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270)
  • 144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만…….”

    그 말에 시은이 웃으면서 서류를 건네줬다. 포스코 타워를 트레이드마크화한 인장이 턱 찍혀 있었다. 당당하게 인천 네크로맨서라고 적혀 있었다.

    ‘신입 적패 네크로맨서 지원 정책.’

    내부에는 다양한 정보가 들어있을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쏙 빼놓고 5번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쪽수를 확인해 보니 21쪽이었다. 수많은 혜택 중 산박과 함께해볼 만한 것만 딱 간추려서 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전부 감추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시은이 산박을 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대놓고 요구하는 건 너무 감정적이었다.

    “좋네요. 베테랑 2레벨 전사 두 명.”

    강력한 카드였다. 적어도 산박이 굳이 앞으로 내달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솔직히 옥시모론보다도 더 뛰어날 수밖에 없는 2레벨 전담 팀 소속의 전사 두 명과 함께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후방엔 이시은까지 있다. 마녀에 네크로맨서. 강력한 카드였다.

    “결행일은 언제입니까?”

    “말만 하면 된대요.”

    그 말에 산박이 서류를 보다가 바로 시은을 쳐다봤다. 너무 큰 대우였다.

    “제가 좀 중요한 인물이긴 하죠. 해골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잖아요.”

    “서리 해골 말이군요. 너무 자주 써먹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시은이 시시덕거렸다.

    “그러는 사장님은 뭐 대단한 거 있나 봐요?”

    산박은 커피 잔을 손으로 잡았다. 내부에서 물이 작은 움직임을 만들어 냈다. 아주 작은, 작디작은 한 흐름이었다. 기괴한 것은 물 전체에 그 흐름이 퍼져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위와 아래가 서로 흐르는 방향이 달랐다. 기괴했다.

    시은은 이를 주의 깊게 쳐다봤다. ‘힘’을 통해서 커피를 회전하게 하는 건 자신도 가능했다. 하지만 외부의 물은 흐르는데 내부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다. 그 기괴함은 이시은의 눈을 빼앗기 충분했다.

    “뭐예요?”

    “진리.”

    물은 금방 멈췄다. 그렇게 적은 물로는 그 진리에 담긴 무서움을 보여줄 수 없었다.

    소수대파도(少水大波濤). 작은 흐름으로 거대한 파멸적 파도를 쏟아 보내는 거대한 진리. 봐도 따라 할 수 없고, 부족하면 좇을 수도 없다. 지혜가 부족한 자는 결코 그곳에 닿을 가능성이 없었다.

    장비로 보정받아도 그저 현실 세계에 적용되는 지혜 수치나 지능 수치 등의 보정만 받을 뿐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더 많은 힘을 휘둘러도 던전 사용자가 지닌 절대적 수치는 그 뿌리로 남고, 장비를 입으면 그 밖에서 적용되는 것만 바뀔 뿐이었다.

    “좋아요. 그래도 남들이 따라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시은이 양손으로 커피를 꼭 쥔 채 물을 힘으로 움직여 봤지만 산박처럼은 할 수 없었다. 위와 아래로 따로 흐르고, 중앙에서는 물이 움직이지 않는다. 기괴했다.

    거기에 물은 구분이 없었다. 운동 에너지는 사방으로 퍼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사실 소수대파도의 진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넘어졌는데 외계인한테 납치당해서 뒤로 넘어간 것처럼 뒤통수 깨진 것과 같았다. 그렇기에 시은은 금방 포기했다. 장비로 강화된 지혜 수치는 이런 경우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저 주문의 수준과 강함을 높여줄 뿐이었다.

    “2레벨 풀 장비는 구하셨습니까?”

    산박의 질문에 시은은 간단히 답했다.

    “받았죠. 공짜로요. 물론 몇몇 계약을 맺었지만 어려운 거 아니고요.”

    “역시 돈이 있고 봐야 합니다.”

    인천 네크로맨서들다웠다. 있는 놈들을 이기는 건 불가능한 법이었다.

    “어떤 장비인데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가 스마트폰의 갤러리에서 사진을 바로 보여줬다. 롱 소드, 로브 그리고 물약이었다.

    ‘소비품.’

    셋 중의 하나는 소비품이었다. 이를 통해서 시은을 자연스럽게 묶어둘 수 있을 터였다.

    ‘그게 맞는지 볼까.’

    스윽.

    산박이 손가락으로 물약을 가리켰다.

    “아, 역시 사장님이시네요. 가장 비싼 걸 찾으시고.”

    “뭡니까?”

    “2레벨 네크로맨서 물약, 중량 코팅 물약이라는 거죠.”

    스켈레톤에 바르는 게 정석이었다. 체중 증가를 도모할 수 있어서 백병전 스펙 증가에 도움이 됐다.

    “이것들은 사령 마력의 롱 소드와 로브예요. 천을 몸에 두르는 것뿐이지만요.”

