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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270)

1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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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박은 이시은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특별하거나 자신이 알아야 할 정보를 다시는 숨기지 말고 연락하는 게 산박이 건넨 계약서 내용 중 하나였다. 이는 시은을 경계하는 산박의 심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고로, 산박에게 보고를 하는 건 결코 빼먹어서는 안 됐다. 나중에 또 들킨다면 그다음은 없었다. 야심가에서 반골로 평가가 바뀌게 될 것이고 산박은 시은을 내칠 수밖에 없었다.

산박은 결코 반골을 자신의 품에 계속 잡아두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그만큼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권력을 뒤집으려는 반골 기질은 권력자가 되려고 하는 산박과는 정반대되는 성질이었다. 한 번은 용서할 만하다. 탐욕을 부린 거니까. 하지만 두 번은 아니었다.

[서리 해골 기술에 대한 전수를 통해서 네크로맨서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받게 되었어요. 햇수가 아직 1년을 넘기지 못해서 적패를 받을 수는 없었지만 가적패를 받아서 적패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어요. 이를 통해서 저는……]

‘빠르다.’

기업에 속해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바로 성장세였다. 남이 이미 닦아놓은 길이고, 다른 이들이 거뜬히 위로 올려줄 수 있었다. ‘신뢰’를 얻어야 하기에 제약이 있었지만 시은은 단번에 백패에서 적패 직함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해골학의 기술 중 하나를 개척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리 해골’. 슬라임 계열의 활동도를 단번에 낮출 수 있었기에 해골을 다루는 네크로맨서에게는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쓸 수는 있어야 했고, 이는 고레벨 던전 사용자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마녀의 싸늘한 증오를 배울 필요도 없었다. 한기를 내뿜을 수만 있으면 됐다.

‘오히려 다른 계통을 추구하는 게 편하겠지.’

마녀는 본능의 주문을 사용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데에는 체계화된 다른 주문을 터득하는 게 더 좋았다. 중요한 건 기술을 해골학에 녹아들게 해서 해골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기를 내뿜은 기술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네크로맨시 중에는 다소 저급하지만 원소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탁. 탁. 탁.

산박은 손톱으로 테이블을 느긋하게 두드렸다. 시은이 이렇게 보고하면서 자신에게 제법 의미 있는 일을 보여주는 건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나한테 집착하고 있다. 무엇이 그녀를 내 팀에서 활동하게 하는 것일까.’

자수성가하는 재미? 그럴지도 몰랐다. 맨손으로 시작해서 그럴듯한 공략 팀으로 자리 잡는 것만큼 재미난 인생도 없었다. 그 과정은 실로 명예로울 터였다.

‘쯧.’

산박은 혀를 찼다. 시은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인간임을 깨달아서였다.

‘더더욱 방심해서는 안 되겠는데. 생각보다 불확실성이 너무 많다.’

이시은은 산박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보고했다. 그건 사회생활을 잘 못하는 연쇄 살인마가 보여주는 몇 없는 실수였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죽일 이유도 될 수 있었다.

‘지금은 놔둔다. 대체재가 없다.’

A급 인재를 버릴 감당이 안 되는 게 현재의 산박이 처한 상황이었다. B급, 하물며 C급도 부족했다. 강합이 리타이어했기 때문이었다. 탕만이 있었지만 탕만도 무너지면 다음이 없었다.

‘강합에게 제의를 하는 건 빠르다.’

모든 걸 포기했을 때, 강합을 사용한다. 그 전까지 어떻게든 잔잔벼락의 배합법을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고아원에서 독립하고 던전 사용자가 되겠다고 말한 독종 두 명도 영입할 마음을 가졌다.

‘녀석들이 조금만 더 경험이 많았어도 맡기는 건데.’

허훤락과 허은서는 의남매다. 하지만 오히려 친남매보다 강력한 관계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 서로가 서로의 족쇄가 된다. 그런 두 사람은 산박에게 엄청난 가치를 가진 이들로 보였다.

훤락과 은서에게는 잔잔벼락의 배합법을 가르쳐줄 수도 있었다. 고아였기에 큰 욕심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1억이나 10억이나 100억이나 비슷비슷했다. 그렇게 많이 손에 쥐어도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쓸 줄 몰라서였다.

‘작은 행복이면 족하지.’

급하면 1년 내로 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만큼 ‘잔잔벼락의 무기’는 엄청난 돈을 끌어모을 것이었다. 해외에서도 팔릴 무기고, 수많은 무역 회사들이 눈독을 들일 상품 중의 상품이었다. 던전 경제는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지구의 무지막지한 출산율 속에서 화려하게 꽃피운 피의 산업이라고까지 불리고 있었으니까. 1레벨 던전 사용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 돈은 나에게 날개를 달아 주겠지.’

