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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132/270)
  • 132화

    * * *

    팅, 팅!

    선두에 선 은섭의 방어구에 화살이 튕겨 나갔다. 중보병에게 화살은 썩 좋은 무기는 아니었다. 트랜지셔널 아머는 빈틈이 있었지만 스포일 크놀의 활 솜씨는 움직이는 대상을 맞출 정도로 좋지 않았다.

    ‘훈련을 게을리 한 모습이다.’

    산박은 이걸 단번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방패를 든 충호는 어느 순간 가장 선두에 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던전 공략에 세 번 실패한 은섭이 못 미더운 듯했다. 물론 자신이 이 전투를 주도하고 싶다는 욕망도 느껴졌다. 실로 A 등급 전사다운 면모였다.

    망가진 크놀들은 방패로 땅을 마구마구 내려치면서 잔뜩 흥분하고 있었다. 어떤 놈은 무기도 버린 채 방패만 그렇게 내려치고 있었는데, 가장 경계해야 할 놈이었다. 방패는 그 면적과 같이 무기로 쓰기에도 좋았다.

    쉬쉭!

    사거리에 들어가자 창 두 자루가 충호를 때리고 은섭을 밀어내려고 난리를 쳤다. 충호는 능숙하게 환도로 창을 쳐냈지만 은섭은 대처가 늦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충호의 이동 속도가 확 느려졌다. 느리고 약한 아군에게 맞춰야 하는 게 ‘진형 유지’의 가장 핵심이었다. 그렇기에 병사들의 수준은 가장 나약한 놈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다.

    “불 잎 수풀 토템 설치하겠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5초 뒤에 발현되는 게 평균적이었다. 그런 걸 미리 파악해 두었다. 산박의 콤비네이션 전술은 철두철미했다.

    “…셋, 둘, 하나!”

    산박은 섬광 단검을 투척하고, 그다음에 화염 물약도 던졌다. 모든 것이 동시에 작용하였다.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피해를 보는 것과 한 번에 큰 피해를 보는 건 현실에서 매우 달랐다. 적들이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확연하게 결과가 달랐다.

    번쩍!

    섬광 단검이 번쩍였다.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분할 팀이었기에 눈을 잠깐 감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반면 망가진 크놀들은 상대가 소극적이라서 더더욱 날뛰었다. 처음에는 좀 헐거워도 그래도 괜찮았던 진형이 엉망진창이었다. 창병이 방패병과 함께 있었고 궁병이 활을 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 상태였다. 그건 그들이 망가졌기 때문이었다.

    빛이 번쩍이니 적극적인 스포일 크놀들도 뒤로 살짝 물러났다. 앞으로 나아가다가 뒤로 물러났으니 몸이 멈췄다. 그 상태는 쏟아지는 불꽃에 많은 숫자가 당하기에 좋았다.

    화르르……!

    이글거리는 불꽃 잎들로 이루어진 작은 토템이 바닥에 자리 잡았고, 부채꼴로 단번에 불꽃을 쏟아냈다. 본래 목표는 방패병 네 마리였는데 창병까지 앞으로 밀고 들어간 상태라서 여섯 마리나 되는 스포일 크놀이 노출되었다.

    화아아아악!

    또한 화염 물약이 달구어진 불꽃 토템에 휩싸이며 허공에서 똑 갈라졌다. 화염이 솟구치며 쏟아져 내렸다. 위에서는 불타는 액체가 떨어지고 아래에서는 불꽃 잎이 우수수 피어올랐다. 그곳에 노출된 여섯 마리의 스포일 크놀들은 겉이 홀라당 타버렸다.

    “돌겨어어억!”

    산박이 고함을 꽥 내질렀다. 그 말을 듣자마자 팀원들은 모두 이를 악물 정도로 온몸에 힘을 줬다.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으며 그간 계속해서 쌓아온 냉철한 카리스마가 빛을 발휘했다. 마치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혹은 진짜로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떠미는 것처럼 여겨졌다. 주궤도 마찬가지였다. 전과 다르게 그는 환도를 뽑아 들어서 돌격했다. 이건 산박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대장삵!”

