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그렇게 또 하나의 진리를 빼앗긴 산박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 눈만은 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건 이용할 수 있어.’
빼앗겼지만 그 잔재는 남아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하지만 산박은 그 이면에 누군가가 개입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의심이 가는 ‘신’은 있었지만, 마음속에만 간직했다.
‘레서 컨벡션(Lesser Convection)이라고 해야 하나.’
주문의 위력을 1할 정도 올릴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자신의 몸에 적용할 수 없어서였다. 봉인당한다는 건 그러한 걸 의미했다. 그렇기에 다른 곳에 쓰여야 했고, 이는 주문과 기술이 될 수 있었다.
‘기술과 주문의 위력 증가는 나한테 큰 이득이 된다.’
특히 현재 장비하고 있는 ‘영혼 불꽃 상체’와 ‘영혼 대지 하체’ 모두에 중복 적용이 가능하다는 게 일품이었다. 기술로서는 ‘영혼 자극’을 통해서 증폭된 영혼이 들어가기에 증폭되고, ‘갈래 불꽃’이나 ‘작은 대지 골렘 소환’의 주문력이 10% 증폭된다. 고로 10%+10%가 되어서 적용된다.
‘썩 내키지 않는 기분이지만…….’
점점 속박되는 기분이었다. 공짜로 무언가를 받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 작은 잔에 흐름을 만들어 소수대파도의 원리를 남에게 보여주는 것과는 달랐다. 확실하게 전투력에 도움이 되고 힘의 수준을 증폭시키는 레서 컨벡션은 음흉한 뒷거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쓴다.’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던져준 것이니 나중에 그걸 빌미로 삼아봤자 명분이 없었다. 빼앗아도 관계없었다. 나중이 되면 정체 대류의 거대한 생명력이 해금되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일행이 일어나서 억지로 밥을 해 먹고 치료수로 목을 축이며 썩은 가스로 인해 소모된 체력과 생명력을 회복하고 있을 때, 박쇠패가 애걸하고 부탁하며 구걸했다.
‘자고 일어났으니 감정이 싹 사라졌겠지.’
남명겸을 생각하는 건 하루에 불과했다. 잠을 자고 난 뒤 박쇠패에게는 전과는 다르게 짓밟으면 짓밟는 대로 혀를 헥헥거리는 약자의 모습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죽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적패 네크로맨서 두 명과 A급 전사 두 명을 설득한다면 박쇠패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었다. 김준서가 남명겸을 위해서 희생했다. 영웅 심리를 자극하는 스토리도 하나 뽑아낼 수 있었다.
“전, 전 그냥 모른 채 살아가겠습니다! 그냥 준서 씨를 대단한 사람으로 만듭시다! 예?! 예?!!”
그가 외쳤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짐을 꾸리기 바빴다. 그는 덤빌 생각도 없었다. 전의를 상실했다. 싸울 의지를 만들었던 전날의 분노는 싸늘하게 식은 재가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언제나 때가 있는 법이지.’
벌벌 떠는 그에게 누구도 온정을 베풀지 않았다. ‘책임’을 지기 싫어서였다. 밖으로 나가서 누가 입을 털면? 그걸로 끝이었다.
“사, 사장님! 태 사장님! 어제 그 제안, 받아들이게 좀 도와주십시오!”
박쇠패가 산박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산박은 매정하게 발을 걷어차며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미안하지만 박쇠패 씨, 인생이라는 길은요, 지나간 버스는 결코 돌아오지 않아요. 그냥 비슷한 거, 다른 거, 그런 것만 정류장에 설 뿐이에요.”
한번 지나간 버스는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비슷하지만 다른 버스가 오거나, 혹은 오지 않을 뿐이었다. 그리고 산박이 가져온 차에 타지 않은 건 쇠패였다.
“미안하지만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잘해 보셔야 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들 말하지 않습니까?”
“으흐, 허허허허헝! 제바아아알! 내가 가진 것 모두 줄게! 저 목돈이 있습니다! 3백만 원입니다! 다 드리겠습니다! 받으실 분? 돈 가져가시면 됩니다!”
그가 점점 이성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자 산박은 배낭을 고쳐 멨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에 산박의 제안을 싫어했던 성기사 김각두는 거리까지 두고 김연정의 손을 잡아당기며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박쇠패는 버려졌다. 던전에서 먹을 최소한의 식량은 내어줬다. 치료수도 인도적으로 가죽 배낭에 담아서 두둑하게 줬다. 손해가 있었지만 그래도 떨쳐내는 게 먼저였다.
