181화
“생명력? 그게 사과 출하량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거냐?”
“예.”
“나가서 한번 보자.”
이에 장 노인이 외출 준비를 했다. 말로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더 좋아 보여서였다. 그만큼 중요하기도 했다.
3천만 원의 매출은 비정상적이었다. 드루이드 과수원에 있는 ‘사과나무’의 숫자에 정비례해 천천히 늘어나던 매출이 급상승했으니 장 노인이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나라로부터 돈 받는 이들이 많은 게 연기 장가(家)였다. 그렇기에 뭔가 사업 수완이 확실하게 많은 건 없었다. 식수 공장부터 으레 제법 마진이 남는 것들만 할 뿐이었다.
‘원래 지금에는 천만 원 매출이 최대인데 세 배로 뻥튀기되었다. 심상치 않아.’
장 노인은 나가기 전에 물 세수를 하고 군대에서 자주 쓰는 올인원 대용량 1.5L 로션을 챱챱, 강하게 발랐다.
판타지 쇼크 이전의 대한 제국은 강대국이었고, 중국과 항상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구수는 크게 차이가 났기에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 덕에 옛날 사람인 장 노인은 8개월의 훈련병 생활을 마치고 2년의 복무를 해야 했다. 그곳에서의 습관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자주자주 물 세수만 하고 올인원 로션을 바르는 것만으로도 장 노인은 나이에 비해서 훨씬 주름살이 적었다.
“많이 변했군.”
장 노인이 드루이드 사과나무를 우러러보았다. 나뭇가지마다 긴 장대가 받쳐주고 있었다. 그만큼 나뭇가지의 숫자가 많았다. 실로 기괴한 사과나무가 된 셈이었다.
“가지가 작은 곳에도 사과 열매가 맺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나뭇가지를 하나씩 늘렸습니다. 근데도 유지가 되더군요.”
보통은 나뭇가지를 많이 쳐내야 했다. 그리고 작은 열매는 억지로 걷어 내기도 하는 편이었다. 그래야 영양분이 남은 사과 열매에 많이 들어가서 실하게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드루이드 사과나무는 생명력이 보통 나무의 몇 배는 되었다. 자연스럽게 한 그루에 더 많은 사과 열매를 큼직하게 생산 가능했다. 그래서 장대로 나뭇가지를 잘 받쳐 주기만 하면 얇은 나뭇가지에서도 두툼한 사과가 열릴 수 있었다.
“영양제까지 박아 넣었구나.”
“예. 남들 하는 건 다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최근에는 유박 비료가 아주 인기입니다. 단가는 정말 싼데 효과는 다른 비료에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부담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비료도 하나둘 쓰다 보면 적은 돈이 아니지. 잘했다. 그렇게 트렌드에 따라가야 해.”
“예.”
“근데 저 나무는 왜 장대 하나 없느냐?”
“태 사장이 최근에 만든 사과나무입니다. 보통 1년 이상 된 것들만 생명력이 대단합니다.”
“그래? 토양에 적응되어서 그런가?”
“뿌리 길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최근에 심은 나무는 모두 다른 나무들과 간격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장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하하하. 지건아, 이제 너에 대해서는 마음 놓아도 되겠다. 대신 전에 말했던 하나만 꾸준히 하자.”
“인터넷에 사기 검색해서 자주 보는 거요?”
“그래, 이놈아. 너는 사기만 안 당하면 정말 사랑 많이 받으면서 살 거다. 부인한테도 잘하고! 임신했다며?”
“예. 그전에는 그냥 딩크로 살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낳아야죠.”
한곳에 자리를 잡았고, 여유도 생겼다. 돈도 들어온다. 아이 생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잘 생각했다. 정말 현명한 아내를 둔 거야.”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태도와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건의 아내는 정말 똑똑한 아내였다. 적어도 계획 없이 찍찍 싸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자식 하니까 말하건대… 공부는 재능이다. 알고 있겠지?”
“예. 제가 그 당사자인데요.”
지건은 쉽게 수긍했다. 자식 농사도 자식 봐가면서 해야 했다. 공부를 못하면 50만 원짜리 사업부터 시작해서 사업 감각을 늘려주는 게 좋았다. 애먼 데 매달 백만 원씩 가져다 바치면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미래를 물려줄 수 있었다.
“알아서 잘하리라고 본다. 원래 바보 같은 부모가 천재 같은 자식을 낳는다.”
덕담도 하나 해주고 장 노인은 돌아갔다. 생각보다 과수원 운영을 지건이 아주 잘하고 있었다.