    산박이 삵을 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먼저 선두에 있던 충호가 불탄 채 버둥거리는 스포일 크놀을 방패로 정직하게 밀어 쳤다. 직선으로 쑥 내밀어진 방패에 얻어맞은 크놀은 허둥거리고 있었기에 전혀 균형을 잡지 못했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이야아아아아!!”

    은섭의 할버드가 그대로 내려쳐졌다. 그 비대한 몸은 신속 중장비와 쾌속의 할버드 덕에 빨라 보였으며 실제로 ‘바람의 그릇’에서 삐져나온 바람의 정령이 그 몸을 휘감고 도와주고 있었다.

    연두색으로 이루어진 바람의 정령은 긴 머리카락이 밀도가 점점 낮아지며 은섭의 전신으로 퍼져 있었고 그 몸은 은섭의 목에 찰싹 밀착하고 있었다. 눈 코 입이 명확하게 보였으며 연두색의 드레스도 입고 있었다. 보통 바람 정령과는 다르게 그 형상이 매우 뚜렷했는데 이는 ‘기본 바람 정령술’과 ‘바람의 그릇’ 덕분이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김은섭의 몸은 바람 정령이 기생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그릇이었다.

    할버드가 매서운 속력으로 덤벼들어서 단박에 불타는 스포일 크놀의 머리를 콱 내려쳤다. 방패가 제대로 전방을 우뚝 보고 있지 않았다. 화염 액체가 들러붙어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머리에 박힌 할버드를 빼내려고 힘을 주자 크놀이 앞으로 엎어졌다. 김은섭은 발로 크놀의 어깨를 밟아서 할버드를 빼냈다. 그 옆에 산박이 자리 잡으며 화살을 쳐냈다. 멈춘 이유는 간단했다.

    “웃.”

    뒤에서 감정에 내몰려 달려오던 주궤가 멈췄다. 병목 현상이었다. 아무렇게나 달려드니 어떻게 돌진해야 할지 그 진로를 확인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는 돌진을 주궤가 하고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개죽음당하기 십상이었다. 주궤는 신병처럼 굴었다.

    ‘요령이 붙는 게 느리네.’

    주궤의 단점이 또 하나 늘었다.

    그사이에 대장삵이 주궤의 근처에 도달했고 다시 산박이 나아갔다. 주궤 또한 침착하게 패닉에 빠진 채로 버둥거리는 크놀 여섯 마리를 처리하는 데 힘을 썼다. 그들을 죽이는 건 조금 살 떨리는 경험이었다. 반항하지 않는 놈들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충호와 산박은 그냥 그 구간을 돌파해서 궁수 두 놈을 조져 놓았다. 둘 모두 도망치고 있었는데, 사용되어서 섬광 능력이 없는 투척 단검에 허벅지를 다치거나 따라잡혀서 죽임을 당했다.

    심장은 여섯 개를 적출했지만 가죽은 두 마리분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많은 크놀이 남아있을 것이라 기대되었기에 최대한 빨리, 많이 죽일 필요가 있었다.

    특히 ‘힘’을 조금 사용하고 죽일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던전 사용자는 아무래도 수익성을 생각해야 했기에 힘을 조금 사용하고 죽이는 게 왜 비효율적인 것일까요? 볼 수 있었지만 가장 비싼 것이 가죽이 아니라 심장이었기에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휴식을 취하고 계속해서 움직였다. 차근차근 지급 물품 사용을 줄였다. 화염 물약을 사용하지 않고, 토템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순찰조들이 이상하게 원군을 부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검은 늑대 때문이다.’

    보스 몬스터가 돌아다녀서 생긴 문화였다. 망가진 크놀들은 검은 늑대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 있었고, 순찰조가 그들의 유일한 방어 체계였다. 순찰조가 잡아먹히면 다른 스포일 크놀은 살 수 있었다. 그 덕을 던전 사용자들이 봤다.

