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270)
  • 113화

    * * *

    산박은 다음 날, 가장 먼저 강합에게로 향했다.

    ‘그를 이용한다. 그의 부상은 안타깝지만, 이용할 수 있기에 이용해야만 한다.’

    그때그때 알맞게 찾아오는 ‘때’를 맞이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산박은 어리석지 않았고, 세상이 주는 이런 사건들을 가공해서 자신에게 알맞은 때로 삼아야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행운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행운이 자신에게 내려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하지만 산박은 달랐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강합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며칠간이라도 그를 위해서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최대한 관계를 다져 놓아야 했다.

    호감도를 높인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람의 호감도란 그렇게 쉽게 높아질 수 없었고, 개개인에 따라서 그 호감도의 절대치도 제각각이었다. 열 명 중 두 명이 자신을 좋아한다면 여섯 명은 자신에 대해 무감각하고 두 명은 반드시 자신을 싫어한다는 262의 법칙처럼 타인의 호감도는 천차만별이었다.

    거기에 그냥 아무도 자신을 안 좋아하는 경우도 있었다. 082의 법칙 등……. 수많은 외부 요인에 따라서 평가는 들쑥날쑥한 편이었다.

    산박의 경우에는 그나마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카리스마가 대단할 정도는 아니다. 남들에 비하면 오히려 첫인상은 평범했다.

    그가 팀원을 사로잡은 건 그 외의 부분이었다. 남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건 산박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무엇보다 냉철한 판단은 보면 볼수록 매력이었다. 열이면 열, 모두 산박과 함께 일하고 싶어 할 것이었다.

    아무리 매력적인 사람이라도 실패한다면 그 곁에는 사람이 적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요한 건 돈과 목표였다.

    산박의 세상은 그가 아니라 그가 지닌 목표에 따라서 움직인다. 평범한 회사에서는 상관없지만 이런 던전 공략에서 산박의 존재는 대체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팀에 한 명이라도 있을 리가 없었다. 군대에서 유능한 하사관을 만나는 것과 비슷했다. 한없이 낮은 확률인 셈이었다.

    그런 산박조차도 사람의 호감을 올리려고 노력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가 중요시 여기는 건 굵직한 관계였다.

    자주 마주하는 사람에게는 예의를 차리는 게 인간이라는 족속들이었다. 옆집? 옆집 사람의 얼굴을 보는 건 쓰레기를 버리는 10초 남짓한 시간에 불과했다. 그건 좋은 예가 아니었다.

    아무튼, 산박은 강합에게 시간을 투자하기로 생각했다. 던전을 공략해서 피곤에 절어 움직이기 싫어하는 몸을 이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 티, 팀장님!”

    강합은 크게 놀랐다. 산박이 찾아오는 건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벌써 두 번째 병실 신세였다. 실패했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산박이 찾아왔다. 절망 속에서 구원을 찾은 것처럼 그는 급히 일어났다.

    “몸은 괜찮으세요?”

    “예. 대장삵이 치료해 줬으니까요.”

    그는 어깨를 덜덜덜 떨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안정만이 답이라고…….”

    정신과 상담을 병행하고 약물 치료를 하고 있다고 강합이 말을 이어 나갔다.

    산박은 매일 한 번씩 강합을 방문했다. 때로는 몇 시간이나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산박은 그가 마음의 빚을 가지길 기다렸다. 사람에게 관심을 쏟아부어서 자신의 입맛대로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오셨습니까?”

    “밥 한 끼 하는 것도 불편하다고 말하지는 않겠죠? 거기에 어제 절 이기고 꿀잠을 잤을 텐데요?”

    “하하하!”

    이것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단 3일 만에 효력이 드러났다. 실패하고 또 실패해서 자신의 몸이 자기 몸처럼 느껴지지 않는 암울한 상황에 처한 강합은 산박에게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건 놀아난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인품이 넘치는 광경이었다. 의도는 검었지만, 현실에서는 훌륭한 팀장의 모습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죠? 혼자서는 극복하시는 게 많이 힘들 겁니다.”

    카드놀이를 하며 산박은 실질적 조언도 줬다. 그렇게 그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을 강합에게 집어넣었다. 투자했다.

    그 와중에 탕만과도 함께 식사했다.

    “들으셨죠? 제가 요즘 강합 씨를 돕고 있다는 걸요.”

