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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106/270)

106화

* * *

충호의 고함 소리에 주궤의 몸이 들썩였다. 어떻게 해서든 기대에 부흥해야 한다는 마음이 그를 채찍질했다. 이곳은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었으며, 모든 것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시험장이었다. 증명하지 않으면 도태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충호의 악다구니는 평범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매주궤는 냉큼 내달려 변질체를 환도로 헤집었다. 대한민국의 공통적 근접 무기는 환도였다. 원거리 공격을 좋아해서 가장 합당한 보조 무기였다.

서걱! 푸욱!

한 번 베고 깊게 찌르고 피해를 크게 줬지만 잠깐의 주저함으로 결국 변질체를 죽이지는 못했다. 단 1초의 판단도 근접 전투에서는 큰 차이였고, 운명을 가르게 하기 충분했다.

텅!

팔 보호대와 환도가 부딪히며 변질체가 일어났다. 주궤는 단번에 수비 태세로 변했다. 겁먹은 쥐 새끼에게 검을 쥐여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행인 점은 도망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뛰어내리는 것보다는 달리는 걸 선택했다.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게 주궤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어어어어어!!”

변질체가 피를 거죽거죽 흘리면서 펄떡거렸다. 실로 흉측했고, 겁이 났다.

‘제기랄!’

욕을 하는 주궤에게 놈이 팔을 휘적거리며 그대로 돌진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화염 토템 덕분에 이 변질체가 많이 약화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런 변질체를 상대로 고전하는 건 후방 직업이라면 응당 있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는 시은과 산박이 괴물인 셈이었다.

살덩이 뿌리로 가득한 변질체와 네크로맨서에 의해 일으켜 세워진 해골의 싸움은 서로 대놓고 부딪치는 걸로 시작했다.

철퍽!

철퇴가 살덩이를 때렸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마구잡이식 돌격병인 변질체보다 해골은 확실히 무기를 사용할 줄 알았다.

쿵!

살덩이의 롱 소드가 해골이 들고 있는 방패를 쳤다. 현실 세계에서 턴제 게임을 하듯이 서로 때리면서 점점 뒤엉키기 시작했다. 거리를 가늠해야 할 롱 소드를 쥔 변질체는 제대로 된 피해를 주지 못했다. 반면 해골은 무식하게 철퇴로 내려찍기를 반복했다.

쿵!

체중과 힘에 밀려서 넘어진 해골이 변질체의 살덩이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버둥거림이 거칠어졌다. 몸이 바짝 붙으면서 무기가 소용없었다. 그러나 뿌리 살덩이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마녀인 시은이 지닌 특별함. 그 특별함은 싸늘한 증오를 지식으로 삼아서 해골학에 접목시켰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뼈에 들러붙은 뿌리 살덩이가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변질체다운 공격이 완전히 틀어막혔다. 해골은 손으로 밀어서 놈을 떨쳐내고 무기로 내려쳤다.

산박은 호랑이로 변해 벽을 한 번 밟으면서 단번에 후방에 도착했다. 대장삵이 호랑이의 가죽을 발톱으로 잡으면서 덜렁거렸다가 내려왔다.

“돌격!”

대장삵이 명령했다. 동물 상태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산박을 놀리는 게 분명했다.

“크릉!”

호랑이의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그런 장난에 어울려줄 수 없었다. 달려가며 두 발을 번쩍 들어 올려 앞발로 변질체의 몸을 후려쳤다. 놈은 옆으로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산박은 바닥에 내려앉으면서 앞발로 단단하게 땅을 밟고 옆구리를 휘둘렀다.

호랑이의 몸이 강합의 장창을 잡은 채 힘 싸움을 하고 있는 변질체를 체중으로 짓눌렀다. 강합은 장창을 타이밍 좋게 놓아 버리고 환도를 뽑아 들어서 쓰러진 변질체에게 다가갔다. 산박은 다른 놈에게로 향했다. 후려치고 부딪치고 넘어뜨리는 것만으로도 산박은 이 전투의 주인공이었다.

“산박! 뒤다!!”

대장삵이 충호와 싸우고 있는 변질체의 머리 위에서 들썩거리는 살덩이 나무뿌리를 사정없이 손톱으로 할퀴다가 내려와서 고함을 질렀다. 다른 삵들의 지배자로 살았기에 전장에서의 시야가 넓고, 주변 정보가 가장 최신으로 갱신되도록 주변을 파악하는 빈도가 매우 높은 게 대장삵이었다. 습관이나 다름없었다.

“크아아아아!!”

곳곳에서 공격당하는 변질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대었다. 전투 시작부터 시작된 그 고함 소리와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외길 통로에 메아리치며 울렸고, 놈들의 증원군이 횃불에 닿았다.