그걸 지킬 힘은 없다. 그렇기에 사람이 필요했다. 산박이 대놓고 활동하면 안 됐다. 암중에서 활동해서 팔아 치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이 필요했고, 그들과 암약해야 했다.

당연히 평범한 사람은 여기서 고꾸라진다. 사지가 쥐어뜯기고, 심장과 내장을 발려 뼈밖에 남지 않은 채 버려진다. 집어삼켜진다. 주제도 모르고 큰돈을 쥐려고 한 대가는 크다. 어렵게 올라와서 자리를 잡은 놈은 더더욱 혓바닥을 놀리며 들러붙겠지.

‘돈을 써야 한다.’

근데 돈이 없다.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창고 외의 곳이 필요했다. 그리고 산박에게는 낚시터의 오두막이 있었다. 배합을 파악하기 위해 소규모로 놀기 좋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재료를 많이 사서 적재를 해줘야 했다.

‘창고로 쓸 컨테이너에 꽉꽉 채워 넣으면 최대한 시선을 피할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대량으로 구매해야 했다. 소량으로 구매한다면 파리 새끼들이 들러붙을 수 있었다.

없는 놈이, 약한 놈이 더 잘 걸린다. 덩치가 있는 놈은 켕겨도 파헤치지는 않는다. 강자는 계속 강해지고 편하고 약자는 계속 얻어맞고 힘들어진다. 세상의 진리였다. 없는 놈이 뺨 한 대 더 맞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약자는 약자의 방식대로 살아가야 했다.

산박은 수없이 많은 약자를 죽였다. 그 약자는 때때로 무시 못 할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강약은 언제나 상대적인 법이었다. 떵떵거리는 세상의 승리자였던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절벽에서 죽음을 기다릴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상 참 X같다고 생각했겠지.’

착.

산박은 연습장을 꺼냈다. 돈을 빌린다면 장 노인에게서 빌리기 좋았다. 하지만 이미 그와 차용증을 쓴 상태였다. 물의 나무를 더 효과적으로 안전하게 키우기 위해서였다.

‘장 노인은 제외.’

너무 그에게 의존해서는 안 됐다. 뒤통수를 치고 싶지 않아도 치게 된다. 상황에 따라서 갈대처럼 변하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양귀문 부장.’

나쁘지 않다. 하지만 신뢰할 수 없었다.

‘박조조.’

남은 건 그 하나였다. 산박은 실로 자신의 차림새가 초라해 보였다. 돈 빌릴 구석이 이렇게 적다니.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적어도 말 한마디에 수백억, 수천억을 빌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했다. 그의 꿈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인물은 되어야 했다.

‘멀다, 멀어.’

산박은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아주 저자세로 박조조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의 목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돈을 줄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적은 돈이라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투자요?”

“예.”

“제가요?”

“네. 그럼 누가 제 앞에 있습니까?”

“저 돈 없는데요.”

범재에 불과한 박조조답게 벌써부터 발을 빼기 바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조용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런 상황에 투자라니? 투자란 남에게 자신의 돈을 주는 행위였다. 트럭 상인인 박조조의 돈을 가져간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는 돈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없긴요. 일 안 하고 돈만 좇는 사람이 무슨 돈이 없어요. 다섯 배, 아니, 수백 배가 될 수 있다니까요.”

그 말에 박조조는 더더욱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산박은 고개를 흔들거리며 박조조에게 소주를 따라줬다. 그러고는 서류 하나를 건넸다. 그래도 명색이 투자자로 대우해 주는데 준비 없이 오지는 않았다.

“잔잔벼락 작업소?”

“이번에 추진하려는 겁니다.”

박조조는 서류를 덮고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적은 고깃집에는 TV를 보고 있는 이모만 있을 뿐이었다.

스마트폰으로 잔잔벼락의 무기를 이것저것 파악해본 박조조의 눈이 흔들렸다. 다만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을 때는 떨림이 사라져 있었다.

“죄송하지만, 너무 큰 거라서 제가 먹기에는 좀…….”

“발이나 하나 담그시죠.”

“발도 잘리면 아픈 건 매한가지 아닙니까.”

산박은 손을 비볐다.

‘좋다. 아주 좋아.’

보신주의에 가득 찬 박조조의 행동은 산박을 들뜨게 했다. 이런 놈을 써먹어야 정말 안전한 자산으로 잔잔벼락을 굴릴 수 있었다.

“비밀리에 만들면 그만 아닙니까.”

“돈 냄새 풍기는 상품이 어떻게 비밀리에 됩니까.”

