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용의자들을 단번에 좁힐 수 있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당연히 장 노인이다. 왜냐하면, 던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장 손쉬운 건 해당 던전 사용자에게 연줄을 놓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강합에게 돈을 줄 동기가 강력했다.
‘굉려까지 넣었으니, 더 한 걸음 나아가고 싶었겠지.’
굉려에 강합. 나쁘지 않은 라인업이었다. 무엇보다 장 노인에게 던전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줄 것이고, 나중을 고려하면 필요한 초석이었다. 산박 또한 던전을 공략하기 때문에 팀원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지킬 게 점점 많아질 거다. 나도, 그의 가문도.’
부동 지구는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이에 맞춰서 무력 또한 갖추고 있어야 했다. 사명감 넘치는 경찰은 어디에든 많아 보이지만 소수일 뿐이었다. 성대하게 저지르면 당연히 크게 제약이 들어오지만 한둘 죽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것도 도시가 아닌 부동 지구 같은 도시의 외곽 쪽은 그저 치안의 무덤일 뿐이었다.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취약했다.
다만, 똑같은 이유로 탕만도 그럴 수 있었고, 충호도 그럴 수 있었다. 끼리끼리 어울리듯이 같은 전사끼리 팀 내에서 입지를 굳건하게 하려고 돈을 줄 수 있었다.
‘주동자는 탕만이겠지.’
그런 경우 주동자는 탕만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술도 제법 자주 같이 먹는 듯했다. 시간이 나면 산박은 가진 것을 수련하기 바빴지만, 그만큼 검소한 자는 잘 없었다. 돈이 일당으로 들어오는 만큼 계획적인 소비보다는 즉흥적 소비가 많았다.
아무튼 1레벨 풀 세트를 자력으로 해결한 게 탕만이었다. 시은이 간섭한 걸 산박은 몰랐다. 남에게 이야기할 것도 아니었고, 그걸 팀장에게 말하는 병신은 없었다. 그러면 자신의 능력을 안 좋게 볼 것이 분명했다. 회사 상사에게 저 돈 빌리고 다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상식적으로 입 밖에 낼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탕만이 그랬다면 상관없었다. 산박이 간섭할 것도 아니었다. 은근슬쩍 간접적으로 툭툭 치는 건 괜찮았지만, 그 이상은 불필요했다.
집단이라면 어느 곳에든 있는 게 친목이었다. 거기서 피해자가 아무리 떽떽거려도 친목 내의 사람들은 이득을 본다. 그건 집단 차원에서 무조건 나쁜 게 아니었다. 초창기일수록 그런 배타적 유대감으로 생기는 이득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좀 걸러야겠지만, 지금은 그냥 놔두는 게 이득이지.’
다만 장 노인이 헛수작질을 한 거라면 대비책을 마련해 둬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산박의 던전 공략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밖에서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다? 이건 목을 쳐도 할 말이 없었다. 그만큼 위협적이고, 비즈니스 파트너를 배려하지 않는 공격적 행동이었다. 욕심에 배가 불러서 자기 배가 터지는 줄도 모르는 셈이었다.
‘이걸 조사하려면 유나 씨가 최곤데…….’
그녀는 없었다. 고로 산박 스스로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대놓고 장 노인에게 갈 생각은 없었고, 굉려를 떠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모두 다 하책이기 때문이었다.
굉려는 암살자다. 누구보다도 경계심이 높았다. 작은 실오라기를 의심하지는 않겠지만, 산박의 행동을 바로 장 노인에게 말할 터였다. 아무 의심도 안 생겨도 일단은 말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장 노인은 거북이가 머리를 쏙 집어넣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을 털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음흉하게 움직이겠지.’
척보면 척이다. ‘장굉려’를 산박에게 처음으로 투입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었다. 그냥은 안 당해주는 사내는 처음에 투입하기 좋았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자.’
산박은 두고 보기로 했다. 경계하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끄적이고 노트를 닫았다. 스마트폰은 해킹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런 시대에는 오히려 아날로그가 더 보안에 좋았다.
산박은 작은 금고를 둔 곳이 아니라 평범한 책장에 노트를 놓았다. 하지만 다시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곳에 이름 하나를 새롭게 적었다.
‘이시은.’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가장 먼저, 물약을 팔기 때문에 돈이 많다. 또한 향상심도 커서 다른 팀원에게 빚을 지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도 있을 수 있었다. 부지런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든지 성과를 낼 준비를 할 수 있다. 이거에도 손을 뻗고 저거에도 손을 뻗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다.
‘모든 사람이 의심스럽다고 했지만 유력한 용의자는 단 두 명뿐.’
