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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0/270)
  • 120화

    산박은 곧바로 박조조에게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쇠뿔도 단김에 뽑아야 했다. 약속 날짜는 금방 잡혔다. 하는 일 때문에 일요일에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자식이 다섯이니 등골이 휘겠지.’

    그사이에 산박은 강합을 한 번 더 방문했다. 그는 정신 치료를 받는 상태였고, 다양한 약물 치료를 병행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집에 고양이도 키우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매우 독립적인 동물이라서 오랫동안 집에 혼자 놔둬도 괜찮았다. 넓은 모래 화장실과 자동 정수기에 조금씩 알아서 배식되는 배급기까지, 제법 투자를 한 것 같았다.

    ‘아직 미련이 대단하구나.’

    산박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희망에 들떠 있는 강합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절망하고 비비적거려야 던전 공략에서 건져내서 잔잔벼락 작업소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때가 언제 찾아올지 몰랐다. 산박이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고 있어서였다. 그저 두 번의 큰 고통이 강합을 좌절하게 하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조금 거리를 둬야겠어.’

    “앞으로는 자주 못 오게 되는데, 힘내세요. 저도 할 일이 점점 많아져서요.”

    “아이고, 전 괜찮습니다. 하하하!”

    그가 아주 밝게 말했다. 그 덕에 산박은 그가 오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졌다. 과한 웃음은 그만큼 큰 반동을 불러올 것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조용한 집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고양이 때문에 포기가 늦어지긴 확실히 늦어지겠어. 그가 조금이라도 현실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막차는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었다. 산박을 믿는 모습은 너무 무방비했다.

    산박은 그사이에 충호와 탕만과 따로 연락하기도 했다. 탕만의 청탁을 받은 충호가 주선한 자리였다. 아무래도 저번 던전 공략에 참가하지 못해서 행동에 나선 것 같았다. 산박은 그런 탕만을 잘 다독거려 줬다.

    그 이후에 다시 박조조와 만났다. 그가 산박을 픽업하러 와줬다. 날이 지날수록 커지는 ‘잔잔벼락’에 대한 기대심 때문이었다.

    “서천으로 안 가고 바로 군산으로 갑니다.”

    “친구가 거기로 옮겨서 삽니까?”

    “예. 서천이 예전만 못하답니다. 또 어차피 뱃일하고 있어서 옮기기는 옮겨야 했답니다. 와이프 고향도 군산이고요. 장인 장모가 애들을 같이 돌봐 주는데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이혼하네 마네 아주 난리였답니다.”

    애가 다섯이다. 절로 겁이 나는 숫자였다. 부모의 삶이 송두리째 변했을 것이었다.

    군산으로 가는 길은 막히지는 않았다. 대신 화물차가 많이 보였다. 군산 인근에 있는 카페에서 약속 시각 전까지 커피를 한잔 마시고 고깃집으로 향했다.

    “어이! 허망! 여기다!”

    박조조가 소리를 질렀다. 작업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다가오며 손을 흔들었다. 모든 게 굵었다. 그는 박조조와 해후를 나누고 모자를 벗으며 산박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시원하게 텅텅 비어 있었다.

    “반갑습니다. 조조한테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매.허.망이라고 합니다.”

    “태산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일단은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죠.”

    세 사람은 서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했다. 거기에는 산박도 포함되어 있었다.

    허허허, 하하하!

    첫 단추가 매우 중요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부터 경제 이야기도 빠짐없이 나왔다. 뉴스에서 대충 흘러 들어온 사고거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물론 허망의 자식 이야기도 했다. 어찌나 그렇게 다들 총명한지 난리도 아니었다.

    분위기가 제법 달아올랐을 때, 산박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어디까지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볼 생각은 있으십니까?”

    “아유. 그럼요. 이 친구한테 들어보니 안 들어오면 병신인 데다가 투자를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요.”

    말 그대로 일자리였다. 밤마다 쌍욕 날리고 술에 취해서 망나니짓을 하는 취객을 상대하며 운전대를 잡는 것보다는 다른 일거리가 훨씬 나았다.

    “가장 지켜야 할 건 최대한 조용히 일 처리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말에 모두 괜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불판의 불을 최소로 줄이고 남은 고기를 구석으로 밀어냈다. 박조조가 덧붙였다.

    “기업 놈들, 냄새 맡으면 지랄도 보통 지랄이 아닙니다. 법대로 하면 완전히 망하는 건 우리 쪽입니다.”

    그는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 겨레, 우리나라, 우리들. 있는 거라고는 산밖에 없고, 만주는 춥다. 그런 땅에서 제국을 일군 것이 한민족이었다. 그 이면에는 우리라는 무시무시한 동일성이 존재했다.

    “군산 쪽에 빈 창고 하나 잡아 놓으세요.”

    “서천은 안 됩니까?”

    매허망이 물었다. 군산과 서천의 땅값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박 사장 투자금이거든요.”

    그 말에 허망이 냉큼 태도를 바꾸었다.

    “그럼 군산이죠.”

    “뭐? 미쳤어? 서천으로 해.”

    “주변에 사람이 안 살면 좋겠습니다. 국도 옆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게 최고죠.”

