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270)
  • 100화

    <암흑 던전>

    산박은 눈을 떴다. 잠깐, 정신을 잃은 듯했다. 전과 비교했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이들도 서서히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고 있었다. 정신을 잠깐 잃은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심장이 펄떡거렸다.

    깜빡, 깜빡.

    산박은 연거푸 눈을 깜빡이고 비볐다. 뭔가 잘 보이지 않아서였다.

    이내 자신의 눈 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주변은 확실하게 보였지만 어두컴컴했다. 기괴한 건 멀리까지 볼 수 있을 정도의 밝기를 지니고 있음에도 일정하게 어둡다는 점이었다. 전체적으로 가시거리는 길었지만, 동시에 일정하게 막을 낀 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환경적 요소는 하나의 던전을 떠올리게 하였다.

    ‘암흑 던전의 기본적인 환경이다.’

    암흑 던전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원거리 공격을 괴롭게 만든다. 어둡기에 상대가 잘 보이지 않았고, 기껏해야 몸통을 맞추는 게 전부였다. 예측 샷이 아니라 예지 샷을 해야 하는 것과 비슷했다. 표적을 잘 볼 수 없다는 건 집중력을 떨어뜨리기에 좋았다. 보이는 표적과 잘 보이지 않는 표적. 무엇이 더 잘 맞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1레벨 던전의 암흑 던전은 던전 사용자의 무덤이나 다름없지.’

    가장 많은 피해가 생기는 곳이었다. 이것 때문에 폭삭 망한 던전 사용자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다가 팀원을 모두 잃어서 블랙리스트 앱에 등록되고 한순간에 거지꼴이 난다. 지인이나 혈연으로 묶여 있다면 그나마 재기할 수 있겠지만, 단신으로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복불복. 꼬우면 수저 물고 태어나든가.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하기에는 불합리해도 너무 불합리했다.

    ‘2팀으로 왔으면 보름은 걸렸겠지.’

    안전 제일주의에 적에 대한 명중률도 떨어진다. 공략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산박이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2팀은 해체되었기에 말해 봤자 소용없었다.

    “악명 높은 던전이네요.”

    시은이 주변을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안개와는 달랐다. 눈에 흐린 막이 씌워진 것 같았다. 이래서야 석궁을 쏴도 적의 약점을 정확하게 노리는 예측 샷은 불가능하다. 그냥 맞추는 것 정도밖에 못 할 터였다. 괴물을 상대로 그건 정말이지 끔찍했다. 치명상을 입히지 않으면 석궁을 백날 날려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강합 또한 인상을 잔뜩 썼다. 재블린 다섯 자루를 챙겨 왔는데 쓰는 게 힘들어 보여서였다. 산박은 턱짓을 하며 강합을 다독였다.

    “투창은 괜찮아요. 그렇게 무식한 건 이런 곳에서도 위력은 그대로니까요. 되레 화살보다 짧은 석궁 볼트가 문제죠.”

    시은이 가장 낭패였다. 그다음으로는 산박이었다. 그 또한 슬링을 곧잘 하기 때문이었다. 공격 수단이 하나 사라진 셈이나 다름없었다. 반대로 무식한 재블린을 다섯 자루나 들고 온 강합은 이 던전에서만큼은 부동의 원거리 피해량 1위의 타격 대원이 될 수 있었다.

    “몇 번 쏴보세요.”

    산박이 시은에게 명령을 내렸다. 혹시 몰라서였지만 역시나였다. 제대로 안 되는 듯했다. 환경이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명중률이 확 깎였다. 익숙해지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장궁을 들고 온 매주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45kg의 장력으로 당기는 장궁을 가지고 있는데 헛물이 된 셈이었다.

    “다들 괜찮으시죠?”

    “예.”

    “모두가 아시다시피 암흑 던전입니다. 정확한 건 공략을 진행해 봐야 더 확실해질 겁니다. 암흑 던전도 종류가 몇 가지로 나뉘니까요.”

    간단하게 브리핑을 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역시나 ‘검은 슬라임’이었다.

    “안 들어 보신 분?”

    주궤가 손을 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

    1레벨이 되자마자 1레벨 던전에 안주할 생각을 한 사람이다. 던전 정보에 적극적으로 돈을 쓸 것 같지는 않았고, 정보를 얻는 데도 어려움이 많아 보였다. 즉, 친구가 적다는 소리다. 산박도 친구가 적지만 그는 돈으로 정보 격차를 해소한 경우였다. 지인이 적어도 돈이 많으면 괜찮다. 돈은 항상 문제 해결에 좋은 자원이었다.

    “검은 슬라임은 늘어지기 좋아하는 괴물입니다. 길쭉하게 벽이나 천장에 들러붙어 있습니다.”

