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270)
  • 172화

    * * *

    별채의 바닥은 뜨끈했다. 온돌을 잔뜩 덥혀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에는 좌식이 아니라 입식 테이블이 있었는데, 고동색으로 매우 고풍스러웠다.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30대 후반~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양복을 입고 있었고 깔끔했으며 군더더기 없는 클래식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계는 무난하면서도 저급해 보이지 않는 걸 선택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모습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 모습이었다.

    그가 제법 고개를 숙여서 산박과 장 노인에게 차례차례 인사를 올렸다. 나이가 젊은 태산박에게도 고개를 똑같이 숙였다. 그 모습은 생소했다.

    ‘언질을 잘 받은 것일까, 아니면 그냥 그런 사람인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좋았다. 부산 은행이 자신을 진중하게 생각하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 사람이 모든 이들을 배려하는 사람이었으면 싶었다.

    “준달독 차장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태산박 사장님.”

    “차장님 정도면 높은 사람 아닙니까?”

    “지점장 다음 직책입니다.”

    “대단하신 분이시네요.”

    본래는 수달군 과장에게 모든 걸 일임하고 싶었지만, 송서아는 직급이 높은 준달독을 끝마무리에 보냈다. 그게 더 옳았다. 처음에는 계장, 그다음에는 과장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차장과 마주했다. 산박으로서는 계단식 만남을 통해서 부산 은행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코 형세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이자도 뒷배가 아니다.’

    그 너머. 준달독 차장의 뒤를 산박이 응시했다. 누가 있을지 궁금했지만 아직 자신의 깜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만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만나서도 안 됐다.

    ‘배 터져서 죽고 싶지 않으면.’

    주제도 모르고 학을 따라 하는 참새나 다름없었다.

    “이 사람은 본래 부산 쪽에서 지점장을 하는데 자네를 위해서 출장까지 왔지. 안 그런가?”

    “예.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부산 은행은 제대로 된 던전 사업을 하지는 않습니다. 근데 이제 첫 시동을 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방침두 때문에 대부분을 파악하고 있는 게 그들이었다. 산박이 서류를 꺼내서 건네줬다. 아주 얇았다. 필요한 것만 적어서였다.

    “제가 취급하고 있던 것이고, 이제는 부산 은행의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준달독이 백지로 된 첫 장을 넘겼다. 짧은 타이틀이 굵직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준달독의 눈이 이를 훑었다.

    ‘잔잔벼락의 무기 레시피.’

    “잠시 스마트폰으로 확인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편한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 말이 오가는 중에 장 노인은 몸을 일으켰다.

    “가시게요?”

    “그래. 서로 사업 이야기 하는 데 제삼자가 끼어드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지. 최대한 서로 배려를 하고, 앞으로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 줬으면 좋겠다.”

    “예. 그래야지요. 어느 분이 소개를 해주셨는데요.”

    준달독 차장이 장 노인과 악수를 나눴다. 부산 전기의 태양광 사업에 발 하나 걸치게 된 것이 연기 장가(家)였다. 그 이득은 15%에 불과하지만, 그것마저도 특혜 중 특혜였다.

    장 노인은 산박과도 악수를 나누고 밖으로 그냥 나가 버렸다. 첫 단추만 적당히 끼워주면 그걸로 끝이고, 얼굴 한 번 비추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쏠쏠한 이득을 주는지 모른다. 하찮은 상인 공회의 회장이 되는 것만으로도 회식 한번 하면 돈을 걷고 돈을 쓴다.

    그리고 돈은 곧 영향력이다. 골목대장 노릇 하는 어른일지라도 돈이 오고 가면 지역 카르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기가 법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되기 쉽다. 돈이 있기 때문이다.

    감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쉽게 보면 안 된다. 쥐어 패고 3백만 원 던져주는 또라이가 가득하다. 그렇기에 간단한 만남이라도, 모임이라도, 장(長) 노릇을 하면 떡이 떨어지기 쉽다.

    어떤 영향력도 없어 보이는 독서 모임이라도 카페에 십여 명을 끌고 간다. 과연 카페 사장과 모임장이 커넥션이 없을까?

    최근에는 사업체에서 독서 모임을 주도하기도 한다. 자기 작가를 밀어주기 위해 출판사가 모임을 주도하는 것을 모르는 독서 모임 회원들은 무슨 기분일까?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 진실을 모르니까. 이처럼 감투와 완장은 차고 봐야 할 일이었다.

