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270)
  • 118화

    * * *

    산박은 소독약 냄새를 맡았다. 병원에 온 기분이었다. 새하얀 건물은 내부도 새하얬다. 하지만 곳곳에 창문이 마련되어 있어서 답답함이 느껴지기보다는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공주 던전 감정 연구소는 유명하거나 메이저 느낌은 안 났다. 하지만 대한민국 내의 순위권 대학원은 대부분 과잉 재능이 투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레벨 장비 감정은 더더욱 좋은 곳에 갈 필요가 없지.’

    중요한 건 은닉성이었다.

    비어있는 사무실은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앉아서 기다리자 곧 연구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주임 연구원 이나예(李裸禮)라고 합니다.”

    서로 간단히 예절을 갖추고 인사를 나누었다.

    산박은 그녀를 파악해 나갔다. 굽이 낮은 구두 때문에 발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조용했다. 연구원 가운을 입고 있어서 더더욱 전문성이 있어 보였고 단정해 보였다.

    머리는 스트레이트파마를 해서 차분했고 처진 눈매가 눈에 확 들어왔다. 포인트를 줄 수 있는 눈매 덕분에 단정한 모습을 추구하는 게 오히려 더 좋아 보였다. 화려하게 몸을 꾸몄다면 과하다는 인상을 받았을 터였다.

    가벼운 화장에 시원스럽게 큰 입에는 연한 핑크 립밤을 발랐다. 170cm의 큰 키에 모델 비율을 지닌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혹시 본관이…….”

    그녀는 개성 이씨였다.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그들은 자신들을 개경 이씨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개성이라고 말하면 반드시 수정을 요구할 정도로 극성이었다. 조선 왕조가 열리면서 벼슬길을 걷는 게 싫어졌기 때문에 강력한 상업 카르텔이 되어버린 게 개경 이씨였다. 그들의 기업은 대기업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송악(松岳)이라 불렸다. 국제 기업이 된 지도 오래였다.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의자 숫자가 적은 모든 곳에 침투해 있기도 했다. 그들은 ‘침투’라는 단어에 헛웃음을 짓겠지만, 세간의 평가가 그랬다. 있는 것들은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도 똑같았다. ‘대중’이라는 이름 속에 자신을 숨길 수 없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산박은 조심해야 했다. 그나마 돈놀이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 개진상만 안 떨면 괜찮을 듯했다.

    “감정을 의뢰하는데 주임이나 되시는 분이 오셔도 됩니까?”

    “저희 연구소 막내가 저예요. 인턴으로라도 학사 하나 들여오자고 해도 예산이 안 되나 봐요.”

    가장 바닥이 주임 연구원인 셈이었다. 또 이들 중 그 누구도 학사 이하의 인물이 없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산박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질문한 건 사전에 이것저것 조사하고 오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평범한 사람인 ‘척’한 것이다.

    ‘그래야 인상에도 안 남지.’

    평범한 1레벨 장비를 감정받으러 온 던전 사용자. 그것뿐이었다. 던전 경제에 현대 사회의 경제가 묶이게 되면서 연구소 또한 사람들이 제법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경기도 근처에 있는 공주 교육 대학교에 찾아오는 던전 사용자는 제법 될 것이었다. 일이 바쁜 톱급 연구소의 대기열에서 기다리기보다는 이곳에 오는 게 좋고, 단가도 낮았다. 없는 것들이 찾아오는 셈이었다.

    “이게 단가 표예요. 사람마다 수정해서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고정 가격입니다.”

    메뉴 표처럼 단가 표를 보여줬다. 구두로 가격을 말하니까 에누리가 가능한 줄 아는 이들이 많아서 그렇게 하는 게 정착되어 있었다.

    ‘없는 놈들이 더하다더니.’

    석사 앞에서 값을 깎을 생각을 하다니 미친놈들이었다. 그들은 대학원을 통과하는 데 많은 세월을 쓴 자들이었다. 결코, 자극해서는 안 된다. 차분해 보여야 연구원이라도 될 수 있었기에 겉으로만 얌전한 척할 뿐이었다.

    “15만 원이네요?”

    “개인 의뢰는 아무래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죠. 그게 싫으면 기업에 미감정 던전 물품을 넘기는 걸 추천해 드려요.”

    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업과 협력하고 있으니 개개인의 돈에는 욕심이 없어 보였고, 그러려고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자존심이 대단했다. 하면 하고 안 할 거면 빨리 가라는 태도가 절로 드러났다.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있었다. 나예는 안경을 벗어서 닦으며 산박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겠습니다.”

    산박은 곧바로 가져온 검과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꺼낸 것은 멍청한 사람을 연기하기 위해서였다.

    “계산은 로비에 가셔서 하시면 돼요.”

