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270)
  • 138화

    * * *

    산박은 그 뒤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지건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바로 만나지는 않았다. 이제 그는 그렇게 뜸을 들여도 될 남자가 되었다.

    드루이드 사과 과수원의 로열티는 매달 증가하고 있었고, 실제로 수익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시중가보다 40% 싸게 내어주기 때문에 중소 마트에서 특히나 대인기몰이 중이었다. 그렇게 싸게 해주면 마트 주인도 마진이 남는다. 유통업자들의 간악한 술수에서 벗어난 상품은 빛이 번쩍번쩍 날 수밖에 없었다.

    대형 마트와의 사과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건 다른 사람들이 사과를 사기 위해서 마트에 온다는 소리였다. 이는 자연히 다른 것들도 팔리는 효과를 내고 있었다. 그 입소문은 주부들의 입을 통해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달고 건강에도 좋은 사과를 싸게 산다? 이거 대박이야. 어머머머!’

    정신 탈출한 거지같이 비싼 기저귀부터 생리대까지 짜증 나는 일의 연속에서 찾은 유일한 마약이나 다름없었다. 웰빙과도 맞았고, 대한민국은 외모 지상주의가 가장 심한 국가 중 하나였다.

    그 모든 걸 보지 않고도 산박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증가하는 로열티가 그 증거였다. 수익의 3%도 안 가져가는 로열티였지만 드루이드 사과나무는 죽지도 않고 꾸덕꾸덕 사과를 생산해 냈다. 규모를 키우기 좋았다. 나중에 가면 아무 짓도 안 하고 돈을 벌 수 있었다. 건물주 위에 사과주가 있는 셈이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잔잔벼락 사업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적으로 불안불안한 게 잔잔벼락 무기 사업이었다. 만주에서는 잘 팔고 있지만, 대한민국 내에서의 활동이 중요했다. 누군가가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산박을 제외한 4인이 서로 작당하여 산박을 사업에서 내던질지도 확인해야 했다.

    그는 가장 먼저 세종시에 있는 임대 사무소로 향했다. 던전 사용자를 지원하는 정부 덕분에 큰돈 들이지 않고 얻은 곳이었다. 버려진 신축 빌라를 지자체에서 사서 돈을 뽑아내는 던전 사용자에게 임대 사업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하는 사업을 벤치마킹한 것이 세종시의 시장이었다. 제법 수완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는 자였다.

    “서 팀장에게서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강합이 사무실에서 경리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경리도 허둥지둥 일어났다. 그걸 본 산박의 눈이 좁아졌다.

    “이거, 분위기 요상한데요? 지유 씨랑 이거…….”

    “아! 무슨 소리를! 아! 정말 아닙니다!”

    강합이 크게 부인했다. 산박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강합을 사장실로 호출했다. 유리창을 단 것에 불과한 조촐한 간이 시설이었다.

    “요즘 서천이나 군산은 어떻습니까?”

    “평범합니다. 제대로 전산 장부도 보내오고요.”

    애초에 레시피의 절반을 만드는 게 강합이었다. 강합이 만드는 양만큼 저쪽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믿을 수 있었다. 다만 ‘유통 마진’을 통해서 얼마든지 더 많은 수익을 거두는 게 가능했다.

    ‘알아서 하라지.’

    거기까지 손을 뻗는 건 갑질이고 오지랖이었다. 안 좋은 단어는 죄다 붙여도 된다. 팔리지 않으면 가격을 내리고 잘 팔리면 가격을 올릴 터였다. 자본주의의 논리대로 흘러갈 것이었다. 만주가 그러했다.

    “만주 쪽은 제가 건드리지는 않았습니다. 그쪽은 박조조 사장이 해야 할 일 아닙니까?”

    “뭐, 아예 손 떼기보다는 적절하게 묻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피드백도 틈틈이 넣어줬다. 그냥 보고를 받는 것으로도 족했다. 그게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큰 역할을 할 터였다. 박조조도 정신 번쩍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걸 매번 확인할 것이었다.

    ‘곧 무뎌지기는 하겠지만, 그건 오히려 좋은 일이지.’

    평화에 찌든 자야말로 사업을 맡기기 좋았다. 현상 유지가 산박이 원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변수는 산박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지금 하는 행보만으로도 너무 자극적이고 위태로워서였다.

    ‘목돈이 모이면 다음 단계로 진행한다.’

    산박은 세종시와 광주시 사이에 있는 땅을 잔뜩 구매할 생각을 가졌다. 그를 위해 당산 부동산을 운영하는 함희두를 통해서 세종시의 부동산 현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좋은 목이 있다면 구매할 생각이었다. 천안이나 아산도 나쁘지 않았다. 당진 국제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적어도 자신이 운영하는 도시에서는 없는 사람도 잘 먹고 잘살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피와 궁핍함의 길을 자신 나름대로 끊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게 산박이 던전으로 향하는 이유였다. 이제 그 이유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서서히 돈이 평범하지 않은 수준으로 들어오고 있어서였다.