    장 노인이 나가자 태산박이 잔잔벼락 무기 시장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다른 던전 무기에 비해 소비율이 높아서 샀던 사람이 또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전율이 높다는 것부터 시작했다.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것만 해도 공장 짓기 좋았다.

    “그렇게 회전율이 높으면 사용되는 재료도 만만찮을 텐데, 자연스럽게 원가가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준달독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즉, 많이 팔리는 만큼 거기에 해당하는 재료비의 단가가 높아진다는 소리였다. 던전 경제는 사람의 피로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하, 세상에 1레벨 던전 사용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에게 모두 한 자루 들려 주기도 힘든데, 걱정이 너무 큽니다.”

    산박은 두루뭉술하게 다른 주제를 통해서 이를 넘겼다. 팔아도 팔아도 정가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고, 레시피를 생각하면 폭리나 다름없었다. 마진율이 거의 열 배가 넘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난 서만주에 팔아서 큰 재미는 못 봤지만.’

    아무래도 서만주는 대단한 곳은 아니라서 달러를 사용해도 큰돈이 될 수 없었다. 그래도 제법 재미를 많이 봤다. 잔잔벼락 무기가 가진 무시무시한 경제적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무엇보다 안전장치가 되어주는 공법이 있어서 누구에게도 안 들킬 수 있습니다.”

    “그건 아주 좋군요. 하지만 역시 사람 손이 가면 정보는 누출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애초에 사업거리라고 할 수 없죠.”

    산박이 단칼에 잘라냈다. 산박과 달독이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달독은 고개를 돌리며 서류를 확인했다. 중요한 건 전혀 없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말해줄 생각인 듯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결정할 수는 없겠어.’

    상대의 수비력이 대단했다.

    “뭐… 중요한 건 초기 자금 투입 아니겠습니까? 비밀스러운 공법이 있든 말든 저희는 완전 자동화로 재료를 공장에 넣으면 그대로 완성품이 나오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가문 사람들을 쓰실 생각입니까?”

    “예. 당연한 소리를. 다른 사람이랑 어떻게 이런 비밀스러운 일을 하겠습니까? 태 사장님도 장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여기 끼지도 못했을 겁니다.”

    “말씀이 참, 듣기가 불편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태 사장님도 충분히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계시기에 말해본 겁니다.”

    “제사 쓸데없다고 자기 부모 앞에서 제사 안 지내겠다고 떵떵거리는 자식이 어딨습니까?”

    입에 담을 말이 있고 안 담을 말이 있다. 이에 준 차장은 다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모습에 준달독 차장은 혀를 내둘렀다. 말에서 뼈가 느껴졌다.

    ‘보통내기가 아니군. 이렇게 강하게 나오다니.’

    생각이 깊었다.

    준달독 차장은 뒷배가 아니다. 그렇기에 산박은 얼마든지 준달독 차장을 함부로 할 수 있었다. 거래가 파토 나면? 준달독 차장만 큰일이 나는 것이었다. 송서아 지점장이 가만히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현실을 잘 안다는 거다.’

    굳이 문제를 크게 키우지 않았다. 준 차장이 조심만 하면 됐다.

    그 순간에 태산박은 준달독의 위에 섰다. 서로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잘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태산박은 자유로운 몸이었고, 준달독 차장은 기업에 속한 몸이었다. 파토가 나면 차장은 밀려나지만 산박은 느긋하게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 됐다.

    거기에 그는 수달군 과장과 최태녕 계장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하소연을 하면? 그걸로 게임 끝이고, 교통정리가 쉽게 이루어진다.

    ‘보통내기가 아니지만, 사람 잘못 골랐다.’

    내심 찔렸음에도 준달독 차장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송서아의 요구 조건 때문인 탓이었다.

    그는 그날을 상기했다. 송서아 지점장에게 호출받은 날을 떠올렸다.

    * * *

    똑똑.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준달독 차장이 송서아의 앞에 섰다.

    “최근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아…….”

    최근 그녀는 혈색이 제법 좋아 보였는데, 사우나를 자주 다닌다고 했다. 눈 찜질도 겸사겸사 할 수 있었고, 혈액 순환을 유도하기에 좋았다. 건식보다는 습식을 좋아했다. 피부 노화 때문에 사우나를 하고 난 다음에 피부과는 필수 코스였다.

    “태산박 사장과의 일을 마무리하세요. 그것 때문에 불렀어요.”