    그냥 가면 될 정도로 허술한 계산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신상 정보를 기입하고 들어오는 게 연구소였기에 오히려 조심해야 했다. 단체와 개인의 법적 싸움은 개인이 이기기 힘들었다. 사법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법정 공방에 투입되는 자원의 양과 질의 차이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판에 패배했다면 그저 자신의 돈이 적지는 않았는지 고민해 봐야 할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연구소를 이용해 줘서 고마워요. 여기 제 명함요.”

    산박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명함을 건네자 이나예가 이를 받아 들었다. 검은색 바탕의 산박의 명함은 다른 명함보다 조금 두꺼웠다. 그리고 심플했다. 팀장 태산박. 전화번호 하나. 그게 끝이었다. 내세울 것이 없기에 되레 심플함을 통해서 특별함을 어필했다.

    나예 주임 연구원이 떠나가고, 산박 또한 대학교 밖으로 나섰다. 스마트폰이 울렸다. 그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고아원에서의 연락이었다. 좋은 일로는 안 보였다. 대개 그렇다. 삶이 힘들면 힘든 일이 겹겹으로 찾아왔다.

    “여보세요.”

    산박은 사무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수녀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백정으로 살 때 자살하지 않게 도와줬지만 반대로 사람을 죽여서 밥을 빌어먹는다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한 사람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모호한 관계. 뒤로 미루어진 심판. 그것은 수녀의 위선이 실제로 수많은 고아를 살렸기 때문이었다.

    * * *

    수녀의 옆으로 남자와 여자가 앉아 있다가 산박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일어났다. 수녀 또한 일어섰다. 그에게 밭을 빌려서 고아원 아이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는 이 고아원 내에서 철저히 대우받을 자격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와주셔서 고마워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모두가 인사를 했다. 산박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해지고 낡았으며 밑으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래도 매번 닦아서 비위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 두 사람입니까?”

    산박이 수녀를 보고 말했지만 대답은 남자애로부터 나왔다.

    “허훤락(許煊珞)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제 동생인 허은서(許恩書)입니다.”

    “제가 누나고, 얘가 동생이에요.”

    서로 눈싸움을 하는 두 애를 보고 산박이 수녀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교통정리를 했다.

    “의남매예요. 고아원에 들어온 날이 같아서 서로 아끼는 마음이 깊어요. 던전 사용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연락을 드렸어요.”

    “다시 일어서 봐.”

    산박의 말에 두 사람이 일어났다. 체격은 제법이었다.

    “교육이나 훈련은?”

    수많은 훈련장, 교육 관련 업체들이 존재한다. 산박 또한 그곳에서 기술을 습득하고 0레벨 던전에 들어갔다.

    “아직요.”

    “돈이 없어서요.”

    “허.”

    산박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수녀는 이들에게 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자신을 부른 듯했다.

    마냥 도와주려면 그만큼 여유가 있거나 기대하는 게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그냥 지연을 통해서 손쉽게 궤도에 오르고 싶어 했다. 1레벨 던전이 어떤지도 모를 것이었다.

    고레벨 던전 사용자는 사회 중산층이 될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지옥도였다. 그저 운이 안 좋은 것만으로도 두 번 고꾸라진 강합만 봐도 던전 사용자의 성공으로 향하는 길은 매우 좁은 구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투자금이 없으면 오래 버틸 수도 없지.’

    쉽게 들어온 만큼 쉽게 나간다. 차용증이라도 쓰고 들어오면 빠져나가기 힘들다. 최소한 뿌린 돈을 회수하고 나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0레벨 던전은 클리어하고 와라.”

    산박이 일어나려고 하자 두 사람이 다급히 그를 잡았다.

    “저희들은 반드시 성공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무리해서라도 수녀님께 부탁했어요!”

    산박은 자신의 팔을 잡은 훤락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마음 같아서는 그 면상을 후려치고 싶지만 참는다. 성공? 당장 나가서 노가다 해도 저레벨 던전 사용자보다는 돈을 많이 벌어. 다른 일 해보고 그래도 던전에 들어가고 싶으면 직접 돈을 써서 0레벨 던전을 클리어하고 와. 그게 최소 조건이니까.”

    그렇게 말했음에도 둘은 생각을 접을 마음이 없었다.

    ‘독종이구만.’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회 경험 하나 없는 독기는 그저 민폐일 뿐이었다. 산박이 다시 앉았다.

    “몇 가지 조건만 만족한다면 팀원으로 받아주마. 물론, 나랑 함께 공략하지는 않는다. 대신 팀 내에서 다양한 아이템을 지원해줄 수 있다.”

    0레벨 던전 아이템 따위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었다. 그 말에 두 명 또한 흥분을 가라앉히고 앉았다.

    “하나는 최소 1년씩 다른 일을 두 가지 해 볼 것. 요즘에는 국가가 지원해 주는 곳도 많아. 최대한 돈이 되는 일을 해보든지 그냥 마음에 드는 걸 해보든지 알아서 해.”

    “그 뒤에는요?”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그때는 약속을 지킨다. 원하면 지금 계약서도 써주지.”