    “예. 본인에게 들었습니다.”

    갑자기 불려 나와서 탕만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강합 씨의 입장만 안 좋아지니까요. 제 말 이해하시죠?”

    “그럼요, 그럼요! 하루빨리 정신 차려야 하는데, 팀원들이 괜히, 예? 괜히… 또 말 나오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탕만은 냉큼 산박의 의견에 동조했다.

    ‘만족스럽다.’

    강합이라면 그에게 뜻밖의 일을 공유할 게 분명했고 그 입을 틀어막는 건 산박의 일이었다. 강합의 일을 정리하는 데 뜬금없이 정보 차단의 임무가 주어진 것은 ‘의문의 돈줄’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 돈을 쥐여준 놈.’

    그걸 잡아내야 했다. 그래서 탕만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때를 기다리며 강합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산박은 장 노인 쪽을 압박하기로 마음먹었다. 간단했다. 던전을 클리어하고 과수원에 안 가면 그만이었다. 문자로 대충 일이 있어서 방문은 좀 늦을 것 같다고 썼다.

    그 외의 시간에는 ‘던전 감정 연구소’를 검색하고 지냈다. 개인이 의뢰하기에 적당한 곳을 물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3일째.

    띠링.

    스마트폰이 울리며 문자가 도착했다.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전화 가능하시면 연락 부탁하겠습니다.]

    드루이드 사과나무를 관리하는 장지건이었다. 문자를 확인하고 산박은 전화를 걸었다. 뒤로 미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먼저 후려치기 전에 저쪽의 반응을 기다린 건 자신이 더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고 상대가 문자를 보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이고, 이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괜히 문자를 드렸나요? 굉장히 바쁘신 것 같으신데…….

    “예. 사실 팀원 한 명이 이번에 두 번째로 트라우마를 심하게 겪어서요. 던전 나오고 나서 계속 병문안을 가다 보니까, 힘들더라고요.”

    ―저런! 그분은 괜찮습니까?

    “곧 정신 병원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간에 일하시는 간호사분들이 힘들어 하셔서요. 어제부터는 남간호사들이 자주 오게 되더라고요.”

    산박은 강합을 제물로 삼았다. 진실이기도 했다.

    “…아무튼! 최대한 여기 일을 정리하고 과수원을 방문하겠습니다.”

    ―박조조 그분 납품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매번 병원 근처로 트럭 몰고 오면 해드리고 있죠.”

    ―굉장히 힘든 일을 하십니다.

    “예. 예. 나중에 제가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진실은 강합에게 시간을 들이는 것과 박조조가 병원까지 온다는 것이었다. 두 명을 조합하면 그 외의 시간을 다른 곳에 써도 진실이 된다. 나머지 시간에 산박은 그저 쉬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장 노인과 그들 혈족에게 자신의 중요성을 깨닫게 만드는 일이었다.

    ‘고작 3일인데, 뭐.’

    산박은 병실로 향했다. 이제 강합에게 제안을 하나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었다.

    “강합 씨,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말에 길강합이 상체를 곧게 했다. 이등병처럼 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우 진지했다. 목이 타는지 그는 물을 마셨다.

    “언제쯤 회복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회복해서…….”

    그는 말을 제대로 이어 나가지 못했다. 턱턱 막히고 꽉꽉 막혀있는 곳에 닿은 것처럼 굴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어깨뼈까지 박살이 난 상처는 강합의 신경계를 크게 손상시켰다. 뇌에 도달한 격통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충호라면 이겨 냈을지도 몰랐다. 숨 한번 내쉬며 술 한잔 하는 걸로 털어 냈겠지. 그러나 강합은 아니었다. 절로 숨이 거칠어졌다. 자신에 대한 분노가 터질 것 같은데, 어디로 그 분노를 배출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제기랄 엿 같았다.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확답을 받으려는 게 아닙니다. 팀에서 방출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산박이 강합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굳게 힘이 들어간 손에 강합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믿어줬다.

    “던전을 더는 공략하지 못하게 되어도 나중에 사무직 자리라도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회복에 힘쓰세요. 아셨습니까?”

    “예. 죄송합니다.”

    산박이 웃었다.

    “물론, 제대로 일을 못 하면 그때는 크게 혼낼 겁니다.”

