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8/270)
  • 148화

    산박은 인천으로 향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장비를 확인했다. 모두 잘 맞춰져 있었다.

    ‘가야 할 곳은 원인재역.’

    포스코 타워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이었다. 원인재역은 ‘판타지 쇼크’의 시작점이기도 했고, 이제는 계속해서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던전이 생성되고 있어서 던전이 없는 지하철역도 폐쇄 절차가 이루어져 있었다. 세상의 지하철역과 갱도 등 지하 공간이 제법 넓고 깊은 곳은 점점 던전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산박의 눈에 시은이 보였다.

    ‘정말 근면하고 성실하단 말이야.’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걸 산박이 깨닫지는 못했는데, 그만큼 시은의 연기는 대단했다.

    또한 ‘던전 기업’의 경우 매우 불규칙한 일정을 지니고 있었다. 평범한 직장이 아니기에 그녀가 속이기에 충분했다. 계속 쳇바퀴처럼 돌아가지 않았고, 출근도 자유였다. 보고할 게 있으면 보고하는 일정을 잡는다. 산박 또한 자주 사무실에 들락날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은 사실상 강합과 경리가 사무적 일을 보기 위한 곳이었다. 정부 지원 사무실이 아니라면 구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또 그런 곳에서는 시은이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운동은 살인에 대한 대비와 충동 억제라는 목적이 있었지만 기업 생활은 시은에게 스트레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인천 네크로맨서에 완전히 몸담지 않고 소규모인 옥시모론에 남은 것만 봐도 그랬다. 회색분자. 그게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포지션이었다.

    “많이도 들고 오셨네요, 사장님~”

    시은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산박의 귀로 들려왔다. 그녀는 입을 조금 벌리며 혀를 굴렸다. 녹색 알사탕이 보였다.

    “사탕 하나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산박은 시은의 장비를 살폈다. 불편한 통로브는 척 봐도 비싸 보였다. 거기에 마법 석궁을 손에 쥐고 있어서 로브에서 툭 튀어나와 있었다.

    “왜요?”

    “팀 지급 물품은 가방에 다 있죠?”

    “네. 공짜로 주는 건데 다 챙겨야죠. 그것보다 들으셨어요? 호주에 산불이 몇 달째…….”

    “가슴 아픈 일이더군요.”

    “코알라 보려고 꼭 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너무 아쉽더라고요.”

    “예?”

    “네?”

    조금 핀트가 나가 있는 그녀의 말에 산박이 갸웃했다. 이에 시은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절로 미소가 번지고, 조금 간지러운 분위기가 확 피어올라 왔다.

    “안녕하십니까!”

    그 사이에 남녀가 끼어들어 왔다. 모두 네크로맨서 같은 복장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시은의 로브와 똑같은 걸 입고 있었다. ‘트위스트 스네이크 로브’는 인천 네크로맨서가 이번 연도에 지원하는 적패 네크로맨서에게 주는 로브였다.

    ‘그 덕에 값이 확 뛰었지.’

    다른 사람만 피해를 본 셈이었다. 큰 놈이 움직이면 작은 놈이 치이기 마련이었다. 주식에서 개미가 승리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시은이라고 해요.”

    “알죠, 알죠! 압니닷!”

    남자 한 명은 대단히 소란스러웠다. 남자의 이름은 김준서. 여자의 이름은 김다은이었다. 둘은 특히나 시은의 눈치를 많이 봤다.

    같은 적패 네크로맨서라도 대우가 달랐고 평판이 달랐다. 그중에서도 이시은은 떠오르는 적패 네크로맨서, 다크호스나 다름없었다. 어떤 곳에도 연줄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회유해서 버림 패로 쓸 만했다. 쓰고 버리기 좋으면서 가지고 있을수록 도움이 된다. 최고의 패였다.

    하지만 시은은 아직 라인을 정하지 않았다. 권력욕이 없다고 여겨지며 포스코 타워, 모든 네크로맨서에게 이득이 될 수 있도록 연구 네크로맨서로 취급하자는 의견도 윗선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들과는 나아갈 길이 다른 여자였다. 굽신거리며 눈치를 보고 어떻게든 좋은 관계로 남게 될 수 있다면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호들갑을 떠는 김준서라는 젊은 남자와는 다르게 김다은은 썩 적극적이지 못했다. 다만 눈치를 보는 건 매한가지라서 오히려 이쪽이 더 피곤해 보였다.

    “태산박입니다. 옥시모론 던전 기업의 사장입니다.”

    그가 명함을 건넸다. 두 사람 모두 명함을 받았지만 주의 깊게 보지 않고 지갑에 넣었다.

