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270)
  • 177화

    * * *

    태산박은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경찰서로 향했다. 녹음도 해놨기에 거침없이 움직였다.

    ‘내가 거칠게 전화를 받은 건 시간을 벌기 위한 준비 운동이었다.’

    부릉부릉!

    택시를 타서 단번에 인근 경찰소로 향하며 산박은 깊은 눈을 했다. 박조조는 버려도 된다. 그건 손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태산박에게 있어서 단 1초 만에 판단 가능한 게 박조조였다. 그는 그렇게 오랜 고민이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박조조를 구한다. 그렇게 하면 박조조는 몇 년간은 조용하게 산박을 따를 것이다. 산박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 될 수 있었다.

    즉, 이건 산박에게 주는 선택권이었다. 박조조를 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박조조를 살리면 인연은 더욱 강화되고, 그는 1년 혹은 반년 정도는 조용히 지낼 수 있었다.

    은인이라고 목숨을 걸고 몇 년을 바친다? 자신의 시간을?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오히려 가해자로 몰리는 게 은인이다. 100%가 아니라고는 해도 그런 경우는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당사자에게는, 당하는 사람에게는 확률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 당장 자기 일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는 10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고하려고 왔는데요. 아무래도 저랑 아는 사람이 납치를 당한 것 같아서요.”

    녹음의 내용은 확실한 것 하나 없었다. 하지만 뉘앙스만으로도 능히 촉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건 강력계나 가능했지만 산박은 운이 좋았다. 경찰 복불복에서 좋은 카드를 얻었다. 강력계를 준비하고 있는 경찰이었다.

    “2층에 강력계가 있거든요. 거기에 가서 말해 보세요.”

    “옙.”

    산박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2층으로 가는 길에는 철창이 있었고 의자에 경찰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산박을 보자마자 일어서서 용건을 묻고 강력계를 손으로 가리켜 줬다.

    산박은 그곳에 들어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소파에서 자는 거지 하나, 머리를 빡빡 깎은 채 팔에 깁스하고 다리는 테이블에 척 올린 채로 컴퓨터로 업무를 보는 사람 등등 개성이 너무 뚜렷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던 형사가 산박을 발견하고 소파로 손짓했다. 본인은 자는 사람을 엉덩이로 밀고 앉고 산박이 빈 소파에 앉을 수 있게 해주었다. 나름 가진 환경에서 예의를 차리고 배려해 주고 있었다.

    “형사 허연근(許然筋)이라고 합니다. 힘 있는 이름이죠. 무슨 일로 왔습니까?”

    산박은 아까 말했던 것을 또 말했다. 녹음된 것을 들은 형사는 단번에 촉을 세웠다.

    “한국어를 잘하는데 억양이랑 사투리가 좀 이상하네요. 만주 놈들 같은데…….”

    그러면서 녹음 파일을 거침없이 컴퓨터로 옮겼다.

    * * *

    산박이 필요한 서류를 모두 쓰는 사이에 반대편에서는 추자해구가 박조조를 보며 말했다. 물론 박조조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이 새끼 이거 전화를 안 할 생각인 것 같은데……. 너 진짜 인복 없다.”

    “저은화, 전화를 좀 제가 다시… 해도 되겠습니까?”

    “지랄! 너 뭐 아는구나? 뭐야? 말해 봐.”

    “그 사람이 좀 냉정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 가치를 말한다면…….”

    “이 새끼가 영화 찍고 자빠졌네. 누가 보면 여기 누가 도와주러 딱 나타날 것처럼 군다?”

    “형님, 그거 위치 추적 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추자해구가 냉큼 스마트폰을 꺼버렸다. 이미 산박의 전화번호도 알아낸 뒤였다.

    그들은 일단은 이 야지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거칠게 박조조를 끌어서 차에 태웠다. 박조조는 반지하에서 조용히 지내야 할 것이었다. 일이 끝나기 전에 인질을 죽이지는 않을 터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박조조를 지금 당장 죽이기에는 산박의 생각을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이들은 뭔가 결단이 서야 사람을 죽인다. 필요성이 있어야지 사람을 죽이는 게 카르텔 크루키히였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을 죽여도 PTSD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자의로 하기 때문이다.

    돈이든 마약이든 던전 상품이든 이권이든 이득이 되기에 사람을 죽인다. 그렇게 해서 들어오는 돈은 실로 짜릿하고 꿀맛이 철철 넘쳤다.

    그들은 미리 구해 놨던 반지하방에 자정이 넘어서야 들어왔다. 이목을 끌기 싫어서였다.

    반지하에 들어선 박조조는 물만 조금 얻어 마실 수 있었다. 그는 눈가리개를 해야 했고, 눈가리개에 테이프가 칭칭 감겼다. 혹여나 자력으로 벗으려고 해도 시간이 걸리도록 만들었다.

