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270)
  • 105화

    * * *

    한 시간 삼십 분의 이동 속에서 만난 건 검은 슬라임 무리 하나뿐이었다. 똑같은 괴물을 만난다는 건 주궤에게 큰 기회였다. 1인분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어서였다.

    나쁘지는 않았다. 리치 거리가 짧고 탄환처럼 튀어 오르는 검은 슬라임은 ‘기습’에 특화된 괴물이었다.

    ‘이렇게 단일적으로 나타나면 아무 소용이 없지.’

    그렇기에 산박은 경계심이 더욱 바짝 올라갔다. 이 암흑 던전에 있는 다른 괴물과 검은 슬라임의 조합은 위협적이기 때문이었다.

    ‘우선순위를 먼저 생각해 놓는 게 좋겠어.’

    적이 어떤 타입인지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지고 판단도 바뀌어야 했기에 팀원에게 말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리더가 다섯 명이 될 공산이 컸다. 판단이 여러 개로 쪼개지기 때문이다.

    ‘대부분 상황에서는 검은 슬라임을 가장 먼저 처리해야겠지.’

    달라붙으면 힘들어진다. 인간의 팔은 길쭉해서 힘을 내려면 크게 휘둘러야 했다. 고로 달라붙은 검은 슬라임 상대로는 아쉬움이 컸다.

    ‘반면 그 외의 상황.’

    예외라고 쳐도 괜찮을 상황이다. 검은 슬라임보다 인간에게 더 위협적인 괴물의 종류란? 타입이란? 예를 들어서라도 하나를 생각하는 건 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검은 슬라임보다 근접전에서 위협적인 놈이어야 하겠지.’

    공격력이 높은 괴물일수록 검은 슬라임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물웅덩이 때문에 빨리 퇴각할 수 없고 게릴라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명중률까지 떨어지는 암흑 던전이다.

    ‘돌진력도 좋은 놈이거나.’

    팀에 누구보다 먼저 도달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일점사를 해야 할 가치가 있었다. 인간은 수비적인 종족이기 때문이다. 달려가서 돌격하는 것보다는 버티는 걸 좋아했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같이 올라오려는 호랑이에게 돌팔매질하는 것이 인간의 방식이었다.

    그런 인간으로 이루어진 던전 공략 팀을 분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돌진력이었다. 마치, 그 언데드 기병처럼. 확실한 타격력을 주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정신을 못 차린다. 그때 필요한 건 전력을 다한 한 방으로 놈을 먼저 고꾸라뜨리는 것이었다.

    강합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둠을 손으로 가리켰다. 횃불의 밝기 때문에 어둠을 꿰뚫어 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횃불이 달린 강합의 장창이 일행의 뒤로 향했고, 일행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 갔다. 화염처럼 드글드글거리는 윤곽이 어둠 속에서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암흑변질체(暗黑變質體). 암흑 던전의 대표적인 괴물이었다. 검은 슬라임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암흑변질체는 일반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자주 나오는 놈이었다.

    하지만 일반병이라고 약한 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설계되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암흑에 잠식된 놈들은 평범한 모습이 아니었다. 다행인 점은 그들의 변질이 무조건 좋은 방향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둠 속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횃불 불빛이 안 보일 리 없는데도 모른 척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시야가 극단적으로 맛이 가버렸다.

    재생력이 강하고 특수한 공격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방심해서는 안 된다. 드잡이질에 특화된 놈들이라 죽이기도 까다로웠다. 거기에 숫자도 다섯은 넘어 보였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준비하세요. 그때 연습했던 대로 할게요. 버텨주고, 제가 잡아 와서 죽이는 거로.”

    “예.”

    산박이 몸을 풀었다. 저런 놈들을 상대로는 집중성탄보다는 동물로 변신해서 끌어당겨 와 죽이는 게 옳았다.

    크륵, 크흐.

    그들 중 한 마리의 변질체가 몸을 돌렸다. 목을 돌릴 수 없는 신체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대신 곳곳에 코가 많았다. 손등에도 코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곳곳에서 코를 벌름거렸다. 횃불의 냄새를 맡았다.

    “크아아아아아!!”

    한 마리가 고함을 지르자 다른 변질체들도 고함을 질러 대었다. 손도끼, 시미터, 창, 롱 소드, 할버드 등 오만 가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변질체들이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는 못했다. 살덩이가 갑옷을 뒤덮고 있어서였다. 쩍 벌어진 방어구의 부위들은 제대로 된 방어를 할 수가 없었다. 빈틈투성이였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놈들이라 진형도 엉망이었다. 그런 놈들을 상대로 집중성탄은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어둠 속에 있더라도 시은과 주궤는 석궁과 장궁을 쐈다. 급소를 맞추는 건 어림도 없었다. 어두웠고, 적은 아무렇게나 달려오면서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보폭도 일정치 않았고, 윤곽조차도 기이했다.

