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270)
  • 108화

    * * *

    다시 소환된 대장삵은 보고를 시작했다.

    “일이 꼬였다.”

    가장 먼저 결론을 말했다. 검은 슬라임의 절반을 물의 마법을 통해서 휩쓸고 간 것은 좋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그 뒤로는 대장삵의 무용담이 이어졌다. 산박은 이를 막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대장삵은 격전을 막은 용사였다. 그가 검은 슬라임 절반을 끌고 가지 않았다면 여기에서 가장 약한 주궤는 확실하게 죽었다. 혹은 용기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충호가 큰 부상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공을 세운 자가 재밌다고 여기는 행위를 막는다? 부하를 밑에 두면 안 되는 사람이다. 억지로 부하를 만들고 대장 노릇을 해봤자 오래 못 가고 추해질 뿐이었다.

    “…그런데 지형이 바뀌었지.”

    대장삵은 전투가 오래 이어질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산박이 무리해서 변질체를 혼자 껴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건 용맹이 필요한 일이었다. 산박같이 냉철한 이성을 지닌 자는 하기 힘들었다.

    그가 잘못 판단한 이유는 ‘변질체의 공격력’ 때문이었다. 기술이 담겨있지 않은 무기를 쥐고 있어서 산박은 그들을 충분히 끌어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차이가 두 존재의 판단을 갈랐다.

    “지형? 지형이 바뀌었다고?”

    산박이 재차 물었다. 그건 매우 중요했다. 당장도 물웅덩이가 많아서 후퇴하려면 ‘준비’를 해야 했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 너무나도 취약했다. 그런데 또 지형이 바뀐다? 짜증이 확 올라왔다. 스트레스는 덤이었다.

    “모래다.”

    그 말에 산박이 웃었다. 이건 좋은 환경이었다. 분명 인간은 모래 위를 달리는 걸 힘들어한다. 하지만 모든 건 상대적이었다.

    “검은 슬라임에게는 쥐약이었겠는데.”

    “불순물이 자꾸 몸으로 들어가니까.”

    제대로 힘을 못 냈다. 슬라임은 맞추기 힘든 작은 크기와 스피드, 그리고 튀어 오르는 단발성 힘 때문에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모래와 흙 같은 불순물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냥 달리는 것도 모래에서는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모래를 크게 한 줌 끼얹으면 운동성이 급락한다. 물론 반으로 가르는 것보다는 약한 제약이었다.

    ‘그래도 앞으로는 편하겠다.’

    슬라임 놈들의 활동성 저하는 피할 수 없었다. 다만 그 판단을 대장삵이 발바닥을 핥으며 제지했다.

    “일부분의 지형만 바뀐 거다. 던전에 이런 경우는 종종 있지만, 1레벨에 이런 건 희한하네.”

    “일부분만?”

    산박이 더더욱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스토리를 집어넣으려다가 실패한 것처럼 보여. 마법사의 제단 같은 게 있었다. 거기에 모래 골렘도 있고.”

    ‘물이 많은 던전에 모래 골렘?’

    헛웃음이 나왔다. 알아서 사라질 놈이었다. 그 정도로 모래 골렘은 물이 들어가면 빠르게 육체가 무너진다. 진흙 골렘으로 변신!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담겨있는 마법 자체가 ‘모래’에 걸맞게 걸려있기 때문이다. 모래 육체가 진흙으로 변한다는 건 혈액형이 O형인 사람에게 A형 혈액을 꽉 채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크기는?”

    적을 파악하자마자 산박이 물었다.

    “진흙 골렘의 크기는 소형. 2미터가 조금 넘는다.”

    “제가 골렘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요.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제법 진지한 산박에게 이시은이 농담을 걸었다. 이때 자신의 빈틈을 보여줘야 했다. 멍청한 소리를 지껄여서 산박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일은 계속되어야 했다.

    “골렘이 문제가 아니에요. 중요한 건 이 던전의 콘셉트죠.”

    산박이 그 말에 대답했다. 다른 이들 모두 궁금한 표정이라 내친김에 말해 주기로 했다.

    “저는 어제만 해도 소비 아이템의 사용을 권장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시은은 침묵했다. 답이야 알고 있었지만,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건 하책(下策)이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맡을 수 있었다. 모든 일에 ‘이시은!’이라고 불리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일에는 강약,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다. 축구에도 권투에도 으레 있는 게 완급 조절이었다. 인간관계에도 이게 필요했다.

    모두 대답하지 못하자 산박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라? 이렇게 큰 판을 보지 못하나?’

    당황했지만 금방 표정을 숨기고 말을 이어 나갔다.

    “던전 진행도 때문입니다. 저희는 벌써 3일째에 돌입했지만 던전을 많이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이템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자마자 모래 골렘을 상대해야 하죠.”

    힘의 사용이 불가피했다. 모래는 화염에 강한 내성을 지닌 건 아니지만, 화염보다는 물이 더 골렘을 조지기에 좋았다.