    산박이 양팔을 쭈욱 늘리듯이 천천히 펼쳤다.

    “그래서 먼저 발견하면 잘라내기 좋습니다.”

    슬라임의 약점은 ‘집합률(集合率)’이었다. 오밀조밀하게 똘똘 뭉치는 힘은 신체가 하나로 얼마나 많이 뭉쳐져 있는지 그 용량에 따라서 달라진다. 신체의 모든 능력치가 덩치에 비례한다고 보면 간단했다. 큰 놈일수록 위협적이고 재빠르다. 작은 놈일수록 약하다. 그런 슬라임은 최대한 작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종종 핵이 있는 슬라임도 있었는데, 그런 슬라임은 던전 사용자에게는 땡큐 베리 머치 이지 몬스터(thank you very much easy monster)였다. 관통 공격은 던전 사용자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화살부터 검까지 대부분의 무기가 찌르기가 가능했다. 철퍽거릴 뿐인 슬라임의 핵을 찌르는 것만큼 쉽게 죽이는 방법도 없었다.

    “아쉽게도 검은 슬라임은 핵이 없는 경우죠. 길쭉해졌을 때 잘라 내거나 타격을 먹여야 합니다.”

    질퍽거린다고 충격에 완벽한 내성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세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의 기본이다. 물을 몽둥이로 치는 것과는 달랐다. 또 거대한 슬라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둔기가 필수적이기도 했다.

    “딱 봐도 방어를 해야 하는 암흑 던전이 아닌 것 같으니 검은 슬라임은 반드시 조심하셔야 합니다. 특히 갑자기 튀어 오르는 경우가 있으므로 조심하세요. 몸이 갑자기 작아지면 힘을 모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공격할 생각 하지 마시고 막거나 피할 준비를 하세요.”

    검은 슬라임의 공략에 대해서는 제법 말을 길게 늘어놓았다. 까딱하면 죽기 때문이다. 슬라임은 어쌔신 몬스터라고 불릴 정도로 ‘한 방’이 강했다. 다양하게 공격하기 때문에 정말 조심해야 했다.

    “다른 주의 사항이 있습니까?”

    주궤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단기간 훈련을 시켜 줬음에도 실전에 오니 바짝 굳은 모습이었다.

    ‘이제야 1레벨 던전부터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달아도 소용없다.’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산박이 그토록 주궤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는 이유는 그가 지닌 기질에 있었다.

    ‘벼랑 끝에 몰고 가면 바짝 똥줄을 조이고 달릴 줄 안다.’

    자기 앞가림은 확실하게 책임진다는 소리다.

    ‘그렇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금세 나태해진다.’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주하기를 좋아하는 기질이다.

    ‘이런 놈이 1레벨 1팀장이 되면 걱정 하나 없다.’

    보신주의(保身主義)는 써먹기 나름이다. 중간 관리자 이하는 보신주의자를 쓰는 게 최고였다. 중간만 가면 되기 때문이다. 모병제인 대한민국에서는 중간 관리직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싹이 보이면 일단 군적(軍籍)에 들거나 공무원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애초에 보신하려는 자들이 다른 걸 할 리가 만무했다. 고로 주궤는 던전 사용자의 세계에서 아주 귀한 존재였다.

    ‘꾸준하게 내 편인 2레벨 던전 사용자를 배출해낼 수 있겠지.’

    그의 손을 거쳐서 2레벨이 되는 자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어찌 되었건 산박은 암흑 던전에서 나오는 기본적인 괴물을 모두 설명해 주고 장비를 점검하며 아얄타의 나무 타투를 몸에 새겼다. 던전에 오기 전에 쓰면 그냥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던전에 진입하고 나서 새겨야 했다.

    주궤는 신발을 벗고 맨발인 상태였는데, 흙 발바닥 기술을 활성화하기 위함이었다.

    충호는 타투가 서서히 손가락을 타고 손목을 지나 어깨로 향하는 걸 흥미롭게 지켜봤다. 또한 신체의 변화도 느꼈다. 약간 간질간질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입술이 씰룩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타투가 완전히 자리를 잡자 신체 능력이 상승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원래 용맹함이 대단해서 타투의 용맹성 증가에는 큰 체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얄타의 나무는 매우 거친 화풍의 타투였고, 약간 검은빛이 감도는 짙은 녹색이었다. 난잡하고 폭력적인 나뭇가지의 역동성은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모두 타투를 시술받았다. 그다음에 던전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매주궤 본인까지 해서 다섯 명에게 타투를 심었지만 나무 타투 기초 기술 덕분에 타투에 소모되는 힘이 30% 줄어들어서 주문 한 개는 더 사용이 가능했다.

