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270)
  • 143화

    평온한 시간은 언제나 짧고, 빠르게 지나가는 법이었다.

    ‘이제 돈 좀 벌어서 2레벨 풀 장비를 살까 생각했는데…….’

    주문 강화와 증강의 세트는 전담 팀에 줘버리고 깔쌈하게 모은 쌈짓돈으로 2레벨 풀 장비를 착용해 2레벨 던전에 처음 도전하는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장 노인.’

    역정을 내는 장 노인을 보며 산박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그는 공짜 밥을 먹고 싶었다. 어느새 그는 장 노인에게 의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장 노인의 역정은 자신에게 의존하라는 호통과 똑같았다.

    산박은 쉽게 일을 해결하고 싶어서 장 노인에게 쉽게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장 노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반대로 장 노인이 역정을 낸 것은 물리적으로 산박의 회사로부터 의존성을 뜯어내기 위해서였다. 드루이드 사과에다가 검은 슬라임 유통까지 장 노인의 손으로 들어간다면 산박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은 자연히 높아지게 된다. 결국 산박의 회사 수익 대부분을 장 노인에게 의존하는 셈이었다. 독점은 위험하기에 이를 피해야 했지만 앞뒤가 다 막혀있는 형국이었다.

    “검은 슬라임의 유통을 차질 없이 하실 수 있습니까?”

    “날 뭘로 보는 거냐? 흐! 양귀문 같은 거무튀튀한 인간보다 합법적으로 물류를 유통하면서도 안전하게 너한테 줄 수 있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유통망이다. 들킬 리가 없었다.

    ‘잔잔벼락 사업에 욕심을 안 보이는 건 장 노인의 배려겠지.’

    이걸 허락한다면 산박의 회사는 불안정한 회사가 된다. 하지만 그는 무지렁이와 같이 기반 하나 없는 사내였다. 온전한 회사를 일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예나 지금이나 기반이 없으면 짓밟히기 일쑤였다. 맨몸 하나로 장군이 된 자의 최후는 토사구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위업을 달성하고 펄펄 끓는 탕이 될 뿐이었다. 이를 모르는 것은 언제나 역사를 게으른 눈으로 쳐다보는 자들뿐이었다.

    고로 산박은 장 노인의 제안만으로도 감사하며 아홉 번 절을 해도 모자랐다. 회사를 키우는 데 도움을 주고 있어서였다. 그러면서도 결혼에 대해서 일절 언급도 하지 않는 대인배 중의 대인배다. 어떻게 장 노인이 산박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지는 산박도 잘 몰랐다.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장 노인은 많은 걸 원하는 자였지만 산박이 몰락하는 것만은 막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짐승 같은 권력자와 사업가들에 비하면 양반 중의 상양반이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검은 슬라임의 물자 사업, 내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양귀문과 방침두는 내가 만나서 해결한다.”

    장 노인이 확답을 내어줬다. 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산박이 검은 슬라임을 내준다면 양귀문을 물러나게 해야 했다. 그걸 먼저 해야 하기에 장 노인이 그렇게 하면 그만이었다.

    “너도 한 가지 약조해야지. 내가 모든 일을 끝내면 대전 쪽은 쳐다도 보지 말아라.”

    “적어도 양귀문 부장의 전화는 받지 않겠습니다.”

    장 노인은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산박이 나가자 스마트폰을 놀렸다.

    “판익이냐? 양귀문 부장한테 가서 한번 만나 보자고 해라. 놈도 세종시에 사는 놈인데, 우리 가문을 모르지는 않을 거다.”

    ―예.

    양귀문이 자신들을 모른다면 그때는 모은 증거를 터트리며 매장시키면 될 뿐이었다.

    “그리고 생각은 해봤느냐?”

    ―하겠습니다.

    “좋다. 하지만 전에 말했던 사촌이랑은 아니다.”

    ―그럼 어느 분이십니까?

    “찾아보고 나중에 연락해 주마.”

    전화를 끊고 장 노인은 서둘러 일어나서 족보를 뒤졌다. 족보는 권수만 해도 책장 하나를 꽉 차지할 정도였다.

    ‘사원은 계속 찾아와 줬으니, 기록을 해놨었는데.’

    사원의 제는 일 년에 열두 번. 바쁜 현대인은 그중에 한 번만 찾아오면 됐다. 경상도 쪽에 터를 잡은 장씨 씨족은 보통 무더운 여름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 양반들이라 가을이나 겨울에 온다. 보통은 은퇴해서 적적한 나이 든 양반들이 손자, 손녀를 끌고 오는 편이었다. 자식 자랑은 덤이고, 어린아이는 언제나 활력소였다.

    ‘있다. 장왕난.’