    ‘효율도 좋을 수밖에 없지.’

    진행도. 속도. 그게 이 던전의 핵심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던전 사용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방법은?

    ‘어느 지점에서 그게 터질까. 폭발적으로 터져야지 치명적이지.’

    산박이 말을 하다 말고 고민하자 모두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있었다. 몸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그의 집중력을 흩트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라면?’

    변질체와 검은 슬라임과 같이 서로 합치면 위협적이고 치명적인 괴물을 배치한다. 물의 웅덩이를 통해서 치고 빠지는 게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암흑 던전으로 시야와 명중률을 ‘강제로’ 낮춘다.

    ‘던전 사용자의 목을 치려면?’

    보스 몬스터. 그때 친다. 하지만 그래서야 시간을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암흑 던전의 보스 몬스터는 암흑 오 형제(Dark Five brothers).’

    평범한 던전 공략 팀은 4:5의 싸움을 하게 된다. 능숙하고 노련한 언데드 전사를 상대로 하는 싸움이고, 생사투(生死鬪)의 성격을 띤다.

    ‘도망칠 수 없지.’

    언데드의 활력은 무한하지는 않지만 유기체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높다. 언데드를 상대로 도주하는 건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서 카드 돌려 막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야 랜덤 던전이 보여준 방향성과 다르다.’

    고로 보스 몬스터가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라면…….’

    시간이 걸리게 하고, 점점 강해지는 보스 몬스터를 배치할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른다. 지식이 짧기 때문이다. 하지만 높은 지혜는 결국 그 답을 움켜쥐었다.

    ‘필요한 건 스피드다.’

    산박이 생각한 걸 팀원들에게 말하자 모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짜 그럴듯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불확실성이 큰 것도 주효했다. 물웅덩이는 넘어갈 만한 변동 요소였다.

    ‘모래 골렘과 마법사의 제단은 아니지.’

    노골적이다. 욕심을 부려도 너무 부렸다. 동시에 산박은 쓴맛을 느꼈다. 던전의 근본, 그 뿌리에 닿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너무 인위적이야. 대체 누가 이런 던전을 이 세상에 뿌렸을까.’

    누구도 몰랐다.

    팀 옥시모론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굽혀진 아가리 괴물’을 통해 큰 수익을 올려서 느려진 발걸음을 더욱 빨리해야 했다. 그것마저도 ‘진행도를 낮추는 함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런데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푹!

    삽질을 시작했다. 보물 지도 때문이었다. 단 한 번. 단 한 번 파서 당첨이 안 되면 바로 중단한다는 조건하에 시작된 삽질이었다. 포기하기에는 옥시모론 팀이 지닌 강점이 컸다.

    물의 연어를 통해서 식수 확보. 드루이드의 생육 마법을 통한 추가적인 식량 해결. 어찌 되었건 지금 옥시모론 팀을 노리는 이 랜덤 암흑 던전은 상대를 잘못 고른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산박이 무르게 대처한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한 번 파보고 아니면 접는 것이었으니까. 일단 스윽 맛보고 쓰면 뱉고 달면 먹으면 그만이었다. 직업 선택 또한 곳곳을 찔러보고 아니다 싶으면 빤스런 치는 게 최고의 구직 방법이었다. 분명 어디엔가는 꿀 빠는 직장이 있기 마련이었다.

    푸서어억!

    흙이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갔다. 떨어질 뻔한 강합을 충호가 잡아서 끌어 올렸다. 장창으로 몇 번 찔러보니 흙이 후드득 떨어졌다. 땅 밑에 또 다른 공간이 존재했다.

    밧줄을 걸고, 충호가 먼저 내려갔다. 어느 상황에서도 대처가 가능한 건 산박이었지만 전투에 한해서는 충호가 더 우세를 점했다. 버티는 것도 그는 방패가 있기에 수월했다. 적이 있다면 버티고, 바로 산박이 내려가서 조지면 그만이었다.

    “이상 없습니다!”

    무기로 방패를 몇 번 때려서 큰 소음을 낸 다음에 반응이 없자 충호가 소리쳤고, 산박이 내려갔다. 여기서 던전 정보를 가장 많이 숙지하고 있는 게 산박이었다.

    ‘연구소?’

    무언가 연구하는 흔적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증류 관이었다. 수많은 관이 있었고, 끓이는 장치와 유리병이 잔뜩 자리 잡고 있었다.

    “팀장님, 이 검을 보십시오.”

    충호의 말에 산박의 고개가 돌아갔다. 관의 끝, 재합성물이 모이는 곳에 있는 건 거푸집과 그 거푸집보다 조금 작은 형태를 지닌 검이었다. 비율이 전체적으로 줄어든 것을 제외하면 거푸집의 형태와 똑같은 검이었다.

    “만져 볼까요?”

    “아뇨. 무슨 검인지도 모르는데요. 천으로 싸서 가져갑시다. 현실 세계에서 감정을 받아야 해요. 저도 본 적이 없는 검이거든요.”