    ‘운 좋게 포스코 타워에 줄을 댄 놈.’

    ‘시은 씨 덕분에 이 사람은 탄탄대로를 걷겠네.’

    산박의 포지션은 콩고물 얻기 딱 좋았다. 시은을 데리고 있어서였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는데, 시은은 겉으로는 인정, 은혜, 선한 베풂을 논하며 옥시모론 기업에 남아 있었다. 따뜻하고 보기 좋은 것이지만 그것도 ‘돈’이나 ‘이권’이 얽히면 질투가 나는 법이었다.

    두 명의 네크로맨서는 명백하게 산박에게 질투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얻지 못한 질 좋은 동아줄을 운 좋게 얻었기 때문이었다.

    ‘운 좋은 사장 놈.’

    특히 준서는 대놓고 무표정하게 산박의 명함을 받아 들고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산박은 그걸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한 번 보고 말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지금 시각이 몇 신데.”

    “아직 시간이 남지 않았습니까.”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저희들이 갑인데. 건방진 하청 놈들, 왜 그런 꼬라지를 하는지 알 만하다니까.”

    준서가 불평불만을 내놓으며 아직 오지 않은 이들을 욕했다. 그러고는 거기에 누구도 답하지 않자 괜히 불편해져서는 담배를 피우러 떠났다.

    ‘던전 사용자가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담배. 미친놈이군.’

    후방 직업이기에 선두에 서지 않아 안전하다고 여기는 놈들은 어리석다. 후방 직업이 더더욱 위험했다. 강한 냄새 때문에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전방 직업이라면 혼자서 그 위기에 대처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네크로맨서는 아니지.’

    어지간히 전투에 재능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허무하게 죽을 수 있었다. 당장 태권도장에 들러서 대련하는 걸 조금만 구경해도 ‘초심자’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노리는 돌려 차기에 수십 번 당하고 나서도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젬병이다. 모든 것이 재능이었다. 공부도 재능이고, 싸움도 재능이다. 세상의 대부분 것들은 모두 재능을 요구하고 있었다.

    ‘노력하면 닿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에는 아쉽지.’

    자기가 잘하고 즐기는 것을 해도 아까운 인생이었다. 산박도 담배를 할 줄 알지만 던전 공략을 앞두고는 피우지 않았다. 모든 건 던전 공략 후에 즐길 뿐이었다.

    준서가 방방 뛰면서 몇몇 곳에 전화를 찔러 넣었다. 대장질하는 게 썩 보기 안 좋았지만 산박은 딱히 뭐라고 경고를 하지는 않았다. 그럴 가치가 김준서에게는 없었다.

    곧, 서둘러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좀 빨리 옵시다. 지킬 건 지키셔야지.”

    대놓고 하청 주제에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직책이 높은 사람이나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던전 공략을 같이해야 하는 처지였다.

    마지막 선은 지키는 모습에 산박은 기가 막혔다.

    ‘어리석다.’

    사람의 선은 그날그날 다르다. 만약 그 선이 똑같다면 그건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다. 기계라면 모를까. 인간은 감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딱 체면치레로 서둘러 잔소리를 끝낸 것만 해도 김준서가 얼마나 대장 짓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두 명이 A급 전사로군.’

    잔소리를 일찍 끝내고 드잡이질도 안 했다. 사과하니 솔직하게 바로 받아줬다. 굳이 서로 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여기기보다는…….

    ‘준서가 꼬리를 말았다.’

    얼핏 보면 갑질 한번 하면서 기선을 제압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산박이 보기에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 이면에 있는 작은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말 말 많이 들었습니다, 이시은 적패 네크로맨서.”

    “반갑습니다. 포스코 타워 2레벨 의뢰를 그렇게 잘 받으신다고 말씀 들었어요.”

    준서에게 사과한 두 명은 서둘러 이시은에게 다가가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한 뒤에 인사를 나누었다.

    “전사 용걸섭, 이쪽은 제 동생인 용갑균이라고 합니다. 둘 다 전사입니다.”

    “친동생분이신가요?”

    “예. 하하하, 그래서 남들보다 더 확 튀죠. 의뢰도 더 받을 수 있고!”

    형 용걸섭이 너스레를 떨었다. 시은은 산박을 소개해 줬다. 절로 시선이 모였다.

    “여기는 제가 몸담은 팀의 사장님. 1레벨부터 같이했어요.”

    “잘 부탁합니다. 태산박입니다.”

    서로 빠르게 하지만 훈훈하게 인사를 마무리했다. 시은으로부터 이미 들었던 자들이었다.