    가장 최근에 적을 올린 자였다. 장 노인은 컴퓨터를 켜서 이를 찾아봤다. 최근 사원 방문록에 등록된 혈족들의 데이터베이스였다.

    ‘재작년에 왔군.’

    2년마다 꼬박꼬박 찾아왔다. 장 노인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통화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받았다.

    “잘 지내는가?”

    ―예! 어르신!

    서로 근황을 묻는 건 기본이다. 왕난은 은퇴를 한 지는 벌써 햇수로만 8년이 되어서 나이가 예순여덟이었다.

    “아직도 무역 회사를 하고 있는가?”

    ―예~ 아들에게 물려줬고, 제 자식들은 대부분 회사를 운영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평범한 양반 가문의 가족 운영 체제였다. 자식끼리 싸워도 죽어도 남에게는 못 준다는 심보였다. 칼부림도 자식끼리 하는 법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군산 쪽에도 좀 영향력이 있나 싶어서.”

    ―하하, 영향력은 무슨,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이 나라가 얼마나 좁습니까, 어르신? 해외 무역으로 먹고살지 않습니까. 다만, 협업해서 해외 항만 시설료를 서로 함께 내고 있기는 합니다.

    “그게 영향력이지, 뭔가? 대표적으로는?”

    ―수에즈 운하가 대표적이지 않겠습니까?

    “중동! 돈 되는 곳이지.”

    ―예, 예. 그리스 무역 놈들이랑 싸워야 해서 항상 피가 터지기는 하지만 아직은 황금 노다지죠.

    “군산의 ‘오식 선박’을 좀 조사해봐 주게.”

    ―이름만 들어서는 무역 회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배 팔고, 뭐든지 하는 회사일 거야. 그렇게 크지는 않아. 군산 쪽에 터를 잡고 있어서 지역 유지라 강해 보이는 것뿐인데,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예. 사람 하나 보내서 어르신을 만나 보라고 연락을 넣어 놓겠습니다.

    “응, 응. 그리고… 요즘 검은 슬라임을 대량으로 들어오려면 어디가 가장 싼가?”

    ―예?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한 달에 적어도 100kg 정도는 필요한데…….”

    ―그 많은 걸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그 정도면 허, 기업 하나 먹여 살리는 양인데…….

    “말도 안 될 소리를! 중소기업이나 그렇지 않겠어? 흐허허, 당연히 좋은 사람과 좋게 거래를 하는 데 써야지. 근데 내가 몸이 불편하니까.”

    ―이거 오랜만에 제가 자식들한테 자랑 한번 해야겠습니다.

    장사하는 데 품목 하나 더 추가되는 건 크다. 특히 무역 회사는 더더욱 그러했다. 무엇보다 상업이라는 게 특별한 걸 추구해서는 안 됐다. 검은 슬라임이라는 간단한 던전 부산물을 고루고루 잘 퍼지게 해서 제값을 받아내면 그만이었다.

    “잘 부탁하네.”

    ―아닙니다. 같은 혈육끼리 돕고 돕는 거죠.

    겉으로는 아닌 척, 바로 하겠다고 했기에 검은 슬라임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 정도 물량이면 국내에서도 충분히 감당했지만 못해도 10%짜리다. 한 품목의 10%는 장난 아닌 수준이었다. 단번에 가치가 폭등할 수 있기에 해외 것을 들여올 필요가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산박은 검은 슬라임을 해외에서 조달해야만 했다. 그 문제가 쉽게 풀렸다.

    * * *

    “후우우.”

    산박이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도 회사를 가진 기업인이고 사업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결국 삐끗하고 말았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었지.’

    아쉬운 일이었다. 적어도 군산 쪽에서 바닷일하는 사람 중에 제법 영향력 있는 자들은 태산박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게 될 것이고, 장 노인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한 사람들의 숫자만큼 빠르게 그곳으로도 그 이름이 퍼져 나갈 터였다.

    ‘알짜배기, 장 노인이 봐주는 신흥 회사.’

    그 평판은 낙인과 같았다.

    ‘다행이라면 찢기지 않았다는 점이겠지.’

    그 당시에는 대단히 후회했고 지금도 마음속으로는 열불이 터져 나왔지만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오히려 가장 잘 풀린 일이었다.

    산박은 이제 겨우 2레벨이고, 2레벨 풀 장비도 아직 맞추지 않았다. 하이에나들에게 갈가리 찢겨서 기술을 토해내고 사라지는 수많은 작은 기업들처럼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 가능성을 보고 살려 줬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잔혹하고 잔인한 말이었다. 하지만 산박은 그렇게 나쁜 표정은 짓지 않았다. 불안정하고 의존적인 회사가 되어서 우울했지만 그래도 최악은 피했다.

    ‘앞으로 더 성장해서 연기 장가(家)가 아닌 그와 비슷한 기업에 연줄을 놓아야 한다.’

