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270)
  • 122화

    * * *

    4개월. 강합이 결국 던전 공략을 포기하는 순간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는 다른 팀원은 찾지 않고 산박을 불렀다.

    ―술 한잔 하고 싶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때가 왔다.’

    언제 오나 싶었다. 요즘 시대에 화끈하게 끊지 못하는 사람은 손해만 엄청나게 보는데, 강합은 4개월을 버텼다.

    산박은 그를 매정하게 걷어차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람이 필요했고, 던전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강합은 그런 조건에 잘 부합하는 인적 자원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전사’다. 1레벨 던전 사용자라고 해도 현실에서는 고레벨 장비를 쓸 수 있었다. 레벨이 의미가 없었다. 그게 유의미한 곳은 던전뿐이었다.

    산박이 도착했을 때 이미 강합은 소주 한 병을 혼자서 비워낸 상태였다.

    “오셨습니까.”

    “뭘 이렇게 급하게 마셨습니까.”

    산박이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지닌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깨를 두드리며 짧게 스킨십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런 자잘한 것도 마음 깊숙한 곳에 도움이 됐다.

    “저, 포기했습니다. 흐흐.”

    울 듯 웃을 듯 흘려내는 소리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산박은 잔을 들어 올렸다. 강합이 잔을 들어 올리자 제법 강하게 부딪쳤다.

    쨍.

    움찔.

    큰 소리에 그가 놀랐다. 산박이 웃었다.

    “포기는 무슨 포기입니까. 그냥 던전 공략을 그만둔 거지 않습니까. 그게 포기입니까? 아니죠. 그만둔 거죠.”

    말장난이었지만 강합은 감동받은 듯했다. 잔을 손으로 문질러 대며 주저리주저리 술주정을 해대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전사 직업’을 얻었을 때는 더더욱 자신감이 붙었죠.”

    “강합 씨 탓이 아닙니다. 그저,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산박의 말에도 그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기 바빴다.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고, 그곳에 산박의 대답은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강합이라는 던전 사용자의 행보를 말하고 난 뒤에는 거기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미래에 대해서 말했다.

    “동기 형님이 계십니다.”

    “던전 훈련소에서요?”

    “예.”

    던전 사용자의 동기는 대개 0레벨 던전 공략을 위한 교육소, 학원의 동기들이었다.

    “부산 쪽에서 젊은 친구들 상대로 제법 깔끔한 민박집을 여럿 운영하시는데 그거 도우면서 목돈 마련해 보라고 하더군요.”

    산박은 작게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호응해 줬다. 산박이 책임진다고 했지만 아마 빈말로 알아들은 듯했다. 다음에 밥이나 한번 먹자는 말이나 같았다.

    ‘부담도 가졌겠지.’

    오랜 정신과 치료, 거기에 비보험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신과 치료에 성인 남성의 보험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무슨……. 그리고 놓아줄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같이하자고요.”

    강합의 깔끔한 마무리는 오히려 산박이 그를 다른 분야에 집어넣도록 만들기 좋았다. 그래도 팀장인데 쓸데없는 청탁 없이 자기 지인 찾아서 부산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했으니, 산박 같은 인간에게 강합은 쓰기 좋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산박이 끊었다.

    “환도가 서만주에서 제법 잘 팔린다는 거 아십니까?”

    “네?”

    “물 구하기 힘든 게 만주라서 철강 쪽이 발전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생산해도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소리까지 듣습니다. 그러니 철강 기업 싸움에서 제대로 한 판도 못 따낸다고요. 지금 폰 켜서 환도가 서만주에서 얼마 정도 팔리는지 보세요.”

    강합이 그 말에 따랐다. 제법 마진까지 붙어서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던전 경제 덕분에 서만주 주제에 달러를 쓰는 곳이었다. 최근 정치는 친미 성향이 짙다. 돈에 정치까지 이끌리는 건 일반적이었다. 그 경향은 만주에서는 절대적이다. 판타지 쇼크 이전에는 도시 붕괴화가 진행되던 국가였다. 오히려 던전 경제 덕분에 살아나고 있는 국가 중 하나였다.

    “우리나라 환도가 서만주에서도 잘 팔리네요.”

    강합의 얼굴에 제법 웃음기가 살아났다.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굴었다.

    산박은 잔잔벼락의 환도를 국내에서 팔 생각을 했지만 박조조 덕에 서만주로의 유통 루트를 뚫었다. 해외인 탓에 반도 사정에는 어두워서 아주 안전했다.

    “거기서 1레벨 던전 장비, 잔잔벼락 무기가 얼마인지 알아보세요.”

    “잔잔벼락요? …….”

    검색하던 강합이 이내 답했다.

    “대충 10만 원 내외로 팔리네요.”

    “수요는 항상 있죠.”

    “중고 사기가 많아서……. 이거 제대로 된 가격처럼은 안 보입니다.”

    충전을 해야 하고 내구력이 잘 닳는 게 잔잔벼락의 무기였다. 사기 치기 딱 좋은 무기였다. 거기에 1레벨 던전 사용자는 숫자가 가장 많았다. 즉, 호구도 많았다.