그리고 어쩌면 강합에게 돈을 준 놈이 유나의 실종과 연관이 있을 수 있었다. 지나친 비약인가? 현실에서는 가능했다.
장 노인과 이시은이다. 이 중에서 누가 비용을 댔는지 가장 손쉽게 알아보는 방법은 강합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확인하는 것이 있었다.
“여보세요?”
―예! 팀장님!
“뭐 하고 계셨어요?”
―지금 탕만이……. 탕만 씨랑 저녁 먹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1레벨 풀 세트 장비는 어디서 구하셨는지 싶어서요.”
―아, 그거요?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장물로 샀어요. 500만 원에요.
“돈이 되셨어요?”
―탕만이 조선소에서 일하면서 목돈이 있었는데 그걸 저한테 보태 주더라고요.
“아하…….”
노가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조선업이다. 사람 한둘 죽는 건 일도 아닌 위험한 직종이었다. 시간을 맞추려면 아무래도 안전은 뒷전이 되기 마련이었다.
“예. 그것 때문에 궁금해서 전화했습니다. 끊을게요.”
―예, 옙. 쉬십시오, 팀장님~
강합이 전화를 끊었다.
물론 그 돈은 탕만에게서 받은 돈이 아니었다. 전처럼 시은에게서 받은 돈이었다. 산박이 2레벨이 되면서 조급해진 강합을 꼬시는 일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 * *
그 일 이후 5인의 인원이 모여서 1레벨 던전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모두 지급 물품을 받았을 겁니다.”
화염 물약, 드루이드 빛 무리 치료수, 별빛 물약, 섬광 단검, 화염 진득액, 악취의 향수.
황량자 던전은 워낙 쉬워서 사용한 적이 없었다. 모두 돈이기에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애끼고 애끼고 또 애껴도 아깝다. 공짜로 받아서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산박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사람 심리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 몇 개가 더 생겼다.
“화상 치료제는 그렇게 비싼 건 아니지만 용량이 적어요. 그걸 잘 감안하세요.”
슬라임 형태였고, 손가락 중지만 한 길고 작은 가죽 주머니에 들어간 것이었다. 형태를 바꿀 수 있었기에 아무런 곳에나 꽂아 넣거나 달고 다니기 좋았다. 박리다매를 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는데 아프리카에서 만들어져서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는 물품이었다. 대규모로 주기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개당 3,500원 수준으로 매우 낮은 값이었다.
몇몇 신념 있는 미디어는 여기에 ‘어둠’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인간에게 있어서, 던전 사용자에게 있어서 화염은 무서운 것이었다. 그걸 싼값에 감당할 수 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기 바빴다.
다음은 진통 가루였다. 고통이 무뎌지고 몸은 계속 움직일 수 있어서 큰 환영을 받는 던전 물품이었다. 고통 때문에 옴짝달싹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구매했다. 가루를 환부에 뿌리면 되기 때문에 편하고 즉효성도 컸다. 가격은 개당 8천 원. ‘화이트 던전 컴퍼니’에서 쓸데없는 부산물을 조합해 만든다고 알려져 있었다.
“들었다시피 주궤 씨는 이번이 1레벨 던전 공략이 처음이고, 수익도 5만 원만 가져갑니다. 저희 팀은 임시 팀원이 많아서 당분간 이렇게 운영될 겁니다.”
“예.”
모두 짧게 대답했다. 큰 반대에 부딪히지는 않았다. 그런 영향력이 있는 충호와 시은은 납득한 지 오래였다. 그건 산박이 지금껏 팀을 여러 번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고, 2레벨에 혼자 올라가 있어서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충호와 시은의 수긍을 받아내고 팀 내의 일을 진행시키는 것도 좋겠지.’
총대를 메고 팀장에게 의견을 내는 사람을 미리 휘어잡거나 미리 언질을 주면 일을 쉽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선후 관계를 조금 바꾸는 걸로 재미를 볼 수 있는 일은 매우 많았다.
“갑시다.”
어둠이 그들을 잠식하고, 공간이 뒤바뀌었다.
* * *
장 노인이 지건과 굉려를 호출했다. 그들은 일도 내팽개치고 서둘러 와야 했다. 그만큼 장 노인의 영향력이 컸다. 그들과 인연이 있는 자들도 장 노인에게서 소개를 받았다. 그들의 아버지나 삼촌들은 그들보다 장 노인을 더 대단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뒤엉킨 인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 가문의 윗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빨리도 왔구나.”
“부르시는데 늦게 옵니까?”
과수원을 운영하고 밭일도 제법 하는 지건이 농담을 건넸다. 농사일은 웬만하면 실패하기 힘들었기에 마음이 편안했다.
“이놈이. 살 만해졌다고 농을 걸어? 흐흐.”
