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270)
  • 96화

    * * *

    시은은 여전히 밤 산책에 나섰다. 언제나 있는 일상이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 의도적으로 부순 가로등. 그것은 유사시에 시은의 ‘사냥터’가 될 곳들이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인기척이 있는지, 사람이 지나다니는 곳인지, 몇 시에 몇 번인지, 그걸 꾸준히 파악하는 건 많은 집중력을 통해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시은으로서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녀의 충동이 위험하다는 걸 그녀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이를 해소하는 건 그녀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일상은 순식간에 비일상이 되어 버린다.

    시은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불청객이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응?’

    시은은 자신이 지나갈 루트에 있는 인영을 볼 수 있었다. 전봇대 아래에 서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못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여자라는 성별 때문에 산박에게 소개를 받아서 교류하게 되었기에 단번에 송유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좋지 않아.’

    그녀는 목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속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그녀가 이 사회에 적응한 ‘척’한 지도 오래되었다. 그녀는 사회의 베테랑이었다.

    그런데도 스트레스 상황에서 충동이 커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래서는 조깅을 할 이유가 없어.’

    조깅을 하면 체중이 줄어든다. 장기 지구력은 필요하지만, 꾸준히 할 필요는 없었다. 딱 유지만 하면 그만이었다. 이미 최고 수준으로 높여놨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오히려 힘든 건 체중을 키우는 일이었다. 석궁을 당기기 위해서는 근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근력은 살덩이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또 유나가 있으면 X 체크를 할 수 없었다.

    ‘모두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명석한 두뇌를 지니고 있어도 한 시간 삼십 분의 조깅 속에서 얻어지는 체크 포인트의 숫자는 많았고, 종류도 다양했다.

    짜증이 확 올라왔다. 자신이 영역 표시 한 곳에 불청객이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내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시은의 ‘축적된 사회성’을 보여줬다.

    탁탁…탁.

    이시은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이는 밝은 운동복을 입었기에 유나 또한 미리 보고 손을 흔들었다.

    조그만 체구의 유나 역시 밝은 색상의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칼처럼 날카롭게 정돈한 단발은 관리를 엄청나게 한 것처럼 보였는데, 빨갛게 염색했는데도 윤기가 있었다. 탈색을 해본 사람이라면 눈을 크게 뜰 정도로 찰랑거렸다.

    “안녕하세요!”

    유나가 통통 튀듯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여긴 어떻게 찾고 기다리고 계셨어요? 깜짝 놀랐어요.”

    “헤헤! 매일 바쁘시다고 해서 팀장님한테 물어봤더니 운동이라도 같이하라고 했거든요. 시은 씨가 밤에 운동한다는 걸 알려 줬어요.”

    거짓말이다. 시은은 산박에게 밤 산책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다. 사냥꾼이 사냥터를 다른 이에게 말해줄 리가 없었다. 거기에 산박은 그녀가 가장 애지중지하고 있는 사냥감이었다. 토끼나 꿩, 하찮은 비둘기랑은 달랐다. 산군(山君)이 되려는 개호주 같은 게 산박이었다.

    ‘불법적으로 취득한 정보로 날 조사했어.’

    시은은 단서 하나로 순식간에 강력한 정보를 획득했다.

    시은이 시원하게 웃자 유나도 기분 좋게 웃었다. 서로 교감한다고 여겨서 절로 기분이 났고, 흥이 피어올랐다. 불법을 저지른 상대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나쁜 일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화를 내야 했다.

    ‘아니, 좋은 일이야.’

    평범한 사람은 불쾌하게 생각하고 따지기 바빴겠지만 시은은 아니었다. 사고방식이 평범하지 않았다.

    불법은 오히려 그녀에게 좋은 것이었다. 상대는 자신의 행동을 조심했을 것이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터였다. 깡패라면 달라졌겠지만, 유나는 깡패가 아니었다.

    “그래서 기다리셨군요. 오히려 잘됐어요. 이 주변에는 운동하는 사람도 없고, 퇴근 시간이 지나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거든요.”

    “많이 불안하죠. 왜 이런 시간에 조깅을 하시는 거예요?”

    “밤공기가 차갑잖아요. 오래 달릴 수 있어서 좋고, 차가운 공기가 뜨거워진 몸 안으로 들어오면 기분 좋아요.”

    “아, 그건 정말 그렇죠.”

    유나가 맞장구를 쳤다. 이시은은 유나를 평범하게 맞이하며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스트레칭은 어느 정도 하셨어요? 15분?”

    “네! 그 정도 했어요!”

    사실은 더 오래 했지만, 유나는 시은을 배려했다.

    “잠깐, 허벅지 근육량을 좀 봐도 될까요? 조깅은 오래 하셨나요? 아니면 처음?”

    “자, 자주는 안 해요. 해도 러닝 머신 한 시간 정도…….”

    “빠르게요, 느리게요?”

    “그냥 보통으로요.”

    시은은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유나에게 밀착해 허벅지 근육을 만졌다. 밀착할 필요는 없었지만 일부러 밀착했다. 허벅지를 만진다고 했기 때문에 상체는 만질 수 없어서였다.

