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270)
  • 126화

    * * *

    용아연, 박예준은 조용히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안달이 나서 맥주와 치킨을 시켰다. 배달이 도착함과 동시에 마트쟁이의 연락이 도착했다.

    “지금이 몇 시야? 왜 이렇게 보고를 안 해? 고객이 우습게 보여?”

    ―고객은 무슨! 확실하게 잡았다. 다시 한번 올 거야. 예준이는 완전히 망했으니까! 아연 너가 나서야 해. 바로 사장과 이야기를 해야 저자세로 나오겠지.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거든. 끊어. 확실하게 정리하고.”

    대답은 없었고, 바로 전화가 끊겼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다.

    “뭐래?”

    “물었대.”

    그 말에 박예준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자존심 챙기는 놈도 돈 앞에서는 별수 없지.”

    “정장에 올백 머리 하고 다니는 놈인데 어련할까? 차가 없는 게 이상할 정도야.”

    “바로 3억 무이자를 부르는 놈이야.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랑 달라. 미친놈이지.”

    “어차피 도장만 찍으면 끝날 일이야.”

    시작이 힘들지 한번 계약서에 도장이 찍히면 그때부터 본색을 드러내는 게 이 바닥의 사기였다. 전입 신고 전날에 바로 돈 땡기는 전세 사기랑 다를 바가 없었다. 도장이 찍히면 그만이었다.

    도장 찍기 전에는 결코 그 이빨을 들켜서는 안 됐다. 산박의 주위를 서성거리는 하이얀 던전 투자사의 행동 진의를 깨닫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그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모든 건 도장 하나 쿵 찍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조용히 엎드려 있던 괴물이 도장을 쾅 찍는 순간 그 모습을 수면 위로 드러내며 단번에 상대를 집어삼키는 것이 바로 ‘사기의 본질’이었다. 황당하게 당했다. 눈앞에서 코가 베였다. 그런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프리미엄 미팅 1:1의 방식으로 도장 찍게 만들게.”

    용아연이 호언장담했다. 예준과 산박은 부딪쳐서 쫑 났지만 아연과 산박은 그래도 훈훈했다. 산박을 단번에 그들 사무실로 오게 했다. 그렇기에 이번에야말로 아연이 나서서 도장을 찍게 할 심산이었다.

    “또 무이자 3억 투자하면 나중에 상장해서 주식으로 되갚아 주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면서 도장 찍게 하는 거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겠어?”

    그들은 그 외에도 다섯 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타입의 계약서를 준비했다. 모두 산박을 겨냥한 정신 나간 계약서들이었다. 그가 연기한 모습은 그런 계약서를 만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3억을 빌려주고 1년 무이자지만 투자사의 사정에 따라서 이를 ‘법정 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음흉한 한 수였다.

    산박이 민사를 걸면 오히려 땡큐였다. 돈이 바짝 말라 있을 게 뻔했기에 12개월 내내 민사 법정에서 시달리게 하면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채를 끌어다 법정으로 나가는 건 미친 짓이었다. 법정 싸움도 돈이 있는 사람이나 가능했다.

    그들이 온갖 개짓거리를 하고 있을 때, 산박은 그다음 날 다시 마트를 찾았다. 이미 그곳은 휑했다.

    ‘이것들… 완전히 미쳤구나.’

    텅텅 빈 넓은 매장을 보며 산박은 혀를 찼다. 그는 부동산을 통해서 그 땅 주인을 확인한 다음 동사무소에서 확인을 해보았다. 어리숙한 공무원은 죽은 사람이라고 대답해 줬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이미 충분한 정보를 얻었기에 산박은 서둘러 도망치듯이 동사무소를 나왔다. 그 눈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놈들은 지금 자신을 아가리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구나.’

    첫 단추부터 잘못된 것을 산박은 인정했다. 그가 올가미에 목이 걸릴 것이라고 상대는 지금 맹신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완벽한 연기가 그들을 자신에게 집착하도록 만들었다.

    ‘던전 사용자는 돈이 되니까.’

    일용직 노동자를 알선해서 사람 장사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돈이 되는 것이 던전 사용자를 이용한 사람 장사였다. 한번 돈으로 코가 꿰이면 아주 쪽쪽 빨아먹을 수 있었다. 던전 경제는 불패(不敗)의 경제다. 그곳의 노동자인 던전 사용자는 일감이 떨어지지 않는 노동자들이었다.

    ‘죽인다. 살해한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들을 죽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검증은 필요하지.’

