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 *
“모이세요. 대장삵! 넌 주변에 적이 오는지 봐라.”
그렇게 산박이 명령했는데, 캡틴 레오파드 캣은 되레 산박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카누토도 소환해. 전투가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데 소환을 왜 안 해? 전담해서 보면 나도 더 편하잖아.”
그 말에 산박은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반박할 명분이 없었다.
매듭의 전사 카누토는 불꽃두더지 파수병으로 2레벨 소환 주문을 통해서 소환 가능했다. 허공에 불길이 쭉 내려왔고, 그곳에서 중무장한 파수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165cm에 달했고 입에서 불꽃을 작게 뿜었다. 강철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도끼가 창에 붙은 큰 할버드를 들고 있었다. 그는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소리를 냈다.
“으엑. 뭐야? 이곳은 정말 끔찍하네!”
바로 이스핀 산딸기 독주를 한 모금 마셨다.
용걸섭과 용갑균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법 그럴듯한 소환수가 나와서였다. 대장삵의 경우 그냥 큰 삵에 불과하고, 주문을 제외하면 도움이 잘 안 됐다. 반면 불꽃두더지 파수병은 척 봐도 1인분은 할 것처럼 여겨졌다. 살찐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으로 털 쪘다는 말처럼 털도 수북해서 화살에 면역이 되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강철 갑옷까지.’
용용 형제와는 다르게 다른 이들은 2레벨 던전 공략을 대비한 정기 훈련에서 자주 봤기에 일말의 동요도 하고 있지 않았다.
“날 다시 돌려보내줘! 여긴 너무 더워! 케켁!”
바짝 마른 황량한 바람에 소리를 지른 불꽃두더지가 기침을 했다.
“어림도 없지! 넌 저쪽을 봐! 난 이쪽을 볼 테니까! 틈틈이 위에도 보고!”
“명령하지 마라, 레오파드 캣! 그리고 나도 척후의 기본은 안다!”
둘은 티격태격하며 주시할 곳을 나누었다. 그사이에 산박은 일행에게 이번 던전에 대해서 설명했다.
“계곡 던전입니다. 외길이고, 그냥 계속 가면 됩니다. 나오는 적은 환경에 따라 다른데 여기는 사막과 관련된 놈들이 나올 겁니다. 전갈이나 그런 것들입니다. 해독과 관련된 치료제를 혁대에 걸어 두세요.”
“포이즌 큐어 스틱 말씀이시죠?”
“예.”
포이즌 큐어 스틱은 직사각형의 설탕을 뭉친 것처럼 생긴 것이었다. 입에 쏘옥 집어넣으면 단번에 녹고 단맛이 났다. 그리고 몸에 들어가서 해독 작용을 하는데 독의 강도에 따라서 입에서 독을 뱉어낼 수도 있고 그냥 오물로 뭉쳐서 배출되기도 했다.
2레벨 던전 소비 물품 중에서 제법 비싼 축에 들어가는데 11만 원이 넘었다. 말 그대로 진짜 독에 중독되었을 때나 먹어야 하고, 마비에 그치면 그냥 안 먹고 싶을 정도로 비싼 놈이었다.
“적이 많이 나타나는 게 2레벨 던전의 ‘기본’입니다. 적들의 숫자에 저희 팀이 압도될 것 같으면 중독된 사람은 망설이지 말고 복용하고 전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셔야 합니다.”
“예!”
모두 일제히 대답했다. 비싼 소비 아이템은 어떨 때 쓰라고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안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는데도 아끼거나 주저한다. 그런 나쁜 습관을 지우려고 산박은 자주자주 언급하는 편이었다.
심지어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정기 훈련 때는 소비 아이템을 쓰는 시늉이라도 하게 만든다. 1레벨 던전 때 소비 아이템을 자주 쓰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에 이를 교육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의 언급이었다. 귀에 딱지가 얹어질 정도였다.
“사막이나 이런 황무지 같은 경우에는 낮과 밤이 계속 이어지거나 혹은 낮만 계속 유지될 겁니다. 중천에 있는 태양이 한 시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으면 계속 낮이라는 소리입니다.”
다음은 환경에 대해서 논했다.
“자연재해나 지형 변동 혹은 화염에 대한 저항 수단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해당 소비 아이템 또한 팀 지급 물품으로 있으니 배낭에서 꺼내서 언제든지 사용 가능하도록 조정하세요.”
