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장 노인의 호들갑에 송서아는 웃었지만 실제로 산박을 부르도록 놔두지는 않았다.
“괜찮습니다. 첫 단추인데, 급하게 맞추고 싶지 않습니다.”
“음…….”
그 모습에 장 노인이 천천히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속이 깊다.’
첫 만남은 언제 어디서나 중요하고, 특히 돈이 연관되면 더더욱 조심하게 된다. 인상이 그저 사기꾼 인상이다? 아무리 좋다고 해도 안 하는 게 돈 투자였고, 사업이었다.
‘남이 대신 해주겠다고 하는데도 거부하다니.’
놀랍고 또 대단했다. 장 노인은 자신의 젊을 적을 생각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었다. 자신의 출생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대단한 자라 여겼다. 그 덕에 큰 손해를 보고 피를 봐야 했다.
그래서 지금의 장 노인이 있었다. 역대 최다, 많은 혈족을 다시 규합하여 사원에 방문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렇기에 장 노인은 송서아의 무서운 재능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이 할 일을 남이 대신 해주니 좋아해야 하는데 ‘시기’와 ‘때’를 따진다. 젊은 혈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질 자체가 그러했다.
‘허…….’
모든 면에서 뛰어난 기반이 그녀의 발밑을 단단히 받쳐 주기에 정도를 걷는 것이 가장 강력함을 알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아주 젊은 송서아가 왜 이렇게 활발하게 행동하는지도 잘 알 수 있었다.
‘천방지축으로 나대는 줄만 알았는데…….’
훨훨 날 줄 아는 봉황이었다. 아마 송서아를 낳은 부부는 집안에서 엄청나게 떵떵거리면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을 터였다. 항렬이 높은 사람도 굽신거릴지도 몰랐다. 그만큼 자식 농사를 잘 지었기 때문이다. 묘한 기 싸움은 명문가일수록 더욱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전화만 한 통화 미리 해두지. 그건 괜찮겠지? 혹여나 딴짓을 할지 몰라서 말이야. 태 사장의 행동력은 나도 못 말리거든.”
장 노인은 그런데도 한사코 자신을 드러냈다. 송서아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지금 만든 관계가 나중에 소원해질 수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가치를 증명해야 할 때 증명하지 않으면 다음은 없었다. 기회를 주는 자는 언제나 상대적이었고 이번에 장 노인은 기회를 얻기 위해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세요. 아, 제가 자리를 비킬까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 전혀 없어.”
장 노인이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아예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는데, 그만큼 산박은 깔끔한 사람이라 누구에게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자였다.
“…….”
단박에 전화를 받지는 않아서 장 노인이 몸을 조금 움직였다. 괜히 불안했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장 어르신?
스피커폰으로 바람 소리가 강했다.
“어디야? 어디인데 그렇게 바람이 불어?”
―예. 여기 군산 앞바다입니다.
“거기는 왜 갔어?”
―사업 때문에요.
송서아의 표정이 변했다.
“누구? 누구를 만나는데?”
그 표정 변화에 장 노인은 송서아의 앞잡이처럼 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태양광 발전소를 지어 봤자 공기업에서 안 받아주면 사업에 쓰지도 못하는 사업이 바로 전기 사업이었다. 거기에 손 하나 쓱 내밀어서 숟가락으로 보리밥을 한 움큼 쓰윽 뜰 수 있게 해줬는데, 앞잡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생겼다.
만약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면 돈이 부족한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했다. 돈 때문에 나라도 팔아먹는데 무슨 대수인가?
―전에 중재를 해달라고 했던 군산 선박업주, 방침두 사장 만나러 왔습니다.
“그 사람은 왜 만나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거기까지는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네요.
이에 장 노인이 스리슬쩍 송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호오…….’
보통은 여기서 자신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송서아는 불편함, 번거로움을 그냥 가져가기로 선택했다. 그게 올바르다고 여겼다. 실제로 그렇다.
“그래. 사업 이야기 잘하고,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러 와.”
―예. 어르신도 조심하세요. 요즘 독감 때문에 난리잖아요. 항상 손 씻고, 기침은 소매에 대고 해야 비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안 줘요. 마스크는 한 번 쓰고 바로 버리시고요.
“오냐.”
장 노인은 그렇게 툭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제법 친하신가 봅니다.”
그녀의 말에 장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하지 않은 던전 사용자지만 기반 하나 없었지. 그래서 나와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었어. 그에 대해서 더 듣고 싶은 게 혹시 있어?”
