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 * *
이새롬(가명)과의 통화를 끊은 김 기사는 곧장 황패 네크로맨서 경왜에게 향했다. 그는 언데드로 그를 맞이하지 않았다. 거침없이 저택 내부로 들어오도록 했다. 대우의 차이는 김 기사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경왜는 말끔한 늙은이였다. 늦은 나이에 던전에 뛰어들었고 성과를 올렸으며, 포스코 타워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근본 없고 기반도 없는 놈이었기에 황패에 만족해야 했다. 흑, 적, 황, 백.
‘백패를 받는 날은 결코 오지 않았지.’
이제는 만족하고 이 자리를 유지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찰나에 재미난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부산 은행이라, 허 참…….”
“세종시에서 들을 수가 없는 소식 아닙니까? 제대로 된 구석도 없는 도시입니다. 토종보다는 외부인이 많이 살고 있어서 부산 은행이 치고 들어오면 걷잡을 수 없이 엎어질 겁니다.”
“서울 복구 상태나 인천의 포화 상태를 생각했을 때 나쁜 생각은 아냐.”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한강의 기적처럼 서울의 폐허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경왜가 코로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늙어서 힘에 부친 건 아니었다. 되레 열정이 타올랐다.
‘이게 막차일 수 있지.’
자신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티켓.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확인할 필요는 있지.’
“태산박. 모든 것을 파악해라. 하나도 남김없이 파헤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임자가 있는 놈 아닙니까?”
“요즘 노예가 무슨 주인을 가리겠어?! 원하는 걸 들어주는 주인을 모시는 법이지.”
봉급, 포상, 휴가, 승진. 그런 것으로 능히 현대인들을 노예처럼 다룰 수 있었다. 그들은 실제로 능동적인 노예들이었다. 태산박은 조금 벗어나 있을 수 있었지만, 자본의 힘을 제대로 맛보면 노예가 될 가능성이 존재했다.
“나가 보겠습니다.”
김 기사의 말에 경왜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시각, 산박은 부산 은행 세종 지점에 방문했다. 이미 연락을 받았는지 자신을 밝히자마자 경호원에 의해서 VVIP실로 모셔질 수 있었다. 아예 다른 층으로 향해야 했다.
고급스러운 방에 들어서자마자 안에서 미리 준비하던 이가 일어났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도 미용실을 다녀왔는지 제대로 스타일이 잡혀 있었다. 오늘 미리 연락을 받아서 공을 들일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산박이 미리 그런 시간을 내어 줬다고 봐도 무방했다.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최태녕 계장을 보러 왔는데, 다른 사람이 이렇게 있네요.”
“예. 그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보냈습니다. 앞으로 부산 은행 관련한 일에서는 저와 함께하실 겁니다. 저는 수달군 과장입니다. 앉으시죠.”
최태녕 계장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100% 마치지 못했다. 산박이 그 투자 건을 밀어내고 곧바로 부산 은행으로 향하겠다고 해서였다. 그렇기에 이를 대신해야 했다.
스륵.
서류에는 역시나 투자 계약서가 있었다. 전에 말했던 대로 최대 1억까지는 무이자다. 은행에서 하는 것이라 그 어떤 불이익도 없었다.
“저희 회사는 32곳의 던전 기업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몇몇 곳이 수락을 한 상태입니다. 계약서상으로는 하자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저희 은행을 주거래 통장으로 해주시면 감사할 뿐이죠.”
“지원? 투자가 아닙니까?”
“1억 무이자가 무슨 투자입니까. 그 이상을 하신다면 투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수익성은 매우 낮죠.”
“그러니까 지원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 단어 선택 문제 때문에 자기가 갑인 것처럼 큰소리를 떵떵 치는 분들이 있어서…….”
“이해합니다.”
산박은 바로 이해했다. 꼼꼼히 계약서를 챙겨 보고 몇몇 구석을 사진으로 찍었다. 모호한 조항이라고 여겨서였다.
그 부분은 모두 그 자리에서 알아서 수정을 진행했다. 수달군 과장의 뒷배가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고, 약 1억 정도 소모되는 사업을 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얼마를 빌릴 생각이십니까?”
“1억요.”
딱 무이자로 주는 만큼만 받기로 했다. 던전 기업의 수익성을 생각한다면, 동시에 산박의 사업을 고려했을 때는 1억 5천도 가능했지만 산박은 무리하지 않았다.