‘연금 불꽃 저항 D2’. 단순한 이름대로 많은 물량을 수급할 수 있었다. 가격은 전 세계 동일했다. 싼 가격으로 2레벨 던전 불꽃 저항 물약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것은 장악하고 나서도 가격은 그대로라는 점이었다. 물가 상승률에 따라서 대동소이하게 변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현재 가격은 2만 9천9백 원! 당연히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카르텔, 정치권도 건들지 못하는 중간 유통업자들에 의해서 조정된 가격이었다. 실제 대한민국에 제공되는 원가는 1만 2천 원대로 2레벨 던전 아이템치고는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사용 방법은 간단. 불이 붙거나 화상을 입은 곳에 뿌리면 된다. 가루로 이루어져 있었고, 소가죽 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이런 거 하나둘 따지면 솔직히 팀으로 운영할 수 없지.’
하청에 하청에 하청 시스템이 도입될 수밖에 없는 게 2레벨 던전이었다. 모 게임처럼 사냥하면 돈이 벌리는 게 아니라 돈을 까먹는다. 즉, 던전 외의 수입에 기대야 했다. 그게 현재 던전 경제였다. 기업들이 던전 상품을 장악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폐해는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것이지만, 그 폐해의 피해자가 되지 않고서는 고레벨 던전 사용자가 될 수 없었다. 그 이후에 그 폐해를 척결해야 했다.
그런데 고레벨 던전 사용자가 되면 더는 그런 걸 고민할 필요가 없다. 상류층으로서 대우받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대우받고, 자신에게 쓸 시간도 많아진다. 여유로운데 사회 활동을 거칠게 하는 사람은 없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기 바쁘다. 그게 현실이라는 놈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 가시밭길을 밟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고시생 과정을 거치는 사람들과 같았다. 그렇기에 2레벨 던전은 꾸준히 적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산박은 그 길을 걸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먹고살기 위해서 손에 피를 묻히는 아이가 있다.’
그런 걸 막기 위해서는 가시밭길쯤은 가도 괜찮았다. 그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탈수에 유의하세요.”
물의 연어는 식수 사업으로 빠진 상태였다. 대장삵이 물을 생산할 수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소비해야 했고, 열심히 보급으로 가져온 물을 들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그건 레벨 2가 되어도 고단한 일이었다.
“헉헉.”
법성 사제 김연정이 헐떡거렸다. 자연스럽게 이동 속도가 느려졌다. 사람들도 뒤를 보곤 조금씩 발걸음을 늦췄다. 앞만 보고 갈 정도로 바보 같은 놈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진짜 실전으로 다져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가겠습니다.”
계곡에 있는 큰 바위가 툭 튀어나온 곳의 아래로 너도나도 들어갔다. 그늘에 들어오자 단번에 시원해졌다. 바싹 메마른 바람이기에 후덥지근하지 않고 그냥 뜨겁기만 했다. 그늘에 들어가면 그나마 살 만했다.
하지만 짜증이 치밀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부분 장비가 피부를 보호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땀으로 가득했다.
꿀꺽! 꿀꺽!
시원하지 않은 물로 갈증만 해결하고 다시 집어넣었다. 많이 마실 수는 없었다. 반면 김연정은 그대로 가죽 포대에 있는 물을 절반이나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탐탁지 않게 본 용걸섭이 다가갔다. 용갑균은 말리지 않았다. 오면서 그 누구도 군기 반장 노릇을 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동생이 해야 한다고 여겼다. 으레 있는 일이었다. 자기 손에 더러운 거 묻히기 싫어하는 사람들. 그게 이번에는 옥시모론 팀이 된 것뿐이었다.
용걸섭이 다가가자 성기사 김각두가 일어섰다. 이에 걸섭이 멈췄다. 그와 일을 해봐서 알았다. 김각두는 강했다.
“물 많이 마셔봤자 소용없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저뿐인가요?”
“알아서 할 테니까 참견하지 마시죠.”
“이거 웃기는 양반…이…네?”
걸섭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마치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산박의 말이 귀로 들려왔다.
“아차. 이거 말을 안 했네요.”
그러면서 산박은 웃음소리를 냈다. 매사에 철저한 산박이 실수로 말을 안 했을 리가 없었다. 즉, 이건 노린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각두와 김연정이 하청이 아니라 옥시모론 팀에 소속된 것이라고 알게 되면 용용 형제는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터였다.