    “이것저것 마구 섞인 것 같은데요.”

    “무작위 던전인가. 골치 아프네요.”

    강합의 말에 충호가 대꾸했다.

    산박은 주변 환경을 확실하게 체크하기 바빴다. 벽에는 습기가 묻어 있어서 슬라임이 살기에 좋았다.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는 곳이 많았는데, 싸우다 보면 진창이 될 경우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물이 크게 튀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고여 있는 웅덩이가 곳곳에 많았다.

    “물 던전 같기도 합니다.”

    산박이 쭈그려 앉았다. 물웅덩이의 깊이와 너비가 정확하게 일정했다. 위치만 무작위였다. 깊이는 5cm로 발이 담기는 수준에 불과했다. 마치 ‘인간’을 노린 듯한 작은 물웅덩이들이었다.

    ‘기동력을 감소시키려는 의도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평범한 동굴을 그들은 꾸준히 걸어갔다. 속도는 매우 더뎠다. 나중에 던전이 파악되면 빠르게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물방울이 너무 많은 곳에서 똑똑 떨어지고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

    충호가 걸음을 멈추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환도를 뽑았다. 횃불을 장창 끝에 묶어둔 강합이 눈을 좁혔다. 횃불의 아주 아슬아슬한 빛의 경계선에 노출된 거무튀튀한 게 천장에 들러붙어 있었다. 근데 그 숫자가 제법 되었다. 검은 슬라임의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아서 정확한 마릿수는 알 수가 없었다.

    ‘좋다.’

    산박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많은 슬라임에게 기습받으면 한 명 죽는 건 삽시간이다. 길쭉하게 늘어진 채로 천장에 들러붙은 검은 액체가 반들반들하게 윤기를 냈다.

    “주궤 씨, 토템을 소환해서 공격할 수 있겠어요?”

    “거리가 너무 멉니다.”

    산박이 신체를 꼿꼿이 세우고 손바닥을 펴서 땅과 수평이 되도록 만들면서 다른 손의 집게손가락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독특한 방법이었는데, 아주 자세하게 거리를 재기 위해서였다. 눈대중은 자주 실패하지는 않지만 매번 똑같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손을 통해서 x, y축을 만들어서 재는 것이 편했다. 한눈에 아 저기까지는 5m 남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잘 없었다.

    당장 떠오르는 생각은 원거리 사격을 하며 뒤로 물러나는 일이었다. 그러면 추격하는 슬라임의 숫자는 더더욱 각개 격파 하기 쉬워질 터였다.

    다만, 물웅덩이 때문에 불가능했다. 옥시모론 팀의 기동력은 물웅덩이 때문에 크게 반감되어 있고, 리스크도 컸다. 이족 보행이라 넘어지면 끝이나 다름없었다.

    “화염 물약 하나를 쓰겠습니다. 몇 마리인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히네요.”

    첫 전투였기에 아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면 다음에는 소비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고 전투를 하면 된다.

    충호를 제외한 네 명은 모두 원거리 무기를 하나씩 손에 쥐었다. 제각각이었지만 강합을 제외하고는 모두 0레벨 시절부터 애용하던 무기들이었다.

    그중에서 15m 내에서 가장 파괴력이 짱짱한 건 산박의 슬링 기구였다.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가까이에서 적을 타격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파괴력에 뽕 한번 맞으면 손에서 놓기가 힘들었다.

    “대충 맞기만 하면 됩니다.”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약간의 긴장감을 주는 건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하나, 둘, 셋!”

    산박이 화염 물약을 슬링했다. 십여 미터가 넘어 보였음에도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것보다 더 빨리 볼트와 화살이 쏴졌다. 재블린도 마찬가지였다.

    푹!

    검은 슬라임들이 공격을 받고 움직일 때, 화염 물약도 천장에 부딪히며 화염을 토해냈다. 떨어지는 검은 슬라임들과 마찬가지로 화염도 비산하며 떨어져 내렸고, 단번에 검은 슬라임 여럿을 불길에 휩싸이게 하였다. 모두 돈이었지만 초전에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도 없이 크기가 쪼그라든 검은 슬라임은 움직임이 매우 둔해졌다. 반면 불꽃에 맞지 않거나 조금만 맞은 검은 슬라임은 기민하게 주르르륵 미끄러져서 다가왔다. 다리를 수백 개 지닌 지네가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것과 비슷했다. 소형견이 질주하는 것보다는 느렸지만 위협적이었다.

    너도나도 근접 무기를 들었다. 가장 긴 무기를 지닌 강합의 창이 검은 슬라임을 정확하게 찔렀다. 반으로 쪼개진 검은 슬라임이 부르르 떨며 충격을 버티기 위해서 크게 수축했다. 근접 전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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