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 *
시은이 산박의 앞에 자리 잡았다.
“오는 길은 안 막혔나요?”
“네. 퇴근 시간도 지났으니까요.”
서로 간단한 안부를 나누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었다. 앞으로 그래도 얼굴을 볼 것이라고, 서로 그렇게 여겼다.
사회라는 건 그렇기에 무서웠다. 내가 피해를 준 사람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이 세상은 너무 좁으면서도 너무 넓게 보였기에 누구나 생각하는 바가 다를 수 있었다.
다만, 시은이든 산박이든 나중을 생각하는 경향이 심했다. 서로 닮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의심받고 있고 경계해야 할 사람이라고 해도 평범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졌다. 강합과 탕만의 반응을 생각한다면 사실 이 자리의 미묘한 긴장감은 특별했다.
“그런데 팀장님은 왜 공주 교육대에?”
“검 감정 때문에요. 충호 씨가 자기는 모른다고 해서요.”
“그답네요. 그래도 팀원다운 태도는 아니지 않아요?”
“주문하신 아이스아메리카노! 라테마키아토 하나 나왔습니다!”
산박이 자리에서 일어나 음료를 가져왔다. 음료를 마시자 쓴맛이 확 느껴졌다.
“저 몰래 강합 씨와 탕만 씨에게 돈을 지원해 줬던데요. 왜 속이셨어요?”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그리고 가장 쉽게 변명할 수 있었다. 그저 단순하게 ‘송유나의 죽음’ 때문에 매우 의심스러울 뿐이었다. 문제가 생긴 시기와 비슷하게 겹치는 비밀스러운 행동이기에 산박은 시은의 모든 것을 재검토했을 정도였다.
시은 또한 송유나를 그녀의 손으로 죽였기에 오늘 급하게라도 산박과의 만남을 노렸다. 더 큰일이 나기 전에 다른 것으로 ‘덮을’ 생각을 했다.
“팀장님이 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굉장히 공을 들이고 있어서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분명 말리실 거잖아요?”
“절 잘 아시는 분이 숨기면 더 안 좋게 끝날 거라는 걸 모르셨어요?”
“알고 있었지만 안 들킬 줄 알았어요.”
산박이 냉랭하게 말했지만, 시은은 나름 각오를 한 표정을 지었다. 완벽한 안면 근육의 움직임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거울 앞에서 표정 연습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시은은 한다. 그것도 매우 오랫동안 해왔다. 만약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연예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관심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 사회에 녹아들어서 사는 게 중요했기에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입이 싸더라고요. 그 사람들, 정말 실망했어요.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그녀가 귀엽게 불평을 터트렸다. 공감을 원하는 모습은 시은이 가장 많은 여성을 보고 얻은 것 중의 하나였다.
“팀장인 저한테 말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걸 안다고 제가 불이익을 줍니까?”
“적어도 강합 씨에게는 불이익을 줄 생각이시죠.”
“…….”
갑자기 강합에 대한 말이 나왔다. 실제로 산박은 점진적으로 그를 멀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치지는 않는다. 자기 스스로 나가는 게 서로에게 좋기 때문이었다. 쫓아낸 사람은 모양이 좋지 않았다. 알아서 퇴직하라는 기업이 왜 그렇게 하는가. 돈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게 모양새가 좋기 때문이다. 그건 산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강합은 더는 1레벨 던전에 못 들어온다. 아니, 애초에 던전 공략을 못 하게 되겠지.’
하지만 현실에는 ‘만에 하나’가 존재했다. 그래서 산박은 아직도 강합과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 뛰쳐나간 그가 제법 주옥같은 사업을 먹고 키우는 데 성공한다면? 산박은 말 그대로 대박 나는 거였다.
“지금 이야기할 것도 아니고, 시은 씨에게 말해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산박이 선을 그었다. 시은은 그것만으로도 수긍했다. 그냥 흔든 것뿐이었다. 산박은 ‘선’을 매우 중요시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그도 이제 시은에게 말할 때 선을 지킬 것이었다. 심한 억측을 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래서, 돈을 지원해준 이유는 뭡니까.”
“제가 여자니까요.”
“예?”
산박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분들은 알게 모르게 술자리도 자주 가지는데, 전 아니었거든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팀~장님은 남자잖아요.”
“아니,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아무래도 여자 앞에서는 말하지 못하는 게 있잖아요. 완전히 없다고 하실 수 있으세요?”
“그건…….”
산박이 말을 흐렸다. 성별이 다른 것만으로도 서로 존중해 주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돈을 지원해서 친해지려고 했다? 근데 그게 저한테 말을 안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요?”
경중이 달랐다. 곧, 변명거리가 될 수 없었다. 똑똑한 그녀라면 더더욱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산박은 이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팀이 고레벨 던전을 공략할 때는 서로 지위도 정해지겠죠. 거기서 전 제가 이인자가 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어요. 앉을 자리가 하나라면 자신과 성별이 다른 경쟁자를 먼저 내치지 않겠어요?”
