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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화 (159/270)
  • 159화

    “그륵.”

    산박은 나오려는 소리를 참았다. 안에 것을 게워내고 싶을 정도로 헛구역질이 나왔는데, 그에 따라서 진득한 침이 한 움큼 곰의 아가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날렵한 호랑이와는 다르게 둔한 곰은 방어력 하나는 뛰어났다. 그 덕에 가죽만 상하고 산박은 설 수 있었지만,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방이 많은 곰은 탁월한 방패 전사였으나 지구력이 썩 좋지는 못했다.

    “…….”

    주변을 둘러보았다. ‘썩은 과육 괴물’이 내는 소리는 끔찍했지만 더는 까마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엄청난 떼로 몰려왔던 썩은 까마귀들이었다. 너무 울어대는 탓에 스스로를 죽일 정도였다.

    결국 썩은 까마귀 모두 죽음을 맞이했고, 썩은 과육 괴물도 더는 오지 않았다. 까마귀 소리를 못 들은 것도 있었지만 인근에 있는 썩은 과육 괴물 모두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엄청난 전투였다.’

    산박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두툼하기 짝이 없는 곰의 엉덩이로 질척거리는 땅에 거침없이 앉아서 상체를 들어 올려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어엉.”

    곰 소리가 절로 났다. 썩은 가스층의 독한 냄새가 폐 속으로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왔다. 피로가 더욱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에는 아직 썩은 과육 괴물들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진창이 된 지대를 넘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간헐적으로 충격 과육이 터져서 더욱 상처를 입고 비틀거렸다.

    ‘늪이다.’

    썩은 까마귀의 시체와 썩은 과육 괴물이 달리면서 뿜어내는 썩은 수액, 그리고 죽어 가면서 뱉어내는 썩은 수액과 쌓이는 시체와 뒤섞인 진흙은 죽음을 노래하는 늪이 되었다. 거칠게 움직일수록 흙이 일어났기에 진흙의 농도는 더욱 농밀해졌다. 거기에 썩은 피가 뒤섞이고 썩은 수액이 뒤엉켰다. 그렇기에 놈들은 더는 전진하지 못했다.

    산박은 숨을 돌리고 변신을 풀었다. 소나무 향기를 내뿜던 뿔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만큼 전투가 길었다. 살갗에 상처가 가득했지만 자잘한 경상이라 참을 만했고, 금방 응고되어서 굳어서 딱지가 생겼다.

    ‘말할 기운도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있는 치료수를 자신에게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몸 상태를 살폈다. 가장 먼저 산박의 손이 닿은 곳은 용갑균이었다.

    “어떻습니까.”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갑균은 칼로 신발을 찢어 벗은 왼발을 보여줬다. 발목이 완전히 퉁퉁 부어 있었다. 그 퉁퉁 부은 곳에는 심할 정도로 검붉은 피멍이 들어 있었고, 점점 면적이 늘어나고 있었다.

    ‘죽을 상처는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처치를 해야 했다. 산박은 자신의 치료수를 건네줬다.

    “마시세요. 표면에 뿌린다고 해서 나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

    그는 사양하지 않고 가죽 주머니를 받았다. 그리고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게 얼마나 힘을 많이 썼는지 알 수 있었다. 왼쪽 어깨는 일정 이상 들어 올려지지 않았는데, 나뭇가지에 후려쳐 맞아서 골절되어 있었다.

    산박은 걸음을 옮겼다. 그 외에는 대부분이 끙끙 앓고 있었다.

    “걸섭 씨, 괜찮습니까?”

    시은이 그를 응급 처치 하고 있었다. 누워있는 그는 입을 달싹거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갑균을 지키려다가 오른팔을 크게 다친 상태였다. 그 이후에는 왼팔만 이용해서 방패로 패 죽이고 다녔다.

    ‘방패가 아니었다면 죽었겠지.’

    산박이 걸섭의 방패를 살폈다. 일그러지고 움푹 팬 곳도 많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형태가 남아 있었다.

    ‘대체 무슨 방패야?’

    이 정도면 엄청나게 비쌀 게 분명했고, 수량도 제한되었을 것이었다. 이렇게 무조건 수요가 있는 건 수량을 줄여서 값을 높여 파는 게 보편적이었다. 물론 그런 물품은 손에 꼽는다.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산박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도금을 했군. 장물인가.’

    용걸섭이 지닌 어둠이 방패에서 느껴졌다. 도금하는 이유는 뒤가 켕겨서다. 다만, 산박은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걸 안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은이 압박 지혈을 마무리했다. 치료수를 먹은 용걸섭이 추욱 늘어졌다. 잠에 빠진 것이었다. 정신력의 한계에 다다랐다. 그만큼 고통과 전투는 끔찍했다.

    “시은 씨는 괜찮으세요?”

    “네.”

    그녀가 짧게 대답했다. 온몸에 썩은 수액을 묻어 있었다. 환도에도 나무껍질이 들러붙어 있었다. 직접 전투에 참가한 모습이었다.