    “좋아요.”

    둘 다 동의했다. 2년 동안 사회의 거친 바람을 맞았을 때 그들은 또 한 번 깨달을 터였다. 고아원 시절의 삶과 노동자의 삶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곳에서 더욱더 날카로운 독종이 될 터였다.

    ‘이놈들은 키워 봤자 다른 팀에 배속해야 한다.’

    뭘 해도 이길 수 없는 A급 던전 사용자를 보면 열등감만 커질 뿐이었다. 산박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다르니 감수할 수 있겠지만 충호나 시은은 달랐다. 사장에게 고개 숙이는 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같은 동기나 선임에게 고개 숙이는 건 종종 회의감이 들기 마련이었다.

    * * *

    그다음 날에 바로 공주 던전 감정 연구소에서 연락이 왔다. 메일을 통해서 감정 결과를 받았고, 검은 퀵으로 받았다.

    [명칭 : 잔잔벼락의 검]

    이미 등록된 아이템이라서 순식간에 결론이 날 수 있었다.

    ‘1레벨 상급 무기라고 볼 수 있지.’

    상급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었다. 결국 같은 1레벨 무기였다. 급수는 다양한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가성비일 수도 있었고 편의성일 수도 있었다. 열 명 중 여덟 명이 만족하는 무기라면 상급이라 여겨질 만했다.

    파직, 파직!

    전방을 향해서 약 2m의 사정거리를 지닌 잔잔벼락의 전격은 매우 얇았지만 무성의하게 퍼져 있어서 아무렇게나 써도 상대를 맞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생명체인 이상 전기 신호에 근육이 놀라고 신경계가 순간적으로 마비된다. 이 때문에 잔잔벼락의 힘은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후방 직업군의 던전 사용자가 주 무기로 사용하기에도 좋았다. 백병전을 못해도 잔잔벼락으로 경직을 먹이고 손목이나 팔 등을 깊게 베고 물러나면 상대의 공격력은 크게 반감된다. 동시에 도망칠 수도 있었다. 좋은 장비 선택이 될 수 있었다.

    ‘단점은 딱 세 번 쓰면 재충전을 해야 한다는 것.’

    치명적이었다. 검의 길이, 부피를 생각한다면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적었다. 동시에 그렇게 빠르게 횟수를 소모하는 마법 물품은 내구력도 쉽게 닳았다. 재충전을 해도 금방 파괴되고 만다.

    ‘하지만 효과를 본 사람은 계속 쓰기 마련이지.’

    쉽게 내구력이 닳아서 파괴된다는 것 또한 판매자 입장에서는 이득이었다. 30년 동안 계속 쓰이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부도 맞기 십상이었다.

    산박은 잔잔벼락의 상업성을 보고 곧바로 작업소를 건설할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가장 먼저 재료.’

    말린 검은 슬라임과 따뜻한 뿌리, 흔들리는 갈대 씨앗. 세 가지가 던전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그 외에는 증류수와 청동 가루가 있었다.

    ‘청동 가루도 구하기 어렵다.’

    청동은 팔아도 가루는……? 황당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직접 부숴서 가루를 낼 기계를 들여와야 했다. 그 소리는 굉장히 클 것이다. 이에 대한 방음 대책도 세워야 했다.

    ‘이 동네는 사람이 적지만 없는 것도 아니니까.’

    먼 곳에 둔다면 관리하기가 힘들어진다. 뒤통수 맞기 딱 좋은 게 자신의 행동 범위 밖에서 사업하는 짓이었다.

    산박은 세 가지 던전 제품을 검색했다. 말린 검은 슬라임은 민간에게 판매하는 곳이 없었다. 검은 슬라임 액체를 사서 말려서 써야 했다. 매입가 1kg에 5만 원.

    ‘비싸다. 얼마나 처먹는 거야.’

    따뜻한 뿌리는 약재로 쓰이기 때문에 어디서든 구할 수 있었다. 체온 보존의 효과가 매우 뛰어나서 겨울에 불티나게 팔리는 던전 식물이었다. 유지 시간이 네 시간은 되기 때문에 엄청나다고 할 수 있었다. 0레벨 던전에서 나오는 거라 비싸지 않았다. 다만 적게 구매하면 비싸졌다.

    ‘이것도 수백kg 넘게 그것도 꾸준히 계약해서 가져오는 게 좋겠다.’

    흔들리는 갈대 씨앗은 친환경 화력 발전소에서 쓰이는 던전 제품이었다. 화력을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데 폭발적인 효율을 지니고 있어서 모든 국가에서 하나쯤은 가동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걸로 잔잔벼락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재료는 알아도 제조법은 까막눈이었다. 부딪쳐 봐야 했다. 성공하면 ‘힘’을 소비하지 않고 계약서에 따라서 개당 5만 원 이상의 마진을 낼 수 있는 알짜배기 사업을 손에 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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