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270)
  • 157화

    상황은 금방 끝이 났다.

    모두 팀이 달랐다. 그저 던전만 같이 공략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산박의 영향력은 이미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건 실로 무서운 일이었지만 그 ‘지배력’을 깨닫는 이는 없었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상태가 안 좋은 법성 사제 김연정을 보고 있던 대장삵이 하나의 의견을 산박에게 내비쳤다. 그는 용맹한 삵이었다.

    “저 인간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처치가 필요해.”

    “어떤 거? 더 많은 힘을 소비하라고? 그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2레벨 전투는 주문이 필수였다. 거기에 ‘썩은 가스층’의 내부에 들어와서 치료수 또한 꾸준히 소모하고 있는 편이었다. 의료 전문가도 없었기에 무식하게 힘으로 다스려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연정을 위한 치료는 불가능했다.

    “그런 게 아냐. 아까 말했다시피 그렇게 하면 끝이 없어. 체력을 회복하려면 휴식밖에 답이 없어.”

    그 말에 산박이 흥미로워하는 눈을 했다. 이에 대장삵이 용맹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내가 책임지고 검은 까마귀가 울기 전에 워터 샷으로 죽이겠다.”

    “가능한 일인가?”

    “둔한 인간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지.”

    산박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산박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면 아껴야 해.”

    소중한 패가 될 수 있었다. 그런 패를 이런 곳에서 쉽게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김연정은 그 정도로 중요한 인간이 아니었고, 대단한 후방 직업도 아니었다. 물의 마법사 대장삵으로 능히 대체할 수 있었다.

    ‘보스 몬스터와 싸울 때 쓰면 좋다.’

    생각과는 다르게 산박은 딴소리를 했다.

    “한두 번은 써먹을 수 있겠지만, 여러 번 쓰면 더 큰일이 날 수도 있잖아. 나타나는 주기가 잡으면 잡을수록 빨라지면 어쩔래?”

    대장삵이 수긍했다. 일이 그렇게 간단히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썩은 까마귀를 처리하니까 까마귀 여러 마리 튀어나온다면? 더 큰일이 날 수 있었다.

    “그 모든 걸 부상자를 두고 진행하기에는 리스크가 크잖아?”

    “내 말은 잊어라. 확실히, 지금 리스크를 안고 갈 수는 없겠지.”

    다른 이들이 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피를 보고 죽음을 마주하는 전사였기에 산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생명은 한번 꺼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힘들어도 착실하게 나아간다면 여길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산박이 팀원들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 뒷말은 쏙 삼켰다.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 여럿 포기하고 버티기에 돌입해야 한다.’

    얼마나 죽을지 몰랐다. ‘특수 던전’임을 알았다면 이렇게 쉽게 썩은 가스층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터였다. 이미 너무 와버려서 되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최악을 피하려면 여기서 멈춰야 하지만…….’

    그건 김연정을 죽이는 일과 다름없었다. 그 결정을 다른 이들이 수긍하기는 어려웠다. 당장은 ‘명분’과 ‘논리’를 통해서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조금만 안 좋은 선택을 해도 거부감을 드러낼 터였다. 이를 지위로 혹은 무리로 파벌을 만들어 찍어 누르는 건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지금 걸음을 멈추고 버티기에 들어가서 던전이 스스로 붕괴하는 걸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걸어왔음에도 썩은 가스층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는데 계속 나아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다만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문제지.’

    결국 산박이 할 수 있는 건 지금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보존하여 이들이 불안감을 느꼈을 때 그 불안감을 이용해서 버티기로 전략을 바꾸는 게 전부였다. 항상 ‘때’가 있는 법이었다.

    “제기랄.”

    천을 몇 번 빨아 다시 코와 입을 막으면서 갑균이 인상을 썼다. 걸어가도 걸어가도 끝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언제 여길 벗어날 수 있을지 몰랐다. 사람 키의 두 배 넘게 정체되어 있는 가스층은 먼 곳을 보여 주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전투하고, 나무 심장과 나무 힘줄을 적출해 배낭에 담았다. 으레 있는 과정이었지만 전과 다르게 배낭은 그냥 버려뒀다. 은폐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마음이 크게 지쳐 있었다.

    날이 갈수록 보급품도 소모되고 배낭도 사용됐기에 점점 몸이 가벼워졌지만 그와 반대로 무언가 거대한 불안감이 그들을 짓눌렀다. 전투는 이제 숙련되어서 완벽하게 정착되었다. 그저 썩은 과육 괴물, 그것도 ‘충격 과육’만 지닌 놈들이었기에 적응이 쉽게 가능했다.

