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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129/270)
  • 129화

    ‘쥐도 몰리면 문다고 하지만, 인간은 아니다.’

    도망치면서 죽는 게 예사다. 겁쟁이들의 최후는 상대에게 흉터 하나 주지 않는 개죽음이었다. 그런 면에서 벼랑 끝에 몰린 주궤가 산박을 문 것은 제법이었다. 그게 주궤에 대한 평가를 냉정하게 바꾸도록 만들었다.

    우웅, 측. 우웅, 측.

    계약서가 새롭게 인쇄되는 사이에 산박은 캔 맥주도 치워 버렸다. 전과는 모든 환경이 달라졌다. 탁자 위는 깔끔해졌고, 물티슈로 닦였다. 그 일련의 과정은 느긋하게 진행되었다. 자연스럽게 방금 있었던 일은 사라지고 가라앉았으며 새로운 과정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프린트가 멈추고, 조용해졌다. 동시에 산박도 뒷정리를 끝내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가 새로운 계약서를 주궤에게 건넸다.

    “보통 기업에 속해서 전담 팀을 꾸리는 팀장은 고정 급여에 인센티브를 가져갑니다. 주궤 씨에게도 그게 약속되어 있었죠. 전 그 대가로 장기 계약을 권했고요.”

    “미래에 말이죠. 제가 전담 팀장이 되면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거 다 잊으세요. 다만, 한 가지만 확실히 합시다. 다른 회사에 갈 생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기서 나가면 그냥 0레벨 던전만 돌면서 제 하고 싶은 대로 살 생각이었습니다.”

    궁지에 몰렸을 때의 결정 능력이 뛰어나다. 쟁쟁한 이들 사이에 있었을 때 주궤는 쭈구리였지만 혼자 있을 때는 강력한 자아를 내비쳤다. 그래서 오히려 작은 우두머리에 어울렸다.

    ‘큰 우두머리는 될 수 없지.’

    쟁쟁한 이들을 아래로 둬야 하니까. 그는 촌장에 가장 어울리는 자였다.

    “전담 팀장 할 생각이시라면, 순수익의 25%를 가져가세요. 40만 원 벌면 10만 원 가져가는 겁니다.”

    “예? 그렇게 많이요?”

    “대신 2레벨이 되시면 안 됩니다. 레벨 오르면 한 달에 1레벨 두 번밖에 못 가시는 거 아시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하하.”

    2레벨 풀 장비를 못 갖춰서 아직도 옥시모론은 1레벨 던전에 도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개같이 돈만 생각하는 던전 기업이 모든 걸 독점하고 가격을 매기고 있어서였다.

    산박은 전과 다르게 진짜 제대로 1레벨 던전 전담 팀에 입김을 쏟아부을 생각을 가졌다. 전담 팀을 타고 달릴 기수가 제대로 된 놈이기 때문이었다.

    ‘2레벨에서는 이런 짓 못 하지.’

    주궤의 그릇은 작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1레벨 던전에서는 깡패가 될 수 있었다.

    “퍼센트로 주는 만큼 계약을 통해서 확실하게 안고 가고 싶습니다. 더는 던전을 공략할 수 없을 경우를 제외하고 30년입니다.”

    “헉.”

    거대한 세월에 주궤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산박이 거듭 강조했다.

    “순수익의 25%입니다. 거기에 던전 장비를 비롯한 건 회사가 내어 줍니다. 세금에 대한 관련 서류부터 팀원 관리까지. 그들이 가져가는 돈을 생각하면 25%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보통 N빵 하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 보면 회사 덕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은 욕심이 적다.’

    헌신적인 인간이다. 돈을 조금 덜 벌더라도 편해지고자 하는 자였다.

    “좋습니다.”

    단번에 주궤가 사인했다. 산박 또한 사인을 하고 서로 계약서를 나눠 가졌다. 그리고 단번에 악수를 했다.

    “나중에 팀장이 되어서 다른 회사 가면 안 됩니다.”

    “사장님이야말로 더 좋은 전담 팀장 찾았다고 절 내치시면 안 됩니다.”

    서로 빙긋 웃었다. 자신보다 대단한 강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용감해지지 못하는 주궤는 1레벨 전담 팀장이 될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쳤다.

    * * *

    충호 또한 분할 팀에서 활동할 사람을 구해 왔다.

    “김은섭. 나이는 25세. 하이브리드네요.”

    “정령 검사입니다. 상당합니다. 이런 사람이 왜 들어왔는지 이상할 지경입니다.”

    기뻐하는 충호를 보며 산박도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조사할 필요성이 있겠어.’

    쎄했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너무 작위적이었다. 그래서 의심이 삐쭉 튀어나와서 산박의 발에 걸렸다.

    “몇 번 1레벨 던전에 실패한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전력으로 보면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밖에…….”

    “재수가 없는 엘리트라…….”

    산박은 그 경력을 훑었다. 짤막하게 있었다. 총 세 번의 1레벨 던전 도전 그리고 세 번의 실패였다. 완벽한 성공을 하지 못하고 도주로를 통해서 도망쳤다.