“없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마주할 때 항상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부모가 모르는 자식의 면모는 무궁무진하지.”
장 노인은 그 말을 이해했다. 실제로 부동 지구의 장 노인을 대하는 태산박과 부산 은행의 지점장 송서아를 대하는 태산박은 다른 인물이나 다름없을 것이었다.
송서아가 몸을 일으켜서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섰다. 소준석 경호원이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뭘 어떻게 보고 있어. 오히려 잘됐어. 어떤 사업가인지, 한번 보자고.”
어떤 인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사업가냐가 중요했다. 그 판단을 위한 선택지로 삼기 좋았다.
현재까지 산박의 행보를 봤을 때, 부산 은행보다는 방침두를 택할 가능성이 컸다. 그에게 부산 은행은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송서아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방침두 같은 소인배를 택한다면 동래 송가(家)의 힘을 보여주면 될 일.’
송서아는 산박이 되레 부산 은행의 손길을 거부하기를 원했다. 그래야 부산 은행의 힘을 보여줄 수 있었다.
“수달군 과장, 아직도 세종시에 있을 거야. 그 사람은 머리가 제법 돌아가더라. 천천히 방침두랑 만나도록 해봐.”
“예.”
동시에 방침두와 태산박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살피도록 했다.
리무진을 탄 송서아가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안과에 갈까요?”
“흔한 안구 건조증이야. 수술하면 더 안 좋아질 일만 있다는데, 갈 필요 없어.”
“조금 충혈이 되셨는데요.”
“그래?”
송서아가 거울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서 눈 상태를 확인했다.
“요 며칠 잠도 잘 안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알았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유준이 운전대를 움직였고, 소준석이 스팀 찜질을 준비하는 소리가 차 내부에서 흘러나왔다.
* * *
“아이고오오오오오오오!! 태 사장!!”
방침두가 양팔을 쩍 벌리며 택시에서 내린 태산박에게 달려와서는 크게 포옹했다. 등을 두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하게 악수하며 웃는 낯으로 연신 말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만나자고 해서 아주 고마워!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
똑같은 죄를 지었음에도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목숨을 부지했다. 둘의 차이는 기득권이냐, 아니냐의 차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건 아주 큰 차이였다. 언론, 기사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은 사건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허무할 정도로 현실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기반이 있으면 면죄부를 가지고 있고, 기반이 없으면 돼지 새끼 멱따이는 것처럼 도축되어 길가에 버려진다.
그 누구도 고아를 위해서 사회 정의를 외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돈을 주는 이들을 위해서 사회 정의를 외친다. 똑같은 ‘사회 정의’이지만 거기에 들어가고 속하기 위한 울타리의 높이가 달랐다. 그 덕에 방 사장은 살았고, 양 부장은 죽었다.
거기에 기반이 있으면 한 번, 두 번, 세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반면 뭣도 없고 똥 바닥에서 버둥거리기 바쁜 이들은 넘어질 수도 없었다. 이미 넘어져 있기 때문이다. 숨 한번 돌리다가 죽기 일쑤였다.
“어서, 어서 들어갑시다! 여기 이 집 회가 그렇게 맛있고 싱싱해!”
방침두가 산박을 안내했다. 상체는 살짝 굽혀서 내시처럼 굴었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돌계단을 다섯 개 올라서 큰 문을 지나자 정원이 보였다. 한국적 특징이 강한 정원이었다. 우물까지 있었는데, 비단잉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조명은 은은했고 곳곳에서 여자 소리가 났다. 군산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군산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항구 도시가 다 그렇죠. 새우잡이 배에서 번 돈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외국인 써도 선장은 다 한국인이지 않겠습니까?”
머리털 빠지게 일해도 선장이 독식하는 것이 뱃일이었다. 산박은 흥미 없는 표정으로 들으며 정원을 구경했다.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좋지도 않았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예.”
방침두는 곧바로 그를 룸으로 안내했다. 술 시중을 위한 여자가 들어와서 산박의 옆에 앉았다. 산박은 굳이 그녀들을 내치지 않았다. 방침두가 접대해 주는 것인데 거기서 물리도록 말한다?
‘상식 없는 놈이지.’
