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270)
  • 107화

    대장삵을 돕는다. 이 판단에서 도움을 주는 건 검은 슬라임에 대한 두 번의 전투 경험이었다. 더 이상 경험을 쌓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모두 익숙해져 있었는데, 슬라임이 지니는 태생적 한계를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렇기에 도와주러 가는 게 쉬운 선택이지.’

    옳은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리스크를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당장만 해도 변질체+검은 슬라임을 마주했다. 그 덕에 산박이 부상을 입었다. 둘의 시너지는 무섭기 때문이다.

    변질체가 방해하고 검은 슬라임이 몸속으로 들어가면 그걸로 게임 끝이었다. 귓구멍에라도 달라붙는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함을 느낄 것이었다. 적어도 날벌레가 귓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큰 피해를 입을 테니까.

    ‘전투가 끝났는데도 오지 못하는 걸 보면 다른 적과 부딪쳤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지.’

    그 예로 산박이 지닌 힘을 모조리 당겨 써버렸다. 이제 곧 죽음에 닿을 것이다.

    “도와주러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검은 슬라임 일곱 마리면 쉬운 상대입니다.”

    고민하는 산박이 쉽게 의견을 내놓지 못하자 몇몇 팀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 그리고 대부분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처럼 느껴졌고, 그럴듯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던전에서의 대장삵의 헌신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주궤조차도 항상 경계를 대신 서주는 대장삵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아뇨. 방금 모든 힘을 끌어다 썼습니다. 곧 역소환될 겁니다. 아무래도 다른 트러블이 생긴 듯합니다. 저희는 물러납니다.”

    반론은 없었다. 애초에 대장삵이 역소환될 거라고 하니 구하러 갈 필요도 없어졌고, 검은 슬라임, 나머지를 처리하기에는 산박이 리스크를 입에 걸었다. 지금은 물러나서 쉬어야 할 때였다. 자정이 지나고 나서 대장삵을 다시 소환한다. 사정을 듣는 건 그때였다.

    물러난 팀은 모닥불을 피우고 침낭을 꺼냈다.

    “이번 던전은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진행 상황이 너무 느려요.”

    시은이 걱정을 담아서 말했다. 실제로 2일 동안 먼 거리를 왔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오늘만 해도 전투 한 번이 끝이었다. 증원군이 더해져서 두 개의 괴물 무리를 처리했다고 해도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래도 보급은 넉넉하지 않습니까? 수익도 그 공룡 놈을 생각하면 이미 끝난 게임이나 다름없고요.”

    강합은 허무맹랑한 변명거리를 찍 싸면서 산박에게 자신의 충성을 보여줬다. 그건 그거 이건 이거였는데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익숙해지면 더 효율적으로 잡아야겠죠. 저번 던전과는 다르게 아무래도 이번 던전에서는 소비 아이템을 적극적으로 써야 할 것 같습니다.”

    힘의 사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소비 아이템 사용이 필수적이었다. 암흑 던전의 진행률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건 산박도 마찬가지였다. 시은은 그 불만을 ‘걱정’으로 비틀어서 꺼냈지만, 실상은 불만이었다.

    그 이면에는 부상자나 고통받는 자가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물론 산박이 제법 중상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뭘 더 말하리, 시은은 방금의 격렬하고 아슬아슬한 합공 전투에서 한 놈이 죽기를 원했다. 그러지 않아서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런 음흉하고 악랄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시은은 실제 전투에는 적극적으로 임했다. 유나가 죽고 나서 첫 던전 전투였다. 여기서는 최대한 노력하는 게 옳았다. 즉, 지금은 숙일 때다. 자신의 본성을 실오라기도 보여주면 안 됐다.

    시은은 똑똑했다. 일부러 상처를 하나 입기도 했다. 전투가 끝난 뒤에 산박이 파악할 수 있는 명확한 ‘피해 사실’에 기록될 것이었다.

    이런 걱정도 인간의 빈틈을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인간미라는 건 이시은이 가장 표출하기 힘든 사회 동물이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획득해야 하고 ‘있는 척’을 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불평, 불만 그리고 걱정은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었다. 지나치면 과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모호한 것. 이를 이해하는 건 어려웠고, 실제로 이시은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알고리즘을 짜고 이를 통해서 지금 걱정을 내뱉은 것뿐이었다. 그것도 가장 먼저. 누구보다 빨리. 선수를 취했다. 이시은에게 대화는 또 다른 전투에 불과했다.

    다른 이들도 너도나도 온갖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몸은 편한데 산박과 시은이 많은 힘을 써버려서였다. 산박에게 너무 치중된 팀 판단 능력은 산박이 호랑이가 되면서 소통이 불가능해지자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유연성을 잃은 팀은 소비 아이템 하나 사용하지 않았다.