“하하하. 이거 박 사장, 말이 참 좀 그렇습니다. 제가 박 사장께 부탁하는 건 이번이 처음 아닙니까?”

“그건……. 어휴……. 이거 참…….”

부탁은 하지 않으면서 박조조와 돈을 나눠 먹는 사이가 태산박이었다. 그런 자가 부탁을 해 왔다. 처음으로 하는 부탁이었다. 그게 얼마나 무거운지 박조조는 그제야 실감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의리 같은 게 아니다.’

상도덕이었다. 그걸 저버리면 돈이 사라진다. 어음으로 서로 좋게 좋게 돌려 막기를 하면서 같이 돈을 버는 것도 이와 같았다. 물론 어음을 한사코 사용하지 않는 기업도 있었다. 대한민국에는 송악. 그 하나만 어음으로 장난을 안 쳤다.

즉, 산박의 부탁은 곧 서로 어음을 주고받자는 뜻이었다. 박조조가 돈을 주면 잔잔벼락이라는 어음을 산박이 건네주는 셈이었다. 이 거래를 파기하면 그걸로 끝. 산박은 다른 트럭 상인을 찾게 될 것이었다.

깊은 수렁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결국 박조조가 택한 것은 타협이었다. 실로 평범한 사람다웠다. 그가 문제없이 트럭 상인을 하는 이유는 경험과 노력 그리고 평범한 바탕이 쌓아 올려진 덕분이었다. 무난한 파트너를 필요로 하는 곳은 정말이지 많았다.

“유통의 절반만 감당해 드리겠습니다.”

“유통요? 뒷돈 찔러주고 던전 대전 상인 공회에서 끌어다 오면 됩니다. 이미 뒷돈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양 부장 덕을 보면 유통? 하이고! 그냥 인력소 사람 써도 됩니다. 늙은 사람으로요.”

박조조의 안색이 나빠졌다. 유통으로 리스크를 짊어져서 타협하는 방안이 싸악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양귀문 부장 이 새끼가…….’

뒷돈만큼 든든한 것도 없었다. 돈을 찔러주는 한 걱정 없고 문제가 생겨도 입 다물기 마련이었다. 깜빵 갔다 나오면 챙겨줄 사람은 검은돈 찔러주는 사람이지 정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 양귀문 부장 놈에게 잔잔벼락의 재료를 맡긴다면 그는 더더욱 산박의 충신이 될 것이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은퇴 자금도 두둑하고, 자식 유학 보내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덜덜덜.

박조조는 다리를 떨어댔다. 그는 산박이 앞에 있음에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술과 담배. 사람을 돌아 버리게 만드는 조합이었다.

“얼마를 줄 생각입니까?”

“투자금 따박따박 돌려드리고 난 다음에는 순 매출의 3할을 드리죠.”

“양 부장은 얼마나 줄 생각입니까?”

“파는 데 도가 튼 양반으로 보이겠지만, 재료만 들여오는데 뭘 줍니까? 기껏해야 달마다 10만 원부터 시작할 겁니다.”

“들여오는 양에 따라서 더 쳐준다는 것이군요.”

“할이 아니라 고정 금액을 줄 겁니다. 처음에는 돈도 안 받을 생각입니다. 그러다가 눈치 주면 5만 원? 아주 하찮은 거로 시작하죠. 어차피 재료만 몰래 가져오는 거니까요.”

박조조는 만족했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양 부장은 ‘잔잔벼락’의 ‘ㅈ’ 자도 못 들을 터였다. 그 저열한 우월감이 박조조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갔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비밀스러운 작업장 하나만 해주시면 됩니다. 세종시 근처로요.”

“어차피 안팎으로 팔고 대전 쪽에서 재료를 유통한다면 서천은 어떻습니까?”

의외의 곳이 나왔다. 서천은 대전의 서쪽에 있었다.

‘차로는 한 시간 정도.’

“서천이…….”

“군산시 바로 위에 있습니다. 그냥 이름만 다르지 딱 붙어 있습니다. 뱃길로 인천 쪽으로 접근도 용이합니다. 작업 치고 옮기기 좋죠.”

박조조가 옮기고 보내고를 책임진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서해를 통해서 인천, 부산까지 가능하니까.’

“근데 서천은 어떻게, 잘 아십니까?”

“예. 거기서 목돈 마련해서 트럭 상인을 시작했습니다.”

산박은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박조조를 보며 웃었다.

‘박조조가 트럭을 타고 옮겨주면 양 부장은 많은 걸 알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작업장까지 굴러들어 온다.’

“군산 쪽에 무역 회사 좀 아십니까?”

“서천에 친구 하나 있습니다. 뱃일하는 놈이죠. 자식만 다섯 명입니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 시대에 자식 다섯? 그것만으로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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