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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4/270)
  • 104화

    * * *

    식사를 끝내고 커피까지 돌아갔다. 가루를 낸 걸 걸러내면 금방이다. 산박과 시은은 아메리카노를 마셨지만 나머지는 설탕을 넣기 바빴다.

    “원거리로 정확도 있는 샷은 아무래도 많이 힘든 것 같습니다.”

    “집중성탄이 아니었다면 근접전을 했겠죠.”

    “화염 진득액을 유사시에 쓰라고 한 판단은 좋았습니다, 팀장님.”

    “섬광 단검도 좀 반감되어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세 자루는 던져야 한 자루 노릇을 합니다.”

    표적이 붕 떠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명중률도 형편없었다. 일직선으로 돌진하는 데다 눈도 큰 중형 괴물 상대로 치명상을 내기 어려울 정도였기에 2차, 3차 작전을 무조건 세워야 했다.

    수많은 의견은 대부분 생산적이었다. 데이터 축적에 도움이 되거나, 팀원을 칭찬하거나, 효과가 반감되는 것들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산박은 조금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강합의 투창 때문이었다. 공격력과 관통력이 강해서 상대를 벌떡 일어나게 할 정도로 강렬한 통증을 주는 무기의 사용은 생각을 한 번 하고 사용해야 했다.

    ‘굳이 지금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지.’

    개인에게 말하면 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나중에 강합 씨, 저 좀 찾아와 주세요. 말할 게 있어서요.”

    “예.”

    강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암흑 던전에서 팀이 쓸 수 있는 전술을 개량했다.

    “모두 알다시피 원거리 피해가 작게 들어갑니다. 치명상을 입히기 어렵기 때문이죠. 재수 없으면 빗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은이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거기에 대해서 말씀드릴 게 있어요. 강제로 명중률이 낮아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몇 번 쏴보고 확신했죠.”

    소름 끼치는 진실이었다. 주궤는 깨닫지 못했지만 자기 관리가 철저한 시은은 명백하게 이를 인지할 수 있었다. 화살이 평소보다 더 극명한 포물선을 그리고, 방향도 기괴하게 어긋난다. 그 속에서 눈을 세 개나 앗아 갔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활의 민족다웠다. 주궤조차도 눈 하나는 가져갔으니까.

    ‘난 전혀 알지 못했는데…….’

    주궤는 시은과 비교되고, 패배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시은은 그의 기분 따위 아무런 상관 없었다. 주궤는 세상에 정말 아무런 영향력도 주지 못하는 벌레 같은 놈이기 때문이었다.

    착하다? 그건 변명이 되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착하면서 한 조직의 변화를 끌어낼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자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궤는 그저 착한 척을 하는 나태한 게으름뱅이일 뿐이었다. 그게 시은의 주궤에 대한 판단이었다.

    ‘어떻게 0레벨 던전을 헤쳐 나와서 1레벨 던전 사용자가 되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야.’

    시은의 제보를 대부분은 강하게 믿었다. 그녀는 그 정도로 실력자였고, 믿음직한 팀원이었다. 괜히 산박이 그녀를 A급 팀원으로 여기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원거리 사격에 주의를 해야 하고, 근접전에서는 아예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충호가 목소리를 냈다. 근접전에서 오인 사격이 나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암흑 던전이 ‘명중률’을 일부러 조작한다면 근접전에서의 원거리 사격은 가장 피해야 했다.

    “충호 씨의 말대로입니다. 아무래도 근접전이 시작되면 모두 근접전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예.”

    모두 대답했다. 주궤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상대에 따라서 그의 공격력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검은 슬라임을 상대로도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수비만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팀원이 위험에 처하면 도와주기는 했다.

    ‘깍두기도 아니고…….’

    말 그대로 놀러 온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경험을 쌓다 보면 1인분을 하겠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몰랐다.

    ‘던전 클리어하고 나서 그의 처우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겠다.’

    성장하는 게 느리면 장기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다 키워 놨더니 손절할 수 있었다.

    한 사람에게 투자하는 건 매우 위험했다. 자식 농사도 그렇게 짓지 않는다. 분산 투자가 최고고, 은행 한곳에 5천만 원 이상 넣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쓸 만한 인재라도 거기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것이 많으면 손절하는 게 옳았다. 그게 아니라면 장기 계약서를 들이밀어야 했다. 쏟아놓은 만큼 받아내야 했다.

    어느 쪽이든 주궤는 선택해야 했다. 산박은 반드시 선택권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궤가 자신의 성장력을 증명하거나 장기 계약을 하거나, 떠나거나.

    ‘떠나기는 힘들지.’

    중형 괴물도 한 방에 보내 버렸다. 산박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클 것이다. 거기에 실수했음에도 돈까지 더 쥐여 주겠다고 했으니 더더욱 떠나기 힘들 터였다. 하지만 그건 단기적인 생각에 불과했다.

    ‘10년 장기 계약에 동의하면 그걸로 끝이지.’

    무시무시한 계략이었다. 군 생활의 다섯 배를 한 명 밑에서 일해야 했다. 악독하게 대하지는 않겠지만, 아쉬움에 술 생각이 날 때는 있을 터였다.

