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70/270)
  • 170화

    서충호와 길탕만이 산박을 마주 보고 앉았다. 두 사람 모두 웃는 낯으로 산박을 보고 있었다. 산박은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갑자기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장 대하기가 편했다.

    자신이 떳떳하면 상대도 떳떳하게 이를 받아준다. 그 덕분에 산박을 대함에서 일상에서도 그들은 마음이 편안했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다는 이유로 욕설하고 해고시켜 버리는 인간 말종 CEO보다는 훨씬 좋은 양반이었다.

    “충호 씨는 여전하고, 탕만 씨는 어떻습니까?”

    “예.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회사에 소속된 신분이니만큼 문제 일으키고 다니지 마세요. 애초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어서 조금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요.”

    “하하하!”

    “사장님 유머 감각 대박!”

    “사무실을 뒤.집.어. 놓으셨다!”

    너도나도 웃었다. 이곳에서는 산박이 절대적 위치에 있었다.

    산박은 가장 먼저 이 돈의 출처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부산 은행이라고, 최근 설문지 좀 돌리더니 고객 유치하려고 우리 사무실에도 찾아왔습니다. 거기서 빌린 돈을 직원들이 2레벨 던전 장비 마련하는 데 쓸 생각입니다. 당연히 차용증을 써야 합니다.”

    산박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이해하시죠?”

    “그럼요. 돈 관계인데요…….”

    길강합이 그렇게 말했고, 충호도 거침없었다.

    “사장님, 머리 아프니까 바로 계약서부터 주시죠. 화끈하게 사인하고 술이나 한잔하러 갑시다. 의미 있는 날 아닙니까.”

    “다른 사람도 와야 하니까 술은 사양할게요.”

    산박은 이를 거절했다.

    “예산은 2천5백만 원~3천만 원입니다.”

    김각두와 김연정에게는 최대한 낮은 가격으로 2천만 원을 이야기했는데 충호와 탕만에게는 2천5백만 원부터 시작했다.

    사실, 맥시멈은 의미가 없었다. 직원의 신분으로 무조건 돈을 많이 쓴다? 사회생활 못하는 놈이었다. 남의 돈을 쓰는데 그 남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모른다는 뜻이었다. 무조건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게 현대 사회라는 정글이었다. 인간들이 만든 정글이었기에 평범한 정글보다 오히려 더 악독한 면이 있었다.

    잘생기면 백만 원 더 써도 되고 못생기면 휴가도 마음대로 못 쓰는 게 이 바닥이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평가였기에 피가 바짝 마르는 삶을 살아야 했다. 고로 최솟값이 그들에게 쥐어지는 예산이었다.

    사장은 직원들에게 선택지를 줬다는 것만으로도 으스댈 수 있었다. 동시에 직원들은 최소 예산으로 살아가는 걸 보여주며 사장 앞에 꼬리를 살랑거려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훌륭한 노예 생활의 완성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웠지만 그 맑고 높은 하늘 끝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목줄에 꿰인 존재들이었다.

    “다음은 없을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고민해서 구매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적당히 사장 노릇을 한 산박은 두 사람이 차용증에 사인을 한 것을 확인하고 돌려보냈다.

    “한잔하러 가시지.”

    “선약이 있습니다.”

    거듭 권유하는 두 사람을 산박이 짧게 대꾸하며 보냈다. 사실 더 말할 사람은 없었다. 남은 건 장굉려였는데, 그는 장 노인을 뒷배로 두고 있었다. 애초에 말할 필요가 없었다.

    ‘임시 팀원이라지만 실력이 좋아.’

    공격력도 높고, 암살자다. 나쁘지 않은 콘셉트와 재능을 지닌 자라서 1레벨 던전에 남겨 두기에는 아쉬웠다.

    산박은 곧바로 당진 국제도시로 향했다. 2레벨 팀 지급 물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3천만 원의 예산으로 대량으로 구매할 생각이었다.

    1레벨 팀 지급 물품은 매주궤 1레벨 전담 팀장의 팀에서 쓰고 있었다. 그 덕에 ‘옥시모론’이라는 회사는 1레벨 던전 사용자들의 입에 제법 오르내리고 있었다. 팀 지급 물품이 열한 가지나 되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많은 자원이 1레벨 전담 팀에 가는 이유는 당연히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제대로 된 사람을.’

    신뢰 있는 곳에는 누구나 소속되고 싶어 한다. 안전하게 1레벨을 공략하는 전담 던전 사용자도 똑같았다. 그렇기에 산박은 그런 자들이 자신의 회사에 오게 하기 위해서, 동시에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 어떤 던전 전담 팀보다 많은 자원을 사용하는 산박의 회사는 단연코 독보적이었다.

    ‘그런데도 손해는 안 나지.’

