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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화 (176/270)

176화

단칼에 잘라내는 송서아를 보며 산박은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독대해야지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걸 못 했으니 아쉬웠다.

“좋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하지만 실패는 아니지.’

제안이 거부되었음에도 그건 그저 반쪽짜리 실패였고, 다시 말해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시도 자체가 중요했다. 산박은 독대했을 시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하고 대신 에너지 브론즈에 대해서 언급했다.

“갈대 씨앗과 청동 가루 극미량을 통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에너지 브론즈입니다. 이게 잔잔벼락의 핵심 공법 중 하나죠. 이 정도면 견고한 울타리 아닙니까?”

청동은 구하기 쉬운 물건이었다. 특히 대한민국은 전통을 매우 중시해서 청동 공예품이 제법 시중에 나오고 있었다. 청동을 납품하는 공장을 가짜 청동 공예 작업소와 연계하고 이를 가져오면 끝나는 일이었다.

“좋습니다. 그 정도 울타리라면 충분합니다.”

송서아가 단언했다. 서로 입만 조심하면 된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소리였다. 이 모든 과정이 녹음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계약서는 곧장 써졌다. 소준석이 꺼내 든 서류에 모두 도장을 찍고, 지장도 찍었다.

계약서를 챙기고, 산박은 레시피가 든 종이 뭉치를 서아에게 건넸다.

“자필로 쓴 겁니다.”

그것으로 송서아와의 만남은 끝이 났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간 송서아는 의문을 느꼈다.

‘결국, 뭐였을까? 궁금해.’

독대했다면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 그 주제……. 송서아는 그게 궁금했다.

“아가씨, 날씨가 춥습니다. 서둘러 가시지요.”

“잠깐 산책 좀 하고 가야겠어.”

그녀가 몸을 틀었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소준석이 서둘러 따라붙었다. 예정되지 않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호원이 안 된다고 해도 갈 사람이 송서아였다. 그저 최대한 경호하는 수밖에 없었고, 여기는 사람도 많은 곳이라서 큰 문제가 생길 여지도 없었다. 연예인과는 다르게 송서아는 유명하지는 않았다. 그저 아는 사람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산책하며 기분 전환을 하고 송서아는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거야. 은행원 말고 가문 사람을 써야 하고…….”

송서아가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에 메모를 빠르게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공장 용지였다.

‘사람이 없으면서도 도로는 잘 되어 있는 곳.’

공공 인프라가 잘 깔린 대한민국이기에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고로 간단히 쓰기만 하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내 다시 되돌아가서 몇 곳을 써 내려갔다.

‘공장이 들어서면 땅 주인들이 좋아하지. 이것도 결국에는 정치야.’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인이 좋아할 거리는 아니었다. 완전 자동화이기 때문에 고용 효과는 없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조용히 이루어지면서 가족이 이득을 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건 가문 어르신과 함께 고민해야겠지.’

동시에 부모님 기를 세워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부산 은행의 혈족 중에서 남의 것을 가져오거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서 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두고 밥그릇 싸움 하기 바빴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사업은 던전 경제에 한 발 걸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송서아의 가문 내 영향력은 더욱 커질 터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입김을 통해서 사업을 끝내겠어.’

물론 모든 것에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 영향력을 남에게 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바로 동래 송가의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이대로 회사로 돌아가겠습니까, 아가씨?”

“아니. 본가로 가줘. 오랜만에 증조부를 봬야겠다.”

“예. 근데 평일에는 바쁘신 분이라, 기다리셔야 할 텐데요?”

부산 은행과 부산 금융의 굵직한 미래를 보고 계신 분이었다. 하루에도 몇 명이나 그의 거처를 방문하고, 회의도 많이 했다. 대부분이 미래 분석이었다. 그를 위한 슈퍼컴퓨터도 큰돈 주고 정부에서 가져와서 쓰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가줘. 너도 깜짝 놀라게 해줄 테니까.”

잘 웃지 않는 송서아가 방긋 웃었다. 보조개가 보이자 이를 보던 두 남자는 거기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동방 미인 하면 송서아였다.

송서아를 태운 검은 고급 세단은 동래 사적 공원 북쪽에 있는 5천 평이 넘는 한옥으로 향했다. 민속촌을 연상하게 될 정도로 한옥이 많은 곳이었지만 당연히 일반인은 통제되었고 담벼락의 높이만 해도 5m는 되었다. 성벽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에는 입구도 서른두 개나 되었다. 주차장 또한 존재했다. 사람이 관리하고 있었으며 주차장 관리원은 대부분 불구였다. 산재를 입은 군인부터 경찰, 소방관 등등을 주차장 관리원으로 채용하고 있는 게 동래 송가였다.