    근거리 사격 금지 다음에는 포지션을 대충 정했다. 주궤는 가장 외곽을 맡았다. 중앙에서 거치적거리다가 충호나 강합이 부상을 당하면 큰 손해였다. 죽어도 혼자 죽는 게 낫다. 그것도 모르고 주궤는 구석진 곳에 배당받은 걸 좋아했다. 왠지 관심도 덜 받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몇 번 포지션 연습을 하고 그대로 진행했다. 어제와 달리 강합이 선두를 섰다. 한 사람이 매번 선두를 자처하면 크게 고되기 때문이었다. 강합은 특히나 장창에 횃불을 묶을 수 있어서 충호보다 더 먼 거리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동 속도는 평소의 반절에 불과했다. 암흑 던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대장삵은 거기서 조금 앞서서 걸었다. 냄새로 충분히 이점을 취할 수 있다는 산박의 판단이 있었다. 처음에 그러지 않은 이유는 후각과 청각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킁킁. 시체 냄새가 난다.”

    안 그래도 느린 이동 속도가 반으로 깎였다.

    멈칫.

    일정한 통로의 어둠 속에서 윤곽이 보이자 강합이 멈췄다. 일행은 슬금슬금 진행했고, 횃불의 음울한 빛에 윤곽의 정체가 조금씩 보였다.

    “유골이네요.”

    시은의 목소리가 들떴다. 네크로맨서였기에 당연했다. 비싼 시체 공수해서 던전에 들어가는 것보다 던전에서 시체를 얻는 게 더 이득이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던전 시체는 던전 클리어가 되면 현실로 들고 갈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강합이 해골을 장창으로 들쑤셔 안전하다는 걸 파악하고 서른 걸음 더 진행해 주변을 확인한 다음에 시은이 해골을 맨손으로 만졌다. 스킬로 존재하지 않는 ‘해골학’을 위해서는 접촉이 필수였으며 적용하는 데 실수할 수 있었고 모든 게 자신에 달려 있었다. 해골학은 시은이 지닌 사령술인 해골 일으키기 주문을 조금 더 완벽한 주문으로 만들어 줬다.

    또한 골내근형법을 통해서 스켈레톤 자체의 능력치도 상승해 줬다. 과유불급을 가장 조심해야 하는 사령술의 일종이었다. 이것을 몇 달 수련하지 않고 바로 실전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실로 공포스러운 재능이었다. 이시은은 악마의 재능을 지닌 네크로맨서라고 말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네크로맨서였다.

    거기에 더해 놀랍게도 그녀는 그녀만의 해골학을 시도했다.

    사아아…….

    한기가 해골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대장삵조차 경계를 서는 걸 잊고 레이즈 데드 주문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을 지켜봤다. 물의 마법사였기에 서늘한 공기에 이끌렸다. 마녀 주문에만 한기가 서리는 기술, 싸늘한 증오를 해골학에 적용한 것이었다.

    ‘됐다.’

    시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전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특별하고 희소한 광경을 산박에게 보여줬다.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노력해 나간다면 기술도 없이 속성 해골을 만들 수 있어.’

    네크로맨서에게 엄청난 재산이었다.

    “와, 엄청난데요.”

    몸을 일으킨 해골이 네크로맨서 백패 얻을 수 있는 장비를 입었다. 방패와 철퇴, 몸을 두르는 큰 망토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확실한 스펙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시은은 해골의 품에서 나온 걸 확인했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금화는 제법 멋졌다. 무게를 가늠했을 때 돈이 될 게 분명했다.

    ‘적어도 다섯 돈?’

    나쁘지 않았다. 그 외에는 양피지로 된 지도가 있었다. 보물지도처럼 X 표가 그려져 있었고 쭉 이어지는 화살표가 일정하게 점선으로 그려져 X 표에 닿아 있었다.

    “파보라는 것 같은데요.”

    “화살표 시작 지점이랑 걸음걸이도 생각해야 하니까, 할 수 없어요.”

    충호가 흥미진진해하며 산박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불가능이라는 소리였다. 던전에 와서 보물찾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보급보다는 수익률 때문이다. 전문적으로 보물 털기 하는 놈들은 중간 이상 레벨을 올린 놈들이었다.

    “힌트는 모두 여기에 있어.”

    대장삵이 끼어들었다.

    “무슨 힌트.”

    “물 때문에 땅이 무르잖아. 조금만 파도 훅훅 꺼져 나가잖아. 그러니까 힌트는 흙에 있다는 거지.”

    “이 사람이 금화를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보물 상자야. 그게 무른 흙이랑 무슨 상관이야.”

    덮으면 똑같은 흙이다. 오히려 무르기 때문에 더 깊게 팠을 터다.

    “해골을 자세히 살펴봐. 배신당해서 죽었을걸. 금화도 인부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준 거고 회수 안 한 것으로 봐서 돈에 얽매이는 놈도 아냐. 그런 놈이 보물 상자를 깊게 판다? 있을 수 없지.”