    그런데도 클리어는 클리어였다. 그 덕에 그는 네 개의 1레벨 기술과 한 개의 순무, 두 개의 샤인(shine)을 보유하고 있었다. 샤인은 정령을 다루는 이들의 액티브 스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령을 통한 주문 체계였다.

    “기술이 많네요?”

    “예. 마음에 드는 기술을 위해서 좀 과다 투자했다고 합니다.”

    “어째서죠?”

    이상함에 산박이 말하자 충호가 웬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상으로는 완벽했는데, 하자가 있습니다.”

    “하자?”

    “너무 뚱뚱합니다.”

    “그래서 기술을…….”

    “예. 검사인데 생각 이상으로 몸이 둔하니…….”

    충호가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에 찍힌 사진을 보여줬다.

    “쩜 톤은 찍을 것 같은데요.”

    “138kg입니다. 대신 키는 185cm로 큽니다.”

    “그래 봤자 이렇게 뚱뚱한데 전력이 되겠습니까?”

    “본인은 그래도 가치가 있다고 여깁니다. 중보병으로 든든하지 않냐고 하더군요.”

    “던전이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전투만 하면 끝! 그런 건 고레벨 던전으로 갈수록 멀어져 간다. 아니, 당장 0레벨만 해도 다수와 싸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던전 사용자가 앞으로 싸우면서 마주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을 미리 보여주는 셈이었다.

    산박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이내 충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을 저에게 추천한 이유가 있습니까?”

    “조용조용합니다, 사람이. 근데 전사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할 땐 하는 놈이라는 거죠. 무엇보다 하라는 건 다 하고, 노력도 부단히 합니다. 놀기도 놀지만…….”

    “갈팡질팡하시네요.”

    “음. 요는 어느 정도 하는 놈이라는 겁니다. 미래를 생각한다는 거죠.”

    “살은 안 빼면서요?”

    “그게 사람 아닙니까. 유들유들한 사람이라 팀 내에 녹이기도 쉽습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 사람이죠.”

    산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의 기술과 주문을 살펴봤다. 세 번 실패한 놈을 쓰겠다는 충호의 판단은 진짜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큰 실패 없이 남을 나무라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충호는 A급 전사. 평범하게 대하면 안 되는 자였다.

    기본 검술은 은섭의 기술 가챠에 걸려든 육체 운용술이었다. 기본 박투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싸움에 도움을 주는 기술이었다. 꾸준히 수련해야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기본 바람 정령술과 바람의 그릇은 모두 정령과 관련된 기술이었다.

    “바람의 그릇은 뭐죠?”

    “바람 정령을 담을 수 있는 몸속에 있는 그릇입니다. 이를 통해서 정령과 계약도 할 수 있고 하나의 정령과 계속 함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순무로는 잰걸음 회피(Hurried steps Evasion)가 있었다. 다만 이건 김은섭이 사용할 수 없었다. 덩치가 크고 체중도 무거워서 그냥 잰걸음이지 회피가 될 수 없었다.

    ‘개그일 뿐이지.’

    체급에 맞지 않는 순무는 독이었다.

    샤인은 겨울바람과 동굴 바람이 있었다. 둘 다 시기적절하게 사용한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령 주문이었다.

    ‘어지간히도 주궤를 못 믿는구나.’

    하자가 있어도 경험자를 데려온 것만 해도 충호의 고민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또한 산박의 대답에도 회의감을 지니고 자신의 행동을 강행했다. 우직하지만 어리석다. 의도를 숨기는 데 맹탕이었다.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 것도 있습니까?”

    “네. 애초에 두 명을 데려가야 하니까요.”

    “그 사람 건 볼 필요도 없겠네요.”

    “네?”

    “나머지 한 자리는 제가 갑니다. 두 번밖에 못 도와드리지만 주궤 씨가 두 번 1레벨 던전 클리어하면 그나마 괜찮아질 것 아닙니까?”

    “저야 좋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그래도 괜찮습니까? 많이 바쁜 것 같으시던데.”

    “바쁘다고 서 팀장이 어려워하는 걸 그냥 방관하면 그게 사장입니까?”

    충호가 기분 좋게 웃었다. 윗사람에게 인정받는 기분은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위태하게 걸어가야 했다. 천천히 올라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사장님이 함께해 주신다니까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하하하!”

    충호의 웃음소리가 사장실 밖으로까지 들려왔다.

    산박, 충호, 주궤, 은섭. 분할 팀 같지 않은 분할 팀이 1레벨 던전 공략을 준비했다. 이미 2레벨이 되었지만 산박은 다시 실전 경험을 끌어 올리면서 그날을 기다렸다.

    * * *

    군산. 오식 선박의 사장, 방침두(邦針痘). 대전을 비롯한 전라도에 다양한 물류를 옮기는 선박업주들 중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리는 자 중에 하나다.