    이 또한 큰 문제였다. 부팀장을 고려할 정도였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팀원의 수가 고작 네 명이라서였다. 보통은 세 명이다. 그런 상황에서 부팀장을 만든다? 산박이 지닌 능력을 의심하는 자가 나올 수 있었다. 그 의심은 아주 나중이 되어서 개화할 것이고 그건 우연이라는 이름 앞에서 산불이 될 수도 있었다.

    지나친 억측이라기에는 현실이라는 놈이 무서웠다. 고로, 산박은 옥시모론 팀에 자유도를 부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독트린이었다.

    “주궤 씨 빼고 다른 사람은 협력하에 소비 아이템을 쓰도록 하세요. 필요하다면 주궤 씨에게 명령해서 아이템을 쓰게 만드시고요.”

    “그래도 됩니까?”

    소비 아이템은 제법 돈이 든다. 그리고 그걸 산박은 홀로 감당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팀원들은 산박의 눈치를 보고 쉽게 사용하지 못하고 산박이 명령해야 그제야 쓰는 편이었다. 이제 그걸 없앨 때가 왔다. 몇 번의 전투로 쓸모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약도 써야지 약이었다.

    “못 쓰고 죽으면 저만 손해니까요.”

    “죽으면 죽는 사람이 가장 손해 아닙니까?”

    충호의 농담에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작은 것에도 쉽게 웃는 게 던전에 들어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무조건 다 쓰라고는 안 하겠습니다. 필요할 때 쓰시고, 힘을 아껴서 던전을 빨리 공략하겠다는 생각을 가지세요.”

    “예.”

    모두가 대답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지금 암흑 던전에서의 이동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것과 진행도도 느리다는 것을.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했고, 산박은 변화를 끌어냈다. 그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아까워서였다. 돈 날아가는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도 똑같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충성심은 무슨…….’

    서로 만족에 의해서 같이 행동할 뿐이다. 산박이 지급 아이템 체계를 도입한 것도 자신의 팀이 팀원들에게 만족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위기가 닥쳐왔을 때 허둥지둥 바꾸면 타산적으로 보이지.’

    위기가 오지 않았는데도 미리 바꾼다면 이타적으로 보인다.

    잠자고 일어난 산박은 대장삵을 소환했다.

    “무슨 일이 있었지?”

    그 물음에 대장삵이 입을 열었다.

    * * *

    휼간은 ‘룰’을 지켰고, 적당한 곳에서 풀려났다. 정확히는 묶인 채 풀려났다는 말이 옳았다. 다만 포박이 헐거워져 있어서 노력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약간의 돈과 대포 폰도 놔두었기에 이동하는 데도 무리는 없었다.

    약속은 지켜졌고, 종휼간은 오늘을 교훈 삼아서 더욱 숨을 것이었다. 그는 중국으로 향할 생각을 가졌다. 쉰 개가 넘는 자치국으로 나누어진 중국은 가장 혼란스러웠기에 가장 숨기 편했다.

    되돌아온 굉려는 부산에 렌터카를 반납하고 다시 세종시로 돌아와서 산 하나를 넘어 장 노인에게 닿았다.

    “송유나의 죽음이 시작이었습니다.”

    휼간이 아는 걸 토대로 송유나에 대한 것이 입에 담겼다. 장 노인은 그걸 주의 깊게 들었다. 몇 번 차를 마시고, 담배도 뻑뻑 피워댔다. 집중력을 위해서였다.

    동시에 산박이 휼간에게 명령한 것도 들을 수 있었다. 살기 위해서 휼간은 정말 ‘모든 걸’ 입에 담았다. 굉려가 제안한 먹음직스러운 생존이 특히 큰 도움이 되었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입을 털어 대었다. 조직에 가장 있어서는 안 될 놈이었다.

    위기 상황에 머리가 안 돌아간 휼간은 산박에게 제대로 엿을 먹여줬다. 어차피 산박과 더는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장 노인이 입을 뗐다.

    “산박 또한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구만…….”

    “저희를 가장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재수 없게도 가장 먼저 그에게 붙은 게 암살자인 저니까요.”

    “쯧.”

    실로 곤란한 형세였다. 산박의 곁에 붙인 게 ‘암살자 직업’을 가진 놈이고, 공격력도 높다. 지나칠 정도로 제대로 된 놈을 붙여 줬는데 되레 독이 된 경우였다. 거기에 장 노인의 자금력과 정보까지 합쳐졌으니.