    “거기에 진출할 생각입니다. 그걸 도와줬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어떻냐니……. 대체 무슨 사업을 구상하고 계신 겁니까?”

    산박은 잔잔벼락 사업에 대해서 말해줬다.

    “저, 강합 씨, 박조조, 매허망에 서만주 사람 하나. 이렇게 다섯이 핵심 인력입니다.”

    “유통은 계속 커질 거 아닙니까.”

    “그건 그 만주인이 잘하겠죠. 어차피 인력이 한정된 만큼 벌이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잔잔벼락 환도의 생산력은 강합과 허망에게 달려 있었다. 박조조는 들러리일 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박조조가 매허망을 끌고 왔고, 만주인을 하나 끌고 왔기 때문이었다.

    “수익은 비슷비슷하게 가져갈 겁니다. 그렇게 만들려면 강합 씨가 도와줘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돈 냄새……. 그런 건 아니었다. 강합은 꿈으로 여겼던 직업을 잃고 내려가야 했다. 그 전에 다가온 동아줄이었다. 안 잡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태산박이라는 남자와 계속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를 밀어주던 산박과 계속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게 남자로서 은혜를 갚는 일이라 여겼다. 정(情)이었다.

    하지만 산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냉철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따뜻한 면모를 보이기에 냉혈한은 아니었고, 종종 손익을 버리고 정과 인간관계를 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여름이라고 탄산음료를 1달러 높여서 파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잔잔벼락의 제조법 중 절반을 강합 씨에게 드리고 나머지 절반은 다른 이들에게 알려줄 생각입니다.”

    “그걸로 그들을 제어하자는 것이군요.”

    “강합 씨는 잔잔벼락 관리자가 되는 셈이죠. 동시에 제작자이기도 하고요.”

    강합이 묻지도 않았는데 산박은 그렇게 툭 내뱉고는 바로 돈 이야기로 넘어갔다.

    “만주에서 얼마에 팔든 상관없습니다. 10만 원으로 정하고 그 이상의 가격에 팔면 만주 사람 돈입니다. 욕심을 버려야지 오래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다섯 명이 연관되어 있으니 적어도 자루당 2만 원은 먹겠군요.”

    10만 원을 무식하게 2만 원씩 나눠도 열 자루 팔면 두당 20만 원씩 가져간다. 서민 눈알 튀어나오는 수익이었다.

    “박조조는 만 원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제 덕을 많이 보고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그 계산법은 좀 틀렸죠. 환도가 3만 원은 하는데요.”

    “7만 원을 나눕니까? 그럼 좀 짜게 느껴지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강합은 술이 당기는지 술을 찾았다. 한 자루를 팔면 적었지만 열 자루, 백 자루를 팔면 확 달랐다. 무려 천만 원이었다. 수요가 많기에 안 팔릴 걱정도 없었다.

    ‘제작법도 반 갈랐기에 배신자가 생길 리도 만무하다.’

    재료 중 가장 많이 필요한 검은 슬라임은 양 부장에게서 사고 그 외는 강합 하나, 박조조 하나 등 나누어서 수급하면 그만이었다.

    “트럭도 모셔야겠지만, 괜찮으시죠?”

    “트럭 상인처럼 안 몰 테니 상관없습니다. 재료 수급 때문 아닙니까.”

    “예. 한 사람에게 다 맡길 수는 없으니까요.”

    순식간에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동시에 산박은 겁을 주기도 했다.

    “거위의 배를 가르는 짓이 가장 멍청합니다. 잘 알아들으실 겁니다.”

    “재료를 빼먹으면 기업한테서 버림받을 뿐이죠. 그걸 누가 모르겠습니까.”

    걷기 불편할 때나 연금이 필요할 뿐이다. 젊어서는 일이 곧 재미였다.

    던전 사용자의 꿈을 포기한 강합과 트럭 상인 박조조를 비롯한 총 5인으로 사업은 궤도에 빠르게 올라갔다. 박조조의 전화는 하루도 빠짐없이 왔는데, 생산량을 늘리고 싶어서였다. 어지간히도 달아올라 있었다.

    ‘딱 강합이 와줬다.’

    산박은 10만 원의 매출 중 2만 원을 가져가게 되었다. 박조조가 가장 낮은 배분을 받았다. 그런데도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땅 파봤자 만 원도 안 나온다. 환도를 내륙에서 서천 창고로 옮기는 데 그렇게 받으면 누구든지 웃음꽃이 필 것이었다. 서민이기 때문이다. 욕심이 적었다.

    반면 산박은 던전 사용자다. 던전에 들어가면 현실에서 손을 떼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렇기에 이런 수익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상대는 자신에게 의존적이어야 했다.

    강합이 만들어서 미리 증류수를 조금 넣어 섞어놓은 액체에 매허망과 박조조가 나머지 작업을 했다.

    순식간에 군산에서 수송된 환도는 서만주 자치국의 항구 중 하나인 대련 항구로 향했다. 그 배에는 산박이 타고 있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대련에 온 이유는 만주 쪽 사람이 그와 한 번은 만나야겠다고 요청해서였다. 이를 거부할 명분이 산박에게는 없었다. 만주 사람의 이름도 알고 싶지 않았고 자신을 노출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결국 만나기로 했다.