여자는 표적이 되기 쉽다. 일단 제쳐놓고 권력을 배분하는 건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거기까지 생각하셨다고요?”
“네.”
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쪽 빨았다.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마시다가 눈을 산박에게로 향했다. 짙은 눈썹이 확 눈에 들어왔지만 산박은 무덤덤했다.
“후우……. 1팀에 여성 팀원은 시은 씨뿐이니까, 조심하는 게 안 좋겠어요?”
“임시 팀원으로 여자 팀원 하나라도 넣어 주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산박이 질문했다.
“유나 씨랑 친하시던데, 실종 관련해서는 들은 게 없습니까?”
나쁘지 않은 연결이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시은이 유나를 죽인 범인이 된다. 증거가 없다? 정황도 부족하다? 다 상관없었다. 수틀리면 숙청하는 것처럼, 리스크가 있는 팀원은 밖으로 내보내는 게 나았다. 혹은 그냥 쥐고 있어서 스스로 나가게 한다.
산박이 지닌 목숨은 하나뿐이었다. 그걸 배팅하는데 확률을 조금이라도 올릴 생각을 안 하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왔다.’
시은은 단번에 울적해졌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위아래로 비볐다. 생각하기도 싫은지 손으로 얼굴을 비비면서 인상이 확 찡그려졌다.
“형사가 찾아왔어요. 전 유나랑 친했거든요. 유나가 저랑 같이 운동하자고 권유도 했고 저도 집에 몇 번 초대를 했었어요. 여성 던전 사용자는 매우 희귀하잖아요?”
“형사가…….”
산박이 몰입했다. 이시은은 막힘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팀장님한테 말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쪽에도 형사가 갔죠?”
“네.”
“그냥 최대한 잊으려고 노력하는 게 좋죠. 이러쿵저러쿵해 봤자 상처만 더 벌어질 뿐이에요. 유나가 선물해 줬던 머그 컵도 아직 못 버리고 있어서 그 애에 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 애’, ‘유나’. 호칭 하나하나에서 정이 묻어났다.
“후우, 이런 이야기는 그만해요. 좀 더 생산적인 대화를 하자고요. 전 야망이 있어요. 그래서 전방 직업 두 사람에게 접근했죠.”
시은이 ‘덮어씌우기’에 들어갔다.
“한자리 꿰차기 위함이 아닙니까?”
“괜한 오해를 만들기보다는 진실을 말하는 게 더 좋겠죠? 충호 씨를 뛰어넘기 위해서였어요. 그 사람 편에 설 사람들을 미리 빼내기 위해서요.”
“충호 씨를요? 어차피 고레벨 던전까지 가면 후방 직업이 더 대우를 받습니다. 굳이 지금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네. 팀장님이 후방 직업이잖아요. 당연히 고레벨이 되어도 제 입지는 독보적이지 못하고 희소한 충호 씨가 더더욱 대우를 받겠죠. 아닌가요?”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너무 적극적이지 않습니까? 다른 이유는 없습니까?”
“여기서 제 개인사를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전 팀장님의 밑에서 한자리 단단히 꿰차고 싶을 뿐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리를 해야 했어요.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 보장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서예요.”
“흐음…….”
산박은 코로 한숨을 내뱉었다. 어려운 일이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현재로서는 충호의 가치가 더 높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중에 반드시 떡상하는 건 시은이었다. 전사가 믿을 건 몸뿐이지만 마녀이면서 네크로맨서인 이시은의 가치는 고레벨 던전에서 더더욱 높아질 것이었다. 아마 그녀의 소문만 들어도 접근해 올 기업이 많을 터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고민된다.’
A급 전사와 A급 주문 사용자. 장단이 있었다.
‘대우해 줘도 떠날 사람은 떠날 텐데…….’
정(情)을 생각하면 충호는 든든한 백반이었다. 반면 시은은 좀 셈을 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확실하게 한다면 시은을 잡아두는 편이 좋았다. 좋은 사람은 뭘 해도 함께 있으니 자원을 투입하지 않아도 되지만 곧 떠날 것처럼 구는 이에게는 원하는 걸 쥐여 줘야 했다. 시은은 후자였다.
“권리 뒤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괜찮겠어요?”
“그러려고 하는 건데요.”
그렇기에 산박은 그녀를 대우해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충호는 자신을 더 대우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고 시은은 그렇게 해달라고 지금 외치고 있었다. 사장 입장에서는 소리치는 놈을 조용히 시키는 게 먼저였다.
동시에 시은은 속으로 검게 웃었다. ‘야망’을 통해서 산박의 재검토를 중단시키고 덧씌운 것이 확실하게 통했다고 생각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보다는 야심가가 나았다.
“계약 기간은 10년.”