    후루룩.

    커피를 마시며 산박은 만주에 대한 것을 강합에게 말해줬다.

    “만주는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잘 해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산박은 순중가와도 개인적으로 연락이 닿아 있었다. 그 사실을 잔잔벼락 사업에 몸담은 이들에게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고, 이는 큰 견제 장치로 이용되었다. 다섯 명이 있으니 복잡한 일을 조용히 추진하기 어려웠다. 당분간은 이 균형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힘을 갖추고 더 단단한 자본을 가지게 된다면 제대로 사업할 생각이었다.

    ‘몇 가지 선택이 있지.’

    사람 없고 돈 벌기도 마땅찮은 서천시의 토착 세력을 끌어들이거나 군산시에서 아예 새로 회사를 만들어 장사하는 방법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잔잔벼락 레시피를 거액에 다른 이에게 파는 선택지도 있었다. 이를 통해서 로열티를 벌 수 있었다. 변변찮은 세력 없는 산박이 할 수 있는 안전한 판매 방법이었다.

    ‘일단은 이대로 놔둔다.’

    잔잔벼락 무기로 최대한 재미를 보고 높은 시세가 떨어지면 그때 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자본만 따지면 고레벨 던전 상품보다는 1레벨 던전 상품이 잘 팔렸다. 힘없고 세력도 없는 자가 가지기에는 큰 물건이었다.

    고아에서 황제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산박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나름대로 사회를 알고 있어서였다.

    약하게 보이면 배신당하는 게 이 바닥이었다. 돈 벌 거리가 하나 있으면 그걸 노리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난다. 그게 지금의 사회였다.

    이를 잘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냥 힘 있는 놈들에게 팔거나 작게 작게, 알게 모르게 돈을 버는 게 좋았다. 하지만 산박은 거기서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 잔잔벼락은 좋은 거래 수단이었고, 기업을 뒷배로 놓기도 좋았다.

    ‘혼자서 다 해 처먹으면 배 갈리기 쉽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허허 웃으며 사람 배 째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사람 피눈물 흘리게 만드는 건 기본이었다. 그 모든 뒷일을 구상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 외에 특별히 변동 있는 일이 있습니까?”

    “이 팀장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한창 던전 공략 중입니다.”

    3일 만에 던전을 클리어한 서 팀장과는 많이 달랐다. 다만 충호의 팀에는 산박까지 끼어 있었으니 시은이 실력 부족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왕보겁이라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박조조 사장과 잘 아는 정보꾼이라는데, 자기도 뭔가 일을 해보고 싶다고 일감을 달라고 하더군요.”

    “음?”

    산박이 관심을 가지자 강합이 입술에 침을 묻히면서 컴퓨터로 돌아가 마우스를 만지작거렸다. 곧 인쇄물이 나왔다.

    “일단 대충 기록을 해뒀습니다.”

    “참 꼼꼼하시네요.”

    “뭔 일이 일어날지를 몰라서요. 그냥 무식한 거죠.”

    강합이 웃었다. 산박이 인쇄물을 훑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대화의 요약본에 불과했고, 이렇다 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이놈이 자신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건 ‘필요’했기에 찾았으며 너무나도 형편없을 정도로 가벼운 행동이었다.

    ‘기가 차는군.’

    박조조에게 산박의 거취를 물었겠지만 그가 아마 답변을 거부했을 것이고, 그냥 직접 정보를 찾아서 세종시 던전 사용자 지원 정책에 이름을 올린 산박의 이름 석 자를 추적하여 여기에 도달했을 터였다.

    ‘박조조와 연관된 것만으로도 멀리한 놈인데.’

    그와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을 꺼린 산박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와 친해 보이는 정보꾼 말고 다른 정보꾼을 썼다. 그 정보꾼은 시체가 되어 버렸지만.

    ‘귀찮은 미꾸라지.’

    무시하는 게 답이었다. 가진 것도 없는 놈이라 금방 포기할 터였다. 헛짓거리할 수 있는 건 돈이 있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했다. 그렇지 않은 자는 먹고살 길을 찾아서 버둥거리며 절벽을 기어 올라갈 준비를 해야 했다.

    “무시하세요.”

    표면에 떠오를 정도로 올라오면 그때 대응해 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웬만한 미친놈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열정을 쏟아부을 수 없었다.

    “매허망 씨가 여기에 한 번 방문했습니다.”