    “예? 하지만 수달군 과장이 이미 세종시에 있는데, 제가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첫 번째는 직급 때문이에요. 한 번의 만남. 그때마다 높은 직급이 찾아와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하게 여기겠죠.”

    그런데도 준달독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두 번째는 만회의 기회를 드리기 위해서예요. 이대로 저한테 마이너스인 상태로 끝나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지 않겠어요?”

    꿀꺽.

    준달독 차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워낙 조용해서 침 삼키는 소리가 귀로 들려왔다. 하지만 송서아의 표정은 변화가 전혀 없었다.

    “필요하다면, 악역도 자처하세요. 오히려 거래가 끝장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어째서입니까?”

    “상상 이상으로 태 사장의 수완이 좋기 때문이라고만 해두죠.”

    다른 이유도 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송서아는 그걸 모두 말해 주지는 않았다.

    “한번 드잡이질을 해야 한다는 겁니까?”

    “아뇨. 할 수 있으면 하라고 했지 무조건 하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 상황에 따라서 하시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계약 딸 수 있으면 그냥 그대로 진행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 * *

    준달독 차장은 그때를 떠올리며 태산박을 바라보았다.

    ‘쩝. 이길 것 같지는 않다.’

    준 차장은 여기서 그와 드잡이질을 하게 된다면 되레 자신에게 피해가 더 많이 올 수도 있다고 여겼다.

    ‘나도 짬밥이 있다, 이거야.’

    송서아는 준 차장의 바닥을 봤다. 생각보다 뛰어나지 않은 자임을 단번에 꿰뚫어 봤다. 사람 파악하는 데 도가 튼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그렇게 젊은 나이에 지점장에 올라설 수 있었다.

    고로, 태산박과 부산 은행의 작고 불미스러운 일을 통해서 서로 교통정리를 하고 관계를 굳힐 계기로 삼는 데 ‘준달독 차장’은 좋은 재료인 셈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기에 하고 싶지 않다.’

    골치 아픈 일이었지만 결국 결론은 똑같았다. 평범하고 안전하게 일을 끝낸다. 준달독은 99.9%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했다.

    “3일 뒤에 다시 미팅을 잡아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산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도 급하게 마무리 짓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무슨 변동이 생길 수 있고, 그것이 자신이 몰랐던 것을 알 기회로 작용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일어났다. 서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는 사이라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특히 준달독은 이를 매우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서 허둥지둥 모습을 감췄다.

    ‘누가 잡아먹나.’

    그 뒷모습을 보며 산박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상대는 자신을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는 듯했다.

    * * *

    대부분이 퇴근했지만 송서아는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 덕에 경호를 맡은 소준석과 대유준도 남아 있었다.

    “아가씨, 이제 퇴근하셔야죠.”

    “응.”

    그녀는 준달독 차장의 보고서를 읽고 듣고 있었다. 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서 올라온 메일이었다. 이를 훑어보고 또 검수까지 진행한 송서아가 이내 컴퓨터에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메모장을 켰다.

    ‘준달독은 웅크리는 걸 택했네.’

    녹화한 것까지 첨부했기에 어렵지 않게 모든 걸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기 싸움에서 진 것이 황당했다.

    ‘뭐 하자는 거야?’

    부산 은행이 뒤를 봐주고 있는데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모습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태산박이 선수를 친 것은 맞다. 근데 거기서 그냥 눈을 깔아 버렸다.

    “어떻게 생각해?”

    “그냥 기에 눌린 것 같습니다만.”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영업만큼은 잘하는 게 준 차장이야.”

    “그만큼 상대가 지닌 기질이 대단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음…….”

    ‘면전에 두면 상대가 꼼짝하지 못하는 스타일?’

    봐야지 진국이다.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안 됩니다. 그 사람은 던전 사용자고, 애초에 급이 안 맞아서 만나게 되면 집안 어르신들이 노발대발하실 겁니다.”

    “기업 사장인데 안 될 게 어딨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송서아는 생각이 깊은 여자였다. 지금 만나면 안팎으로 부스럼이 생기는데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었다.

    “계속 이대로 놔두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어차피 저쪽도 그걸 원하는 눈치야. 조용한 걸 좋아하나 보네.”

    할 일이 많은 송서아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가진 걸 유지하고 이미 있는 걸 가져오기보다는…….’

    새로운 사업을 창출하는 것이 빛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송서아는 누구보다 이를 갈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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