    강합도 재블린을 한 자루 던질 수 있었다. 산박 또한 슬링질을 제법 했다. 하지만 기대 이하의 피해를 주기 때문에 놈들이 횃불의 불빛에 들어오자 미련 없이 원거리 공격을 포기했다.

    ‘다섯 이상!’

    횃불의 불빛에 비친 그들의 숫자가 다섯 마리가 넘었을 때, 산박은 단번에 별빛 물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건 시은도 마찬가지였다. 원거리 수단이 제맛을 못 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소비 아이템에 의존해야 했다.

    “소나무 향기 외뿔.”

    2레벨 주문이지만 이곳은 1레벨 던전이었기에 주문의 수준이 하향당했다. 그런데도 효과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별빛 물약을 통해서 강화가 이루어졌다. ‘작은 별의 힘’이 깃든 별빛 물약은 복용하는 것으로 주문력의 상승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산박이 작은 별의 힘을 물약을 통해서 복용하는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힘은 남겨두는 게 이득이었다. 만에 하나라는 건 현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목돈 하나 없어서 한순간에 몰락의 길을 걷는 이들도 많았다. 닥치는 대로 대출을 하는 은행은 나사 하나가 빠지는 것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었다. 던전 사용자도 다를 바 없었다.

    뿔이 돋아나고, 산박은 그대로 동물 변신까지 했다. 모습은 당연히 호랑이의 모습이었다. 몇 번의 조사를 하면서 곰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호랑이가 더 좋아 보였다. 남들에게 보이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그저 전투에만 좋은 곰보다는 팀원들에게 강인하게 각인될 수 있는 호랑이가 1석 2조였다. 곰이랑 호랑이 중에 무엇이 멋지고 지립니까? 100이면 100 보드카 마시는 곰보다는 호랑이를 선택할 것이었다. 그 시각적 효과는 자연스럽게 산박의 카리스마로 이어졌다.

    호랑이로 변신한 산박은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을 받았다. 가장 먼저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말 그대로 육체의 힘이다. 감히 인간 따위는 가질 수 없는 가벼움이 몸에서 철철 흘렀다. 이 세상을, 거대한 태산을 엎어 치기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 지구를 들어 올리는 역사(力士)가 된 것처럼 끝없는 자신감이 산박의 눈에 담겼다.

    이를 냉철한 이성이 짓눌렀다. 짐승과도 같은 야성미에서 나오는 자유로움과 난폭한 기세가 싹 사라졌다.

    호랑이 같지 않은 호랑이가 던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의 연어가 후방에 있는 물웅덩이에 퐁당 들어갔다.

    150kg에 가까운 호랑이는 기회를 노렸다. 그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크아아악!”

    암흑변질체들은 나무뿌리 같은 살덩이로 뒤덮인 인간형 괴물이었다. 그들의 무기에도 그런 살덩이 뿌리가 뒤덮여 있었고, 싸우면서 무기의 모습이 드러날 정도로 빽빽했다.

    가장 선두로 달려오고 있는 변질체는 시미터에 버클러를 들고 있었는데, 기본 사용법도 모르는 듯했다.

    버클러는 좁은 방패인 만큼 자세가 중요했다. 버클러를 든 손을 조금이라도 더 적에게 들이밀어야 하기 때문에 몸을 항상 틀 수 있어야 했다. 또 공세보다는 수비를 해야 했다. 특히 종종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버클러를 무식하게 들이밀고 시미터로 아래를 긁는 공격법이 가장 초보적이며 안전한 버클러 공격법이었다. 이를 생각했을 때, 그냥 내달리는 놈은 위협도가 매우 낮았다.

    휘익!

    시은의 마녀의 손길이 놈을 지나서 그 뒤의 놈을 노렸다. 산박이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아도 그녀는 노련한 레인저로 활동해서 0레벨 던전을 클리어한 만큼 누구를 먼저 노려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무기술에 따른 기본적인 자세 또한 숙지하고 있었다.

    “쿠엑!”

    벌목하기 좋은 양손 도끼를 들고 달리는 놈의 발목을 마녀의 손길이 움켜쥐었다. 놈은 단박에 고꾸라져서 몇 바퀴나 굴렀다. 뒤에서 달리던 놈도 앞으로 엎어졌다. 횃불의 불빛조차 깨닫지 못했는데 앞에서 구르는 놈을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살덩이 안쪽에 있던 툭 튀어나온 갑옷이 살덩이를 찍었다. 피가 확 튀었다. 흙에 쓸리면서 가죽 하나 없는 살덩이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짓이겨져서 흉측하게 보였다.

    고함을 지르면서 버둥거리며 일어났지만 마녀의 손길이 놈을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몸이 무뎌서인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버둥거리며 나아갈 뿐이었다.