    “그런 땅 넘쳐납니다. 펜션도 안 팔려서 공짜에 팔 지경입니다. 세금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

    “제주도도 힘들다던데.”

    바로 땅 이야기로 흘러가는 걸 산박이 제지했다.

    “땅 찾는 건 허망 씨가 해주고 돈 드는 건 조조 씨가, 땅 주인은 저로 할 생각입니다. 그래야 추적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발품 팔아 봤자 내부로 안 들어오면 작업하는 것도 모르게 하면 됩니다.”

    배합은 산박의 개인 낚시터 오두막에서 찾겠지만 본격적으로 만드는 곳은 군산 창고가 될 것이었다.

    “그러면 그냥 펜션 사서 내부를 리모델링하는 게 좋겠습니다. 커튼 치고 안에서 작업하면 모르겠죠.”

    “나쁘지 않네요.”

    건물 짓는 값도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것을 이야기했고, 그중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물색했다. 그다음에 계약서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함께 작성해서 세 부를 나눠 가졌다.

    “잔잔벼락의 배합을 알게 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하루라도 빨리 되기를 바랍니다.”

    문제 하나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 * *

    1개월 뒤에 산박의 개인 낚시터가 완성되었다. 공사 시간이 굉장히 빨랐다. 숙련된 이들이 돈도 많이 받으니 야간작업도 마다치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컨테이너 창고, 1층짜리 오두막, 낚시터를 두르는 2m짜리 철조망까지. 완벽했다.

    산박은 창고의 삶을 그만두고 거주를 그곳으로 옮겼다. 당연하게도 임대 문제가 남았는데, 장 노인은 쿨하게 계약서를 위약금 없이 찢어 버렸다. 그런 장기 임대보다 낚시터로 얻은 돈이 많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과수원까지 봐주는 산박한테 법대로 하자고 하기에는 장 노인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보글보글…….

    증류수가 끓었다. 그곳에 갈대 씨앗이 거품을 따라서 올라갔다가 다시 구석으로 내몰리며 안으로 들어가고 회전했다. 내부에 백색 빛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흔들리는 갈대 씨앗은 ‘높은 온도’를 에너지로 만드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확인.’

    산박은 이를 검증부터 먼저 했다. ‘에너지의 백색 빛’은 잔잔벼락의 색과 달랐다. 다른 변형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따뜻한 뿌리의 효과는 보온과 발열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갈대 씨앗과 호응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근데 청동 가루는 왜?’

    전도율? 하지만 번개를 일으키는 건 없었다. 결국 실험, 실험, 또 실험의 연속이었다.

    이것저것 조합한 결과 산박은 재료들이 지니는 용도를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모든 재료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우웅……!

    갈대 씨앗과 청동 가루가 함께 담긴 증류수에서 청백색 에너지가 발현되었다. 하지만 전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유리병은 얼마 가지 못하고 균열이 일어났다.

    쩌적……. 퍼석! 콰르르……. 치익.

    부서진 균열에서 증류수가 쏟아져 나와서 불을 꺼트렸다. 산박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갈대 씨앗만 끓일 때는 얻을 수 없었던 효과였다. ‘파괴’가 추가된 모습이었다.

    ‘에너지 브론즈(Energy Bronze)가 지닌 파괴 성질.’

    청동 가루가 첨가된 것만으로도 주변을 파괴하는 성질을 지니게 된 에너지를 갈대 씨앗이 토해냈다. 이건 매우 중요했다.

    ‘잔잔벼락은 단순 벼락이 아니다.’

    파괴의 힘이 깃들어 있는 파멸의 벼락이었다. 그 수준은 낮았지만 평범한 전류 마법과는 효율성 자체가 남다를 터였다. 같은 벼락이지만 생명체를 파괴하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고작 청동 가루를 섞어서 생긴 것이라 황당했다.

    ‘남은 건 벼락.’

    하지만 조합을 통해서는 벼락의 속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방법. 모두 빻아야 한다.’

    따뜻한 뿌리, 흔들리는 갈대 씨앗, 바짝 마른 검은 슬라임도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거기에 청동 가루를 뒤섞어야 했다. 전부 1:1:1:1의 비율로 뒤섞었다.

    낚시터 밖에 나와서 주변의 인화성 물질을 제거하고 실험을 진행했다. 따뜻한 뿌리를 4g만 넣어서 진행하고 싶었는데 발열 효과가 낮았다. 이 때문에 따뜻한 뿌리를 가루로 만들어서 발열 효과를 낼 때 어느 정도가 필요한지 하나씩 체크해야 했다.

    1g씩 따뜻한 뿌리 가루를 계속 첨가했다. 10g을 넘게 집어넣었을 때 고열이 발생함에도 감감무소식이자 다시 새로 다른 것도 첨가해 나갔다. 하지만 가루 상태에서는 발열되어도 흔들리는 갈대에서 에너지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증류수를 통해서 액체 상태로 만들어야 하나?’

    다양한 조건이 추가되고 제거되어 갔다. 나중에는 간단한 단검에 바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동시에 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파괴 성질을 지닌 에너지 브론즈가 단검에 스며들었다. 단검을 쥐고 에너지 브론즈의 형상을 떠올리자 단번에 빛이 단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벼락은 나오지 않았다.