    어차피 1레벨 검이다. 다른 기업에 속한 감정사에게 의뢰하는 건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재료는 익숙한 것들이네. 다행이다.’

    유리병 안에 있는 것을 통해서 재료를 추측할 수 있었다. 또한 포박된 채 바짝 말라있는 괴물도 볼 수 있었는데, 이 또한 재료였다.

    말린 검은 슬라임, 따뜻한 뿌리, 흔들리는 갈대 씨앗, 증류수, 청동 가루. 다섯 개의 재료.

    산박은 증류 관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흔적을 모두 눈에 담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건 흑탄을 꺼내서 대충 종이에 썼다.

    ‘저 검이 뭔지에 따라서 사업을 할지 말지 결정되겠는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높은 지혜를 지닌 산박은 높은 직관력으로 증류 관에서 이루어진 연구와 실험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대충’ 가늠했다. 남은 건 그 비율일 뿐이었다.

    연구소 내에 자료는 전무했다. 단지 화덕과 재 가루가 식은 채 있을 뿐이었다. 바닥에는 유골 3구가 모여 있었고, 목이 베어져 있었다.

    빛바랜 피를 손으로 문댄 산박은 몸을 일으켰다. 더는 볼일이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오래 보낼수록 팀원들이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연구소가 풍기고 있는 돈 냄새를.

    두 명은 밧줄을 타고 다시 올라갔다. 아무리 뒤져도 돈 되는 건 검 하나뿐이었다. 산박을 제외한 이들에게는 허탕인 셈이었다. 재밌는 게임을 보고 그 회사의 주식을 사기보다는 그냥 재밌다고 넘기는 것이 사람의 심리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산박은 올라오자마자 말했다.

    “모래 골렘을 잡겠습니다. 검은 배낭에 넣어두고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저주검일 수 있습니다.”

    “잠깐만요.”

    시은이 이를 제지했다.

    “저주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확인할 수 있어요.”

    그녀는 마녀였다. 당연히 마녀들과의 커넥션을 가지고 있고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이 중에 하나였다. 이용하는 이들이 적어서 폐쇄성이 없는 셈이다. 제발 한 명이라도 그냥 들어오라고 할 정도로 절박한 셈이다. 마녀들의 커뮤니티는 그만큼 중요했다.

    검을 감싼 천에 손을 올려놓고 집중했다. 모두 가만히 지켜봤다.

    “저주는 없어요. 근데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겠네요.”

    “저주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죠. 돈 굳었네요.”

    강합이 냉큼 시은의 행동을 두둔했다. 저주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 비용이 절감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배낭에 넣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 환도를 쓰기 때문이었다.

    롱 소드는 대단히 좋은 검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도와 검은 다르다. 미묘한 차이는 실전에서 터무니없는 실수로 이어지기 쉬웠다.

    * * *

    경찰차가 몇 대나 섰다. 좁은 삼거리 길목이 통째로 막히자 방해받은 시민들이 불만을 토로했지만 공권력은 막강했다. 시민들도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체면을 생각하는 한민족 특징상 명분이 으뜸인 상대가 갑이었다.

    노란색의 폴리스 라인까지 쳐졌다. 강력계 형사들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다른 짬 처리를 하다가 큰일이 터져 허둥지둥 왔음에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송헐기(宋歇祇) 경장입니다.”

    “송포변(宋疱辯) 순경입니다.”

    폴리스 라인을 가로막은 경찰은 지갑에 있는 신분증을 확실하게 눈에 담았다. 그리고 통과시켜 줬다.

    ‘현장’은 확실하게 보존되고 있었다. 기다리던 경찰관이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폐지 줍는 할아버지께서 발견을 하셨답니다. 조금이라도 돈이 될까 봐요.”

    진술에 의하면 캐리어는 잘 은폐되어 있지는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빨리 발견되기를 원하는 모습이었다.

    흰 천을 걷어내자 열린 캐리어가 보였다. 어린 여성이 접혀 들어가 있었다. 추운 겨울이라 시체의 상태는 양호했다. 악랄한 건 캐리어가 하수구 위에 있어서 피가 흘렀지만 길게 늘어지지 않고 바로 하수구 구멍으로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즉, 캐리어를 은폐하지 않은 것과 하수구에 둔 것의 의도가 서로 상충했다. 하나는 빨리 발견되었으면 하는 행위였고 다른 하나는 흐르는 피를 숨기는 행위였다.

    ‘골치 아프구만.’

    포변 순경이 눈을 찌푸렸다. 척 보면 척이었다.

    “끔찍하네요, 선배님.”

    “뭐가 보여?”

    “예? 그냥 끔찍한데요.”

    “새끼야. 딱 봐도 잘 들어가 있잖아. 캐리어에 사람 넣는 거에 능숙하다는 뜻이잖아. 집중 안 해?”

    “죄송합니다.”

    “사진이랑 동영상 이 주변 거 싹 다 찍어. 난 CCTV 확보하러 간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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