‘밖에 나가면 그렇게 말해야 하니까.’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쉬운 게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밖에 나가서 진술할 때 편한 진실을 만들어야 했다.
박쇠패는 공략 팀에서 완전히 걷어차였다. 그의 흐느낌은 걸어갈수록 줄어들어 갔다.
산박은 박쇠패에 대한 미련이 하나도 없었다. 버러지같이 배경 하나 없으면서 기회도 골라서 잡는 병신이었다. 그가 그럼에도 그의 정류장에 선 것, 버스 하나를 몰아서 세운 건 당연히 김각두와 A급 전사 두 명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냉철하지만 살아갈 구멍을 마련해 주는 산박의 모습은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그의 위치에서 해줄 건 모두 해줬다. 쇠패, 그걸 걷어찬 건 너다.’
모두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채 굳세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피해자인 박쇠패는 가해자로 돌변했다. 자기 복을 자기가 걷어찬 놈이 되어 버렸다. 무서운 선동이었다. 선동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산박의 진짜 의도를 모르는 이가 대다수여서였다.
‘아깝다.’
시은은 박쇠패가 저렇게 방치된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가 범처럼 달려들어서 준서를 넘어뜨리고 단검으로 미친 듯이 찌를 때, 그 몸을 헤집을 때 내는 준서의 헛바람 소리는 시은의 귀를 간지럽히는 천상의 소리로 들렸다. 그 여흥이 이렇게 쉽게 끝난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조금 더 자극적으로 끝났으면 좋았는데.’
예를 들면 산박이 직접 박쇠패를 죽인다. 그런 장면은 실로 재밌을 터였다. 하지만 산박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리가 없었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환상 속의 이야기였다.
그는 2레벨 던전 사용자였으며 1레벨 던전 팀 하나와 2레벨 공략 팀을 만들려고 하는 던전 기업 사장이었다. 다른 이에 비해서는 이미 성공 가도를 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진 자는 몸을 사리는 법이지.’
산박이 지금 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팀은 침묵 속에서 걸어갔다. 그 행군 속에서 산박은 성기사 김각두에게 다가갔다.
“각두 씨.”
“아, 예!”
그는 깍듯하게 산박을 맞이했다. 절로 걸어가는 속도가 줄었다. 그 대신 다른 이가 사주 경계를 맡았다.
“무슨 일로…….”
“던전 일 끝내면 저랑 같이 일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전 다른 기업과는 다르게 하청으로 사람 굴리지 않습니다.”
“예? 저를요?”
“네. 당신을요. 나가면 명함 드릴 테니 가져가세요.”
“전……!”
각두의 말을 산박이 끊었다.
“나중에 말씀해 주세요. 지금은 던전 공략 중이니까.”
기대심 하나 심어주고 산박은 그를 다시 앞으로 밀어내며 후방으로 위치를 옮겼다.
걸어간 지 세 시간. 그들은 휴식을 했다.
“생각보다 긴데요? 산은 보이지도 않고요.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인지 걱정일 정도입니다.”
동생 용갑균이 우려를 표했다. 걱정스러운 말이었다.
“저희가 생각을 잘못한 듯합니다. 여기는 특수 던전. 이미 다른 던전이라고 봐도 됩니다.”
산박이 그 말을 받았다.
“충격 과실만 있다는 것부터 좀 그렇긴 그랬습니다만, 설마 지형까지 바뀐 걸까요?”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시은의 말에 산박은 단언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특수 던전은 던전 사용자를 죽이기 위한 장치라고 할 정도로 간악했다.
‘대산은 신기루, 환영일지도 모르지.’
나쁘지 않은 추측이었다. 하지만 확신은 불가능했다. 일단은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까악! 까아아악! 까악! 까아아아아아아악!”
“뭐야? 까마귀 소리가 무슨?”
미친 듯이 발작하는 까마귀의 울음소리에 너도나도 휴식을 멈췄다. 까마귀는 썩어 있었는데 날개만 성했고 앞가슴이 푹 꺼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썩은 물이 고여 있었다. 그런 까마귀는 소리를 내지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쐐액!
산박이 슬링해서 까마귀를 단박에 떨구었다. 놈은 찍소리도 못 하고 떨어져서 죽어 버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쿵, 쿵! 쾅!
쿵쾅!
굉음이 들려왔다. 썩은 과육이 모두 충격 과육으로 이루어진 ‘썩은 과육 괴물’이 다가오고 있는 소리였다. 일행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썩은 가스층이 잔뜩 낀 이곳에서 얼마나 지낼지 모르는데 전투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도망쳤다.
‘썩은 까마귀. 경보 같은 건가.’