    검은 늑대가 만든 생태계는 대부분이 산 제물을 바치는 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스포일 크놀들의 공동 보육 시설이 입구 가까이에 있었다. 암컷들은 소수만 있었고, 새끼들은 그보다 더 많았다. 번갈아 가며 교대하면서 보살피는 듯했다.

    질병과 수많은 사건 사고들로 장성하기가 힘든 새끼 스포일 크놀은 검은 늑대에 잡아먹히는 게 오히려 사회에 이득이었다. 또한 어른이 되어야지만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으므로 새끼들은 가장 먼저 검은 늑대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만난 순찰조는 재수가 없었던 셈이다.

    입구를 틀어막고 괴성을 지르는 크놀을 모두 죽여 그 심장을 채취하고 가죽을 벗겨냈다. 은섭은 세 번을 토해서 위액만 나오고 있었지만 도축하는 작업을 계속 도왔고, 주궤는 울기까지 했다. 잘 손질된 고기를 먹는 현대인에게 좀 심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산박은 억지로 주궤에게 도축 할당량을 부여했다. 주궤는 끌고 가서 어떻게든 가죽을 벗겨 왔다.

    “잘했습니다.”

    산박은 짧게 칭찬해 줬다.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꼰대질을 하지도 않았다. 순수한 칭찬 한마디면 족했다.

    초를 만드는 설비 지역도 털었다. 건질 건 당연히 없었다. 작업자들은 순찰조보다 나약했다.

    무기 제조 대장간도 박살을 내놓았다. 망가진 크놀 대장장이들의 반격은 매서웠지만 충호와 은섭의 깡패 같은 체급으로 그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상대가 나빴다.

    대장간 한편에 모셔진 제단을 산박이 조사했다.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뼈와 살로 만들어진 제단이었다. 파괴하기는 쉬워 보였다.

    퍽, 퍽!

    단번에 무너뜨리자 썩은 피가 갑자기 쏟아져 나왔다. 그건 서로 뒤엉키더니 지네, 바퀴벌레 등의 벌레로 변해 사방으로 도망쳤다.

    “으윽, X발.”

    절로 욕이 나왔다. 날아다니는 제법 큰 바퀴벌레는 진짜 욕밖에 안 나온다. 그게 수십 마리가 사방으로 도망치니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 안면이 일그러진 망가진 크놀들의 굴을 정리했다. 가죽은 마흔 개가 넘게 나왔고, 심장은 그보다 많았다.

    “대박이네요.”

    “원래는 이렇게 못 합니다. 검은 늑대 때문에 크놀들이 잔뜩 뭉쳐서 다니지 않은 게 컸습니다.”

    “보통은 어떻습니까?”

    “굴 하나 크게 있고 수직으로 되어 있어서 들어오자마자 바로 첨병에게 들키죠.”

    야만적 대장장이인 크놀들은 ‘수직 동굴’을 좋아했고, 실제로 자연 동굴도 손을 봐서 그렇게 만들었다. 아래에서 공기를 데우면 위에 있는 식은 공기가 내려와서 동굴 내부에 대류 현상도 강하게 일어난다. 그렇기에 야만적인 용광로에서도 철을 뽑아낼 수 있었다.

    “이놈들은 좀 변형된 놈들이기도 합니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고 야만신을 모시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망가진 크놀들이었다.

    “심장은 제값을 받겠죠?”

    “크놀은 크놀이니까요.”

    그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휴식했다. 입구 근처에서 머물렀는데, 피 냄새 때문이었다.

    은섭은 밥을 조금 먹었다가 다시 토해 버렸고 주궤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수십 마리를 해체하는 광경을 봤으니 그럴 법도 했다. 0레벨 던전과는 너무 달랐다. 사회에서 천대받고 버러지 취급을 받았던 백정 새끼가 된 꼴이라 심적으로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직업에는 귀천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모두 겉으로만 아니다, 아니다 노래를 부를 뿐, 속은 놈만 바보가 되는 꼴이었다.