    ‘다재다능.’

    그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반면 김다은은 옷은 비교적 멀쩡했지만 자신의 피로 조금 물들어 있었다. 무리한 힘의 운용으로 각혈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입술이 새파랬는데, 그만큼 내부에서 큰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꼼짝도 못 하는 그녀였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가장 위험한 건 역시 법성 사제 김연정이었다. 체력 스탯이 낮은 만큼 생명력도 낮았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쿠구구구…….

    던전이 매우 느릿하게 붕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린 산박은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시은과 김각두와 함께 괴물 시체에서 나무 심장과 나무 힘줄을 적출하고, 살아있는 괴물을 마무리했다.

    ‘의외야.’

    김각두는 경상에 그쳤다. 방패 하나 없고 ‘양손 망치’에 소비 아이템도 최소한으로 끝낸 성기사가 경상에 그쳤다. 그렇다고 몸을 사린 것도 아니었다. 김연정에게 적이 도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장 위험한 줄타기를 한 것이 김각두였다.

    ‘A급 성기사로 판단을 새롭게 한다.’

    반드시 영입해야 할 놈으로 찍었다. 평판과 비교하면 실력이 좋았다. 일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빠지면 갑자기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사람이 김각두였다.

    ‘그렇기에 대우받지 못한 거겠지.’

    마가 낀 것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삶을 살았을 터다. 회유는 쉽겠지만, 김연정이라는 혹을 달아야 했다. 다만 산박은 그런데도 영입을 진행할 생각을 가졌다.

    ‘A급 인재는 적으니까.’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것으로 2레벨 던전 공략이 끝이 났다. 두 명이 죽었고, 한 명은 현실에서 죽게 될 것이었다. 포스코 타워는 네크로맨서를 죽인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그걸 감싸줄 사람은 없었다. 괜히 감싸 줬다가 한 사람이 포스코 타워에 진실을 이야기하며 돈을 요구한다면? 포스코 타워는 좋다구나 하고 그에게 보상을 줄 것이었다. 줄줄이 사탕으로 엮여 나가며 멱이 따일 것이었다.

    ‘하나 지킨다고 그렇게 할 수는 없지.’

    박쇠패는 어쩔 수 없었다.

    [레벨 업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사용자 태산박을 인식합니다. 필요한 정보를 출력합니다.]

    [던전 사용자 태산박의 존재를 특정합니다. 당신은 카르마의 선택을 받은 자입니다.]

    [2레벨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충분한 카르마를 획득했습니다. 레벨 업을 위해서 남겨놓을 수 있고, 자신의 수준에 맞는 새로운 주문과 기술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정체 대류의 진리’가 봉인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새로운 주문 하나, 새로운 기술 하나를 얻습니다. 이후에 수준이 오르면 자연스럽게 해금됩니다.]

    [‘썩은 과육 괴물’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죽였습니다. 생명신이 관심을 보입니다. 그녀는 당신이 야만신을 섬기기보다 자신을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선물을 받으시겠습니까?]

    “선물이 뭔지는 알 수 있나?”

    [알 수 없습니다.]

    “거부한다.”

    선물이 뭔지도 모르는데 야만신이 아닌 생명신의 라인을 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산박은 단숨에 이를 말하고, 던전 클리어를 한 대가로 주문을 택했다. 무작위 2레벨 드루이드 주문이 산박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푸른 새 변신(Blue bird transformation) 주문을 획득했습니다. 신비로운 대형 조류인 푸른 새는 바람과 물의 마법에 보너스를 부여하고, 1레벨 바람 주문인 윈드 팽(Wind Fang)과 물의 주문 워터 스프레드(Water Spread)를 한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흠.’

    산박이 인상을 찡그렸다. 새하얀 공간에서 자신의 감정을 확 드러냈다. 조류 변신이 썩 내키지 않아서였다. 일단 뼈 자체가 무르다. 공격당했을 때 훅 갈 수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게 조류 뼈였다. 그런 놈으로 변신해서 던전을 날아다니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내구력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개방형 던전을 굳이 정찰할 이유도 없었고, 특수 던전으로 바뀌었을 때는 썩은 가스층과 썩은 까마귀에 시달려야 했으므로 힘을 최대한 아껴야 했다.

    ‘윈드 팽.’

    바람을 송곳니처럼 적에게 날려 보내 상처를 주는 1레벨 주문이었다. 강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1레벨 던전에서나 쓸 만했다.

    ‘워터 스프레드.’

    이건 더 질이 안 좋았다. 그냥 물을 뿌리는 것에 불과했다. 작은 불을 끄기 위해서나 쓰는 정도였다.

    다만 사람만 한 키에 날개 길이는 그 두 배에 달하는 대형 새가 될 수 있다는 건 어찌 되었든 어느 상황에서는 쓸 만했다.

    ‘예를 들면…….’

    그렇기에 산박은 손바닥 뒤집듯이 발상을 전환했다.