    1레벨 공략을 안전하게 끝내서 2레벨에 도달하고 싶은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을 하나씩 껴서 1레벨 던전을 공략하면 손해는 쉽게 메꿀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산박은 2레벨 던전 공략에 필요한 ‘팀 지급 물품 리스트’를 새로 작성해야 했다. 전에 쓰던 것들은 2레벨에서는 효과적이지 못했다.

    ‘2레벨 던전의 콘셉트에는 100% 물량이 들어가 있다.’

    물량을 저지하는 데 중점을 둬야 했다. 그런 소비 아이템이 필요했다.

    예나 지금이나 떨이로 팔고 있는 ‘섬광 단검’은 2레벨 팀 지급 물품 첫 번째 리스트에 들어가기 충분했다.

    “사도 사도 왜 끝이 없어요?”

    “팔리니까 계속 만드시던데요?”

    작은 상점의 종업원이 대꾸하며 태블릿에 켜놓은 드라마에 다시 집중했다. 산박은 섬광 단검을 아예 정기적으로 배송받기로 했다. 택배 보내기는 쉬웠다. 땅덩어리가 워낙 작아서 가능했다.

    산박은 섬광 단검부터 시작해서 빠르게 상품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2레벨 회복 아이템은 행동력을 소모해서는 안 된다.’

    손을 놀리기 바빠 물약 마실 시간이 없다. 있어도 이를 다른 곳에 쓰는 게 효율적이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소비형 아티팩트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른 2레벨 던전 공략 팀도 이를 잘 인지하고 있었다.

    ‘설치형 힐링 팩.’

    효율은 떨어지고, 값도 제법 나간다. 하지만 유사시에는 이것만큼 든든한 것도 없었다.

    ‘신정호 힐링 컴퍼니.’

    설치형 힐링 팩의 TOP OF TOP. 물론 국내 한정이지만, 가성비는 이만한 게 없었다. 바닷길, 육로를 거쳐 오면서 관세까지 붙는 외국 물품이 들어올 구석이 없었다.

    ‘온양 함가(家).’

    유명하다면 유명하다. 18세기 해적을 수없이도 토벌한 양반 함관서(咸寬西)가 시조였고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와 이제는 아산으로 이름을 바꾼 온양의 터줏대감이 되어 있었다.

    사람을 위한 기업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는 신정호 힐링 컴퍼니는 설치형 힐링 팩 개발비를 국제적으로 봤을 때도 순위권에 들 정도로 많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만큼 수출도 많이 하고 있어서 유명했다.

    특히나 한민족은 근본을 따지는 걸 중요시했다. 아무리 잘난 기업이라도 가문 망신시키면 판매율이 뚝 떨어지기 일쑤였다.

    산박은 2레벨 전용 설치형 힐링 팩 ‘세컨더리 힐링 팩’을 리스트에 추가했다. 그냥 스위치를 켜고 바닥에 놓으면 알아서 던전 사용자를 치료하는 힐링 팩은 2레벨 던전에서 필요하지 않은 경우가 적었다. 다수를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회오리 화염 철구.’

    철구의 위아래를 잡고 힘을 주면서 반 바퀴를 돌리면 3초 후에 화염이 토해지는 공격 아이템이었다. 특히 위로 솟구치는 마법 불꽃은 사방으로 번지기 때문에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2레벨 던전 상품은 특히나 범위 공격 소비 아이템이 비싼 편이었다. 회오리 화염 철구는 유명한 만큼 브랜드값도 있어서 거품이 끼어 있었다. 하지만 안 살 수는 없었다. 그만큼 누구나 하나쯤은 소지하고 있는 좋은 물건이었다. 개당 20만 원을 호가하지만 다른 대체재는 형편없는 것들뿐이었다. ‘세컨더리 힐랭 팩’이 7만 9천 원임을 생각하면 엄청난 폭리였다.

    ‘나도 화염 관련된 소비 아이템을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면에서는 시은이 부러웠다. 그녀는 마녀. 2레벨 던전을 공략하다 보면 관련 스킬이나 기술을 얻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시약과 재료, 연금과 아티팩트에 깊은 관련이 있는 게 마녀였다.

    실제로 1레벨 때도 화염 물약을 만들어서 돈을 번 것이 이시은이다. 이제는 2레벨 던전 공략을 하며 본격적으로 마녀로서의 면모도 갖추게 될 터였다.

    ‘화염 물약의 화력은 여럿을 상대하려면 공중에서 터트려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바닥에 터트리거나 상대에게 뒤집어씌우면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화염 물약은 2레벨에서는 더는 사용할 수 없었다.