‘사람 보라고 트럭 몰고 다니게 한 게 좋은 결과를 냈다.’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트럭을 타고 다니며 땀을 뻘뻘 흘리는 지건을 얕보고 자신의 날것을 보여줬을 것이었다. 트럭 기사가 자신의 성씨와 이름을 말하나? 안 말한다. 그리고 고객들은 그걸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리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사는 것이 중요했다. 양복 입은 명문가와 생선 내 나는 명문가는 확실히 다른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지건은 좋은 과수원을 가꾸는 농부가 될 수 있었다.
장 노인은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곧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웅웅 울리고 있었다. 척 봐도 공장이었다.
“어때?”
―대단합니다. 수질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물맛이 다른 것에 비해서 압도적입니다.
“당연하지, 이놈아. 정령수(精靈水)야, 정령수. 맛을 알았으면 브랜드 작업도 시작해. 물맛이 그렇게 다른데, 단번에 뜰 거야.”
―예. 근데 태 사장도 알고 있습니까?
“자기도 마셔봤을 텐데 당연히 알겠지. 그저 언급만 안 했을 뿐이야.”
―왜 언급을 안 했을까요? 저희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그쪽도 알 텐데.
“나중에 물의 연어를 통해서 자기도 생수 브랜드 사업 하겠다는 거지.”
―예? 그럼 저희가 브랜드 사업 해도 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장 노인이 웃었다.
“이놈아, 산박이 물의 연어 가져간다고 하면 그냥 주면 돼. 뭐가 문제야? 우리는 브랜드만 남으면 되는 거야.”
―예?
“한철 장사라는 것도 못 들어봤어? 이럴 때 확 돈을 당겨 먹어야지. 나중에 아무도 안 사면 그땐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야. 뭐가 문제야? 애초에 물의 연어에서 나오는 물로만 프리미엄 브랜드 사업 하는 건데.”
망해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산박이 생수 사업 독립을 외치기 전까지 제대로 재미를 보면 그만이었다.
‘산박이 욕심이 날 정도로 뜨면 그때 산박은 선택하겠지.’
물의 연어로 계속 함께 사업할지 아니면 물의 연어를 가져가서 자신이 새롭게 시작할지.
장 노인은 산박이 전자를 택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때 그 전에 벌었던 매출액을 보여주며 확실하게 지분을 챙겨주면 된다. 항상 적당히 가져가는 것이 산박이었다. 산박만큼 사업하기 좋은 파트너가 없었다.
‘그 전에 산박이 막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항상 이거, 저거 찌르고 다니는 게 태산박이라는 놈이다.’
사업 제법 한 사람의 눈에 보이는 산박은 국도를 350km로 내달리는 오토바이나 다름없었다. 말 그대로 자살행위였다.
사업 하나만 가지고 평생 하는 사람이 많고, 그마저도 자기 건물에 유명 프랜차이즈 하나 들어오면 다른 사람한테 팔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누구보다 공격적 사업을 하고 있는 게 산박이었다.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도미노처럼 무너져 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장 노인이 추진하는 돈 더 버는 생수 사업을 방해하거나 중단하는 걸 원한다? 바보 같은 억측이었다. 들켜도 산박은 그때 또한 현실적으로 접근할 것이었다.
장 노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사업거리’가 적은 연기 장가(家)에 굴러들어 온 호박은 커도 너무 컸다. 언제든지 자신의 마당을 벗어날 정도로 거대했다.
‘그래서 더더욱 좋지. 남과 나눠 먹어도 배가 부르니까!’
“하하하하!”
‘오래오래 함께하자고, 태 사장!’
오랜만에 그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태산박이 보여주는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충격적이고 재미났다. 늙은이에게 찾아온 최고의 재미였다.
* * *
휘오오오!
계곡에 바람이 크게 불었다. 마치 안개처럼 모래바람이 찾아와 쉬고 있는 산박을 뒤덮었다.
스르릉.
모두 자연스럽게 무기를 빼 들었는데, 기괴하게도 바람 소리는 들렸지만 모래는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 경계심을 피워 올릴 때 산박은 그 모래에 손을 가져갔다. 마치 먼지처럼 둥둥 떠있었지만 바람은 확실하게 거세게 불고 있었다.
‘신기하다.’
평범한 모래였다. 하지만 보이는 건 특별한 모래로 보였다. 즉, 물리적인 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는데 그 속은 전혀 다르다는 소리였다.
곧 회오리가 치듯이 모래가 모여들며 단번에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사막 악령입니다!”
산박이 소리를 질렀다. 사막 혹은 황량한 던전에서 나타나는 괴물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하나만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2레벨 던전 괴물다운 괴물이었다.
“크흐아아악!”
