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270)
  • 168화

    속으로는 당황했지만 산박은 차분하게 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장 먼저 설문지에 관해서 물었다.

    “우리 회사가 설문지를 썼습니까?”

    “예. 여기 길 부장님 덕을 봤었습니다.”

    강합이 고개를 숙였다. 다만 산박은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다른 회사도 했습니까?”

    “예. 이 주변에 있는 던전 기업은 죄다 했습니다.”

    제법 공을 들인 모습이었다. 산박이 강합을 바라보자 강합이 그때 상황을 서둘러 설명했다.

    “그게, 인턴이 찾아왔는데, 상품권을 준다고 해서 성실하게 대답한 것뿐입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걸릴 수밖에 없었다. 공짜 하면 눈 벌겋게 뜨고 달려드는 게 인간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산박은 최태녕 계장이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들었다.

    “어떤 겁니까?”

    “기업들과 깊은 관계가 있어야지 은행도 좋은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대하여 무이자로 대출해 드립니다.”

    “파격적이네요.”

    무이자, 카드 회사나 대부업체나 하는 방식이었다. 그걸 한다는 것 자체가 도박이었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이자로 돈 버는 것이 은행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산박은 이것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만히 돈 버는 은행이 굳이 자신을 찾아왔다? 다분히 의심할 만했고, 애초에 장 노인과 부산 은행이 한 번 부딪친 일도 있었다.

    ‘나한테 닿았다.’

    장 노인 선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사건에 흥미를 느꼈던 자는 생각보다 꼼꼼한 양반이었다. 그저 운이 나빴다고 하기에는 상대의 역량이 제법이었다.

    ‘운이 좋았어도 나한테 닿았을 터다.’

    사장 하나, 사원 가진 가문 하나가 뒤섞인 사건이다. 그걸 적당히 교통정리 하고 끝내지 않고 여기까지 도달했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와 더불어서 상대는 상당한 영향력을 소모했다. 굳이 직원을 동원하고,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면서 접근해 왔다.

    ‘공교롭다.’

    더욱이 현재 산박은 방침두와 계약까지 할 생각을 가지고 대접도 한 번 받았다. 즉, 지금 산박은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방침두를 손절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침두를 대접해 줘야 했다. 과거를 생각한다면 방침두는 쉽게 손절할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의 형세를 생각한다면 방침두는 나중에도 두고두고 쓸 수 있었다.

    ‘부산 은행과 관계가 생겼다고 해서 방침두가 쓸모없는 건 아니니까.’

    나중에 어떻게든 쓸 수 있는 카드가 될 수 있었다. 결국 산박은 서둘러 최태녕 계장을 내보냈다.

    “제가 가까운 날에 부산 은행에 방문하겠습니다. 제 명함입니다.”

    단출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명함을 산박이 그에게 건넸다.

    “예? 무이자밖에 말씀을 안 드렸는데요.”

    “그건 그때 은행 가서 듣겠습니다.”

    산박이 일어나자 너도나도 일어섰다.

    “강합 씨, 밖에까지 배웅해 주세요. 가벼운 사람들 아닙니다.”

    “예!”

    강합이 냉큼 대답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동시에 산박은 서둘러 방침두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 사장! 하하하하!!

    방침두는 크게 그를 반겼다. 통화음이 세 번도 가지 않고 받았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는 슬픔이 존재했다. 이미 부산 은행 쪽에서 태산박과 방침두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물어봤기 때문이었다.

    “이거 죄송해서 어떡합니까. 아무래도 그 계약, 다른 곳에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다 알면서도 방침두는 딴소리를 했다. 모든 일에는 절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결코 부산 은행을 이길 수 없었다.

    오히려 이번 ‘연기’를 해주는 대가로 그는 1억을 받았다. 돈만큼 사람 말 잘 듣게 하는 게 없었다. 예상되었던 수익에 비하면 약소한 돈에 불과했지만 모두 현금이었고, 은행 돈이었다. 고래에게 후려쳐 맞지 않고 1억으로 퉁치는 건 방침두에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속만 조금 쓰라릴 뿐이었다.

    ‘어차피 먹어도 배가 터졌을 건이다.’

    산박조차도 두려움에 국내에서 팔지 못하고 서만주에 팔던 상품이 바로 잔잔벼락의 무기였다. 환도뿐 아니라, 원료만 있으면 다른 어떤 무기도 가능했다. 소모도 잘 되는 물품이어서 회전율도 높았다.