    ‘현실에서는 쓰기 나름이지.’

    나쁘지 않았다. 다만 2레벨 던전 보상으로는 아까웠다. 도박 실패였다.

    그다음에는 진리 봉인에 대한 대가로 얻은 기술이 산박에게 들어왔다.

    ‘땅의 부름.’

    심플하지만 난해해 보이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 기술에는 어떤 드루이드의 편린이 존재했다. 그걸 이해해야지만 그 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다. 주문과는 달랐다.

    “후욱!”

    산박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토해냈다. 뜨거운 열기가 몸속에서 조금 피어올라 왔다. 뜨거운 사막의 바람을 거침없이 들이쉰 사람처럼 얼른 숨을 뱉어내기 바빴다.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고 추레한 로브를 머리까지 덮어쓴 드루이드는 맨발로 사막을 횡단했다. 까지고, 물집이 자리 잡히고, 피가 흘렀던 발은 기어코 땅을 불러낼 수 있었다.

    드루이드가 사막의 끝에 서서 그에게 다가오는 어린아이들 앞에 벌린 양팔을 하늘을 향해 올리자 땅이 솟아오르며 그에게 큰 기운을 줬다. 바짝 마른 나무 몇 그루밖에 없는 마을에 녹음이 퍼져 나갔다.

    ‘그 정도 수준까지는 못 가지.’

    그 단편적인 필름은 뚝뚝 끊겼다. 의도적으로 삭제되고, 편집당했다.

    2레벨 기술 땅의 부름은 땅이 솟아오르며 그 기운이 발을 통해서 체내에 스며들어 오는 기술이었다. 힘의 총량이 증가하고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기술이라서 대단히 희소한 기술이었다.

    ‘힘의 회복 기술은 보기 드문데.’

    대자연을 다루는 드루이드라서 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큰 어드밴티지였다. 총량 증가에 회복까지 가능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마지막 주문.’

    산박이 그것을 개봉했다.

    ‘불꽃두더지 파수병(Blaze mole sentry) 소환 주문.’

    ‘대장삵과 비슷한 소환 주문이다.’

    산박은 입술에 침을 묻혔다. 거기에 대장삵과 다르게 파수병이라고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전사를 소환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 여기서 소환해도 괜찮나?”

    [상관없습니다. 소환된 소환수 또한 해당 지하철의 바닥으로 이동됩니다.]

    산박은 곧바로 소환 주문을 사용했다. 허공에서 화염이 일그러지듯이 일어나며 그 균열에서 두더지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 갑옷 사이로 털이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갑옷은 전신을 가리고 있었지만 관절 틈마다 틈이 컸고, 체인 메일이 보였다. 대단히 촘촘하지 못한 체인 메일에서도 털이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반갑다! 나는 불꽃두더지! 용맹한 파수병이다! 하하하!”

    그가 가슴에 힘을 주고 몸을 부풀린 채 말했다. 어깨에 턱 걸친 할버드를 만지는 모습만으로도 베테랑으로 보였다.

    ‘키는 165. 하지만 체중이 제법 나갈 것 같다.’

    뚠뚠했다. 사람으로 치면 옆과 앞으로 툭 튀어나온 느낌. 천하장사 스타일이었다.

    “여긴 던전이 아닌데?”

    “어……. 시험 삼아서 소환해 봤다.”

    산박의 말에 그가 볼을 부풀렸다. 앞니가 툭 튀어나왔는데 실로 불만스러운 표정이 만들어졌다. 옴폭 들어간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말 그대로 이글거리며 아주 작은 불을 짧게 뿜어냈다.

    “그러면 안 돼!”

    “왜?”

    “난 현역 용광로 파수병이다! 그리고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서 널 도우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지하 연합의 용광로를 지키고! 크놀 대장장이들을 수호하는 용맹한 불꽃두더지 파수병이다!”

    그렇게 하면서 산박에게 할버드를 겨누었다. 어찌나 할버드의 간극을 잘 아는지 한 번에 산박의 목젖에 살짝 닿았다.

    “당장 날 역소환하도록! 꼭 필요할 때만 소환하라!”

    대장삵과는 정반대의 스타일이었다.

    “미안하다. 다음에는 전쟁터에서 보자.”

    “음!”

    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할버드를 회수했다. 산박은 단번에 그를 역소환시켰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묵직함이 담겨 있었다. 실로 든든한 파수병이었다.

    ‘나도 편하지.’

    그것으로 새하얀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새하얀 공간이 무너지면서 산박은 야만신의 석상이 마치 자신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석상이 무너지는 공간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현실에 돌아왔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법성 사제 김연정을 볼 수 있었다.

    “흐, 읍. 헉!”

    호흡이 대단히 불안정했다.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생명력이 바닥나서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두면 죽겠지.’

    김각두의 발목을 잡던 나약한 인간이 사라진다. 거머리 같은 삶이다. 김각두의 성공 가도를 위해서는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산박의 눈에 갈등이 서렸다. 하지만 고민을 그리 오래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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