    살인 멸구(殺人滅口)라는 말이 있지만 그건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이었다. 사람은 죽는 것만으로도 빈 공간이 생긴다. 사회에 틈이 생기고, 그건 바닥이 꺼진 낭떠러지와 같았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서 같은 인간이 죽어서 사라진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증거였다.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데 아무런 영향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살인은 가장 후순위의 해결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산박은 높은 지혜를 통해서 직관적으로 죽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다리를 두드리듯이 자신의 판단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다.

    집으로 돌아간 산박은 냉큼 노트를 펼쳤다. 펜으로 몇 번을 끄적이고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이내 술을 찾았다. 커피를 비롯한 각성제도 꺼내 왔다. 이번에는 오랜 고민이 필요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돈에 미친 놈들이다.’

    돈과 관련된 일에는 악착같은 놈들이었다. 편하게 버는 돈 맛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이었으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넌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에게서 도망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경험도 많다.’

    역순으로 짚어 가면 그것이 명확하게 보였다. 마트에서 받은 팸플릿, 다른 사람을 내세워서 투자를 언급하며 간보기, 그 전에는 단순 문자.

    ‘미팅으로 간다면 아마 여사장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무슨 수를 써서든 일단 도장을 찍게 할 것이다. 정말 막 나가는 놈들이라면 강제로 엄지손가락을 잘라서라도 인을 찍게 할 터였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대한 제국의 서울은 ‘판타지 쇼크’로 폐허가 되었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악인이 더 많았다. 책임을 질 줄 아는 선인들은 모조리 그 지옥도에 남았다. 그리고 죽었다.

    모든 것이 타락한 세상이었음에도 대한민국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건 악인의 자손 중에서도 선인이 되는 자들이 많아서였고 악인에게도 악인 나름의 상도덕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반대로 상도덕 없는 놈들도 있었다.

    ‘신생 던전 기업을 노리는 만큼 이놈들은 상도덕이 없다.’

    소규모로 움직이기 때문에 잘 잡히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인적 사항을 도용하는 것이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었다.

    ‘노련하다.’

    그렇기에 경험이 많은 놈들이었다. 이런 자들과 장기적으로 싸운다는 건 산박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쪽이든 피해를 보기 때문이고, 더더군다나 산박은 들키면 안 되는 사업이 있었다. 잔잔벼락의 무기 사업부터 시작해서 개인 낚시터에서 기르고 있는 ‘물의 묘목’ 또한 숨겨야 하는 힘이었다. 그곳에서 산양삼도 키우고 있어서 더더욱 들키면 안 됐다.

    ‘놈들이 내 뒷조사를 제대로 시작하는 시기는 이번 팸플릿 미팅이 파토가 났을 때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건 드루이드 사과 과수원이다. 꼬박꼬박 로열티가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밭작물과는 다르게 매달 사과를 출하할 수 있어서 매달 로열티가 들어오고 있었다. 특징짓기 아주 쉬웠다.

    ‘장 노인에게도 폐를 끼치게 되겠지.’

    그건 빚이 될 공산이 컸다. 그렇게 되기 전에 해결을 봐야 했다.

    그 해결 방법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아직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 보나 하자가 없었다. 계약서 사본을 들고 가도 피해자가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합법적으로 놈들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산박이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피해자가 되더라도 합법적으로 놈들을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세월이다. 그 전에 산박의 사업이 피를 볼 것이었다.

    ‘그렇게까지 끌고 가면 놈들은 합의를 보자고 하겠지.’

    우리도 실수한 게 맞지만 너도 지킬 게 많다. 그러니까 서로 없던 일로 하자.

    ‘말은 그렇게 하겠지만, 내가 벌이는 사업은 돈 냄새가 지나치게 크다.’

    드루이드라는 것만으로도 산박에게 들러붙는 날파리가 생길 정도였다. 이들 또한 산박의 직업 때문에 더 파고들고 더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모든 게 산박에게는 불가능했으므로 결국 산박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사각, 사각.

    노트를 통해서 생각을 적은 산박이 이를 다시 한번 훑었다.

    ‘놈들도 범죄자다.’

    대놓고 다니지 못하고 숨어서 조용조용히 살아가는 놈들이었다. 그래서 처리하기도 수월했다. 자신들의 ‘진짜 신분’을 노출하지 않아서 눈에 띄지도 않고 있었다. 시체가 되어도 찾는 이 하나 없겠지.

    범죄자를 죽이는 건 정말로 쉬운 일이었다. 산박은 그들이 범죄자라는 것에 감사했다.

    물론 그들이 죽으면 슬퍼할 이들이 있을 수 있었다. 범죄와 관련 없는 배우자와 자식들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찰들은 곧 깨닫게 될 것이었다. 그들의 죄를. 정황상 깨닫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더 조사한다면, 그건 산박이 운이 없는 것이었다. 박봉에 신념을 지닌 경찰관과 마주하게 되는 건 그냥 복불복이니까.