    “아하핫!”

    시은이 허벅지의 근육을 만지자 유나가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 무방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에서 범죄자를 만나는 일은 일반인에게 힘든 일이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네. 내가 그렇게 안전해 보였나?’

    남초 집단에서 만난 여자 동료라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치한 퇴치 도구도 없다는 게 놀라웠다.

    다만, 이건 시은만의 착각이기도 했다. 그녀는 퇴폐적이고 섹시했기 때문이다. 반면 유나는 결코 성적인 매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귀여움은 있었지만.

    참고로 시은은 다리 쪽에 단검을 숨기고 있었다. 남자에게 쓰러뜨려졌을 때 뽑기 좋았다. 시은은 한국에서 보기 힘든 육감적 여자였다. 성숙미가 대단했다. 그만큼 많은 준비를 하며 살아야 했다.

    시은이 어리숙했을 때는 선이라는 걸 잘 잡지 못해서 오해도 많이 샀다. 요즘에는 그걸 이용하고 살았지만. 물론 산박에게는 통하지도 않았다. 그걸 보고 그녀도 굳이 산박의 앞에서 경박하게 굴지 않았다.

    “잘 따라올 것 같네요. 조금 타이트하게 갈 건데 괜찮나요? 아니면 배려를 해줄까요?”

    시은이 은근히 자존심을 긁었다.

    “괜찮아요! 저도 던전 사용자인걸요. 요즘에는 슬링도 위력적으로 던지게 되었다고요. 팔이 짧아서 근력이 많이 붙어야 하는데요.”

    “어떤 훈련을 하셨는데요?”

    시은이 천천히 뛰며 말했다. 점점 속도를 붙이겠지만, 지금은 ‘정보’를 얻는 게 더 중요했다. 쓸데없는 잡담 속에서 진실을 끌어내야 했다.

    “팀장님이 뭐라고 하신 건 없으세요?”

    “있죠! 2팀에 새로운 팀원을 영입한다고 하셨어요. 두 명 정도 생각하신다고 했어요.”

    “그, 같이하시던 분이 누구셨더라. 그분은 잘되었대요?”

    “휼간 오빠요? 어떻게든 잘되었긴 한데 저한테 불똥이 튈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리고, 병원에서도 상태가 아주 나빠서 난리였다니까요. 전에 병문안을 갔었을 때 봤는데 토를 어찌나 하던지 헛구역질도…….”

    잡담은 서서히 최근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시은은 유나가 뭘 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유나와 연관되어 있는 이들의 근황을 물었다. 유나가 그들에 대한 것을 말할 때마다 시은의 눈에 광기가 물들어 갔다.

    이내 시은은 거리낌 없이 점점 속도를 냈다. 유나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 누구도 모른다고 한 번 더 확신할 수 있어서였다.

    ‘정보꾼들은 위험해.’

    특히 팀 내에서 활동하는 여자 정보원은 시은과 너무 깊은 관계를 요구하고 있었다. 동료가 아닌 던전 공략이 끝나고 사적으로 만날 관계를 원했다. 유나를 통해서 더더욱 이를 실감한 시은은 매우 거칠게 나왔다.

    유나의 적극성, 산박에게 선을 넘고, 옆집에 임대를 구하는 과감성까지 가진 그녀의 행동은 시은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시은은 눈을 감았다. 가로등 불빛에 눈이 노출되지 않으며 동공이 서서히 축소되어 갔다. 시은은 다시 눈을 떴다. 어둠이 그녀를 반겼다.

    “앗!”

    시은은 전날 부순 어두컴컴한 가로등을 조금 앞질러서 지나가다가 발을 헛디디는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밝은 가로등 다음 바로 어두워졌기 때문에 칠흑처럼 어두웠다. 유나의 좁아진 동공이 넓어지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괜찮으세요?!”

    유나가 달리는 속도를 줄이며 서둘러 다가왔다. 시은의 손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유나의 눈에는 정확하게 시은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윤곽을 통해서 신체를 어느 정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푹.

    “윽!”

    숨이 턱 막혔다. 목에 단검이 박혔다. 그대로 옆으로 당겨서 쓰러진 유나를 시은이 짓눌렀다.

    “크……!”

    부질없이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피와 침이 공기와 함께 들끓었다. 입에서 미약하게 숨이 흘러나왔지만 금방 끊겼다. 말을 하려고 노력한 탓에 유나는 더 많은 산소를 빠르게 폐에서 토해냈고, 곧 피에 의해서 기도가 완전히 틀어막혔다.

    꿀꺽.

    피를 먹던 목젖이 단검과 맞닿았고, 유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시은은 목에 박힌 단검을 빼지 않았다. 충분한 장비가 없어서였다. 출혈로 죽이는 건 오래 걸렸다. 목에 단검을 박고 피를 적게 내는 대신에 기도를 막아서 질식사시키는 게 좋았다.