장 노인이 웃었다. 굉려는 깍듯하게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 많이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모인 이유가 굉려가 제공한 정보 탓이기 때문이었다.
“굉려야, 네가 말해줘라.”
“예.”
그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문은 아니었고, 패턴도 아니었다. 숫자를 적어야지만 풀 수 있는 잠금장치였다. 번거롭지만 비밀이 많은 굉려에게는 평생 뗄 수 없는 보안 방식이었다.
“송유나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팀장님이 던전에 간 당일에 연락이 왔습니다.”
부정 경찰은 결코 장 노인과 연락하지 않았다. 자르는 건 팔이다. 머리가 잘려서는 안 됐다. 굉려는 젊은 시절의 장 노인이 쌓은 어둠을 이어받았다.
“시체…….”
지건의 혈색이 안 좋아졌다. 그는 양지의 사람이었다. 또 선을 넘는 유나는 당연히 산박이 매일같이 드나드는 과수원의 선도 넘었다. 열아홉 살의 젊은 여자에 미모도 열심히 관리하는 유나의 죽음은 지건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사진 보여주면 졸도하겠구만.”
장 노인이 굉려가 주는 사진을 혼자서 보고 상 위에 뒤집어서 올려놨다. 지건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이를 받아서 확인했다. 그리고 금방 굉려에게 돌려줬다. 사후 경직으로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녹아서……. 그냥 끔찍했다.
굉려는 말을 이어 나갔다.
“목에 단검이 박혔고, 그대로 죽었습니다. 어디에서나 구매할 수 있는 사출형 단검이라서 범인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네가 보기엔 어떠냐?”
“습격하는 놈들이라면 그냥 손 망치같이 작은 걸로 머리 한 대 치면 끝이죠. 굳이 단검을 목에 박는 고도의 기술을 쓰지 않습니다. 피하면 그만이니까요.”
사람의 목에 단검을 꽂아 넣는 건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 당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 여자의 가장 오래된 지인은?”
“종휼간이라는 남자입니다.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누구랑 접촉하거나 그런 건 없고?”
“알아봐 주겠다고 하지만 아직 답장은 없습니다. 거기까지는 도와줄 것 같지 않습니다.”
“조회하면 기록에 남으니까. 전화 조회는 못 하겠지.”
장 노인이 그렇게 말하며 날카로운 눈을 했다.
“어찌 되었건 산박을 건드리는 놈이 있다. 통발을 설치하는지 투망을 던지려고 돌담을 쌓는지는 모른다. 아니면 벌써 낚싯줄을 꿰려고 하는지도 모르지.”
‘특성’을 벗어난 드루이드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었다. 제대로 잡아둔 뒤 키우는 것도 재미날 것이다. 희소한 건 돈이 된다. 돈 때문에 멀쩡한 것도 버리고, 태우고, 묻는 게 자본주의였다.
두 사람 모두 장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판단해야 할 일이고, 그가 명령을 해줘야만 했다.
본래라면 장 노인은 바로 대책을 마련했을 것이었다. 수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배꽁초만 쌓여갈 뿐이었다.
창문을 열고, 차가운 밤공기가 들어왔다. 굉려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던전을 공략하기 때문이었다. 자극적인 담배 향은 던전에 들어가서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표적이 되기 쉬웠다. 나와 너. 둘 중에 괴물은 담배 냄새가 나는 놈을 더 자극적으로 볼 것이었다.
장고 끝에 장 노인이 입을 열었다.
“산박에게는 무리해서 접근하지 마라. 놈이 선을 넘는다는 이유로 유나를 죽였다면 우리 사업도 폭삭 주저앉는다. 유나에 대해서 더 이상 정보를 보여주지 말라는 소리다.”
증거가 없었지만 산박이 범인이라면 그 즉시 그와의 비즈니스는 끝이 난다. 산박은 다른 곳에서 성공할 것이고, 장 노인은 그저 손가락만 빨게 된다. 죽은 이를 위한 선택은 당연히 없었다. 애초에 송유나는 그들의 씨족도 아니었다. 그녀를 위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장 노인은 가장 먼저 범인을 산박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산박이 범인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산박을 건드리려고 한 짓인지 몰랐기에 그냥 철저하게 ‘자신’을 위주로 생각했다. 그렇게 따졌을 때 가장 위험한 스토리는 산박이 범인이라는 스토리였다. 고로 이럴 경우를 막기 위해서는 산박을 아예 언급 안 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휼간 그놈도 5일 내에 찾아와서 내 앞에 놔둬. 도망친 새끼니까, 뭐라도 알겠지.”
“예.”
굉려가 짧게 말했다.
5일. 그건 산박이 던전으로부터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 전에 잡아서 스마트폰이든 연락책을 박살 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