    이 덕에 산박은 이 특수 던전의 음흉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는 ‘미로’로 되어 있었다. 미로는 벗어날 수가 없다. 버텨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내실이 부실한 던전 공략 팀이라서 밖을 보기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산박은 이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짜증 난다.’

    그렇기에 2레벨 던전의 현 상황이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시에 ‘던전 사용자’들이 누구보다도 2레벨 전담 팀을 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무분별한 하청이 2레벨 던전에 만연했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자기 밥벌이라서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사들조차도 의료계의 문제에 대해서 입 뻥긋하기 힘들다. 하물며 괴물들 피 묻혀 가며 백정 짓을 하는 던전 사용자는 더더욱 쭈구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레벨 던전 사용자는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나 몰라라 하는 것처럼 기업들로부터 대우받기 바빴다.

    “다른 방법을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떠세요?”

    산박이 가볍게 물어보았다. 그저 흘리듯이 육포를 먹으면서 내뱉었다. 말 그대로 식사 시간에 짧게 하는 잡담 같은 말투였다.

    “어떤 방법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용걸섭이 흥미를 보였다. 김연정은 계속 업고 다녀서 그런지 제법 체력이 돌아온 상태였다. 반면 일행들 전체적으로 정신적 피로감이 충분히 누적된 상태였다. 다만 그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라는 소리지.’

    “글쎄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다른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산박은 그걸로 대화를 끝냈다. 불만은 있어도 버틸 만하면 침묵하기 마련이었다.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산박은 아주 부드러운 모습을 내비쳐 주며 이들이 마음속의 말을 내뱉기 쉬운 환경을 만들었다.

    그 대화로부터 다시 하루.

    “이거, 더는 가면 안 되겠는데요, 형님.”

    용갑균이 불안감에 용걸섭에게 말했다. 걸섭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끝이 없다.’

    산박이 며칠 전에 깨달은 것을 용걸섭, 용갑균 형제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거 가스층에서 너무 오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들…….”

    그들로부터 시작된 목소리는 자잘자잘한 불만과 불안에 대한 것뿐이었지만 산박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짝짝!

    산박이 박수를 두 번 쳤다. 이목이 쏠렸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던전 보스… 잡지 않겠습니다.”

    “예?”

    몇몇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충격적인 발표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미 그런 생각을 가졌던 용갑균과 용걸섭은 달랐다.

    지능이 높은 시은도 여기까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망했다.

    ‘이게 끝이야? 아쉽네.’

    시은은 던전 공략에는 흥미가 없었고 언제 김연정을 버릴지, 그녀가 언제 어떤 죽음을 맞이할지 재밌는 장난감을 보듯이 상황을 관망했다. 파괴적인 이시은의 깊은 내면은 이런 피 말리는 상황, 그 끝은 낭떠러지뿐인 행군을 즐기고 있었다.

    고로 그녀는 불만이 없었다. 모두가 이 상황을 불안해하고 불편하게 받아들였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순간이 계속되기를 원했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 파멸을 원하는 파괴의 존재였다.

    “던전이 스스로 붕괴할 때까지 버티겠습니다. 전사와 언데드를 이용해서 벌목을 진행해 주세요. 최대한 많은 장애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 하지만 태 사장님!”

    김각두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연정은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 모르는데 여기에 계속 있으면서 썩은 가스를 맡는다? 밖으로 나가더라도 체력 스탯이 낮아질지도 몰랐다.

    “그럼 계속 가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산을 오를 희망을 품어야겠습니까?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어차피 다른 팀이잖아요?”

    같은 던전을 공략해도 서로 소속된 곳은 달랐다. 남명겸이 죽어도 산박의 커리어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의 팀원은 현재 이시은뿐이었다. 기가 막힌 통계였지만 그게 가능한 것이 현실이라는 놈이었다. 소속이 다르면 결국 느그 팀원이었다.

    “…….”

    김각두가 주변을 살폈다. 시은은 침묵한 채 관망하고 있었다. 그녀가 관망함으로써 남은 네크로맨서는 김다은뿐이었다. 그리고 김다은은 지금까지 팀 내의 문제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제대로 내뱉은 적이 없었다.

    김준서는 죽었다. 용걸섭과 용갑균은 냉정하게 산박의 편을 들고 있었다. 이제는 멈춰야 할 때였다.