기숙사도 싸게 운영하고 있었는데, 월 20만 원으로 싼 대신에 매우 빡빡한 곳이라서 다른 의미로 악명이 높았다. 젊은 피도 진탕 놀고 싶은데 너무 건전함을 요구해서였다. 그래서 야자를 빼먹는 심각한 양아치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편이었다.

그곳에 차량이 들어갔고, 차에서 내린 송서아가 관리원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예!”

관리원이 급히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한 타이밍 늦게 또 말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절로 그녀를 어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송서아는 속으로는 그런 게 싫었지만, 그와 그녀의 위치를 생각하면 오히려 이런 거북한 사이가 서로 좋았다.

두 명을 대동하고, 송서아는 본가의 문을 지났다. 간단한 검문은 그녀도 피할 수 없었다. 그만큼 많은 권력과 돈이 오가는 곳이라서 가족끼리도 나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비서 또한 가문의 일원이었다.

“어? 서아야!”

깔끔하게 차려입었고, 화장도 제대로 힘을 줬다. 외부인들이 와서 사업 얘기를 거침없이 할 수 있는 곳이라 편하게 있을 수 없었다.

“언니!”

송서아도 손을 슉슉 흔들었다. 친한 사람에게는 제법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라고 하기보다는 자신과 경쟁할 가치가 없는 이들에게는 편하게 대해주는 게 송서아였다.

“증조부께서는 뭐 하고 계세요? 많이 기다려야 할까요?”

“지금은 쫌……. 이번 여름에 해운대 파라솔 대여 때문에 난리 났잖아?”

“아……. 여론도 들끓었죠.”

“파라솔 대여 하던 사람들이 지역 상인회 쪽에 제법 돈을 대줬나 봐. 경찰들도 그래서 손을 대기 싫어하고. 근데 해운대 쪽 가게 돌리는 건물주들한테는 말도 안 되는 짓이 일어난 거거든.”

일개 상인이 불로 소득을 손에 움켜쥐고 있는 건물주보다 돈을 더 번다? 괘씸했다. 물론 그 상인이 세금은 더 내겠지만, 아무튼 돈을 더 버니까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는 찾아오기 쉽지 않잖아요?”

“얘, 건물주 뒤에 누가 있니? 건물사들이 있잖아. 투기꾼들에다가 이 사람 저 사람 동원하면 제법 되지.”

그제야 송서아도 이해했다.

땅이 작은 나라고, 집중적으로 발전된 도시는 한정적이다. 부동산에 자금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2015년에는 주택 거래 신고제도 폐지되어서 꾼들이 판을 쳤다. 탈세 안 하면 병신이라는 소리까지 나돌았던 게 2015년의 부동산 업계였다. 그때 당했던 일반인들은 월급의 90%를 대출을 갚는 데 내고 있었다. 기득권에 가장 좋은 부동산 정책으로 악명이 높았다.

물론 그걸 아는 사람은 적었다. 평소에 부동산 정책을 챙겨 보는 일반인이 대체 어딨단 말인가?

송서아는 소준석이 가져다준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 흔한 소파도 없었다. 최대한 일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증조부의 생각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도 의자는 없었다.

이야기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돈이 연관되어 있는 이야기가 쉽게 끝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 싸움은 돈과 돈의 싸움이다. 결국 돈을 더 많이 내거나 앞으로 더 많이 줄 세력의 손을 들어줄 것이었다.

지방의 법은 지방의 양반 가문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법조계에 종사하는 사람만 해도 수백 명에 달한다. 그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한목소리를 낸다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거기에 연차까지 높다면 말할 것도 없었다. 문제를 크게 일으키지 않는 한 연고지 근무 법에 의해서 자기 본가에서 일할 수 있는 게 무엇보다 컸다. 사실상 지역 카르텔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달칵.

양쪽의 문이 모두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연령대도 다양했지만 20대는 한 명도 없었다.

송서아는 자연스럽게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이 지나가는 걸 기다렸다. 몇몇 남자들이 그녀의 외모에 관심을 보였지만 경호원만 두 명이다.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고, 몇몇 그녀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 다가왔다. 송도에서 제법 땅을 많이 사들이며 부산에 큰돈을 뿌린 사람이었다.