‘난 넘어지면 끝이다.’
다시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장 노인이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자신의 재기를 도울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산박의 꿈은 영영 사라져 버린다.
‘애초에 지금 상황도 안 좋아.’
잔잔벼락 사업을 손에서 놓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그 대가가 지금 이렇게 산박의 앞에 보였다.
주머니 속에 숨겨진 송곳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잔잔벼락의 사업’이 그러했다. 검은 슬라임 수액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레시피 때문에 생긴 촌극은 지금 거대한 고래가 자신의 앞에 있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욕심이 컸다. 잔잔벼락 사업은 신생 기업 따위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 자신의 혈족이 있는 가문에서 진행할 수 있는 패밀리 사업이었다. 기반도 없는 고아가 가지기에는 너무 위험한 사업인 셈이다.
장 노인 덕분에 아직 산박의 목이 떨어지지 않았고 옥시모론 회사도 멀쩡했다. 하지만 산박의 회사는 부산 은행 같은 거물 앞에서는 위태로운 회사에 불과했다.
“이렇게 바로바로 저에게 유리한 쪽으로 조항을 변경해 주시니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아유,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앞으로도 저희 은행 잘 이용해 주십시오.”
“제 직원들보고 모두 주거래 통장을 바꾸도록 해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헤헤헤.”
과장이면 그래도 성공한 인생인데 절로 굽신거렸다. 그다음에 수달군 과장이 운을 뗐다.
“날이 되시면 장 어르신을 한번 뵈러 가십시오. 그때 부산 은행 쪽의 중요 인물이 방문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용한 말에 산박 또한 제법 굳은 표정으로 이를 받아줬다. 그런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게 사회생활이었다.
1억은 곧바로 들어왔다. 일 처리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찾아가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
중요할수록 시일을 두고 봐야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냉큼 잠수를 타야 했다. 모든 걸 버릴 준비를 갖춰야 한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사이에 산박은 김각두와 김연정을 호출했다. 사무실에 마련된 칸막이 너머로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았다.
“요즘 생활은 어떻습니까?”
“평범하죠. 2레벨 던전을 빨리 가고 싶을 뿐입니다.”
김각두가 우직하게 대답했다. 그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레벨 업 시스템’의 힘으로 김연정의 체력 수치를 최대한으로 높이는 것. 오로지 그게 그의 원동력이었다.
특히, 김연정의 바닥난 생명에 대한 대금을 지불한 산박은 은인이었다. 목숨을 걸어서 살려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그냥 소설 속에서나 있는 일이었다. 은인 앞에서 병원비 내놓으라고 고소 협박 하는 이들이 수두룩한 게 현실이었다. 다친 은인 병문안 한번 안 가는 건 기본 탑재다.
그런 면에서 김각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우선순위는 은인이 아니었다. 은인이 구해준 김연정이었다. 그다음, 그다음 어쩌면 그다음 우선순위에 산박이 있을 수 있었다.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의미했다. 헌신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숭고한 행위였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2레벨 던전 장비, 확인해 보니까 형편없는 것이더군요. 어떤 사람은 1레벨 장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2레벨 장비라고 하고… 그런 갈등조차 일어나지 않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장비죠.”
정확히는 15년 전의 2레벨 던전 장비였다.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2레벨 던전 장비에 랭크되어 있지만 지금 보면 결코 2레벨 던전 장비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서류에는 2레벨 장비로 등록될 수 있었다. 누구도 정보를 수정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하청의 하청의 하청 팀으로 활동하는 두 사람을 자세히 관찰하고 검증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
두 사람은 침묵했다. 자연스럽게 서로 손을 잡았다. 그들에게 닥친 모든 위기가 그들의 사랑을 꽃피우는 거름이며, 물이며, 햇빛이었다. 모순되게 고통이야말로 사랑을 강력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이런 사랑이라.’
산박은 그를 신선하게 여겼다. 변수가 많은 이 세상에서 그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기대되는 결말일지 흐물거리는 끝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거 팔고 새롭게 장만하세요. 이제는 이 회사의 직원 아닙니까?”
“하지만 돈이 없습니다, 사장님.”
그 말에 산박이 웃었다.
“누가 본인 돈으로 사라고 했습니까? 전 그런 적이 없는데요.”