    그사이에 추자해구는 앞으로의 방침을 잡았다.

    ‘경찰에 연락했을 가능성도 있고. 며칠 지켜보다가 행동해야겠다.’

    놈이 경찰에 신고한 흔적이 없으면 놈의 집에 쳐들어가서 속전속결을 낼 생각이었다.

    “노향왕이!”

    “예! 대장님!”

    “새우잡이 배 하나 알아놔. 게잡이 배도 상관없고. 대련 항구 도시에 가는 밀항 배로 만들어 버려. 현금 5백만 원에 오가자고 하면 뒤져도 하고 싶어 할 놈들이 많으니까.”

    “예!”

    노향왕이 새벽에 밖으로 나섰다. 거침없는 모습이었다. 곧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당연히 렌트한 것이었다.

    ‘수틀리면 태 사장을 데리고 바로 만주로 간다.’

    그렇게 되면 태 사장은 바로 끝이다.

    “아들아, 싸움 준비해라.”

    “예.”

    그들은 무기를 점검했다. 당연히 던전 장비였고, 살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것이, 현대에서 전투할 때는 결코 눈에 띄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막대, 도색을 진행하고 겉감을 다른 것으로 한 위장 가죽점퍼, 평범한 트레이닝 바지처럼 보이지만 만져보면 두껍기 그지없는 하의.

    무기들도 광택 하나 없었다. 오로지 검은색으로 되어 있었다. 70cm 남짓한 쇼트 소드가 가장 긴 무기였다.

    마지막으로 총기가 존재했다. 소음기는 당연히 필수였지만, 그건 소란을 조금 더 줄일 뿐 시끄러운 건 똑같았다.

    “총기 손질 빼먹지 마라.”

    “예.”

    소총일 수는 없었다. 모두 마카로프(Makarov) 권총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1950년대부터 생산되고 있고, 현재도 생산되고 있었다. 다른 권총에 밀리기는 해도 워낙 많이 퍼진 상태라서 러시아 인근 국가에서 권총이라면 보통 마카로프 권총이었다.

    다만 클래식해서 8발 탄창뿐이었다. 구식이라서 언제 박살이 날지 모른다는 무서움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신형 좋아하는 놈들은 인터넷에 판을 쳐도 구형 권총 처맞은 놈은 죽고 없다. 신형이나 구형이나 총에 맞으면 죽는다. 그리고 더블 액션의 구형 권총은 사용하는 데 나쁘지 않고, 특히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폐쇄된 권총 공장에서 암암리에 생산되는 마카로프 권총은 공장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양질이기도 하고 부품을 교체하기도 쉬웠으며 탄약 해결도 어렵지 않다.

    그래도 손질은 필수였다. 오래되었을수록 관리를 철저히 해야 했다.

    조직원들이 권총을 손질하는 걸 보면서 추자해구는 대포 폰을 통해서 다시 한번 산박에게 전화를 해봤다. 통화음이 몇 번 울리고 산박이 받았다.

    ―왜?

    ‘어? 이 새끼가?’

    마치 누가 전화를 할지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뭐냐? 어떻게 알았냐?”

    ―머리가 나쁘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새벽 두 시에 오는데 누군지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냐? 띨띨하게 굴지 말고 프로페셔널하게 대답해.

    “프로뻬셔널 같은 소리 하네. 태 사장, 잔잔벼락 사업… 그거 우리한테 넘겨. 그래야 박조조가 살아.”

    ―이미 죽였겠지. 너희 만주 놈들을 내가 모를 것 같아?

    그 말에 추자해구가 킬킬거리며 말했다.

    “기다려 봐라.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줄 테니까.”

    추자해구가 배고픔과 공포 속에서 잠들지 못하는 박조조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밀며 스피커폰으로 변경했다. 손발이 묶인 그가 입술을 떨었다.

    “저……. 콜록.”

    물을 마셨음에도 입이 바짝 말라서 기침 소리가 나왔다. 침을 몇 번 삼키고 박조조가 다시 혀를 놀렸다. 이빨이 몇 개 없었지만,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태 사장님, 저 박조조입니다. 저랑 예? 얼마나 오래 같이했습니까?”

    그는 오직 살 생각뿐이었다. 다만 태산박은 그럴 마음이 있긴 있어도 적극성을 가지지는 않았다. 형사들에게 말한 건 자신이 용의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박조조를 죽이는 것도 급하게 진행하고 싶지 않아졌다.

    ‘아직 명줄이 붙어 있으니까.’

    처음에는 먼저 해야 할 것을 했다. 그리고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화된 것 같자 방관을 택했다. 이제 자신은 대충 돌을 골랐다. 자신을 챙기며 지켜보면 된다.

    ―오래 했죠.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카르텔이 덤비면 전 그냥 잠수 타야죠. 사람 납치하는 놈들 상대로 악수를 어떻게 합니까?