    그게 산박의 다음 목표였다. 그렇게 하면 위험할 수 있었기에 자잘하게 개인 사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사사건건 장 노인이 한 발 걸치려고 할 터였다. 그걸 견제하는 데에는 그와 체급이 비슷한 놈을 하나 들여놓는 게 나았다. 산박은 조용히 미래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땅 사는 건 뒤로 미룬다. 지금 샀다가는 만주에 잔잔벼락을 파는 이득이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걸 들킨다.’

    잔잔벼락의 수익은 은행을 통하지 않고, 전산을 거치지 않고 현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는 순중가를 통해서 들여오고 있었는데, 몰래 보관하고 있는 사과 박스에 현금이 그득했다.

    물론 공짜로 배달해 주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하면 산박은 배분금 2만 원 중 2천 원을 순중가에게 얹어줬다. 적은 돈 같지만 한 자루에 2천 원의 이득이 순중가에게로 향한다. 그 덕에 순중가는 사실 산박을 가장 신뢰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했다.

    ‘농업도 모두 미룬다.’

    던전에 집중할 생각을 가졌다. 그때 스마트폰에서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개인마다 모두 특정하여 개별적인 알림을 설정해 놓았다.

    ‘이시은. 정기 보고 할 때는 아닌데?’

    규칙적으로 근황을 나누는 게 옥시모론 기업의 특징 중 하나였다. 작은 기업이라 가능했다. 산박이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사장님, 네크로맨서 쪽에서 제안이 왔는데 의견을 듣고 싶어서요. 시간 언제 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급한 건 아니에요.]

    산박은 일정을 잡았다. 세종시의 시청 앞 새로 생긴 카페로 갔다. 인테리어가 중세 유럽식 석조 건물을 그대로 따왔으며 그림도 그럴듯해서 인기가 대단한 곳이었다. 카페 옆에는 기계식 주차장까지 새로 만들었다.

    ‘돈이 돈을 버는구먼.’

    그걸 보며 산박은 혀를 찼다. 자식한테 물려주기 좋은 사업이었다. 얼마나 많은 돈을 썼을지……. 생각만 해도 대단했다. 입구에는 검은색으로 변질되고 때도 많이 탄 소년상이 있었는데 아래로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작은 분수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와요?”

    그 옆에서 사진을 찍던 시은이 산박이 걸어오는 걸 보고 불만을 드러냈다.

    “들어갑시다. 그건 뭐 하러 찍어요?”

    “요즘 킹스타그램 최고의 핫 이슈거든요. 여기서 사진 안 찍어서 올리면 그만큼 이슈를 못 따라가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 것치고는 사진 찍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산박은 1층에서 주문을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벨이 울리자 내려와서 음료를 갖고 다시 올라갔다.

    “시럽은요?”

    “필요한 게 더 있으면 직접 내려가세요, 이 팀장님.”

    “네, 싸장님~”

    시은이 귀엽게 대답하며 내려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산박은 서둘러 본론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시은이 곳곳에서 사진 찍는 걸 도와줘야 했다. 카페 주제에 포토 존이 떡하니 있었고, 바닥에 실선이 그어져서 구역을 구분 짓고 있었다. SNS의 전파력을 얻어내기 위해서 많이 노력한 티가 확 났다. 평일인데도 커플이 많았고, 포토 존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줄도 제법 있었다. 활기가 가득했다.

    산박은 시은에게 거침없이 휘둘렸는데, 인천 네크로맨서가 가지는 영향력과 힘 때문이었다.

    ‘도시 하나를 지배하는 포스코 타워.’

    층수 지상 68층. 높이 305m. 인천에 있는 최고의 빌딩이었다. 그리고 인천을 지배하고 있었다. 정치, 정부, 재계, 법조 등. 그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던전 사용자들이 강력하게 뭉쳐있는 집단은 던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팀이 소속되어 있었다.

    ‘인천 네크로맨서는 던전 사용자들의 정보와 영향력이 모이는 곳이지.’

    던전 사용자들의 의견 대표 중 한 곳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의견 대표는 다른 곳에도 득실득실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이 대한민국 내에서 한자리를 항상 차지하고 있었다. 짓누르기에는 무섭기에 서로 어깨동무를 했다.

    그것은 국제적으로 특이한 현상이었다. 경쟁이 아닌 타협을 했기 때문이다. 서로 칼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입으로 터는 게 많았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죠?”

    “투 숏 한 번만 찍어요.”

    “저건 커플 포토 존입니다만.”

    “안 넘어오네.”

    산박이 웃었다. 하지만 의자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에 시은도 본론을 꺼냈다.

    “포스코 타워가 저한테 2레벨 던전 공략을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한 명을 더 데리고 와도 된다고 하셨고요.”

    산박의 표정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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