    “안 그래도 경계를 받고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야. 오히려 날 노리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

    산박의 가장 큰, 가장 중요한 사업 파트너는 장 노인이었다. 드루이드 과수원에, 땅에, 고아원과도 연결 고리가 있다. 당산 부동산을 운영하고 있는 함희두가 고아원에 제법 식량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되레 장 노인의 입지를 무너뜨리기 위한 수작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누구일 것 같나?”

    “제 생각에는 던전 대전 상인 공회라고 생각합니다.”

    “박조조, 그 개만도 못한 인간이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군.”

    던전 대전 상인 공회에서 짚이는 놈은 양귀문 부장이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장 노인은 박조조를 언급했다. 굉려는 고개를 자연스럽게 끄덕였다.

    “박조조에게는 저희가 눈엣가시일 겁니다. 자기 혼자서는 감당 못 하니 대전 상인 공회를 통해서 수작질을 하려고 했겠죠.”

    “돼지 같은 놈들. 드루이드 나무를 노린 거겠지.”

    박조조는 트럭 상인이다. 드루이드 사과 같은 사업거리에 욕심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꾸준히 생산되고 유통 기한이 오래 지속되는 드루이드 사과는 상품 가치가 대단히 뛰어났다.

    매달 생산되는 것이라서 소량의 로열티가 달마다 꾸준히 산박의 계좌로 들어가고 있었다. 은행에 연줄이 닿아있는 던전 대전 상인 공회라면 얼마든지 조회가 가능했다. 불법? 하찮은 민초들에게나 불법이었다. 박조조에게서 최신 근황을 듣고 이를 단초로 삼아서 조사를 하면 알 수 없는 정보에도 손이 닿고 눈으로 보였다.

    즉, 박조조가 문제인 셈이다. 박조조를 해결하면 대전 쪽 놈들은 도태될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굉려의 물음에 장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번에는 그런 방식으로는 안 돼. 저쪽도 체급이 있으니까.”

    박조조의 뒷배가 없을 때는 상관없었지만, 있었기에 건드릴 수 없었다. 박조조는 이미 산박으로부터 물량을 받고 있었고, 그건 제법 돈이 되는 일이었다. 다른 제품에 섞어서 팔기 때문에 상상 이상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게 산박이었다. 중요하다고 해도 ‘개인’의 수준에서 중요할 뿐이지만…….

    “산박에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우리가 휼간을 쪼아 대었다는 걸 알면 그것만으로도 큰 사달이 난다.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야.”

    “가만히 있으면 더더욱 오해를 불러오지 않겠습니까?”

    “말은 똑바로 해야지. 의심을 불러올 뿐이다. 오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야. 놈은 제법 똑똑하거든. 사리분별을 잘해.”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올 상황이 아니라면 보다 확실한 걸 추구할 터였다. 확신 없이 교류를 끊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미리 말해놓고 대전 상인 공회 쪽을 더 조심하라고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장 노인이 웃음을 흘렸다.

    “제법 고평가하는구나. 산박의 카리스마에 넘어갔구만?”

    “예? 아닙니다!”

    굉려의 외침에 장 노인이 더욱 크게 웃었다. 젊은 사람에게 산박의 냉철한 이성은 마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사업 파트너는 고개를 숙이는 일이 있어도 사건이 터지고 나서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때로는 피를 흘리고 나서 서로의 체급을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순서가 틀려서 X 되는 건 카드놀이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때로는 인생의 철학이 될 수 있었다. 박조조가 먼저냐 대전 상인 공회가 먼저냐의 고민만으로도 제법 깊은 통찰을 요구한다.

    “쓸데없이 말을 놀리지 말도록. 오해만 더 키울 거다. 산박은 우릴 제법 크게 보고 있으니까.”

    땅과 배곯지 않는 사람만 있는데, 산박은 장 노인을 제법 대우해 주고 큰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그에게 없는 걸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장 노인이 눈을 좁혔다.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멈췄다.

    “아니다.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팀 내의 분란을 조장한다면 산박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쯧.”

    장 노인이 혀를 찼다. 다른 세력인 데다가, 산박은 이권에 밝다. 손해와 이익을 판별하여 선을 넘는 놈도 때로는 자신의 부하로 삼는다. 젊기에 유연하다.

    “이번 일에는 가만히 있는 게 이득이다. 산박이 우리에게 칼을 겨눠서 피 몇 방울 나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쓸데없는 짓은 절대로 하지 마라.”

    장 노인이 다시 한번 경고했다. 그만큼 산박이 중요했다.

    굉려는 대답하고 방을 나섰다. 그들은 산박을 노리는 세력을 던전 대전 상인 공회로 보고 준비하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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