“송서아 지점장님 아니십니까! 하하하!”

그가 웃으며 다가오며 송서아의 전신을 벌레처럼 훑었다. 돈 많은 남자이기에 온갖 여자를 만지고 놀았던 그였다. 그런 그조차도 못 먹는 과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가문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벼락부자를 좋아하는 명문은 없었다. 몰락한 가문이나 벼락부자를 원할 뿐이었다.

적당히 근황을 나누고 그는 떠나갔다. 눈도장을 찍는 것으로 만족한 듯했다. 다리가 아파서 빨리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5분이야, 5분!”

비서 언니가 소리를 냈다.

“응!”

송서아는 웃으며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방문임에도 그녀는 용서되었다. 물론 사유가 명확해야 했다.

“던전 사업을 하나 해볼까 해서 허락차 들렀습니다.”

“다 결정은 하고 온 거야?”

게슴츠레한 눈으로 머리를 뒤로 한껏 당겨서 서류를 읽고 있는 증조부, 송공명(宋珙銘)의 말에 송서아가 답했다.

“예. 공장 부지를 정해야 하는데, 그건 제가 결정할 게 아니잖아요?”

“던전 품목은?”

그 말에 송서아가 서류를 꺼내 잔잔벼락의 사업성이 나온 곳을 펼쳐서 보여줬다. 이를 읽은 송공명이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일만 할꼬? 하지만 오늘은 안 된다. 너도 이게 그렇게 쉽게 정해지는 걸 원치 않을 것 아니냐? 주말에 다 불러서 제대로 네 콧대를 세워주마.”

“제 부모님 콧대도 세워 주세요.”

“네가 한 일인데 무슨 네 부모를 말하느냐? 싫다.”

“부탁할게요.”

그녀의 말에 송공명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보기만 해도 제대로 키우면 30년은 우려먹을지도 모르는 좋은 사업거리였다.

* * *

밖으로 나온 산박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뭐야?’

부재중 통화만 스물일곱 건이 있었다.

‘박조조?’

뜬금없는 건 아니다. 잔잔벼락 사업을 빼앗았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뭘 해주기는커녕 강합에게 수작질하지 못하게 강합을 올려준 것이 산박이었다.

‘불만을 품을 만하지.’

산박은 전화를 걸었다. 박조조는 단번에 전화를 받지는 않았다. 산박이 전화까지 안 받자 화가 잔뜩 난 듯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박조조가 아니었다.

―태산박 사장요?

“누구십니까?”

―그건 알 것 없고, 생각했던 것보다 이 박조조란 트럭 상인이 제법 하는 일이 많더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겠지?

그 말에 태산박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지금 밖이라서 조금 있다가 전화하지. 사람들이 듣게 할 수는 없잖아?”

―뭐? 너…….

산박은 통화를 끊었다.

‘이게 웬 떡이냐?’

박조조는 트럭 상인이다. 던전 대전 상인 공회에 산박의 물품을 납품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던전 부산물을 마진 없이 거둬들여 주는 사람이었다. 잔잔벼락 사업에도 제법 참가했고, 산박을 대신해서 유통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었다.

‘양부장이 죽고 던전 대전 상인 공회는 그냥 납품처에 불과해져 버렸지.’

검은 슬라임 수액의 수급이 힘들어졌지만, 잔잔벼락 사업은 방금 산박의 손을 떠났다. 즉, 박조조는 오히려 죽는 게 산박 입장에서 쉬운 결말이었다. 지금까지는 손이 부족해서 써먹었지만 상황이 달라졌기에 되레 쳐내야 할 대상이었다. 물론 그냥 쥐고 있어도 나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계륵.’

그렇기에 다른 자의 손에 죽는 건 더더욱 산박이 원하는 일이었다. 그를 돕는다?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산박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박조조의 가치는 분명 존재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DVD방에 들어간 산박은 방을 하나 잡고 바로 스마트폰을 켜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냐! 엉!

스마트폰에서 거친 음성이 토해졌다. 산박은 녹음을 누르고 조용히 말했다.

“어디서 소리를 지르고 자빠졌어? 그렇게 나랑 이야기하는 게 싫으면 그냥 너 알아서 해라.”

뚝.

통화를 그대로 끊어 버렸다.

반대편에서 통화하고 있던 추자해구가 당황했다.

‘뭐야, 이놈? 박조조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블러핑이다, 이 새끼!’

그렇게 생각한 추자해구는 스마트폰을 쥔 채 하염없이 태산박의 전화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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