    시은은 새하얀 헤어밴드를 벗었다. 짊어지고 있는 배낭에서 락스를 꺼내 헤어밴드에 부었다. 락스에 흠뻑 젖은 헤어밴드가 유나의 머리를 지나서 목에 걸렸다. 시은은 이를 손으로 잡아당겨 조였다.

    “으…….”

    시은은 동시에 뱀처럼 유나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허벅지 사이에 다리를 집어넣어서 비볐다. 유사 성행위와도 비슷한 행동처럼 보였다. 얼굴과 얼굴이 맞닿았다.

    시은은 죽어가는 이의 모든 것을 피부로 느꼈다. 거칠게 힘을 쓰고, 경직된 근육의 느낌도 아름다웠다. 이 격렬함은 곧 사그라질 것이었다. 그게 시은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시은은 손으로 유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냄새를 맡지는 않았고, 다만 군침이 주룩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내렸다. 그녀는 정상이 아니었다.

    꾸준히 관리하는 유나의 피부는 촉촉했고 부드러웠으며 밤공기 때문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은의 뜨거운 숨결이 유나의 귀에 닿았다.

    “금방 죽지는 않을 거야. 출혈도 적지. 하지만 숨이 막혀서 질식해서 죽을 거야.”

    유나의 입이 뻐끔거렸다. 폐에서 공기 하나 나오지 않았다. 유나가 마지막으로 크게 버둥거리며 거칠게 반응했다. 하지만 체구부터 작은 유나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능력치로 힘과 민첩, 체력은 시은보다 높았지만 그게 적용되어도 체급은 강력한 조건 중 하나였다. 적어도 3레벨은 되어야지 체급을 씹어 먹을 수 있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시은도 거침없이 유나를 노렸다.

    “네 잘못도 있어. 선을 지킬 줄 몰랐어.”

    야생의 육식 동물은 덩치가 큰 상대를 잘 노리지 않는다. 그건 시은도 마찬가지였다. 노쇠한 남자도 근력은 무섭다. 단련한 여자보다는 못하지만, 남자는 언제나 리스크 있는 사냥감이었다.

    “내 잘못도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그만큼 짜릿하기도 하지만, 솔직히 남자 사냥도 몇 번 해낸 시은에게 유나는 너무 손쉬운 상대였다.

    유나의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시은은 유나의 다리를 잡고 그녀를 끌고 갔다. 집과 집 사이의 골목길로 들어가서 은폐를 시켜놓고, 옷을 벗겼다. 운동복은 상황을 특정할 수 있었다. 락스 통을 빼고, 유나의 옷을 배낭에 집어넣고, 락스 통을 모두 비웠다.

    ‘팀장님은 내가 사는 곳을 모르지. 들킬 염려는 없어.’

    보통이라면 여기서 끝낼 일이지만 시은은 달랐다. 마녀의 손길로 몸이 굳기 전에 유나의 시체를 접어놓고 집에서 캐리어를 끌고 왔다. 옷은 완전히 다르게 입었다. 두 치수나 큰 것들이었고, 안에 몇 겹을 껴입었다. 마치 살찐 남자처럼 보였다. 머리카락도 집어넣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일부러 상태를 좋지 않게 한 복장이었기에 노숙자로 보기에 충분했다.

    시은은 유나를 캐리어에 집어넣고 마녀의 손길을 이용해서 살짝 붕 띄웠다. 마치 끌고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캐리어의 시끄러운 소리는 야밤에 너무 큰 소리였다.

    사람이 보이면 잠깐 멈춰 서서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그렇게 이동해 아주 멀리에 캐리어를 놔두고 락스 스프레이를 캐리어 곳곳에 뿌렸다. 그다음에 시은은 CCTV를 피해서 돌아갔다. CCTV가 많은 것처럼 보여도 대부분이 모형이었고, 진짜인 것도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런 세계였다. ‘판타지 쇼크’는 많은 걸 가져가 버렸다.

    돌아가면서 그녀는 생각을 달리했다.

    ‘팀장님은 분명 경계하시겠지.’

    그런 남자였다. 하지만 시은은 걱정이 없었다. 산박에게 있어서 이시은이라는 재원은 대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듀얼 클래스였다. 마녀와 네크로맨서는 서로 상성이 매우 좋다고 할 수 있었고, 이중택일(二中擇一)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다른 기업에 들어갈 가치가 있었다. 오죽하면 인천 네크로맨서 집단의 총본산인 포스코 타워는 시은이 듀얼 클래스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귀찮은 스카우트 제의가 올까 봐 시은이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시은은 자신의 사이코패스적인 모습을 산박에게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들이 팀에서 내쳐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종휼간’이었다. 동기도 충분하다. 유나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는 트라우마를 극복했다고 하지만 병원에서 지낼 때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매우 빨리 회복되었지만, 그 차트를 읽어보면 형사들도 용의자로 삼을 게 분명했다. 모두 유나가 알려준 것들이었다.

    시은은 되돌아가며 흥얼거렸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굴었다. 사라진 충동은 당분간 튀어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시은은 해방감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서 춤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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