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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101/270)

101화

충호가 환도를 휘둘러서 튀어 오르는 놈을 베기에는 늦었다. 방패로 한 놈을 후려치면서 몸이 돌아가서 튀어 오르는 슬라임 쪽으로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거리를 좁힌 탓이 컸다.

슉!

산박이 던진 투척 단검이 놈을 베고 지나갔다. 충호가 몸을 비틀었다. 갑옷에 슬라임이 들러붙었다. 무지막지한 근력으로 균형을 단단히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호는 대단한 전사였다.

충호는 검과 방패를 끌어당기며 움켜쥔 손의 밑부분으로 들러붙은 슬라임을 강한 힘으로 밀어냈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그 점액 덩어리를 짓이겨 떨어뜨렸다. 발을 틀며 능숙하게 짓밟았다. 동시에 방패와 무기를 찌르듯이 앞으로 향하게 하였다.

산박이 던진 투척 단검은 모두 세 자루였고, 작은 피해밖에 주지 못했지만 튀어 오르는 걸 방해했다. 그 덕에 다른 사람들은 조금 더 수월하게 검은 슬라임을 감당할 수 있었다.

시은은 환도의 검 면을 야구 방망이처럼 휘둘러 검은 슬라임을 날려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압박감이 크게 사라졌다. 후려쳐져 날아간 검은 슬라임이 부르르르 몸을 떨었다가 축 늘어졌다. 느린 심장 박동처럼 펄떡거리며 늘어진 점액질 육체가 빠르게 모여들었다.

“흐합!!”

충호의 방패 위에 기어올라서 충호의 머리를 노리려는 놈에게 강합의 장창이 쑤셔 박혔다. 놈은 베이면서 허물어지듯이 방패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반면 거기에 집중해서 강합의 어깨에 튀어 오른 검은 슬라임이 강합의 몸을 강하게 두들겼다. 전사에 체중까지 보정받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강합이 균형을 잃었다. B급 수준에 불과한 재능이라 공세 직후 받은 공격에 무책임할 정도로 쉽게 무너져 버렸다.

발 하나가 물웅덩이를 위태롭게 밟고 있어서 균형이 삽시간에 치우쳤다. 버티지 못했고, 강합은 섬뜩함을 느꼈다. 슬라임이라는 놈은 얼굴을 덮고 목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진짜 끝이었다.

뻥!

움츠리고 쉽사리 공격을 못 하고 눈치만 보던 주궤가 이를 발로 걷어찼다. 다만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는데, 날아간 슬라임이 시은의 허벅지에 들러붙었다.

“헉.”

주궤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개같은 짓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보통이라면 핏기가 싹 사라질 정도로 서늘함을 느끼면서 당황해야지 정상인데 시은은 능숙하게 뒷걸음질 치며 슬라임이 추가로 덤빌 수 있는 상황을 원천 차단했다. 다만 그사이에 검은 슬라임이 등으로 기어 올라가며 빈틈을 찾았다.

“마녀의 손길.”

서늘한 오한이 주변 공기를 냉각시켰다.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음에도 시은은 단숨에 혼자 해결했다. 소형 괴물을 상대로 집중력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순간 진형은 단박에 붕괴되고 슬라임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뛸 게 분명했다.

마녀의 손길이 단번에 검은 슬라임을 움켜쥐어서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검은 슬라임의 저항력은 대단했다. 발차기에 얻어맞은 걸로 피해를 입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아주 건재했다.

하지만 천천히 오한에 잠식되어 가며 활동력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시은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얻은 기술인 싸늘한 증오(Frosty Hatred)의 효능이었다. 오직 마녀 주문에 한해서 한기가 서리는 것이기에 효과도 1레벨 기술치고는 뛰어났다.

하지만 그건 기술의 위력이 아니었다. 이시은은 누구보다도 ‘싸늘한 증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던 마녀가 연구했던 기술을 이시은은 이해했다. 그 덕에 기술의 위력이 배가 될 수 있었다.

액체 형태인 슬라임은 특히나 저온에 취약했다. 저항하던 힘은 줄어들었고, 그대로 느리게 움직이며 마녀의 손길에 떨어져 나갔다. 조여 오는 손길에 쭈우욱 손가락 사이로 점액이 면 뽑히듯이 뽑혀서 나누어졌다.

대장삵은 슬라임을 물려고 하지 않았다. 큰일 날 소리였다. 앞발로 탁탁 치면서 한 마리를 붙잡아둘 뿐이었다. 굳이 힘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화염 물약을 써버려서 물의 마법을 크게 사용할 조건도 되지 않았다.