    “이놈은 내가 맡을게! 뒤의 놈을 공격해줘!”

    충호가 강합에게 외쳤다. 동시에 주문을 사용했다. 그림자 칼날(Shadow Blade)이 충호의 검에 들러붙었다. 길이도 조금 길어졌다.

    쿵!

    충호의 방패를 시미터에 버클러를 든 놈이 무식하게 들이받았다. 방패와 방패가 부딪친 것도 아니었다. 몸과 방패가 부딪쳤다. 버클러가 방패 위에서 허우적거렸고, 시미터가 방패의 옆 부분을 후려쳤다.

    “끄흐!”

    충호가 소리를 냈다. 나무뿌리 같은 살덩이로 잔뜩 뒤덮이고 암세포처럼 자라나 있는 암흑변질체의 체중은 대단했고 근력도 예상 이상이었다. 버틸 만했지만, 깜짝 놀랐다.

    서걱!

    마음은 당황했지만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충호의 전사적 재능은 A급.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가는 스타일이었다. 단번에 놈의 손목을 베었다. 시미터가 땅에 떨어졌다.

    “크워어어억!”

    그런데도 놈은 방패에 바짝 밀착해서 충호와 힘 싸움을 시작했다. 곱게 죽을 놈이 아니었다. 방패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서 화가 나는지 버클러로 자꾸 찍어 대었다. 하지만 곰 같은 덩치를 지닌 충호는 그냥 곰이 아니었다. 생각하는 곰이었다.

    칠난균. 충호는 오른쪽 어깨를 뒤로 쑥 뺐다. 타이밍에 맞춰서 옮긴 것이기에 버클러가 성대하게 헛손질을 했고, 방패에 체중을 싣고 있었던 변질체가 그대로 땅에 넘어졌다. 충호의 환도가 그대로 변질체의 목을 치고 발로 다시 한번 걷어차서 구르게 하였다.

    쾅쾅!

    방패가 땅을 쾅쾅 찍어댔다. 변질체가 괴로워하면서 물러났다. 순식간에 피떡이 된 변질체였지만 단번에 일어나서 더욱 발악했다. 하지만 그런 발악에는 예전만큼의 힘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충호는 놈을 죽이지 않고 이용했다. 갑자기 힘을 쿵 하고 줘서 옆으로 자빠지게 했다. 그로써 당장에라도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상체를 뒤로 뺀 병신 새끼, 주궤를 구했다.

    근접전에서 무기가 다가오는 무서움에 더해 수비를 하지 않고 돌격, 또 돌격하는 변질체를 상대로 몸을 뒤로 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열 명 중 일곱 명은 빤스런을 쳐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병신 새끼는 도가 지나쳤다. 어정쩡했다. 튀려면 튀고, 버티려면 버텨야 한다. 하지만 놈은 버틴다는 선택을 하면서도 상체를 뒤로 뺐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실패는 죽음 혹은 치명상으로 이어져야 했지만 충호의 전사로서의 역량이 그를 살렸다.

    “헉헉! 헉헉헉! 크억……. 헉헉!”

    주궤가 뒷걸음질 쳤다.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 같았다. 뭔가가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외곽에 있어야 할 그였지만 어느새 충호의 옆에 있었다. 암흑변질체 하나와 드잡이질을 하다가 진형을 생각 못 하고 이리저리 막 싸웠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팀이 지배하던 공간이 매우 좁혀졌다.

    “빨리 죽여!!”

    충호가 고함을 질렀다. 이미 그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 * *

    야심한 밤, 굉려는 휼간을 차에서 끌어 내렸다. 입에 물을 한 모금만 먹여주고 눈을 검은 옷으로 단단히 묶어서 가렸다.

    끼익.

    기름칠이 안 된 문 여는 소리에 휼간이 벌벌 떨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 수많은 매체에서 다루어진 납치 후의 모습과 광경들이 뇌에 담겼다. 오금이 찌릿했다.

    굉려는 하회탈 가면을 쓴 후 휼간의 눈을 가린 것을 치워주고 입에 물린 천도 치워줬다.

    “으그극…….”

    단검에 쑤셔졌기에 상처가 건드려져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굉려는 목소리를 다르게 해서 능숙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변조한 목소리라는 게 티가 전혀 안 났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다.

    “서로 쓸데없이 시간 소모하지 말자. 난 정보가 필요하고, 넌 살아야 한다. 나와 너는 서로 모른 채로 끝나는 그런 사이다. 내가 누군지 알려고 하면 너는 죽고, 네가 정보를 토해내지 않으면 나 또한 곤란해. 이해했나?”

    휼간이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의자에 묶였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가장 먼저 굉려는 자신을 위장하기 위한 떡밥을 던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