    던전 내의 시체를 이용하기에 방어구는 형편없었다. 다만, 언데드 능력치를 높여준다. 사령 마력을 추가로 언데드에게 부여해 줌으로써 강화제 역할을 하는 무구였다. 중력이 적어진 상태에서 차가운 비가 내리는 트랙을 내달리는 마라토너처럼 더욱 활력이 넘칠 수 있었다.

    ‘나쁘지는 않네. 하지만 부족해.’

    공짜로 주기 때문에 조금 낮은 등급이었다. 다만 그걸 지워주는 게 ‘중량 코팅 물약’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단번에 1인 몫을 할 수 있었다.

    ‘네크로맨서에게 장비를 주는 만큼, 언데드까지 지급하기에는 힘들지.’

    그래도 해줬다. 그렇기에 대단한 집단이었다.

    ‘기업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나라 속의 나라였다.

    “시은 씨 개인적으로는요?”

    “전 일단 쓰던 환도가 있죠.”

    “산화 두꺼비독 검집요? 아직도 그걸 쓰세요?”

    “유사시에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없거든요. 환도를 자주 뽑는 것도 아니고요.”

    “석궁은 변경 사항 없습니까?”

    “바꾸려고 생각은 하고 있어요. 허리 굽혀서 당기다 보면 한쪽 등만 좀 당겨서 나중에 척추가 휘어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생각하는 석궁은요?”

    “마법 석궁이죠. 충전식으로.”

    경장비를 입고 있었지만 그건 중고로 판 상태였다. 대신 천 옷과 로브를 선택했다. 포스코 타워가 준 것이었다. 시은이 말하기 전에 산박이 툭 내뱉었다. 그도 잘 아는 것이었다.

    “트위스트 스네이크 로브.”

    “어? 아시네요?”

    “전 세계 2레벨 네크로맨서 로브 중 100순위 안에 들어가니까요.”

    그만큼 즐겨 찾는 로브였다. 추가적인 공격 주문을 내어주는 로브였다. 천 옷 일체형으로 그 길이와 너비만큼 힘을 부여할 수 있었다. 회전하며 질주하는 뱀의 형태를 지닌 주문이 상대를 옭아매며 물고 조이는 피해를 주는 공격 주문이었다. 2레벨 던전에서는 적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런 추가 주문형 장비들이 주목받는 편이었다.

    “그 외에는 변한 게 없네요.”

    “이마저도 느낌 좋죠. 다른 주문 사용자보다 공격 주문을 두 번은 더 사용할 수 있는데요.”

    옷과 로브의 일체형이 트위스트 스네이크 로브였다. 자연, 다른 2레벨 장비보다 주문을 두 번은 더 사용할 수 있었다. 총 다섯 번 쓸 수 있을 정도고 이는 1레벨 던전 사용자 하나 끼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엄청난 장비였다. 괜히 순위권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마녀 쪽은 아예 손 떼셨어요?”

    “네크로맨서의 전투적 부분이 뛰어나니까요. 어쩔 수 없죠.”

    골내근형법, 해골학, 서리 해골 등으로 강화시킨 언데드는 강력했다. 다만 다른 건 전혀 없었는데, 산박과 같은 레벨 업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카르마를 족족 끌어모으고 있기 때문이었다.

    ‘얻더라도 2레벨 기술과 주문을 얻는다.’

    1레벨 던전의 기술과 주문은 필요 없다고 여긴 건 아니었다. 마녀의 기술과 주문은 드루이드보다는 알찬 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산박을 바짝 좇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네크로맨서, 포스코 타워의 기술과 주문을 스킬 없이 익혀서였다.

    “사장님은요? 준비되셨나요?”

    “아직 구매하지는 않았습니다. 일주일 뒤에 봅시다.”

    “말로는 2레벨 던전 노래를 부르시더니…….”

    산박은 곧장 일어났다. 그런 산박은 시은이 잡았다.

    “에이, 이제 곧 저녁인데…….”

    “세 시간 뒤에 해가 지는데요?”

    “영화 보면 금방이죠. 요즘에 새로 개봉했잖아요.”

    “영화 안 봅니다.”

    “왜요?”

    “다 허구잖습니까. 봐도 없던 일인데, 의미가 없죠.”

    “어, 그거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말인지 모르세요?”

    산박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대로 나가 버렸다. 지금 이렇게 ‘레벨 업 시스템’의 보정을 받는 현실만 해도 버거웠다.

    ‘우리나라는 진짜 이상해.’

    이 꼴이 났는데도 영화 산업은 호황인 몇 없는 나라 중 하나가 대한민국이었다.

    * * *

    똑똑똑.

    “들어와.”

    양귀문이 서류를 보며 문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는 요즘 기분이 좋았다. 방침두가 제대로 칼을 뽑아서 칼춤을 출 준비를 하고 있어서였다. 돈을 쓴 만큼 확실하게 결과를 낼 것이었다.