‘을이 갑이 되니까.’
하청 팀이 되어서 오퍼를 당기며 제법 돈벌이를 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돈보다는 자존심을 챙길 수 있었다. 그냥 80만 원만 포기하면 되니까.
‘하지만 난 그들이 필요하지.’
“뭘 말을 안 하신 겁니까, 태 사장님?”
걸섭이 물었고, 갑균 또한 가까이 다가왔다.
“그게, 김연정 씨가 딱해서 각두 씨와 함께 제 팀에 영입했습니다.”
“예? 아니, 저런 C급을 어떻게…….”
“김각두 씨는 아니죠.”
산박이 툭 내뱉었다.
“그건 그렇지만, 이동 속도가 연정 씨 때문에 많이 느려질 겁니다.”
걸섭의 말에 갑균이 어깨를 툭 쳤다.
“무슨 그런 말을 해? 아무리 C급이라도 오퍼 팀이다. 우린 하청 팀이야. 태 사장님, 죄송합니다. 제 동생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라뇨. 제가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생긴 일입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잘못했죠.”
“아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서로 훈훈하게 사과하며 마무리했다. 하지만 용용 형제는 연정에게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되레 C급이라고 말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이 던전에서 그들은 확실히 A급이었고 김연정은 C급이었다. 인성이 실력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그들은 전투 때 확실하게 할 줄 아는 자들이었다.
반면 산박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김각두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딱 봐도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게 보였다.
‘그게 그를 더욱 높은 곳에 가게 할 것이다.’
언제 사람들이 안주할지 몰랐다. 탕만은 잘해 봤자 3레벨에서 멈추고 전담 팀에 속하게 될 것이었다. 그가 하는 걸 보면 딱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연정과 김각두의 여정은 아주 길어질 수 있었다. 산박은 그 동기 부여에 장작을 또 하나 추가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인내심은 상상 이상이고, 두 사람의 도덕심은 대단했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연인 관계이기에 더더욱 끈끈하지.’
솔직히 말해서 충호 다음으로 좋은 카드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김연정만 꾸준히 케어해 주면 된다. 명줄 하나 유지하는 것으로 A급 성기사가 자신의 품에 있을 수 있다니, 미소가 절로 나올 일이었다.
산박과 걸섭의 사회력을 통해서 문제는 금방 덮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기억할 것이다. 용갑균과 용걸섭은 자신들이 뺨을 맞았다는 걸 잊을 수가 없었다.
‘다음은 없다.’
일회용인 만남이 되어 버렸다.
암살자 장굉려는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태산박의 팀 내 영향력이 무시무시한 이유를 알겠군. 평소에도 저렇게 한단 소리겠지.’
한 명 한 명 관리하는 게 분명했다. 간단한 메시지로 안부를 물으면서 은근히 부추기거나 행동하게 하고, 때때로 전화로 관계를 이어 나간다. 하지만 결코 부담을 주지는 않는다.
‘짧고 반복적으로 하겠지.’
힘들지만 잘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산박은 힘든 일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 * *
탁.
장 노인이 손톱으로 탁상을 쳤다. 그 앞에 있는 장지건이 움찔했다.
“벌써 한 달에 3천만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했겠다?”
“예. 여기 장부를 보시면…….”
그 말에 장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계산이 맞지 않아서였다.
“사과 수가 왜 이렇게 많아?”
“그야 배둔국이 어느 가게든 마진을 높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물량부터 팍팍 해치우고 있어서……. 이게 박리다매라고…….”
그 말에 장 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지건이 말귀를 못 알아먹고 있어서였다.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네가……. 아니다. 너도 너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내가 이런 것까지 너를 어찌 욕하겠느냐. 남들은 사과를 출하해도 팔리지가 않아서 난리인데…….”
“예. 확실히 가게 사장들이 먹는 마진까지 좌지우지하는 배둔국의 솜씨가 상상 이상입니다.”
“이놈이!”
소리를 꽥 내지른 장 노인이 이내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그리고 찬찬히 말했다.
“내 말은 그거다. 과수원에서 어떤 일을 했길래 사과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이냐?”
“아! 죄송합니다. 완전히 다른 걸 생각했습니다.”
“그래. 이제라도 말해 봐라.”
“그것이, 드루이드 사과나무의 생명력이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