물의 마법은 기본적으로 사방으로 물을 튀기고 표적을 뭉뚱그려서 타기팅하는 마법이었다. 한 명을 노리는 마법은 효율이 매우 낮거나 저지력만 가질 뿐이었다. 살덩이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강력한 수압을 내려면 많은 힘이 필요했다.

기습을 당한 검은 슬라임은 지리멸렬했다. 튀어 올라도 서로서로 보조하고 한 방향을 틀어막아서 집중적으로 공간을 철저하게 단면으로 만들어 버렸다.

주궤는 어버버거렸지만 처음 원거리 사격에 이어 강합을 도와줬다. 시은이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다른 팀원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손쉽게 위기를 벗어났다.

전투가 끝나고 나서 바로 이시은이 주궤에게 다가갔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섰는데, 시은의 표정이 무서워서였다.

“누가 잡아먹어요? 제대로 보고 발로 차세요. 강합 씨가 위험했지만, 환도로 내려찍으면 더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었잖아요.”

“죄송합니다.”

주궤가 고개를 숙였다. 100% 자신의 실수였다. 쓰러진 강합의 어깨에 들러붙어 있어서 무기를 쓰지 않고 발로 걷어찼는데, 오밀조밀 모여 있는 상황에서 슬라임을 발로 걷어차는 건 생각하면 할수록 병신 같은 짓이었다. 주궤는 단순한 발차기로도 죽을죄를 지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주문 사용자가 아니었으면 진형이 그대로 무너졌을 거예요.”

한 면으로 들어온 검은 슬라임을 정면에서 막고 있는 이들이 시은의 도움 요청에 뒤로 관심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믿고 싸워도 동료의 헬프 요청에는 판단이 확 뒤바뀌기 마련이었다. 특히 남자들은 여자들과 노인, 어린아이와 아기의 비명 소리에 대단히 민감하다. 심장이 덜컥거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건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아무리 처음 1레벨 던전에 오셨다고 해도 이것저것 귀로 들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팀플레이에 대한 다양한 정보도 안 찾아보셨어요? 적을 던지기보다는 고정하는 게 팀에게 이득인 경우가 많아요.”

“죄송합니다.”

주궤가 연거푸 사죄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진짜 미안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지켜보던 산박은 혀를 찼다. 그가 물렁물렁한 자였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을 것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과 기분 나쁘게 티격태격하고 싶지는 않은 법이었다. 명분이 있으니 주궤를 다그치는 건 누군가는 해야 했다. 그걸 피해자가 하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다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건 무른 팀장에게나 좋은 일이었다. 산박은 무른 팀장이 아니다. 확실한 규율과 명령 권한을 지닌 강력한 지휘관이었다. 무슨 위기가 닥치면 모두 산박을 바라볼 정도였다. 문제 해결 능력을 다른 팀원에게 확실하게 보여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민하기보다는 산박이 의견을 내놓으면 그걸 따라가는 게 더 편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군중의 속성이 산박의 팀에 부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건 장점도 단점도 될 수 있었지만, 당장은 장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실수를 하셨으면 미친 듯이 달려와서 도와주셔야죠. 뭘 멍하게 바짝 굳은 돌하르방처럼 가만히 있어요?”

산박이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정확하게 사정을 말하도록 하고, 산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궤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지니고 있을 거였다.

“앞으로는 조심해 주세요. 사과는 했습니까?”

“네.”

시은이 대답했고, 산박은 고개 숙인 주궤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강합도 나섰다. 주궤가 매우 미안해하고 죄송스러워했기 때문이었다.

“저 구하려다가 한 거니까, 의도가 나쁜 게 아니잖아요.”

시은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딱 여기까지였다. 그녀가 주궤에게 부딪친 이유는 그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였다.

‘변변찮은 남자네. 그렇게 다그쳤는데도 찍소리도 못 하다니…….’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주궤에 대한 시은의 평가는 끝났다. 시은에게는 점점 질 좋은 사냥감을 죽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었고, 그녀에게 있어서 주궤는 그저 토끼 수준에 불과한 사냥감으로 보였다. 또한 경계해야 하거나 위협적으로 여길 대상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여준 행동은 너무나도 수동적이었다.

반대로 이 일로 주궤에게 시은은 강인한 이미지로 각인될 수 있었다.

‘미친 상여자네. 가장 조심해야겠어.’

그렇게 겁먹으면서도 주궤는 시은에게 호감을 가졌다. 강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강자 앞에 모여드는 약자와 다를 바 없었다.

산박의 경우에는 좀 딱딱한 이미지가 있어도 배려하는 게 눈에 보였고 화를 자주 내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 그가 무섭지는 않았다. 물론 그런 인상이 언제까지 갈지는 몰랐다.

“후우…….”

충호는 그걸 가만히 지켜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산박이 다가와서 웃었다.

“잘 싸우시던데요.”