“5년요.”
“확실하게 대우해줄 테니까 10년 합시다.”
“5년에 격년으로 갱신 주기를 두죠. 다음 주를 기점으로요.”
계약서 양식까지 만들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다음 주에 사인하는 게 옳았다. 산박은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었다. 벌려놓은 사업이 있으니까 정신이 없을 터였다.
“갱신 없이 합시다.”
“팀장님 수완을 생각하면 솔직히 매년 제 대우에 대해서 논의하는 게 당연한데, 그걸 2년으로 했어요. 만족하시는 게 어떠세요?”
“그러죠. 5년에 격년 갱신으로.”
산박은 떼를 쓰지 않았다. 그의 입지를 생각했을 때, 아직도 인재가 부족한 실정이었다. 자신만의 팀을 여럿 만들고 난 뒤에나 돈이나 다른 자원을 빌미로 사람을 굴릴 수 있었다.
‘사람 장사가 최고지.’
그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탄탄한 주춧돌 하나를 만들어야 했다. 그게 충호고, 시은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시은은 독립적으로 자신의 팀을 운영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어.’
커리어 우먼의 종착지는 지배자다. 기업에 들어가서는 한계가 있다. 산박은 그 야망을 이뤄줄 수 있었다. 고로, 그녀는 앞으로 5년 동안은 산박을 위해서 일할 것이었다.
‘이인자로 만족한다면야, 그렇게 해줄 수 있다.’
그 이상을 바라는 모습을 보였을 때, 산박은 거침없이 이시은을 처리할 것이었다.
‘그건 이미 전쟁이지.’
시은의 가치는 그것으로 정해졌다. 그녀를 위한 ‘선’도 마련되었다. 새로 그어졌다. 송유나보다 더 위협적인 그녀였다. 선 하나를 넘는 것만으로도 산박은 그녀를 죽일 생각을 가졌다.
시은이 자신의 ‘꿈’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만큼 대단한 파트너였지만 반대급부도 자연히 높아졌다. 고로 몇 번의 선 넘기는 더는 용서할 수 없었다. 야심가는 경계해야 할 존재였다. 그리고 시은은 연쇄 살인마보다 야심가를 택했다.
“계약서는 온라인으로 보내겠습니다. 거기 사인하시면 됩니다.”
“앞으로 팀장님의 오른팔로 최선을 다할게요. 5년까지만요.”
“계약이 끝나도 다시 계약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제가 중요하다면 앞으로 두고두고 확인해 주셔야 할 거예요. 전 계속 충호 씨랑 절 비교할 거예요.”
“첫인상이랑 너무 다른데요.”
“네크로맨서 직업을 얻었을 때, 미치도록 욕심이 나더라고요.”
산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듀얼 클래스. 그건 사람을 송두리째 바꿀 만했다. 힘, 권력……. 남들과 다른 특별함은 사람을 바꾸기 어렵지 않았다.
시은은 그길로 세종시로 돌아갔다. 그녀에게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완벽하게 의심을 지우지는 못했다. 야심가 포지션만으로도 산박은 그녀를 경계할 터였다.
‘어쩔 수 없었어.’
신호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에 저장한 매뉴얼을 삭제한 시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강하게 깨물었다.
산박의 앞에 섰을 때, 수많이 준비했던 매뉴얼을 모조리 머릿속에서 파기해야 했다. 그녀의 본능이 크게 경종을 울렸다. 만만하게 보지 말고, 결코 다른 곳에 개짓거리를 하지 말고 빨리 양보하라고 외쳤다. 자신을 스스로 베어 내어서 야심가처럼 둘러대며 산박이 경계하도록 만든 건 시은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굴욕적이야.’
그 짧은 만남 속에서 시은은 겁쟁이처럼 굴었다. 나약한 약자의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만 했어.’
손쉽게 넘어갈 수 없다는 확신이 그를 보자마자 들었기 때문이었다. 산박은 더는 이시은을 상대로 뒤를 보여주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계속 던전 공략은 하게 될 것이다. 시은을 이인자로 대우하기 위함이었다.
준 것도 있고, 얻은 것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시은은 ‘패배’라는 두 글자가 생각났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개새끼나 다름없었다. 사회라는 거대한 놈을 속여온 경험이 없었다면 산박의 날카로운 직관력과 마주했을 때 분명 실수했을 터였다.
‘쉽게 갔다면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겠지.’
가정이지만, 그냥 모르쇠로 갔다면 산박의 덫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시은은 확신하고 있었다.
부르릉.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중고차가 밤거리를 질주했다. 오늘은 조금 늦게 도착할지도 몰랐다. 창문이 살짝 내려지고 밤바람이 확 들어와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답답함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살을 내어준 만큼 그 대가는 나중에 톡톡히 받아 내겠어. 기대해. 난 오직 그날만을 위해서 몇 년이고 널 속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