    그는 북적거리는 한식당 홀을 지나 조용한 룸에 들어갔다. 상대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오랜만이야, 양 부장!”

    “하하하하!! 어떻게 더 젊어지셨습니다, 방 사장님.”

    양귀문이 벌떡 일어나서는 그대로 고개를 90도로 숙였다. 던전 대전 상인 공회와 오식 선박의 관계는 깊었다. 그 다리 역할을 하는 게 양귀문이었다.

    운이 좋았다. 방침두는 양 부장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양귀문이 부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의 입김 덕분이었다. 가좆 같은 분위기의 던전 대전 상인 공회에서 외부인이 부장을 단 건 양귀문 혼자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엄청난 대외 활동을 보이고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회장이 열두 명이나 되는 상인 공회의 빈틈을 여실히 이용하고 있는 수완가이기도 했다. 그 빈틈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방침두와 밀수 사업도 하고 있는 게 그였다.

    식사하며 근황을 나눴다. 차 한잔 마시고 그다음에 디저트와 술이 올라왔다. 양귀문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조사를 하나 부탁하고 싶습니다.”

    “조사?”

    “예. 신경 쓰이는 던전 사용자가 있는데 이번에 던전 기업도 창업하고 제법 잘나가고 있습니다.”

    “그자를 조사해 달라는 건가?”

    방 사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찮은 일이었다. 자신 말고도 할 사람이 많았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게. 빙빙 둘러서 말하는 거, 좋아하지 않아.”

    “그자가 검은 슬라임을 대량으로 구매하고 있습니다.”

    “음?!”

    돈 냄새. 돈 냄새가 났다.

    “이거 이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가져와도 되나? 상인 공회는?”

    “웃대가리가 열두 명인데 조용히 조사하겠습니까?”

    그 말에 방침두가 껄껄 웃었다.

    “그렇긴 그렇다! 전봇대에서 정보원 열두 명이 서로 말싸움할 테니, 야밤에도 시장 바닥이 될 거다! 하하하하!”

    그가 박수까지 쳐대었다. 거기에 단번에 벨을 눌러서 술을 다섯 병이나 더 시켰다.

    “여기는 전통주를 써서 몸에도 좋아.”

    단번에 전통주가 좌르륵 올라왔다. 상업에 사장 노릇 하는 사람이라 쓸 때는 쓸 수 있는 돈이 있었다. 만 원의 마진을 주는 물건을 하루에 서른 개만 팔아도 한 달에 900만 원 돈이 들어오는 게 상업이었다.

    “자자, 들이켜, 들이켜. 오늘 이렇게 중요한 걸 이야기했는데, 안 취하고 배기겠어?”

    술을 마시면서 양 부장은 검은 슬라임 물량 조사에 따른 수많은 의심과 음모를 입에 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사장님. 열 명도 안 되는 던전 기업에 무슨 그렇게 많은 검은 슬라임이 필요합니까? 예? 아무리 눈을 감아 달라고 해도 제 앞에서 이렇게, 이렇게!”

    그가 손을 허공에 휘적거렸다.

    “안 보고 싶어도 봐달라고 이 난리를 피우는데 어떻게 안 보겠습니까?”

    “그렇지! 그렇지! 알아서 잘 가렸어야지. 보여주는 놈이 나쁜 게지.”

    100:10:30:30의 비율로 만들어지는 잔잔벼락의 무기는 검은 슬라임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레시피를 지니고 있었다. 양귀문 부장이 그 특별함에 신경을 안 쓴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다만 산박은 그가 그렇게 꼼꼼한 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는 일이 워낙 많고, 향락도 즐기는 자였기 때문이다. 술 좋아하는 놈치고 꼼꼼한 놈은 없었다. 실제로 양 부장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양귀문 부장의 혹독한 갑질에 혹사당하는 다른 사원의 보고가 있었다. 물론 그 사원은 던전 대전 상인 공회의 직원이 아니었다. 양귀문이라는 개인에게 소속된 프리랜서였다.

    정말 미친 짓이었다. 불법을 남에게 관리하도록 하다니, 산박이 상상할 수 없는 정신 나간 짓이었다. 그러나 양귀문은 그걸로 많은 시간을 절약하고 더 많은 불법을 저지를 수 있었다.

    “내가 한번 조사해 보지. 그리고 만약 그게 돈 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면 자네는 진짜 대박 하나 터지는 거야.”

    “헤헤헤. 그저 잘 부탁합니다.”

    “이런 정보까지 주니까 내가 매 명절 때 한우부터 돈까지 두둑하게 주는 것 아니겠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아닙니다. 저야말로 오래오래 사장님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휴가 나오면 나한테 연락해. 제주도에 호텔 하나 있는데, 진짜 진탕으로 놀 수 있어. 러시아, 일본, 필리핀, 멕시코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봐야지. 그리고 약도 좀 하고.”

    단번에 양귀문의 표정이 밝아졌다. 최고의 쾌락이 바로 마약이었다. 돈 많은 이들의 가장 끝장 문화가 마약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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