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270)
  • 110화

    똑같은 형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계통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뱀과 도마뱀이 석상 아래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형상이었다. 몇 마리나 되었고, 딱딱하게 굳어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모두 고개를 올리고 있었는데 유독 한 마리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마치 그곳을 주시하고 있는 듯했다. 잡아당길 수 있어 보였다. 중심에는 사자가 두 다리를 번쩍 들고 있고, 그 머리 위에 새가 앉아 있었다.

    ‘야만신. 이걸로 두 번째다.’

    기회인가? 아니다. 그렇게 좋은 떡일 리가 없었다. 신은 독이 든 성배와 같았다. 개개인의 객체에 불과한 인간에게 있어서 그건 좋은 동아줄이기도 했지만 장단점이 확실했기에 산박은 이를 기회로 여기지 않았다.

    ‘선택의 갈림길이다.’

    혹독한 결정의 시기가 왔다. 산박은 현재 두 가지의 신을 섬기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수준이 낮았기에 용인될 수 있었지만 점점 레벨이 올라가면 용납되지 않을 것이었다.

    레벨. 기술과 주문. 한정된 아이템과 레벨보다 더 가혹한 ‘돈’으로 제한된 장비들. 그 속에서 무한한 신의 보조는 공짜 폰처럼 유혹적인 것이었다.

    ‘빛의 치료수는 상품으로도 팔고 있지. 하지만 치료수가 주목적은 아냐.’

    빛. 그 빛 무리의 효과를 위해서 다른 물약에 첨가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별빛의 힘으로도 능히 가능한 일이지.’

    별빛과 빛 무리는 그렇게 차이가 심한 것도 아니었다. 대체 가능성이 존재했다.

    ‘청철 십자가는 매력적이지만, 야만적이지 못하지.’

    이 던전에서는 야만적인 게 필요했다. 강력한 수단! …힘! 빛의 신 팔라딘보다는 잔혹한 괴물들과 어울리는 야만신이 더 나을 수 있었다. 빛도 어둠도 아닌 야만신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괴물과 인간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산박은 솔직히 말하자면 팔라딘보다는 야만신이 더 구미가 당겼다.

    ‘물론 한번 거절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시험이다. 언제나 그렇듯 산박은 상대를 실험하고 나서야 제대로 쓰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런 게 필요 없는 자도 있었지만 야만신에게는 ‘검증’이 필요했다.

    ‘헉.’

    석상을 놓으려는 순간, 석상이 그대로 녹아 버렸다. 그리고 마치 벌레가 기어오르는 것처럼 산박의 손을 타고 올라가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모두가 딱딱하게 굳은 상태에서 산박이 손으로 석상을 털어 내려고 했지만 그것은 계속해서 들끓으며 산박의 몸에 들러붙었다. 시은의 시리도록 차가운 냉기를 지닌 해골이 다가와서 용암처럼 달아오른 석상을 쳐내려고 했다. 그러나 석상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산박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조금 가쁜 숨에 다른 이들도 안도했다.

    “안 뜨겁습니까?”

    “화상은 안 입었어요. 그냥 건든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한 것 같네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산박을 보며 모두가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농담을 건네기 힘들었다. 반면 산박은 되레 농담을 입에 담았다.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신이네요.”

    그제야 다른 이들이 입을 열었다.

    “개같은 신이겠죠.”

    너도나도 야만신을 욕했다.

    “심장이 떨어질 뻔했어요.”

    시은은 정말로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는 방금 전 마치 전시해둔 미술품에 불이 붙은 기분에 휩싸였었다. 패닉. 그 감각은 시은의 심장을 거칠게 뛰게 만들었다.

    ‘이거야.’

    그저 손에 불이 들러붙은 시각적 효과만으로도 시은의 쾌감은 상상을 초월했으며 동시에 공포도 대단했다. 자신의 손이 아니라 타인의 손에 의해서 산박을 빼앗겼다고 생각해서였다.

    그 공포! 그리고 쾌감! 모든 게 뒤섞인 혼돈 속에서 시은은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속옷을 갈아입고 싶어졌다. 옷을 조금 더 강하게 정돈했다.

    ‘젠장할.’

    반면 산박은 놀란 상태에서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분명 야만신의 은총이 더 강해졌을 것이었다.

    ‘사냥감이 된 기분이야.’

    기분 나빴다.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었다.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돈다발을 주고 가버리는 상황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뭘 기대하는 걸까?’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감상은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이 던전의 가장 큰 노림수는 ‘시간 지연’이었다. 고로 이를 확실하게 ‘돌파’해야 했다.

    건질 것 하나 없는 변질체 놈들. 천장에 들러붙은 검은 슬라임. 그들은 시간을 지체할 수는 있어도 산박의 팀에게 경상을 입히는 게 전부였다. 팀은 이들이 전처럼 합류하게 만들지 않았고, 이미 같은 곳에 있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화르르르!!