“네? 그럼…….”
산박이 법인 카드를 건네줬다.
“예산은 1인당 2천~3천만 원입니다. 알아서 장만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김각두가 고개를 숙였다. 목숨은 못 줘도 감사의 표현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도 고개 숙이는데 그렇지 않은 인간에게 고개를 안 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앞으로 좋은 날만 있을 겁니다.”
“하하하.”
김각두가 오랜만에 웃었다. 그는 연신 감사를 표하며 김연정을 데리고 나갔다.
산박의 시선은 그녀의 배낭으로 향했다. 물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회복 물약을 달고 사는구나.’
안타까움이 조금 생겼지만 결코 산박의 냉철한 이성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있었지만 할 수 없었다. 이득이 없어서였다.
그때 강합이 들어와서 물었다.
“저, 탕만도 부를까요?”
“괜찮습니다. 순서가 있어서요.”
“아, 예.”
강합이 물러갔다.
―예! 사장님!
산박은 그다음에 충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사무실도 좀 오고 그러세요.”
―하하, 검 쓰는 사람이 사무실에 갈 일이 어디 많습니까?
“아직 2레벨 던전 장비 못 구하셨죠?”
―예. 돈이 돈이다 보니…….
1레벨 던전 장비를 사면서 산박에게 차용증까지 쓴 충호였다. 전사의 역량을 뛰어나도 돈 굴리는 건 젬병이었다. 이제 한 번 수확한 삼은 큰돈이 되지는 못했다. 해를 넘기며 차근차근 느리게 성장하는 사업이 ‘물의 나무 삼 사업’이었다.
“탕만 씨에게도 전하세요. 없는 돈 챙겨서 드리겠습니다.”
―저번 주에 2레벨 클리어하시더니, 이제 마음이 생기신 겁니까?
“마음은 전부터 있었죠. 다만, 돈이 없었을 뿐이죠.”
―어떻게 돈을 구하셨습니까?
돈 얘기에 충호가 흥미를 보였다. 삼 사업을 하면서 목돈을 단번에 얻을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최근에는 돈 얘기에 흥미가 생겼다. 물론 어려운 건 그냥 강합에게 짬 처리를 시켰다.
충호 또한 이것저것 못 해본 것이 없는 양반이라 강합은 찍소리도 못 했다. 회사 내에서의 영향력 싸움에서도 밀리기 때문에 더더욱 입을 다물고 하라는 대로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충호는 현역 던전 사용자였으며 팀장으로 불리고 있었다.
“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탕만 씨한테도 적당히 말씀해 주시고, 데려오세요.”
―예.
산박은 탕만을 호출하는 걸 강합이 아닌 충호에게 맡겼다. 끼리끼리 놀아야 한다는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B급 던전 사용자인 탕만은 회사에 오래 남고 싶어 했기에 탕만과 충호는 서로 돈독해지는 게 회사 차원에서 이득이었다.
‘충호는 돈에 대한 미련이 조금 있지만, 많이는 없지.’
돈보다 인간을 중요시하는 양반이었다. 고로 충호와 탕만은 서로 깊은 관계가 되어야 했는데 이는 산박이 은근히 밀고 있는 추세였다.
“아니, 두 사람이 어떻게 같이…….”
“아! 강합 형님. 오랜만입니다.”
충호와 탕만이 동시에 오자 강합이 어리둥절해했다. 이에 충호는 대충 넘어갔다.
“사장님이 절 부르시길래 겸사겸사 데리고 왔죠. 순번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아, 예……. 들어가세요. 사장님이 기다리십니다.”
돈을 주는 자리다. 사장이 모든 걸 주관해야 했다. 돈 주는 걸 소홀히 여기면 안 됐다. 자식한테든 여자 친구한테든, 누구에게든지 가볍게 주면 안 되는 게 돈이었다. 돈을 가볍게 여기면 이를 받는 이 또한 이를 가볍게 여긴다. 그걸 모르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뒤통수 맞기 쉬웠다.
“앉으세요.”
“예!”
두 사람이 냉큼 앉았다. 김각두와 김연정과의 만남과는 다르게 산박은 차까지 내줬다. 다름이 아니라 공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는 가볍게 돈을 주면 안 됐다. 충분히 설명하고, 어떤 돈인지를 말해놔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