모래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 소리는 계곡의 높이만큼 크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 숫자는 끝도 없이 많아졌다. 족히 40체가 넘었다.
“무기를 아무리 휘둘러 봤자 소용없습니다! 방패로 최대한 저지하고 적이 무기를 쥐고 있는 팔을 노리세요!”
모래로 이루어진 괴물이었다. 팔을 자르면 팔과 무기는 떨어지지만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힘’을 통해서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저렇게 숫자가 많은 상태에서는 금방 무너지지.’
법성 사제 김연정이 갖가지 주문을 전사들에게 부여했다.
방패를 쥔 용걸섭과 용갑균은 모래로 이루어진 괴물이라도 능히 막을 수 있었다. 무리해서 덤벼들면 방패로 후려쳐서 몸통째로 무너뜨리면 됐다. 모래였기에 체중이 대단치 않은 것도 전사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다만 기괴하게 움직이며 자유롭게 꺾이는 양팔에 쥐어진 녹슨 무기들은 실로 위협적이었다. 특히 방어력이 적은 암살자 장굉려에게는 매우 까다로운 놈들이었다.
즉, 공략 팀에 있어서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기에 저들의 숫자나 이목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그렇기에 산박은 ‘갈래 불꽃’이 아니라 ‘작은 대지 골렘’을 소환하기로 마음먹었다.
‘땅의 부름.’
드루이드의 기술. 산박이 걸어가면서도 사용하고 휴식할 때도 항상 사용하고 있는 기술이었다. 그만큼 좋은 기술이었는데, 땅의 기운을 통해서 ‘힘’을 조금 증가시킬 수 있었고 소모한 힘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대장삵은 틈틈이 치료수를 뽑아낼 수 있었다. 산박이 힘을 조금씩 회복 가능해서였다. 덕분에 물이 비워진 큰 가죽 주머니에는 항상 치료수가 채워지고 있었다.
땅의 부름은 이번에도 능히 그 효력을 발휘했다. 땅의 부름은 땅 주문과도 잘 어울리기 마련이다. 다른 것보다 몇 배에 달하는 효능을 줄 수 있었다.
차르르…….
산박의 눈에서 광채가 튀어나오며 철철 흘러넘쳤다. 영혼 자극 기술의 효능이었다.
‘소나무 향기 외뿔.’
단번에 이마에 뿔이 돋아났다. 그리고 작은 대지 골렘이 일으켜 세워졌다. 골렘은 평소보다 10cm는 더 큰 키를 지니게 되었다. 또 몸 자체의 표면적도 넓어졌다.
쿵! 쾅! 쿵쾅!
대지 골렘이 거칠게 달리며 양 주먹으로 바닥을 쾅 쳤다. 단번에 모래 악령이 찐빵이 되어서 흩날렸다.
그렇게 우직하게 대지 골렘을 좌측으로 보냈다. 장굉려가 막고 있는 곳이었는데, 굉려가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게 산박의 눈에 들어왔다.
“최대한 수비로!”
팔을 이용해서 360도 회전까지 가능한 것이 모래 악령들이었다. 관절 자체가 궤를 달리했다.
그리고 놈들은 물리력에 잘 피해를 입지 않는다. 무너지지만 금방 다시 일어선다. 물론 계속 충격을 주면 죽기는 죽지만 번거로웠다.
또한 번거롭게 죽는 놈들의 숫자는 40체가 넘었다. 작은 대지 골렘이 뚫고 지나가며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팀이 실질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숫자는 적었지만 그래도 두 배는 되었다.
방패를 든 인원은 네 명. 그중에서도 방패를 가장 잘 사용하는 건 방패 전사라는 직업을 지닌 길탕만이었다. 체중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모래 악령들을 상대로 방패는 그냥 깡패나 다름없었다.
“탕만! 제대로 붙어! 놈들은 아무렇게나 무기를 휘두를 수 있으니까!”
“이크! 에크!”
탕만이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재능이 좋은 충호가 말한 대로 방패로 적을 공격하던 탕만은 기괴하게 꺾이고 길어지는 모래 악령의 팔 때문에 목을 거북이처럼 정신없이 방패 아래로 움직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했다. 서로 경험치와 재능 차이가 심한 충호와 탕만은 위태로워 보였다.
반면 용용 형제는 그야말로 단단한 성벽이나 다름없었다. 그 덕에 이시은은 저번에 던전 클리어를 하고 얻은 2레벨 주문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녀와 네크로맨서 중에서 마녀의 주문이었다.
‘퍼지는 늪(Spread Swamp).’
진녹색에 종종 흙색을 띠는 덩어리가 허공에 나타났고, 단번에 부채꼴로 퍼뜨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