    애초에 부산 은행이 자기들이 먹겠다는데 그걸 먹을 방침두가 아니었다. 그는 그냥 군산에서 조용히 돈 벌고 살고 싶었다. 한번 데인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 교훈을 계속 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였다.

    다만 체면치레는 하고 싶은 게 방침두였는데, 산박이 순순히 사과하고 있었기에 만족했다.

    “다음에 꼭 같이 사업합시다.”

    산박의 말에 방침두 또한 냉큼 대답했다.

    ―그런 말을 해주시니 마음이 많이 놓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접근하고 제가 파토를 내야 하니, 이게 참, 정말 죄송합니다.”

    산박은 거듭 사죄했다. 동시에 방 사장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돈을 앞에 두고 안 좋게 엮였지만 사실 큰 피해도 없었다. 장 노인이 막아줬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권력자가 좋다니까.’

    연줄 없으면 그냥 후리는 대로 싸대기를 맞아야 했다. 비가 오면 그대로 쫄딱 맞아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다시 새롭게 관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쫄깃한 상황에 부닥쳤지만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았기에 그러는 게 가능했다.

    양 부장? 어쩌라고. 그 누구도 그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자식의 복수? 돈이 있고 생활이 보장되어 있어야 할 수 있는 게 복수였다. 복수도 돈이 없으면 못 한다.

    그리고 복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복수는 그만큼 많은 행동력을 요구했다. 직장 다니면서 복수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복 받으실 겁니다.”

    ―태 사장이 나한테 복을 가져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방침두는 이를 갈았다.

    ‘지지리 운도 없지.’

    부산 은행이라니, 결코 연관되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적어도 방침두에게는 그랬다.

    그는 이번 일을 아쉬워했다. 괜히 욕심이 나서였다. 먹으면 안 되지만 먹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독이 있는 복어를 먹지 말라고 해도 인간들은 기어코 먹는 방법을 터득해 냈다. 이처럼 욕망은 참기 힘들었다.

    죽으러 들어가는 길에도 미련이 남았다. 그 죽음의 길 뒤에 있는 풍요로운 돈 때문이었다. 돈에 미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렇기에 방침두는 가문 없이 이 자리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X부랄, 접자.’

    그는 생각을 접었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 * *

    산박은 카페에서 이시은을 기다렸다. 시은은 2레벨 던전에 한 번 줄을 대줬다고 아주 유세를 떨기 바빴다. 그리고 산박은 거기에 어울려 줘야만 했는데, 실제로 큰 덕을 봤기 때문이었다.

    ‘하자가 있지만 김각두도 얻었고.’

    또 장물을 취급하긴 해도 용갑균과 용걸섭 형제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걷어차려고 했지만 사적인 정보 수집 끝에 하청을 맡기는 건 괜찮다고 판단했다. 질은 조금 나쁘지만 선은 넘지 않는 행보를 보여서였다.

    아무튼, 2레벨 던전을 한 번 클리어한 대가로 시은은 자주 산박과 사적인 만남을 추구했다. 다만 그때그때 확실하게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만남의 경우에는 포스코 타워의 정치 구도에 대한 조언을 산박에게 구하기 위해서였다. 거절하기에는 시은이 올린 성과가 유의미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산박을 위해서 산박이 기대하는 것 이상을 준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제안하고 나눠주는 쪽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이시은이 산박에게 뭔가를 줬다. 그것도 큰 놈이다. 받기만 하는 다른 팀원들에 비해서 시은은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사람 짜증 나게.’

    산박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이새롬이 카페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커피를 시키고 산박의 맞은편에 있는 또 다른 테이블에 않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인기척에 산박의 시선이 던전 정보가 든 스마트폰에서 떨어져서 그녀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새롬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산박은 표정 변화 없이 그냥 다시 스마트폰으로 눈을 돌렸다.

    ‘뭐야, X발?’

    미녀로 한참 대접받으며 살았던 이새롬이다. 어떤 사람은 9억대 초고가 아파트를 주기도 했다. 그만큼 살을 섞어서 만들어지는 떡 정은 끈적하고 비이성적이었다. 그런 이새롬에게 웃음조차도 보여주지 않는 태산박의 모습은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저기요.”

    톡톡.

    테이블을 긴 손톱으로 두드리며 새롬이 산박의 관심을 끌었다. 산박은 2레벨 던전 정보를 암기 및 복습하고 있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네. 무슨 일이시죠?”

    “잘생기셨는데, 여자 친구 있으세요?”

    “없습니다.”

    “저…….”

    “필요도 없고요.”