변질체는 쉽게 죽지 않는다. 그들은 암버섯처럼 피어오른 살덩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 뿌리 같은 것들이 피를 쏟아 냈음에도 변질체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서리 해골은 손쉽게 변질체 하나를 잡아먹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칼로 땅을 파는 격이었다. 말 그대로 변질체의 심장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마구잡이로 살덩이가 증식해서 장기의 위치가 크게 달라져 있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버둥거린다는 점이 컸고 피도 많이 나오고 있어서 명확한 답이 없었다. 피통이 큰 징집병인 셈이었다.

‘여기서 검은 슬라임이?’

그런 상황에서 검은 슬라임의 증원은 위협적이었다. 산박은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대장삵이 감당할 수 있는가? NO.

자신까지 투입되면 감당할 수 있는가? NO.

함께 싸운다면 피해가 전무할 수 있는가? NO.

1+1=2가 아니다. 단순한 숫자로 매기기에는 변질체와 검은 슬라임의 시너지가 컸다. 한 놈은 발악하는 광전사고 다른 놈은 혼란 속의 훌륭한 암살자다. 즉, 현재의 전황 속에서는 뭘 해도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대장삵만 보내든 산박이 검은 슬라임을 최대한 걷어내든 되돌아가서 진형을 단단히 하든 결국에는 변질체가 살아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놈들에게 중경상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심장을 찾아 죽여야 했다. 그 결과 변질체는 전투를 길게 끌어 나갈 수 있었다.

‘검은 슬라임의 투입 전에 변질체를 모두 죽일 수 있을까?’

가능성은 희박했다. 결국 산박이 할 수 있는 건 대장삵을 미끼로 쓰는 일이었다. 그걸로 피해를 최소화하기로 했다.

어차피 다시 소환하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더럽다. 그 또한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죽는다고 해도 검은 슬라임의 투입은 막을 수 없었다. 이미 횃불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대장삵은 전투하고 있어서 간파가 느렸다. 그게 대장삵의 실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마저도 없었다면 검은 슬라임에게 기습을 당해서 한순간에 전멸했을 것이었다. 최소 두 명은 죽었을지도 몰랐다. 입을 비집고 귀로 들어가서 뇌에 슬라임이 들어찬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대장삵은 가장 용맹을 떨칠 수 있는 곳으로 용맹하게 나섰다. 바로 검은 슬라임이 달리는 곳으로 거침없이 뻗어 나갔다. 죽어도 되살아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도 그런 선택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주인공이다!”

매번 물의 마법이 가진 저지력 때문에 한쪽에 짱박혀 있거나 근접전으로 할퀴기만 해야 했던 대장삵이 봉인을 해제하듯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햐아악거리는 고양이 소리는 다른 고양이보다 조금 저음이었다.

물살과 함께 검은 슬라임들이 쓸려 나갔다. 전부 쓸어 내지는 못했다. 엉망진창으로 벽에 들러붙어서 달리는 놈들, 천장에 들러붙은 채 뻗어 나가는 놈들, 바닥에서 껑충 뛰며 은근슬쩍 물웅덩이에 물을 묻히면서 난잡하게 통통 튀는 놈들까지.

이런 놈들을 모두 물살로 휩쓸어 가기에는 대장삵이 쓸 수 있는 주문이 마땅찮았다. 1레벨 던전에서는 하향된 물의 마법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물의 마법은 하향당하면 1레벨 주문인 ‘파도 송곳니’보다 저지력이 약한 것뿐이었다.

쏴아아아!

대장삵은 바닥에 있던 세 마리를 타이밍 좋게 타격하고 그대로 쓸면서 벽 한쪽에 부딪혔다. 그러고는 좌우로 물살 치며 총 일곱 마리의 검은 슬라임을 끌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검은 슬라임의 숫자는 여덟 마리였다.

변질체 일곱 마리 중에 세 마리는 건재한 상태. 서로 뒤엉켜서 그나마 버틸 만했지만 검은 슬라임 여덟 마리가 도달하면 무너질 것이었다.

거기서 산박의 직관력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위협적인 검은 슬라임을 모두 죽이는 건 불가능했기에 검은 슬라임을 타격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 작은 크기를 생각하면 오히려 팀원들의 손발을 빌리는 게 더 효과적으로 검은 슬라임들을 막을 수 있었다. 고로 산박은 위협적인 검은 슬라임의 숫자를 반토막 내기보다 변질체들에게로 향했다.

“커헝!”

처음으로 호랑이의 낮은 저음이 울려 퍼지자 변질체 중 몇몇이 단번에 몸을 돌렸다. 목이 살덩이에 들러붙어 있어서 몸 전체를 돌려야 했다. 멀쩡한 놈 세 마리는 정확하게 호랑이에게 시선을 꽂았고, 그곳으로 향했다.