    듣는 조직원들이 더욱 숨을 죽였다. 여기서 나서면 눈치 없다.

    “그래도 일단은 절 살려 주셔야지요. 왜 그렇게 급하게 전화를 끊었습니까?”

    ―당황해서요.

    “예?”

    ―사람 하나 납치했다는데, 당황해서 그냥 그렇게 해버렸습니다. 박 사장에게는 죄송한데, 저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사람인데.

    그 말에 추자해구가 미소를 지었다.

    ‘새끼, 겁쟁이였구먼. 이거 잘만 하면 쉽게 끝날지도 모르겠어.’

    “사장님, 태 사장님……. 사업거리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카르텔이라도 돈이 오고 가는데 저랑 다르게 대하지 않겠어요? 저 좀 살려 주십시오! 네? 제발!”

    추자해구가 스마트폰에 다시 손을 가져가자 박조조가 냉큼 소리를 꽥 내질렀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추자해구는 바로 스피커폰을 꺼버렸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자신의 귀로 가져갔다.

    “태 사장~ 박조조 잘 살아있지?”

    ―응. 그렇네.

    “박조조도 살았는데 슬슬 말투를 바꿔야 하지 않겠어? 왜 반말이야?”

    ―그러는 너는 왜 반말인데?

    “이 새끼가, 진짜. 박조조 죽여 버린다?”

    ―내가 이래서 깡패 새끼들이랑은 사업을 안 해. 누가 위에 있는지 모르거든.

    “내가 위에 있다, 이 녀석아!”

    ―박조조는 보내줘라. 사업 이야기 할 거면 정식으로 예의 차려서 와라. 어차피 너희들도 돈을 원하잖아? 사업 때문에 온 거 아냐? 돈을 원하면 제대로 고개 숙이고 와라.

    그 말을 끝내고 태산박은 전화를 끊었다. 이것이 그들에게 희망을 줄 것이었다.

    ‘활로는 줬다. 선택은 하늘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애초에 이미 경찰의 눈과 귀가 태산박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놈들이 박조조를 먼저 풀어주면 놈들은 살 것이었다. 박조조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태산박에게 있던 형사들도 철수하기 때문이었다.

    강력계 형사들은 살인적인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미 끝난 사건에 시간을 쓰는 형사는 드물었다. 피비린내는 어느 사건을 움켜쥐어도 풀풀 풍겼다. 썩은 피보다는 가능성 있는, 증거가 있는 사건에 눈이 가기 마련이었다. 생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건이 아직도 많았다.

    그렇게 되면 이제 사업 이야기를 하면 된다.

    ‘부산 은행과 싸워 보라고 하면 표정이 볼만하겠지.’

    명함을 보여주면 끝이다. 거기에 덤빌 수는 없었다. 번화가 카페에서 만날 생각이고, 덤벼도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그게 산박이 그들에게 주는 생(生)이었다. 이를 추자해구가 본다면 바로 욕을 하겠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적어도 목숨 부지하고 돌아가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만약 그러지 않고 나를 노린다면…….’

    아쉽게도 박조조도 죽고, 이들도 형사들과 싸우게 된다. 던전 사용자가 생기고 나서는 형사들도 실탄을 3탄창을 가득 채워서 들고 다닌다. 일반 경찰은 어림도 없는 소리지만 강력계 형사는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사유가 있어야 했지만, 이번 경우에는 충분히 그 사유가 됐다.

    단순 납치가 아니라 사업상의 문제였고, 거기에 정치 깡패가 있는 만주였다. 카르텔이 보통 입김이 강한 게 아니었다.

    ‘많은 피해가 생기겠지.’

    하지만 가장 깔끔하기도 했다. 박조조도 죽고, 그들도 죽는다. 형사들도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싸울 수 있다. 그리고 그들 또한 죽을 것이다. 시민을 지키기 위해서.

    고로 산박은 추자해구가 욕심을 부렸으면 했다. 때를 가리지 않고 창고 겸 생활을 하는 거처로 덤볐으면 했다. 숨어있는 경찰들과 싸우기를 기대했다. 그래야 일 처리가 빨라진다.

    산박은 자신의 던전 장비를 챙겨 입었다. 며칠 동안은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는 전화만 받을 것이고, 오려는 사람은 오지 않게 만들었다.

    추자해구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빨랐다. 가장 먼저 노향왕이 퇴로 루트를 여덟 시간 이내에 해결해 버렸다. 그리고 추자해구는 단숨에 일을 끝낼 생각을 가졌다.

    ‘물렁한 새끼.’

    물러 터진 소리를 해대는 태산박은 결코 경찰에게 연락을 안 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태산박과의 전화 이후 대낮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후 한 시 삼십구 분. 그들이 거침없이 부동 지구로 들어섰다. 차량은 두 대로 나누어서 탄 상태였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였다. 또 노향왕이 없었다. 박조조와 함께 반지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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