    방패에 들러붙은 화염에 변질체는 허우적거리며 벽에 부딪쳤다. 모든 이성이 날아가 버린 형태 속에서 불꽃 때문에 오감이 망가져 버렸다.

    여덟 개의 무리를 단 하루 만에 처리한 옥시모론 팀은 거대한 문을 마주했다. 이미 쩍 열려 있었고, 그 앞에는 낭떠러지가 있었다.

    ‘퇴로를 없앤다. 물웅덩이랑 같다.’

    모든 게 관통되고 있었다. 뒷걸음질, 전력으로 달리기 힘든 물웅덩이는 이족 보행 하는 인간에게 특히나 괴로웠다.

    낭떠러지도 마찬가지였다. 높이는 높지 않을 거다. 그렇게 느껴졌다. 직감이었다. 하지만 다시 올라가는 건 힘들다. 내려가기는 쉽지만, 다시 올라오는 건 힘든 작은 턱. 딱 성인 남성 키보다 한 뼘 정도 클 것이었다. 잘 내려가면 부상은 당하지 않는 수준의 턱이었다.

    ‘낭떠러지라고 말하는 것이 우습지.’

    하지만 산박은 문 너머의 턱을 ‘낭떠러지’라고 확신했다.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던전에 짓눌려서였다. 그리고 그건 진짜 낭떠러지와 같은 효력을 발휘할 것이었다.

    ‘다시는 못 올라가겠지.’

    “여기서 휴식하겠습니다. 4일 차. 보스 공략하겠습니다.”

    산박의 말에 모두 빠르게 휴식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가혹한 질주였다. 안전하다고 생각해도 몸은 확실하게 지쳐갔다. 마지막에는 까딱 잘못하면 다리가 무너지듯이 기울어져서 떨어질 수 있었다.

    그걸 깨달은 건 산박, 충호, 시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산박은 명령을 내렸으니 불만이 없었고, 충호는 A급 전사이기에 위험을 낮게 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좀 위태로운 것처럼 보여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시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남의 고통이 쾌감으로 들어오는 비틀린 존재였다.

    고로 이 주체할 수 없는 돌파는 보스 방까지 그들을 인도했고, 성공했다.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인원수가 많아서이기도 했다. 해골과 대장삵까지 합치면 인원수만 일곱이었다. 소환물만 2개체가 있었고 던전 사용자도 한 명이 더 추가된 상태였다. 돌파가 난전에 휩싸여 걸려 넘어질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떠들다 조용해졌다. 그사이에 시은은 산박에게 다가가서 옆에 앉았다.

    “이렇게까지 빨리, 많은 적을 상대해본 건 처음이에요.”

    “저희 팀은 지금까지 소모 아이템을 이렇게 격렬하게 소비한 적이 없으니까요.”

    2일 때까지 이동한 거리의 세 배에 달하는 거리를 주파했다. 적의 밀도는 높아졌지만 무리 없이 격퇴했다. 첫 전투가 언제나 고비일 뿐이었다.

    “보스 몬스터는 분명 성장형이겠죠.”

    “예. 아마 저희가 예정일을 절반으로 줄였으니까, 놈은 상당히 약해진 모습을 가질 가능성이 있어요.”

    “그래도 보스 몬스터니까, 보통 놈은 아니겠죠?”

    “던전 사용자를 죽일 확실한 수단은 몇 가지 가지고 있을 겁니다.”

    산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찍 도착해서 보스 몬스터가 약화되어 쉽게 공략된다? 개소리다.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자정이 지났다. 힘이 회복되고 몸도 휴식을 취했다. 외길이라 큰 다행이었다. 경계를 설 필요가 없었고, 있다고 해도 대장삵이 있었다.

    일어나서 뜨거운 물을 마시고 보스 몬스터에 대해 몇 가지 간단한 브리핑을 했다. 그다음에 그들은 턱 아래를 봤다. 우물처럼 앞이 막혀 있었고, 아래만 보일 뿐이었다.

    “쯧.”

    충호가 혀를 찼다. 정말 들어가기 싫었다. 굴처럼 보였고, 시야가 제한되었다. 내려갔을 때 적이 너무 가까이 있다면? 큰일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먼저 내려갈게. 밧줄만 줘.”

    대장삵이 용감하게 나섰다. 실제로 그가 먼저 내려갔다. 삵은 충분히 은밀한 존재였다.

    아래로 내려간 대장삵이 납작 엎드렸다. 귀를 쫑긋거렸고, 이내 몸을 뒤집어서 발짓했다. 해골이 그다음에 내려가고 나머지도 내려갔다.