산박은 호랑이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메모를 할 정도로 열성적으로 공부한 덕에 그들의 모습을 따라 할 수 있었다. 직선으로 있으면 작아 보이지만 사선으로 이동하고 있는 호랑이는 매우 거대해 보였고 길쭉해서 위협적이었다. 거기에 그 울음소리와 풍겨 오는 노린내……. 그리고 강렬한 검은 줄무늬.

시각, 후각, 청각. 생명체라면 잘 발달된 세 가지의 감각 기관을 자극하는 호랑이의 카리스마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변질체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아아아아!”

저주파가 뒤섞인 초저음의 울음소리에 소름이 쫙 돋은 변질체가 괴성을 지르며 산박에게 덤벼들었다.

휘익!

리치가 닿지 않는데도 무기를 휘둘렀다. 눈이 높이 있는 만큼 낮게 있는 호랑이를 타격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앞발만 쭉 아래로 내밀면 고개도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출 수 있어서 호랑이의 머리를 때리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머리를 때린다고 해도 움직임을 둔하게 하기도 어려웠다. 호랑이의 약점은 머리가 아니었다. 무식하게 튼튼해서 총알도 두개골을 빗겨 튕겨져 나올 정도였다.

“크엉!”

산박은 단번에 앞발을 쭉 내밀어서 변질체를 밀쳐 넘어뜨리고 다른 놈을 뒷발로 걷어찼다. 보통 호랑이는 하지 않는 묘기였다.

퍽!

변질체는 맞자마자 그대로 고꾸라졌다. 체중이 0.1톤은 그냥 넘는 무지막지한 호랑이였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발이 엉망으로 꼬여있는 변질체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콱!

산박은 다른 팀원과 드잡이질 하고 있는 놈의 뒷다리를 물어서 그대로 잡아당겼다. 그사이에 두 놈이 산박에게 들러붙었지만, 가죽 하나만 믿으며 엉덩이를 크게 흔들었다. 살짝 떨어져 나간 놈들이 다시 들러붙었다. 잡아당겨서 세 걸음을 빼내자마자 순식간에 팀원에게 들러붙은 세 마리가 협공을 당해서 곤죽이 났다.

동시에 검은 슬라임이 공격을 시작했지만 그런 검은 슬라임을 도와줄 변질체는 일시적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팀원이 여러 개의 손과 발로 합심해서 검은 슬라임을 처리할 때 산박은 물어뜯기고 있었다.

‘크윽!’

살덩이 뿌리가 조이고, 몸을 뒤덮는다. 무식한 힘으로 버텨 보지만 호랑이의 육신은 굉장히 빠르게 활력을 소모했다. 체중이 큰 만큼 힘이 빠르게 소모되었다.

“크아아아아악!”

산박의 아가리에 크게 깨물린 변질체가 버둥거렸다. 버둥거릴수록 살은 더 빨리 떨어져 나갔다. 뾰족하고 긴 호랑이의 이빨과 턱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서 그대로 신체의 한 부분을 ‘통째로 뜯어냈다’.

로이드를 너무 맞아서 고자가 되어버린 로이더 킹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킹 오브 킹 로이더가 오더라도 무리였다. 단단한 앞발로 사냥감을 고정하고 굵직해서 허리만 한 목 근육으로 잡아당기며 턱으로 물어 버리는 행위는 서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그사이에 변질체보다 생명력이 낮은 검은 슬라임을 모두 처리한 팀원들이 변질체에서 산박을 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한번 검은 슬라임을 경험하고 크게 혼난 주궤는 검은 슬라임과의 두 번째 전투에서 1인분을 해냈다.

호랑이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걸쭉한 침이 길게 늘어져서 바닥에 떨어졌음에도 입과 연결되어 있을 지경이었다.

“커흐허허…….”

산박은 그대로 드러누웠다. 가죽이 크게 상한 부분도 있었고 털에 피가 묻은 곳도 있었다. 그런데도 변질체를 상대해서 그나마 피해가 크지 않았다. 놈들은 가죽을 뚫어도 중상과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그런데도 고통이 대단했다.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무기는 무기다. 보통 호랑이보다 두꺼운 가죽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통은 똑같았다. 변질체로부터 해방되자마자 드러누운 건 해방감도 있었지만, 고통스러워서이기도 했다.

‘이게 최선이었다. 오히려 안전한 방법이지.’

검은 슬라임 여럿과 싸우는 건 산박도 죽을 수 있었다. 이를 양보하고 변질체를 데려갔다. 그들의 공격력은 대단치 않아서였다. 실제로 협공을 당했음에도 산박은 살아남았다.

인간으로 돌아와서 치료수로 상처를 돌보며 산박은 서둘러 생각했다. 대장삵에 관한 판단이 남아 있었다.

그를 도울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 것인가. 마지막으로 뒤로 물러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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