    웃음소리가 두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뭔가 마음이 조금 후련해지네요.”

    “너무 집착해서 그래요. 던전 사용자 출신이라면 실무에도 몸을 담았으니 오히려 관리직에 어울릴지 모르죠. 머리는 조금 아프겠지만, 그래도 제 사람을 제가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마음 편히 가지세요.

    산박의 말은 실로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려왔다. 거기에 흰 봉투에 돈도 제법 찔러줬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이거 어떤 말을 해드려야 할지…….”

    강합은 고개를 거듭 숙였다.

    “괜찮습니다. 뭘 그렇게까지 고개를 숙이세요? 어허, 하지 말라니까요.”

    강합은 크게 감동한 것처럼 굴었다. 산박의 큰 배포에 감탄했다.

    산박은 음흉하게 입을 움직였다. 갖은 방법을 다 써버렸기에 이제 수확하는 일만 남았다. 그는 간사한 뱀이 사람의 발목을 물듯이 자신의 목적을 이빨에 박아 넣었다.

    “근데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요. 두 사람에게 장빗값을 대준 사람이 누굽니까? 어떻게든 제가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강합이 아주 자연스럽게 툭 그 이름을 뱉어냈다. 그는 오히려 그렇게 돈을 준 상대에게 보답을 할 수 있다는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팀장님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산박이 능숙하게 한 걸음 물러났다.

    “저희 팀입니까? 이거 더 놀라운데요. 전 제가 완전히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하하하. 제가 무슨 인맥이 있다고요.”

    “그래서 누굽니까?”

    들을 가치도 없었지만 산박은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하려고 일부러 물었다.

    “시은 씨입니다. 그분이 팀원을 생각하는 마음이 대단합니다.”

    “그렇습니까. 이거 의외네요. 매일 갤러리에 페스티벌… 참가 안 하는 곳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큰돈을…….”

    “그만큼 저희 팀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강합의 말에 산박은 맞장구를 쳐주고 병실을 나왔다. 문을 닫은 그의 표정이 무서워졌다.

    산박은 곧바로 이시은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곧장 카페에서 커피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사람이 제법 보였지만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행동은 그다음이었다. 적은 대비를 했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분노에 몸을 맡기는 건 우둔했다. 어리석다 못해 둔하기까지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시은에 대한 정보.’

    산박은 가방에서 연습장과 펜을 꺼냈다. 스마트폰은 너무 작아서 한눈에 다 볼 수가 없었다.

    ‘첫인상과 현 인상이 다르다.’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것은 이시은이 상황에 따라서 만변(萬變)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만날 때마다 조금조금씩 인상이 달랐다. 대부분 섹시함과 육감적인 육체를 통해서 이미지를 고정하지만 언행에는 미미한 오차가 존재했다.

    산박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는 차이였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녀의 외모에 뇌가 크게 지배당할 테니까.

    쪼오옥.

    산박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단번에 쪽 빨았다. 꿀꺽, 꿀꺽. 크게 두 모금을 마셨다. 쓴맛이 혀에 느껴지고 차가운 커피가 그의 머리를 맑게 해줬다.

    ‘이시은을 다시 점검할 줄이야.’

    그가 눈을 찌푸렸다. 예상 이외의 일. 아니, 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방 직업의 A급이 그녀다. 듀얼 클래스에 네크로맨서의 지식을 탐구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마녀의 기술을 해골학에 접목해서 해골 하수인에게 반영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던전에 대한 집념을 알 수 있었다.

    남녀를 떠나서 그녀는 반드시 영입하고 움켜쥐고 가야 할 인재였다. 삼국지의 수많은 A급 장수들 중 하나나 다름없었다. 사회적 기반이 약한 산박에게 주어진 몇 없는 인재 중 하나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야망…….’

    하는 노력을 보면 다른 이에게 돈을 준 것은 야망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즉, 매수를 통해서 팀 내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뜻이었다.

    ‘반골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나에게 꼬리를 흔들었다.’

    모순된다.

    탁, 탁, 탁.

    산박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때렸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점원이 와서 문을 닫는다는 소리를 하고 나서야 산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더 고민하는 수밖에.’

    뚜렷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서 고민을 해야 했다. 적어도 다음 던전에 가기 전에는 이시은에게 간섭해야 했다. 반드시. 산박은 스스로 기간에 제한을 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