    산박은 주변을 훑었다. 시야를 방해하듯이 돌들이 언덕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돌 언덕이 그득했고, 돌탑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제한된 시야는 그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벌레가 특히나 많았다. 좁쌀만 한 날벌레가 콧구멍으로 들어가자 기겁하기도 했다. 지독한 환경이었다. ‘벌레가 먹을 것’이 풍부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바람이 불지 않았음에도 역한 냄새가 났다. 산박은 바위틈에 있는 검은 것을 손으로 만졌다. 까끌까끌한 흙이었다. 그게 뭔지 산박은 몰랐지만, 수색을 하고 나서는 뭔지 알 수 있었다. 구더기, 벌레들이 썩어서 검게 된 것뿐이었다. 먼지와 뒤섞이면서 흙과 비슷한 감촉을 줬다. 그 냄새는 비린내로 가득했다.

    “웁. 웨에에엑.”

    주궤가 토악질을 했다. 1레벨 던전의 보스 몬스터. 거기에 환경까지 기괴하니까 별수 없었다.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는 1레벨 던전의 뉴비였다.

    천장을 통해서 이곳의 규모를 짐작했기에 보스 몬스터는 금방 찾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 보스 몬스터의 기척은 소리로 먼저 다가왔다.

    구애액. 구애액. 철퍽! 철퍽! 콰악, 흑!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토하는 소리, 질퍽거리는 발걸음, 뭔가를 무는 것 같고, 먹는 것 같은 아가리. 거대한 숨결…….

    꿀꺽.

    누가 마른침을 삼켰다. 소리가 제법 컸다.

    강합이 충호의 어깨를 쳤다. 그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모두 돌리지는 않았다. 인간의 시야각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거리 감각을 재는 데에는 도움을 주지만… 넓은 시야각을 지니지는 못했다. 함부로 고개를 돌려서는 안 됐다.

    “발소리 들었어요? 얼마나 큰 놈일까요?”

    “질퍽거리는 소리 때문에 크게 들리는 겁니다. 실제 크기는 더 작을 겁니다. 미리 겁먹지 마세요.”

    산박의 말에 강합이 입을 다물었다. 왠지 모르게 허벅지 한쪽이 아려 왔다. 아직도 정신적 트라우마를 이겨내지 못한 걸까? 이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내면 달라질지도 몰랐다.

    “삵아, 올라가서 확인해봐.”

    대장삵이 돌무더기에 올라갔다. 그러고는 제법 긴 시간 놈을 주시했다. 일행들도 그가 보는 방향을 주의 깊게 노려봤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대장삵이 슬금슬금 엉덩이를 빼며 조금 뒷걸음질 치다가 몸을 돌려 능숙하게 내려왔다.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말랑말랑한 고양이 특유의 발바닥은 강력한 소음 방지제였다.

    “그렇게 큰 놈도 아냐. 우리가 확실하게 일찍 온 것 같은데.”

    “보통 던전 사용자였다면 하루를 쫄딱 굶고 여기에 도착했겠지.”

    던전의 계획보다 2일이나 더 빨랐다.

    “충호보다 조금 더 큰 정도야. 대신 뭔가 길어.”

    “뱀처럼?”

    “도룡뇽? 악어? 하지만 두 발로 걷고, 팔이 원숭이처럼 길어.”

    “돌을 던질지도 모르겠네요.”

    산박의 말에 전부 눈을 찌푸렸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팔을 봉인하는 게 가장 먼저입니다. 적어도 뭘 던지지는 못하게 만들어야 해요.”

    당연히 산박의 시선은 강합에게로 향했다. 여기서 가장 긴 꼬챙이를 지닌 건 그였다. 강합의 눈이 흔들렸다가 금방 안정되었다.

    “해보겠습니다.”

    “다른 이들도 오른팔을 노리세요. 한 손만 못 움직이게 해도 큰 이득입니다.”

    그 말에 대장삵이 의견을 냈다.

    “놈은 왼손잡이야. 내가 봤어.”

    “좋아. 그럼 왼팔을 노리세요.”

    주로 쓰는 팔을 무력화시킨다면 명중률이 크게 떨어질 것이었다.

    “그 외에는?”

    산박의 말에 대장삵이 입을 열었다.

    “구더기다.”

    “구더기?”

    “구더기를 뱉어내고 다시 먹고, 반복하고 있어. 등에는 뭔가 구멍 같은 게 있고……. 위협적으로 보여. 등에서 뭔가 쏠지도 몰라. 아무튼 자꾸 뱉고 먹고를 반복해.”

    산박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없었다. 평범한 암흑 던전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처음 보는 보스 몬스터라니, 화가 났다.

    질퍽거리는 건 구더기와 체액 때문이었다. 몸 자체에 수분이 많았다.

    “작전을 짜겠습니다.”

    산박은 놈의 위협적인 부분을 지적했다. 돌 던지기, 꼬리와 아가리, 그리고 등에 있는 사람 머리통만 한 구멍. 마지막으로 덩치.

    작전에 대해서 말하고 곧바로 돌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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