    산박은 닥치는 대로 쇼핑을 진행했다. 순식간에 2천8백만 원을 써버린 산박은 그대로 당진 도시를 떠났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 *

    잔잔벼락 사업에 참가한 이들은 태산박, 길강합, 박조조, 매허망, 순중가였다. 그중 순중가의 연락이 끊긴 상태였고 그 덕에 사업은 잠정 중단된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 그 사업은 부산 은행에게로 옮겨질 것이었다.

    ‘안심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산박에게는 중개인이 있었다. 바로 장 노인이었다. 동시에 부산 은행을 믿을 수 있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부산 은행 또한 장 노인의 ‘중재’를 원한다는 점이었다. 서로서로 다리 역할을 장 노인에게 맡기고 있을 정도로 서로를 생각해 주고 있었다. 그만큼 상대를 조심히 여긴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산박은 그들을 믿을 수 있었다.

    ‘어차피 그들도 이윤을 따진다.’

    산박에게서 이득을 취할 수 있고, 그 덕을 산박 또한 볼 수 있었다. 로열티의 지급에 장난을 치지는 않을 터였다. 문제는 바로 이미 잔잔벼락 사업에 뛰어든 이들을 설득시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한데 모아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

    서로 왕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서로가 가진 절반의 레시피를 서로 합치면 그걸로 산박이 걷어차이게 된다. 그 전에 이를 박살 내려면 ‘대기업’의 무서움을 그들에게 각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혹은 죽이든가.’

    만약 죽인다면 박조조와 매허망을 죽여야 한다. 강합은 산박과 너무 가까이 있는 존재였다. 순중가는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물론 죽일 수는 없었다. 박조조는 사회 활동을 많이 하고 있었고, 놈을 죽여서 오는 물결은 거칠 터였다. 그렇기에 죽이는 선택은 할 수 없었다. 고로 각개 격파를 선택했다. 가장 먼저 강합을 호출했다.

    “예, 사장님.”

    “잔잔벼락 사업, 중단된 지 며칠이 지났죠?”

    “이제 두 달이 지났습니다.”

    배당금이 떨어지니 강합도 죽을 맛이었다. 소비 패턴을 줄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몸에 배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전에 온 부산 은행… 봤죠?”

    “예. 친절하던데요.”

    그 말에 산박은 상체를 조금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양귀문 부장의 죽음이 부산 은행이 한 짓이래도, 그들이 친절하게 보입니까?”

    “헉.”

    강합이 말을 아꼈다. ‘검은 슬라임 수액’의 최대 공급원이었던 그였다. 죽었다길래 그런 줄만 알고 있었고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산박이 기민하게 움직여서 잡음 하나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은 상태였다. 먼저 ‘선공’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 지금 일이 중단된 것도…….”

    “그건 그냥 시일이 딱 떨어져서 그런 거예요. 어찌 되었든 부산 은행은 계속 저를 압박하고 있죠. 그래서 그냥 넘겨줄 생각이에요.”

    “예? 그냥요?”

    “그럼 객사하고 싶어요?”

    “…….”

    강합이 입을 다물었다. 세상은 때론 지나칠 정도로 피비린내가 풀풀 풍기기 마련이었다. 그건 잘살지 못할수록 더욱 농밀하게 퍼져 나갔다. 부산 은행과 강합. 그 둘을 비교하면 누가 가난한 놈인지는 바로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잔잔벼락 사업에 뛰어든 사람의 명단, 모두 부산 은행에 넘겼습니다. 누구누구가 절반의 레시피를 알고 있는지도요.”

    산박은 더욱 강합을 위협했다.

    “아니?! 왜요?”

    “그래야 레시피가 유출되어도 제 탓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합 씨도 입을 조심하세요.”

    “하아…….”

    그가 맥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PTSD는 여전해서 던전 공략도 못 한다. 여기가 그의 종착지였다. 거기에 부산 은행이라는 거대한 기업과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강합은 쉽게 포기했다.

    그다음에는 박조조부터 시작해서 매허망까지 차례대로 불렀다. 둘 모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시피를 알아도 파는 순간 부산 은행의 주적이 된다. 부산 금융까지 있어서 돈은 썩어 넘치는 게 부산 은행이었다. 사람 둘 죽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냥 전 국민이 음주를 좋아하기에 법 자체가 음주에 관대했다.

    순식간에 사업을 정리한 산박은 곧바로 장 노인에게로 향했다. 다만, 걱정은 남았다.

    ‘박조조와 매허망이 충분히 수작질을 부릴 수 있다.’

    그들이 너무나도 쉽게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실로 이상한 일이었다.

    ‘강합을 돈으로 매수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림도 없지.’

    산박은 미리 선수를 칠 생각을 가졌다. 덫도 놓는 게 좋았다. 한번 갈등이 생기면 끝을 봐야 했다. 용서는 약자가 하는 짓이었다. 힘이 있다면 싹을 잘라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야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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