“잘 아는 고수분이 있으십니다. 그분한테 요즘 돈 주고 무학(武學)을 배우고 있습니다.”

“무학?”

생소한 단어였다. 그 모습에 충호가 눈웃음을 지었다.

“몸 놀리는 것도 학문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셔서.”

산박은 뭔가 촉이 왔다.

“실례가 안 된다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저도 좀…….”

충호는 고개를 저었다.

“제 몸이 좋아서 가르쳐 주는 거라, 다른 분들까지 소개할 처지가 안 됩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성함만이라도.”

충호는 고개를 저었다. 실로 우직했다. 산박은 연거푸 거절당했음에도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충호는 어깨를 괜히 으쓱했다.

“그렇게 웃으셔도 못 가르쳐 드립니다.”

“저도 양심은 있습니다.”

작게 서로 웃음소리를 냈다.

시은이 인천에서 네크로맨서로서 회비를 내고 신분 패를 받아 수련을 했다면 충호 또한 자신을 위해서 투자하고 있었다. 모두 서로 노력하고 있었다. 산박은 자신이 뒤처지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들 모두 배움의 터가 있어서 ‘레벨 업 시스템’의 도움 없이도 기술과 주문을 터득할 수 있어서였다.

이들은 흩어져서 검은 슬라임을 처리하고, 그들의 몸을 종이봉투에 나눠서 담았다. 많이 뭉치지 않으면 종이도 못 뚫는 게 슬라임이었다. 한 마리를 다섯 개의 종이봉투에 나눠서 담으면 딱 적당했다.

검은 슬라임 점액은 연금 재료였지만 값이 매우 낮은 경우였다. 연금 물약을 만드는 기업에서 매입 단가를 낮춰 버렸기 때문이었다. 기업마다 모두 동일했고, 유통에 힘쓸 수 없는 던전 사용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싸게 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서둘러 열심히 담았다. 불에 좀 탄 개체가 여덟 마리에 근접 전투로 쪼개진 것이 일곱 마리. 총 열다섯 마리였지만 실제로는 열한 마리 분량의 종이봉투밖에 나오지 않았다. 네 마리가 소실된 셈이었다.

일행은 슬라임을 배낭에 넣고 대충 흙으로 덮었다. 혹시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휴식을 취했다. 힘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화염 물약을 써서 조금 아쉬웠다.

“시간을 조금 들여서 흙으로 물웅덩이를 덮는 건 어떻습니까?”

강합의 말에 시은이 반대했다.

“너무 오래 걸려요.”

검은 슬라임을 미리 발견해도 한 세월이다. 다만 산박은 시은의 의견과는 다르게 거절했다. 저렇게 단호해서야 강합의 자존심만 긁을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을 때, 체중을 키우려고 온갖 노력을 하는 강합이었다.

‘이미 충호와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강합의 멘탈은 제로야.’

A급 전사와 비교당하는 B급 전사는 무기도 장창으로 바꾸고 재블린을 짊어졌다. 그 결정 속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을지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똑같은 경주를 하지 않고, 그곳에서 도망쳤다.

“생각은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에게는 충호 씨와 강합 씨가 있습니다. 두 분의 수비력을 생각하면 굳이 검은 슬라임 상대로 물웅덩이를 덮을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로 위험했던 건 두 마리 정도였죠. 그건 후방에서 손쉽게 처리할 수 있고요.”

산박은 시은도 칭찬해 줬다.

“시은 씨의 위기 대처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색적만 잘 해내면 검은 슬라임은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충호도 손을 들어 올리며 강합이 기분 나빠 하지 않도록 짧게 답했다. 강합이 쳐들어와서는 충호의 무식한 식단을 보고 간 적이 몇 번 있어서였다.

참고로 충호의 식단은 고탄수화물, 고단백질의 무지막지한 씨름부 스타일이었다. 무시무시한 건 거기에 매번 오징어를 비롯한 다양한 간식을 먹는다는 점이었다. 입이 심심한 꼴을 못 본다는 게 옳았다. 충호의 식욕이 크게 억압받는 건 던전에 들어왔을 때가 유일했다.

쿵.

“쉿.”

멀리서 들려오는 아주 미약한 소리와 털을 흔드는 공기의 움직임에 대장삵의 귀가 쫑긋해졌다. 모두 숨을 죽였다. 몇 번 쿵쿵거리는 육중한 소리가 들렸는데, 그제야 다른 이들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상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대로면 부딪친다.’

암흑 던전의 메인 요리나 다름없는 놈이었다. ‘굽혀진 아가리 괴물’이었다. 하급 악마이며 야만신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추악한 실패작이었다. 야만신의 실패작답게 부산물이 아주 먹음직스러운 괴물 중에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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