    새롬이 뭐라고 이어 나가려고 할 때 산박이 새롬의 말을 끊었다. 2레벨 던전은 안 그래도 더욱 복잡하고 외워야 할 것이 많았다. 스마트폰도 없는 곳에서 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하는데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을 여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쓸데없이 이시은의 일에 어울려 줘야 했다. 소위 사회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억지로 하는 일이라 현재 기분도 썩 좋지 않았다.

    “네?”

    “여자 친구, 필요 없습니다.”

    “아……. 네…….”

    철벽을 치는 모습에 이새롬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녀는 더는 시도하지 못했다. 외모 하나로 남자들을 엮고 다녔던 여자였다. 사회생활 하면서 자신의 본명 하나 꺼내지 못하는 거짓된 삶을 살았다. 거기에 쌓인 열등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깊은 늪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일이 잘 안되는 경우에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이새롬은 주문한 커피도 가져가지 않고 바로 도망치듯이 카페를 나가 버렸다.

    그 모습을 힐끗 본 산박은 인상을 찌푸렸다.

    ‘된장녀인가. 돈이 넘쳐나나 보네.’

    미인은 자기 관리도 잘해서 요즘에는 전부 똘똘한 미녀가 많은데 저런 미녀는 실로 오랜만에 봤기에 생각에 조금 남기도 전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인기 진짜 많으신가 보다.”

    고개를 돌리자 이시은이 와있었다.

    “다 보고 있었어요?”

    “네. 조금 놀래 주려고 했는데 엄청난 걸 봐버렸네요. 사장님 조금 잘생긴 편이긴 해도 저런 미녀가 엮일 사람은 아닌데…….”

    “뭐라고요? 요즘에는 외모 평가하면 큰일 나는 거 모르세요?”

    “그거야 인터넷 찐따들이나 난리 치는 거고요. 꽃보고 예쁘다는 소리도 못 해요?”

    “저보고 잘생기지 않았다면서요.”

    “잘생기셨어요. 평범한 것보다는.”

    그녀가 앉았다. 동시에 커피가 나왔다. 산박이 커피를 가져와서 테이블에 놓았다.

    “포스코 타워 상황이 어떤데요? 누구 라인을 타라고 하던가요?”

    산박은 바로 본론으로 가고 싶어 했지만 어림도 없지. 시은은 아까 그 여자에 대해서 떠들기 바빴다.

    “그 여자가 뭐라고 말했어요?”

    “그건 왜 물어봐요? 이런 거 물으려고 만나자고 한 거 아니잖아요.”

    “아니… 눈앞에서 여자한테 고백받는 남자를 봤는데 그럼 안 궁금해요? 누구라도 궁금하잖아요?”

    “그냥 갑자기 여자 친구 있냐길래 없다고 했고, 생각도 없다고 했죠.”

    “와, 얼굴 앞에 대고 바로요?”

    산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얼굴만 예쁘면 뭐 합니까.”

    “기분이 좋죠. 보기만 해도 행복하잖아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예쁜 사람들, 잘생긴 사람들에 좋아 죽잖아요?”

    “…정론입니다만, 물론 저도 동의합니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그 말에 시은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러면서 검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거예요, 그거. 사장님이 다른 사람이랑 다른 이유.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데요?”

    “됐습니다.”

    “됐기는 뭐가 돼요? 그 이유가 뭔데요? 예쁜 여자가 옆에 쏙 들어오면 옆구리도 따뜻해지고 기분도 좋아지는데 왜 밀어내셨어요?”

    “때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전 지금 회사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상투적인 말이고, 모호한 답변이었다. 시은은 더 묻기를 포기하고 물러섰다. 이렇게 쉽게 들을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기에 쉽게 물러날 수 있었다.

    반면 카페를 나간 이새롬은 감미롭게 울리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받았다. 김 기사였다.

    “왜요? 일이 잘됐는지 물으러 걸었어요?”

    그녀가 신경질을 냈다.

    ―아니. 접으라고.

    “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거물이 비집고 들어왔어. 태 사장은 접는다. 그렇게 알아들어.

    “아니… 잠깐만요.”

    통화는 바로 끊겼다. 이새롬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 기분을 깊게 가져가지 못했다. 그런 훈련이 안 되어 있었고, 습관도 엉망이었다.

    ‘클럽이나 가서 진탕 놀아야겠다.’

    그런 강렬한 마음에 휩싸였다. 원나잇을 하고 뒹굴었던 살 내음도 잠시, 해가 뜨고 나서 정신을 차리면 거대한 허무감이 그녀를 다시 한번 덮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될 대로 되라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이새롬은 하이힐을 벗어서 조수석에 놓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다음 액셀을 밟으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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