    ‘된다. 나머지는 배합을 통해서 벼락을 만들어 내는 것뿐이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2개월이 걸렸다. 강합은 여전히 던전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다. 지건이 운영하는 드루이드 사과 과수원의 로열티는 7만 원으로 껑충 뛰었다. 점점 돈이 들어오고 있었다. 유통 기간도 길고 사계절 상관없이 A 등급의 사과를 내놓기에 어디서든 환영받았다. 특히 지방에서 많이 주문하는 편이었다. 소비가 엄청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때때로 마트에서도 오래된 과일을 파는 곳이 있기 때문이었다.

    2개월 하고도 둘째 주. 산박은 계속해서 실험을 이어 나갔다. 그의 눈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가장 먼저 흔들리는 갈대 씨앗과 따뜻한 뿌리 가루를 증류수와 함께 그릇에 부었다. 끓지는 않지만 열이 일정 온도에 도달하는 걸 기다리면서 산박은 말린 검은 슬라임 가루와 청동 가루를 섞었다. 이렇게 섞는 이유는 청동 가루가 흔들리는 갈대 씨앗 가루와 만나면 ‘파괴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었다.

    단번에 둘을 모두 한 그릇에 집어넣었다. 기포가 조금조금 올라오며 색 자체가 푸르게 변했다. 그 액체를 준비한 환도의 검신에 발랐다. 기포가 꾸준히 발생했다. 그 기포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10일.

    파지직!

    환도를 든 산박의 의지에 따라서 잔잔벼락이 환도에서 쏟아져 나왔다.

    ‘배합법을 알아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담겼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사라졌다.

    “빌어먹을.”

    배합법이 거지 같았기 때문에 욕지거리가 절로 뱉어졌다.

    말린 검은 슬라임, 따뜻한 뿌리, 흔들리는 갈대, 청동 가루, 증류수. 100:10:30:30.

    다른 것에 비해서 말린 검은 슬라임이 많이 들어가는 게 큰 함정이었다. 청동 가루와 검은 슬라임의 작용이 미미하다는 걸 높은 지혜로 간파하지 못했다면 평생 몰랐을 터였다.

    다만 그렇게 해서 ‘잔잔벼락의 액체’를 만들면 무기에 소모되는 액체의 양은 적었다. 즉, 어느 정도의 양을 유지만 한다면 힘을 무기에 스며들게 만드는 데에는 오직 시간만이 필요했다. 아주 경제적이었다.

    무기의 크기에 따라서 그 기간이 달라졌는데 환도의 경우에는 10일이 걸렸다. 이로 인해서 다른 무기도 예상할 수 있었다. 롱 소드는 대략 보름이고 대검 이상의 중병기는 한 달 이상이 걸릴 게 분명했다.

    ‘해외에 보낸다면 롱 소드를 해야 하고, 국내에서 소비한다면 환도로 족하겠지.’

    일단은 내수용 환도부터였다. 큰 가마솥에 잔잔벼락의 액체를 쏟아붓고 환도를 십여 자루 집어넣었다. 환도 주변에 기포가 일어났다. 힘을 흡수한 환도는 기포가 사라진다.

    소량 생산을 해본 산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완벽하게 힘이 깃들어 있었다. 다만 보이지 않는 파괴 속성 때문에 가마솥의 표면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무쇠로 했는데도 이러네.’

    한 번 할 때마다 가마솥을 갈아 치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럴 바에는 양은으로 만든 큰 대야를 가져오는 게 나았다. 무쇠 가마솥은 너무 비싼데 여러 번 못 버틸 것 같아서였다. 양은은 한 번 쓰고 철물점에 가져다주면 그만이었다.

    2개월 2주 만에 잔잔벼락의 무기 제조법이 산박의 손에 들어왔다. 높은 직관력과 지혜 덕분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팀의 1레벨 공략일이 잡혔다. 2레벨에 도달했는데도 아직도 1레벨을 돌고 있는 게 현재 팀 옥시모론의 위치였다. 2레벨 던전 풀 장비가 너무 비싸서 당분간은 계속 그래야 했다.

    돈이 없는 대부분의 던전 사용자들은 레벨 업은 쉬워도 다음 던전을 공략하는 건 어려웠다. 당장 1레벨만 해도 1레벨 던전 풀 장비를 맞추는 데 밥 안 먹고 모아도 세 달은 꼬박 걸렸다.

    ‘2레벨 풀 장비는 더하지.’

    1레벨이 5백만 원이면 2레벨은 1천~2천만 원이었다. 최소 5만 원에서 최대 수십만 원을 버는 1레벨 던전 사용자가 2레벨 던전 풀 장비를 맞추려면 몇 년이나 필요했다.

    그렇다고 2레벨 던전이 수익이 뻥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걸 취급하는 기업 논리에 의해서 정해진 가격일 뿐이었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던전 장비의 중고 거래와 개인 거래를 막는 법안까지 추진되었다가 전복되기도 했다. 돈에 휘둘리는 던전 사용자가 많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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