    산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문자를 받았습니다. 제법 급해 보이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오식 선박’의 직원들이 곳곳을 찌르고 다닌답니다. 공무원 하나 대동해서요.”

    “그 공무원 직급이 어떻게 됩니까?”

    “7급 주임입니다. 계장을 못 달고 은퇴를 해야 해서 바짝 벌고 나가려는지 아주 개판입니다.”

    산박이 혀를 찼다. 하지만 그들은 헛수고하고 있었다. 진짜는 서천에 있기 때문이다. 군산은 그저 바다로, 인천으로 향하는 중간 지점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 말을 들으니 등골이 서늘했다.

    “개같지만 어쩌겠습니까? 군산 쪽은 쓰지도 못하고 서천에서 육로로 인천에 보낸 뒤에 만주에 있는 순중가에게 양도하고 있습니다.”

    산박은 나쁘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육로로 가기 때문에 시간과 돈을 좀 버리겠지만 안 들키는 게 중요했다.

    ‘진짜 돈 냄새 하나는 미친 듯이 잘 찾는다니까.’

    황당할 노릇이었다. 이렇게까지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하는 이들이 넘쳐난다니, 산박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선박업 하는 놈은 대체 왜 잔잔벼락 사업이 군산에 있다고 여기고 있는 거야?’

    도통 모를 일이었다. 군산이 아니라 서천을 택한 게 큰 행운으로 작용했다.

    “사회 초년생들을 써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말에 산박은 손사래를 쳤다. 바닥부터 키우는 건 던전 공략만으로 충분했다. 거기에 인간을 상대하는 데 사회 초년생은 뒤통수 맞기 좋았다. 사람 상대하지 않는 일을 맡기기에도 어려웠다. 괜히 사람들이 경력 있는 신입을 원하겠는가? 다 이유가 있었다. 내로남불 노래를 부르지만 사실 모두가 내로남불을 하고 있었다.

    “조금 번거롭게 되었지만 그래도 잘 마무리된 것 아닙니까.”

    “예, 예.”

    “입단속 계속 꾸준히 해주세요. 저는 매 사장이나 박 사장과 한번 만나야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산박은 그대로 사무실을 나섰다. 강합은 눈치를 좀 보다가 바로 경리에게 다가갔다.

    “자기이이이잉! 많이 기달렸찡?”

    “우우우우웅!”

    * * *

    그로부터 정확히 2일 뒤에 던전을 공략한 이시은은 던전에 다녀온 후로 2일을 내리 쉬고 인천으로 향했다. 그곳에 대한민국 네크로맨서의 총본산이 있었다.

    ‘태 사장‘님’께 보고를 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부재중이었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조사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웬만한 사람이 아니면 미행을 들킬 게 뻔했다. 한다면 자신이 직접 해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함은 물론이고 자신의 성장도 멈추고 지체된다. 산박은 지금도 경험치를 쌓고 있었고, 시은은 이를 바짝 따라가야 했다.

    그녀는 여전히 도서관을 찾았다. 네크로맨서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이미 죽고 없었지만 박서후가 치근덕거리는 걸 보고 그녀는 도서관에 올 때도 항상 제법 힘을 줬다.

    또각, 또각.

    안 그래도 큰 신장인데 5cm짜리 하이힐까지 신은 그녀는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오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붉은 립스틱에 새까맣게 염색한 진한 흑발은 매직까지해서 놀라울 정도로 가지런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거기에 검은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조금 어두운 색의 스타킹을 신었다. 잘생긴 남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게 아니면 다가오기 힘들 정도로 날이 선 모습이었다.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고, 다가오지도 않았다. 물론 눈치 없는 병신들이 커피에 포스트잇을 달아서 놓고 가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지식을 탐닉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녀가 최근에 관심이 있는 네크로학(Necro學)은 외골 장비(外骨裝備)에 대한 것이었다. 뼈를 장신구나 장비로 만들어서 장비에 추가로 부착하는 방식이었다.

    ‘단번에 파워 업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재료가 싸다.’

    가축이나 동물의 뼈를 사용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무두질을 끝낸 가죽을 쓰기도 하지만 그래서야 효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박제한 특수 부위는 의외로 쓰이기도 했다. 눈알이라든가 장기 등…….

    그녀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당연히 분할 팀 때문이었다.

    ‘아무리 산박 님이 포함되었다고 해도 난 3일 내에 끝내지 못했어.’

    이시은은 그를 ‘님’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깔끔한 살인 광경을 보고 나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시은은 눈을 감으며 볼펜을 놀렸다. 그리고 새하얀 연습장에 태산박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 나왔다. 그녀는 그걸 보고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 태산박의 입술을 붉게 칠해줬다.

    ‘응, 나쁘지 않아.’

    사랑하는 여자처럼 그녀가 새하얗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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