    산박은 오랜만에 자신의 장비를 꺼내기 위해서 산으로 향했다. 세종시에서 부동 지구로 가기 위해서는 야산 하나를 넘어야 했다. 그곳의 중턱. 길도 없는 곳에 나있는 나무 위의 선명한 흉터는 짐승처럼 흉한 발톱에 뜯긴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먼저 짐승이 발톱을 손질하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딱 사람의 눈높이, 정확히 말하자면 산박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었고 나뭇가지 곳곳에 무당이 한 것처럼 붉고, 노랗고, 푸른 온갖 천이 길쭉하게 늘어져서 을씨년스러웠다.

    그렇게 화려하게 위장한 나무의 바로 뒤에 있는 나무의 뒤편을 팠다. 클래식한 목함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멋스러움이 넘치는 암살자 따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칼로 사람을 죽여서 돈을 버는 자들이다. 인간 백정이라는 말처럼 구질구질했다.

    산박은 검은 비닐봉지를 꺼냈다. 몇 겹이나 싸인 검은 비닐봉지를 벗겨내고, 물건을 일일이 확인했다.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손질을 통해서 날카롭게 벼리거나 아예 새로운 것으로 만든 온갖 장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조심스럽게 따로 검은 봉지를 추가로 내어 단단히 봉해둔 것을 꺼냈다.

    ‘석궁.’

    머리에 명중만 한다면 한 방이었다. 소음도 총보다 매우 조용한 편이었다. 사제 석궁으로 불법적인 루트로 밀수입한 석궁이었다. 쉰여섯 개로 나누어져 있는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물건이었다.

    ‘짱깨 새끼들. 이런 거에는 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까.’

    사람 죽이는 인간 백정이 가장 많이 있는 곳이 중국이었다. 그곳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살인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대한민국은 치안으로 봤을 때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산박은 가장 애용하는 석궁을 챙기고 길이가 15cm 간격으로 차이가 나는 롱 소드를 여러 개 챙겼다. 방패는 없었다. 근접전을 했을 시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상대를 무조건 죽여야지만 생을 도모할 수 있는 게 암살자였다. 방패는 사치였다.

    롱 소드 세 자루 중 한 자루는 던전 장비였으며 무려 3레벨짜리였다. 양지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죽은 사람에게 특수한 검흔을 남기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과학 수사를 생각하면 쓰는 것 자체가 대단한 만용이었다.

    산박은 혁대를 꼼꼼히 확인하고, 복장도 흠이 있는 곳을 찾았다.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모두 등산 배낭에 집어넣은 뒤 흔적을 지우고 하산했다.

    하이얀 던전 투자사가 조용히 발톱을 갈며 상대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를 기다리는 짐승이라면 암살자는 나무 위로 올라가 물 마시는 사슴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짐승이었다. 짐승과 짐승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무는 것이었다.

    ‘놈들은 내가 짐승인 걸 모른다.’

    고로, 이 싸움은 우위를 지니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산박이 타깃으로 잡은 인물은 총 셋. 마트에서 수작질을 건 짐승, 계약서로 장난질하려고 한 남자 짐승, 그 모든 걸 계획하고 뒤에서 여차하면 목을 물어뜯을 준비를 한 여자 짐승이었다.

    * * *

    킁킁.

    어디선가 피 냄새가 맡아졌다. 이시은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는 야시경부터 챙겼다. 이런 기회를 놓칠 여자가 아니었다.

    시은은 검은색 일색의 복장에 자신의 피부 톤과는 과하게 맞지 않는 어두운 색조의 비비 크림을 얼굴과 목에도 발랐다. 위장 크림을 바르지는 않았다. 그건 과하다. 대신 검은색 가죽 장갑을 챙겼다.

    그녀는 산박을 미행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대신 시은은 하이얀 던전 투자사를 미행했다.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어디서 그들이 죽을지’를 예상하는 건 그녀에게 어렵지 않았다. 산박이 돈을 위해서 사람을 죽였다면 시은은 충동을 해소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였다. 당연히 돈 받고 죽이는 것보다 살려고 죽이는 게 빈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양으로는 산박은 시은을 결코 이길 수 없었다.

    철컹!

    어둠으로 가득한 건물 내부의 가장 높은 옥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쇠도 없이 철사로 단번에 돌린 시은이 거칠게 문을 열었다. 강한 바람이 크게 불어왔다.

    그녀의 눈에 세종시 도심의 중심에 있는 오피스텔이 담겼다. 평수만 해도 52평이나 되는 곳이었다. 하이얀 던전 사업이 얼마나 많은 신생 던전 기업을 잡아먹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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