    “순중가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누가 태산박 사장입니까?”

    “접니다. 반갑습니다.”

    순중가는 산박과 악수하며 그를 껴안았다.

    “덕분에 제가 살길이 트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투박한 한국어였다. 하지만 절로 정이 느껴졌다. 산박은 그와 술을 걸치며 온갖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 또한 많은 걸 떠들어 대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 바닥의 칼 밥 먹고 사는 놈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람 죽이고 감방 가고, 나와서는 큰돈 먹는 놈들이었다.

    “단순히 술만 마시자고 만나자고 한 건 아닐 테고, 할 이야기가 따로 있죠?”

    “예. 이 서만주에는 유툼(Utum)이라고 부르는 놈들이 있습니다.”

    “유툼.”

    “가게를 지켜주고 보호세 걷어 가는 조폭입니다. 던전 사용자들에게서도 보호세를 걷는 막장인 놈들이죠.”

    미친놈들이다. 그만큼 서만주의 사람값이 낮다는 뜻이었다. 단검 하나 쥐여주고 부모에게 돈 제법 들려주면 사람 찌르는 게 쉬워졌다. 아니, 오히려 즐기게 된다.

    “돈만 주면 문제가 없다 이 말입니까?”

    “예. 돈을 안 주면 아주 골치 아픈 놈들입니다.”

    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만주의 막노동꾼이었다. 그래서 서만주의 카르텔인 유툼에 대해서 잘 알았다. 포악하지만 건들지만 않으면 된다. 대신 건들면 끝장을 본다.

    그가 이야기를 조금 옮겼다. 왜 유툼이 무서운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다.

    “만주에서는 성씨를 말하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째서요?”

    “제법 큰 마을 하나가 통째로 같은 성씨를 사용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 말에 산박은 혀를 내둘렀다. 진짜 말도 안 되는 혈연이 마을 경영에 큰 영향을 끼칠 듯했다.

    “그럼 이렇게 큰 항구 도시도 예외는 아닌 겁니까?”

    “여기는 그래도 성씨가 제법 많습니다. 그래도 굵직합니다. 그래서 던전 물품을 많이 팔다 보면 유툼이 저한테 올 수 있습니다.”

    돈 쏟아내는 유통 라인을 안 잡으면 병신이다. 그리고 그들은 병신이 아니었다. 그가 산박을 보자고 한 이유이기도 했다.

    “전 한국에서 활동해서 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어요.”

    “예. 저도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단지 지키고 싶어서입니다. 그저 머릿수만 채워 주시면 됩니다. 될 수 있으면 던전 사용자라는 것도 보여주면 더 좋습니다.”

    중가는 조금 불안한 눈치였다. 하지만 산박은 자신을 노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트럭 타고 좀 멀리 가는 건 안 됩니까? 횡족들이 사는 곳에 판다거나…….”

    “바이족 말입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그놈들은 이슬람교도들입니다. 오히려 유툼한테 돈을 바치는 게 낫습니다. 돈 때문에 사람 죽이는 것보다 무서운 게 종교를 이유로 사람 죽이는 놈들입니다.”

    그는 횡족이라면 정말 치를 떠는 듯했다.

    이야기가 제자리다. 이에 산박은 그가 자신을 너무 얕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변명 저 변명 할 거면 언급해서는 안 됐다.

    “순중가 씨, 이런 일로 절 불러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저는 그냥 제 상품 팔아줄 사람을 찾을 뿐입니다. 중가 씨가 어렵다고 하면 그냥 다른 사람 찾으면 됩니다. 무기를 바꿔서 카타나나 일본도 형태로 일본 쪽에 팔아도 상관없습니다.”

    “예?”

    그는 굉장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산박은 그가 다른 이에게 꿀을 제대로 대접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박조조 이 새끼가 사람 하나 병신으로 만들어 놓았군.’

    거리가 멀기 때문에 관계를 원만하게 하려고 대접해 놓았는데, 순중가라는 놈은 엉뚱하게 자신의 가치를 대단히 높게 보고 있었다.

    “뱃길로 몇 시간을 달려와야 되는지 알고 얼굴을 보자고 한 겁니까?”

    산박이 일어났다. 그는 서둘러 돈을 벌어서 2레벨 풀 장비를 맞추고 2레벨 던전을 공략해야 했다. 지금은 1레벨 던전이나 돌고 있을 뿐이었다.

    “어어, 자, 자자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순중가가 의자를 뒤로 넘어뜨리며 격렬하게 일어나서 산박의 옷을 잡았다. 산박은 한숨을 내쉬면서 앉았다. 그제야 순중가는 자신의 처지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유통은 분명 큰 비중을 지니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 이 세계에 나지 않는 던전 상품이라면 더욱 그랬다. 거기에 자주 파괴되는 잔잔벼락이면 더더욱 그랬다.

    “한 사람 말만 너무 믿으셨습니다, 중가 씨. 앞으로는 조심, 또 조심하세요.”

    산박은 은근히 박조조를 깠다. 오히려 좋은 기회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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