겉멋에 뇌가 전 놈들이나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다. 혹은 갑을 관계에 있거나. 둘 다 지금 이 자리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대접하러 데려온 곳에서 그 대접을 발로 걷어차는 순간, 그걸로 사실 사업 이야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모든 행위는 서로의 신뢰를 위한 것이었다. 남의 성의를 함부로 대하는 놈이면 등쳐 먹는 것은 더더욱 쉽다. 그렇기에 산박은 술 시중 여자를 내치지 않았다.
“예쁘죠?”
“아잉.”
“이렇게 좋은 곳이 군산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산박은 어깨가 훤히 드러난 개량 한복을 통해서 섹시함을 드러내는 술 접대 여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말랑했고, 부드러웠다. 향수 냄새는 은은했다. 품위가 있었다. 그렇게 하도록 가게가 신경을 바짝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하하!”
식사는 즐거웠다. 여자까지 있는데 안 즐거울 리가 없었다. 제법 취하면서 서로의 언행을 확인하고 나서야 여자 둘을 물렸고, 상도 치웠다. 간단한 다과가 올려졌다.
“감이 적당히 달죠?”
“예. 특이하네요. 감을 내어주고.”
그렇게 잡담이 끝났다. 본론은 산박이 꺼냈다.
“인도네시아나 인도 쪽에 던전 무역 할 생각 있으십니까?”
“당연히 가능하죠. 무역부터 시작해서 바다 일이라면 안 건드리는 게 없는 게 오식 선박입니다.”
단번에 방침두가 확답을 줬다. 조사한 것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른 이에 의해서 자신을 죽일 뻔한 사업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궁금했다. 앞으로 관계자가 된다면 이전의 일도 아는 게 중요했다.
“근데 갑자기 왜 이런 제안을 하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있었다. 혹, 리스크가 큰 것일 수 있었다.
“국내에서만 안 알려지면 됩니다.”
“그거야 당연한 겁니다만……. 근데… 왜 갑자기……. 예?”
산박은 턱을 매만졌다. 서만주의 지역 카르텔 때문에 X 됐다고 말한다면 자신의 위신만 망가질 뿐이었다.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방침두가 억지로 웃었다. 산박의 심기를 건드리기 싫었다. 그렇기에 산박도 한마디 했다.
“불법적인 건 전혀 없습니다.”
“좋습니다. 계약서 작성해서 차근차근 진행해 봅시다.”
방침두가 손을 다시 한번 건넸다. 산박이 이를 받아들여서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3일 뒤, 산박은 사무실에 있었다. 회사 자산과 자신의 현 자산 그리고 수입을 정리해서 파악한 뒤에 전자 문서화하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방침두의 부하 직원과 서서히 계약을 진행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강합과 경리가 며칠을 밤새웠다. 그들은 매우 바빴다.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았다. 하나같이 처음 겪는 일이라 자문하려고 곳곳에 발품을 팔고 전화를 돌려야 했다.
“실례합니다.”
“누구십니까?”
“아, 저희는 전에 설문지를 토대로 던전 기업에 투자를 하는 부산 은행 소속 직원입니다. 저는 최태녕 계장이라고 합니다.”
은행 계급의 가장 밑바닥이 바로 계장이었다. 강합이 저도 모르게 산박에게 눈길을 줬다. 평소였다면 산박은 그런 잡상인 따위 걷어찼을 터였다. 하지만 부산 은행이라는 말에 눈을 좁혔다.
“차 한잔 하고 가세요.”
산박이 부드럽게 말하고 경리에게 턱짓했다. 그녀가 서둘러 차를 준비하러 움직였다. 강합은 서둘러 서류를 치웠다. 산박은 소파에 미리 앉아서 자리를 권했다. 부산 은행의 계장 두 명, 남녀가 자리에 앉았다.
“요즘 은행 영업을 여자가 뛰어요?”
“보통은 그렇지 않지만, 최근에는 승진 때문에 여성들의 영업 참여도가 높습니다. 예전처럼 편한 일만 찾지 않죠. 하하하.”
최태녕 계장이 그렇게 말했다. 산박은 옆에 앉은 여성 은행원에게 물었다.
“최태녕 계장 명함은 받았는데, 명함 가지고 있지 않으세요?”
“네? 아, 죄송합니다. 여기…….”
어리숙해 보이는 게 영업 은행원을 따라다니며 최대한 배우고 있는 듯했다. 곧 익숙해질 것이다. 저런 열정이 중요했다.
명함 두 장을 챙긴 산박은 속으로 생각했다.
‘부산 은행, 날 놓아줄 생각이 없구나.’
이것은 덫이다. 산박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단번에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