    남명겸도 죽었다. 박쇠패는 내보냈다. 당연히 김연정과 김각두는 팀 내 영향력이 없었다. 그들은 하청의 하청의 하청을 받은 2인 팀이었다. 결국, 그가 고개를 숙였다. 눈을 깔았다.

    김각두가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 산박은 말을 아꼈다. 그리고 그가 이내 스스로 숙이자 다시 똑같은 명령을 했고, 언데드와 전사들은 벌목을 시작했다.

    “김각두 씨.”

    산박이 각두를 불렀다.

    “예!”

    그가 빠릿빠릿하게 달려왔다.

    “전 연정 씨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각두는 양손 망치를 사용하고, 든든한 전사였다. 거기에 청철 문장도 지니고 있었다. 김연정이라는 족쇄를 달고도 2레벨 던전에 도달했다. 그것만으로도 김각두는 포섭할 가치가 있었다. 동시에 몇 번이고 전투를 같이했기에 김각두의 가치를 산박은 잘 알고 있었다.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력.’

    그는 신성 주문을 다루는 자였고, 김연정 또한 법성 사제였다. 자연스럽게 다른 전사들은 하지 못하는 위험한 짓을 해대었다. 이런 무모한 자는 찾기가 어려웠다. 죽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내 품으로 가져온다.’

    철저한 환경 속에서 무모한 싸움을 하게 만든다면 강력한 쐐기가 될 수 있었다. 산박이 그를 챙기는 이유였다.

    그는 또 시은과 다은에게 다가갔다.

    “나뭇가지를 모아서 날카롭게 깎으세요.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으시죠?”

    “네.”

    “…예.”

    다은이 조금 뒤늦게 대답했다. 그런 다은을 산박은 썩 좋지 않은 눈으로 봤다. 주도적이지 못한 인간이었다. 실력은 그나마 이류는 됐지만 능동적이지 못하기에 던전 사용자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대장삵! 썩은 까마귀를 최대한 처리해라.”

    그렇게 말한 산박은 품에서 물의 연어를 불러냈다. 그리고 거점으로 삼은 곳의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흙으로 양옆을 다지고 나서 물의 연어로 하여금 물을 뿜어내게 했다. 거기에 산박의 힘은 소모되지 않았다. 물의 연어가 지닌 힘이 중요했다.

    콸콸콸.

    제법 커져있는 물의 연어는 물을 한껏 토해냈다. 이를 이용해 주변의 흙을 진흙으로 만들어서 턱을 더욱 높게 만들었다. 이 작업을 꾸준히 행했다. 거점을 빙 두르는 것은 어려웠지만 후방으로 삼은 곳을 더욱 견고하게 할 수 있었다. 소형 해자인 셈이었다.

    누군가 접근한다면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물의 밀도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붙잡는 듯한 감각 때문에 최소한 비틀거리기는 할 터였다.

    촤아악!

    “껙.”

    거센 물소리와 뭔가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삵이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나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딱 세 마리까지 썩은 까마귀를 죽였을 때, 일행은 최소한의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통나무가 겹겹이로 쌓여있는 곳 사이로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밖을 향해서 비스듬하게 솟아나 있었다. 급하게 만든 탓에 날카로운 말뚝은 하나같이 볼품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가 달려오는 속력만큼 피해를 줄 것이라 기대가 됐다.

    “꿀꺽! 꿀꺽! 꿀꺽!”

    대장삵이 주는 치료수를 모두 거침없이 집어삼켰다. 김연정은 마약처럼 이 치료수를 거세게 갈망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절박하게 마셨다. 김각두가 자신의 분까지 그녀에게 양보할 정도였다.

    “두고 보실 거예요?”

    “네.”

    최고의 상황은 김연정과 김각두 모두 살아남는 것이었다.

    까악!

    까악!

    까마귀가 한 마리, 두 마리 계속해서 나타났다. 대장삵은 요격을 일찌감치 포기했는데, 산박이 며칠 전에 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통할 수는 없는 법이지.’

    거대한 전투가 그들의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후우우……. 후우우…….”

    김다은이 심호흡했다. 그녀의 안색은 크게 안 좋았다. 썩은 까마귀들이 주변에 수백 마리가 넘게 자리 잡아서였다. 그녀는 조금만 건드려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정신 차리세요.”

    산박이 그녀의 양어깨를 강하게 잡아서 흔들었다.

    “헉. 네, 네.”

    김다은이 식겁한 표정을 짓다가 빠르게 안정되었다. 약간의 충격이 큰 도움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