    ‘군산에서 지내기에는 답답했겠지.’

    던전 경제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 오식 선박의 사장 방침두였다. 양귀문은 이를 잘 이용한 것뿐이었다.

    ‘So easy.’

    “과장님?”

    “어, 놔두고 가.”

    “그게 아닌데요.”

    그 말에 양 과장이 고개를 올렸다. 장판익이 눈에 들어왔다.

    “판익이? 왜? 다른 볼일이라도 있어? 내가 시킨 일은?”

    “처리했죠. 근데, 사실 제가 잘못 알려드린 게 있어서요.”

    “뭐?”

    “저 사실 본관이 세종시 부동 지구입니다.”

    “뭐?”

    양귀문은 순간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 그는 기습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아직도 과장인 거겠지. 본능적으로 숨어서 나오지를 않는 것이기도 했다.

    “너…….”

    자신을 드러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판익은 단번에 사표를 냈다. 검은 슬라임 유통엔 사람이 필요하고, 그는 부산으로 가서 든든한 무역 회사에 낙하산으로 훅 떨어져 직함 하나를 차지할 터였다.

    “그리고 부동 지구에 한번 들르세요. 장 어르신께서 만나보고 싶어 하십니다.”

    “…….”

    적어도 현재의 양귀문에게 부동 지구=태산박. 이것은 공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장판익이 떠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식은땀이 삐쭉 튀어나와서 온몸이 후끈거리더니 이내 추위를 느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진땀을 닦아냈다. 있는 것끼리의 싸움에서 양귀문은 그저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방침두에게 연락했지만 방침두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또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뭐 해, 이 새끼들아! 오늘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몰라?”

    Z.O.P 무역 회사의 방문. 수많은 국제 해양, 해운 사업 등에서 대한민국은 이점을 위해 범기업적 협력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총대를 메고 있는 강력한 무역 회사 중 하나가 Z.O.P 무역 회사였다. 대기업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중견 기업 중에서는 덩치가 크다. 고작 군산에서 으름장을 놓고 사는 방침두가 어찌어찌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며칠을 이 만남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근데, 이 개새끼야! 풀 컬러로 인쇄를 해야지! 죄다 흑백이잖아! 이 새끼가 돌았어?!”

    중소기업답게 모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캄캄한 미래를 걸어가는 직장인들은 열정이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서둘러 유인물이 거두어지고 몇몇은 인쇄소로 내달렸다. 시간에 맞추기 위함이었다.

    ‘흐흐흐.’

    조금 유난스럽지만, 그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이곳에 오는 사람의 직함 때문이었다.

    ‘영업과장.’

    그런 자가 자신을 보러 오고 있었다. 분명 좋은 일일 게 분명했다. 그런 기대감과는 반대로 방침두는 초조하게 미팅을 준비했다. 자신의 회사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보여줄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미팅은 박살이 났다.

    “과장 변초두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악수를 건네는 초두를 보며 방침두는 뭔가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초두는 떡두꺼비같이 생긴 사내였지만 피부가 거무튀튀해서 누구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나, 변초두가 연락책이라니.’

    아무리 ‘외부인’이라고 해도 정도를 넘어섰다. 그리고 그 분노는 자연스럽게 방침두에게로 향했다.

    쾅!

    변초두는 바로 테이블에 주먹질부터 시작했다.

    “연 성장률 가장 높은 사장님. 근데 함께 내는 돈은 38위로 하위권이십니다?”

    “그게 아무래도 회사 덩치도 있고…….”

    방침두가 쩔쩔맸다. 한 번 곤죽을 만들어 주고 난 다음에 초두가 주변을 물리게 명령하고 독대를 하는 상태에서 진짜 목적을 꺼냈다. 하위권 선박 혹은 해양 업체를 돌아다니며 으름장을 놓아 돈을 뜯어내는 건 Z.O.P 무역 회사의 연례행사나 다름없었다. 대접받으면서 딴생각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기 위함도 있었다.

    아무튼, 그 일에 과장이나 되는 변초두가 동원되는 일은 솔직히 말해서 회사에서도 손해였다. 자신이 받는 것보다 최소 여덟 배 이상의 영업 이익을 남기는 것이 초두였다. 성과금이 연봉보다 높을 때가 많은 ‘용병’이기도 했다.

    “장 어르신께서 보자고 하신다.”

    변초두가 반말을 툭 내뱉었다. 직원 앞에서 사장 대우 해주는 건 예의를 차린 거고 이제는 아니었다. 방침두가 절로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을 했다.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뭘 못 알아 처먹은 척을 해? 양귀문, 부동 지구, 태산박이, 장 어르신 말이야.”

    “예?”

    멍청한 소리에 변초두가 혀를 찼다.

    “쯧쯧, 이 불쌍한 인간아.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어? 남이 작업해 놓은 곳에 그물을 그냥 불쑥 집어넣으면 어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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