    던전 기믹에 추가된 요소라고 한다면 보물 상자에 금화를 잔뜩 넣을 리도 없었고, 그런 보물 상자를 넣지도 않았을 터였다.

    “다른 게 있다는 뜻이라는 거야?”

    “적어도 던전에 들어오는 인간들이 은퇴할 수 있을 만한 금화를 던전에 잔뜩 뿌려 놓지는 않았을 거라는 소리야.”

    “파도 돈 될 건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네요.”

    산박이 대장삵에게서 눈을 돌려 팀원들에게 말했다. 그래도 진행하겠냐는 뜻이었다. 그간 산박과 시은이 얻은 게 있어서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던전에서는 항상 특별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전사를 위한 특별한 일이 있을지 몰랐다. 물을 안 넣고 다른 걸 넣었기에 일수도 충분했다.

    “팀장님만 괜찮으시다면 한번 찾아보고 싶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여기서 제가 용기사 직업을 얻을지.”

    충호가 넉살 좋게 농담을 걸었다.

    “좋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이미 300만 원을 벌었기에 거침없었다. 또 암흑 던전이 외길인 것도 중요했다. 어둡고, 중형 괴물에, 검은 슬라임 다수가 포진해 있으면서도 물웅덩이가 있는데 미로까지 넣는다? 그냥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외길이었다. 살길, 희망 하나 넣어준 셈이었다.

    산박은 지도를 찬찬히 훑었고, 뒷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꼼꼼한 산박이기에 간파할 수 있는 규칙이었다.

    “일정한 흠을 냈어요. 자기가 까먹어도 보면 알 수 있게 했네요. 양피지 뒷면은 워낙 상처가 잘 나니까 다른 놈들은 모를 테고요. 여기를 접으면 더 잘 보여요.”

    산박이 흠집이 규칙적인 곳을 중심으로 반을 접고, 또 반을 접었다. 양피지가 접힌 부분은 더더욱 벌어졌고, 시각적으로 더 잘 보이게 되었다. 접히면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정말이네요.”

    “미쳤다…….”

    주궤가 입을 가리며 감탄했다. 머리가 비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강렬한 직관력이었다. 머리를 통해서 함정에 안 들어가는 사람인 셈이다. 사냥꾼이 눈에 익은 곳에서 경계력을 올린다면 산박은 그 요소요소를 파악해서 경계해야 할 곳임을 알게 되는 식이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간격이었다. 지도에는 X 표만 나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 또한 까먹을 걸 대비해야 했다. 1년만 지나도 어떤 지도 기믹을 넣었는지 까막눈이 될 것이 분명했다. 비밀 지도의 기믹은 피아노와 같았다. 1년만 안 쳐도 다 까먹는다.

    “아까 특이하게 보이던 물웅덩이네요.”

    시은이 단번에 지적했고, 이를 통해서 지도의 보폭, 점선의 축적을 알 수 있었다. 산박과 시은의 높은 지혜는 다른 이들에게는 대단하게 여겨졌다. 열 자리 이상의 사칙 연산을 뚝딱하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었다.

    해당 지점은 제법 멀리 가야 했다. 전투가 있을 수 있었기에 일단은 양피지를 넣었다. 되돌아가서 다시 재더라도 다른 것에 신경을 쓰면 안 된다. 대신 현 지점을 표시하고, 양피지 지도에도 표시했다.

    * * *

    굉려는 러시아인의 안내를 받아서 그대로 계단을 올라갔다. 놈은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러시아인이 쥔 검은 봉지가 소리를 사보작, 사보작 냈다.

    쿵쿵쿵!

    “어이! 밥!”

    그 말에 문이 단번에 열렸다. 러시아인의 인상과 행동은 너무 과격했고, 기민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손이 보였고, 굉려가 이를 당겼다.

    휼간은 억 소리도 못 냈다. 몸을 가누려고 힘을 준 탓이었다. 바닥에 엎어지며 턱이 부딪혔고, 그대로 팔을 꺾어서 묶었다. 러시아인은 그걸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입에는 천이 쑤셔 박혔다. 반항했지만 날 없는 단검이 이빨을 쑤시는데 안 벌릴 수가 없었다. 피가 입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흐으, 읍!”

    대낮임에도 주변은 쥐 죽은 것처럼 조용했다. 단번에 렌터카 트렁크에 휼간을 집어 처넣고, 굉려가 테이프로 휼간을 칭칭 묶었다. 다만 팔은 다시 풀어서 앞으로 향하게 했는데 그때 휼간이 반항했다.

    굉려는 주먹으로 휼간의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 갈겼다. 그제야 조용해졌고, 다시 팔을 앞으로 해서 묶었다.

    텅.

    “일 잘하네.”

    러시아인이 엄지를 척 올렸다. 굉려는 대꾸하지 않고 운전 좌석에 탔는데 러시아인이 유리창을 툭툭 건드렸다. 살짝 열자 러시아인은 명함을 하나 끼워 넣었다.

    “여자 필요할 때 말해. 부산에서 사업할 생각 있으면 나랑 같이하자고.”

    굉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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