    ‘쌍둥이 전사.’

    인천 네크로맨서들의 든든한 2레벨 전담 의뢰 팀이었다. 두 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혈육 관계다. 이만큼 안정적인 구도도 없었다. 피가 없는 것보다는 피가 있는 게 나았다.

    ‘하지만 인원이 부족하지.’

    이렇게 모여도 여섯 명이었다.

    “다른 사람은 연락 없습니까?”

    준서의 말에 용걸섭이 냉큼 대답했다.

    “지금 바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차가 막힌다는데 제가 당장 전화해서 다그치겠습니다.”

    “예. 알아서 하세요. 하하.”

    그 말에 걸섭은 몸을 돌렸다. 바로 똥 씹은 표정을 짓고 냉큼 스마트폰을 조작해서 상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어, 나야. 왜 이렇게 안 와? 지금 다 와있어! 최대한 빨리 와! 지금 시간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아니, 사장님. 약속 시각이 아직 남았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다 기다리는데 약속 시각은 무슨! 일찍일찍 와야지! 이래서 믿고 맡기겠어? 하던 것보다 더 해줘야 일을 맡기지.”

    ―에효. 예, 예. 갑니다! 여기 사거리 하나만 지나면 됩니다.

    “빨리 와요! 빨리! 내 목도 간당간당해!”

    ―예, 예!

    걸섭은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었다. 이 정도는 해야 저 병신 같은 젊은 꼰대 새끼를 만족시킬 수 있을 터였다. 실제로 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했다.

    ‘역시, 난 대단하다니까.’

    자신의 말 한마디에 사람의 태도가 확확 달라지는 건 실로 큰 우월감을 줬다. 잘못되고 비틀린 지도력이었다.

    곧 용걸섭에게서 하청을 받은 주술 검사 남명겸과 마검사 박쇠패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들은 한 짐을 싸고 있었는데, 척 봐도 다른 이들보다 많은 배낭을 가지고 있었다. 하청의 하청이니 당연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그래. 여기 여기 이 분들이 이번에 오퍼 넣으신 김준서, 이시은, 김다은 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특히 준서는 이를 놓치지 않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이 스물여섯 살 처먹은 놈이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돈도 술도 주지 않고 떠드는 모습은 싸대기를 그냥 양쪽으로 팍팍 치고 싶을 정도로 밉상이었다. 산박은 그 모습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내가 2레벨 던전에 굳이 가지 않고 있는 이유.’

    바로 저런 모습 때문이었다. 2레벨 던전의 최소 기준을 만족하려면 적어도 천만 원을 투자해서 풀 장비를 갖춰야 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똑같이 풀 장비를 갖춘 이들이 많이 잔류하고 있어서였다. 3레벨로 가는 길이 멀기 때문이다.

    고로 기업 처지에서는 인력을 자유롭게 입맛대로 쓸 수 있었다. 노동력이 과잉되어 있기에 너도나도 기회를 잡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청의 하청이 가능했다. 다만 산박이 간과한 점은 생각보다 현실이 더욱 가혹하다는 점이었다.

    “이제 다 온 거죠?”

    시은의 말에 하청의 하청을 받은 주술 검사 남명겸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직 두 명이 덜 왔습니다.”

    여덟 명이 적정 던전 공략 수준이었지만 최대 열 명까지 가능한 것이 2레벨 던전이었다.

    ‘허, 하청의 하청의 하청이네.’

    마지막 두 명은 하청의 하청의 하청인 셈이었다. 그들은 척 봐도 삶에 지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법성 사제 김연정이라고 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힘없이 말하는 사제를 보며 준서는 입을 딱 다물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성기사 김각두라고 합니다. 차가 막혀서……. 죄송합니다.”

    “죄다 변명이 차 막혀서네.”

    그 말에 남명겸이 손을 싹싹 비볐다.

    “헤헤, 그만큼 포스코 타워로 향하는 길이 꽉 막힌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얼마나 인천 네크로맨서들에게 의존을 하고 있습니까? 그 증거이지요!”

    “크흠. 이제 갑시다.”

    준서가 앞장섰다. 하도 꼰대질을 하다 보니 지가 대장인 줄 알았다. 시은은 거기에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 못 하면 그때 부숴 버리면 그만이었다.

    산박의 눈이 하청, 하청, 하청에게로 향했다. 김각두가 김연정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할 수 있겠어?”

    “해야지. 빚 갚아야 하잖아.”

    우울한 대화였다. 하지만 산박이 해줄 건 없었다. 그는 아직 그 정도 일에 관여할 정도로 대단한 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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