    * * *

    “협회가 나설 일은 아니라니까.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이 양반이…….”

    “아니, 씨부랄, 그게 할 말이여? 매달 꼬박꼬박 찬조비까지 냈는데, 이렇게 나오는 거여?”

    새까만 피부를 지닌 배둔국(裵遁麴)이 분통을 터트렸다.

    “자네, 유통업자 아냐? 근데 뭔 개소리를 하냐 이 말요. 전국 사과 협회에서 연락 오면 움직이지. 근데 당신은 아니잖아. 엉? 회비가 아니라 찬조비 내면서 무슨 개같은 소리야?”

    “찬조비나 회비나 똑같지야! 뭐가 다른 거시여!”

    “농부들 주선해 주는 대가로 받는 것이 찬조비고, 농부가 내는 것이 회비야, 이 양반아.”

    배둔국은 단번에 제2금융권 과수원 은행에서 쫓겨났다. 그나마 찬조비를 15년이 넘게 내고 있었기에 은행이 직접 쫓아내지는 않았다.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경찰의 손에 얌전하게 끌려 나왔다.

    “X발.”

    과수원 은행의 입구 계단에 쭈그려 앉은 배둔국이 욕지거리를 날렸다.

    그는 세종시에 사과를 유통하는 유통업계의 큰손 중 하나였다. 한국인의 사과에 대한 사랑은 실로 대단했다. 물론 이는 전 세계적인 트렌드이기도 했다. 늦은 저녁에 먹어도 그나마 괜찮다고 전문가에게 말해지는 게 사과였다. 그러니 과일 중에서도 유독 잘 팔렸고, 프리미엄이니 지랄 떨다가 꼬랑지 내린 요즘은 더더욱 잘 팔렸다.

    유통업자가 덜 가져가는 만큼 박리다매가 가능했다. 사과 농원들의 노동자들도 자존심을 접었다. 한 번 큰 폭락을 경험해서 더더욱 저자세였다. 고로 유통업자가 사과 시장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좁은 땅이기에 가능했다.

    도시 하나에 들어가는 사과에 모두 제 손을 걸쳐서 마진을 쇼속! 빼먹으며 떵떵거렸던 배둔국은 요즘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잡것들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뒈질 것 같았다. 어제만 해도 소주 세 병을 내리 까 마셨다.

    ‘장지건, 듣도 보도 못한 새끼가…….’

    들어오는 물량은 한꺼번에 훅 쏟아지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배둔국도 몰랐다. 그게 윤곽을 드러낸 것은 거래처 중 하나가 배 째라고 배둔국을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돈 하나에 그간 인연도 포기하는 버러지 같은 상인 새끼.’

    가장 찢어 죽여야 할 짐승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배둔국, 자신도 들어가 있었지만 그는 나름 자기 변론을 잘하고 있었다. 자기변호는 어디서든지 잘 써먹을 수 있는 면죄부였다.

    ‘내로남불 안 하는 상병신이 세상 어딨는가?’

    남 복권 당첨되었다고 자기는 복권을 양보하겠다고 하는 놈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청렴에 에미도 팔아먹는 헛것들이나 좇는 것이지. 난 아냐.’

    벌써 거래처 두 개가 놈에게 잡아먹혔다. 점점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배둔국은 그렇기에 서둘러 과수원 은행을 찾았지만 들려오는 건 책임 회피뿐이었다.

    누군가가 사과를 싸게 판다면 그 대가는 다른 사람이 치르기 마련이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누군가가 대박을 터트리면 필히 다른 놈이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그 전까지는 모두 배둔국의 이득이었다. 자기 이름 석 자만 중간 유통에 끼워 넣으면 마진이 눈 감고 있어도 들어오고 여자 엉덩이를 주무를 때도 들어왔다. 근데, 그 법칙을 깨는 곳이 나타났다.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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