전투를 일정 시간 하지 않으면 마주치는 듯했다. 그 덕에 다시 휴식하는 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조금밖에 못 쉬고 또 뛰었기에 체력 손실이 더 컸고, 그렇기에 더 오래 쉴 수밖에 없었다. 숨을 돌리고 치료수로 목도 축였다. 달리면서 호흡을 많이 해야 해서 더 많은 썩은 가스를 들이켰다.
‘환경이 적인가. 며칠을 헤맬지 모르겠다.’
간담이 서늘했다. 나중이 되면 대장삵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산박이 사람들을 모았다.
“검은 까마귀를 보셨을 겁니다.”
“예. 아무래도 전투를 안 하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뛰고 멈추고를 반복하면 쉽게 지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반면 꾸준히 걷다가 적과 마주치면 전투는 불가피하죠.”
어느 쪽이든 선택하기 힘들었다. 그 빡빡함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끊어져 버리는 고무줄과 같았다. 자신이 살얼음판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근차근 천천히 전투를 이행하면서 벗어나는 게 가장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 버틸 수 있을지 누가 압니까?”
“그럼 반대로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게…….”
“전투할 체력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 적과 마주친다면요?”
“그럼 해결법이 뭡니까?”
산박의 반박에 용갑균이 목소리를 높이자 형 용걸섭이 그를 잡아당겼다.
“못 하는 말이 없어? 조금 침착해.”
“죄송합니다.”
그가 사과했다. 산박은 그 사과를 받아들여 주고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특수 던전’에서 살아남는 법이었다. ‘검은 까마귀’의 존재만으로도 썩은 가스층은 위험한 곳이 되어 버렸다.
‘지구력 싸움.’
“산 위에서 봤을 때 반대편 산은 제법 가까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거의 반나절을 걸었는데도 아직도 보이지 않고 있죠. 고로, 저희들이 확실하게 속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행군을 해도 위험에만 빠질 뿐입니다.”
“그럼 남은 건 천천히 나아가는 것뿐이군요.”
“똑같이 최악이지만 그게 가장 나은 방법이죠.”
산박이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세 명이나 줄어든 상태였다. 그렇기에 전력은 전과 달랐다. 지금도 막강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화한 건 사실이었다.
“다행이라면 시야가 나쁘다는 점이죠. 그래도 썩은 과육 괴물은 척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희는 잘 숨을 수 있고요. 그렇기에 검은 까마귀가 있는 겁니다.”
장점도 이야기했다.
조심만 하면 ‘나무’에 불과한 놈들을 사전에 파악 가능했다. 즉, 검은 까마귀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것과 같았다. 이를 이용하면 불침번 없이 충분한 휴식을 능히 취할 수 있었다. 또 대장삵은 잠자면서도 귀를 쫑긋 세울 수 있었다. 훌륭한 첨병이었다.
“짐은 공통 분배하겠습니다. 많이 짊어지고 있는 김연정 씨와 김각두 씨는 배낭을 몇 개 나눠 주세요.”
“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두 분이 느려서 이동 속도도 느린 거 아닙니까. 행군은 가장 느린 사람 발만큼 나아갑니다. 그것도 모르십니까? 입 아프게 하지 마세요. 평균 속도를 최대한 높여야 하니까.”
“죄송합니다.”
그 누구도 산박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전방에 선 김각두가 뒤처지면 뒷사람도 높였던 속력을 줄여야 했다. 행군이 길어지면 그것마저도 큰 체력 손실이었다. 멈칫, 멈칫하는 행동은 근력의 사용을 극대화시키기 좋았다. 논리 있는 명령에 딴소리하는 사람도 없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부터 시작된 변화는 전투에서도 이어졌다. 평상시에 산박의 입김이 영향력을 발휘했기에 자연스럽게 전투에서도 그의 명령을 듣게 되었다.
“우로부터 1, 2번에게 주문 시전하세요.”
트위스트 스네이크가 순번대로 쏟아져서 달려오는 썩은 과육 괴물을 착실하게 붙잡고 과육을 떨어뜨렸다. 땅과 부딪친 썩은 과육은 그대로 굉음을 터트리며 충격파를 쏟아냈다.
‘갈래 불꽃.’
산박의 상체 옷에서 쏟아지는 불똥이 허공을 날았고, 썩은 과육에 들러붙어서 태웠다. 표면이 타들어 가자마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썩은 과육이 터졌다. 이는 거대한 연쇄 반응을 일으켜 냈다.
‘이거지.’
원거리 수단을 돌파한 썩은 과육 괴물을 기다리고 있는 건 두 마리의 언데드와 단단하게 차려입은 전방 직업군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