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270)
  • 93화

    * * *

    이시은은 나갈 준비를 했다. 취미 생활을 위해서였다. 전에는 없던 취미가 생긴 건 아니었다. 그저 정기적으로 ‘해야만 하는’ 취미였다. 사실 그건 남에게 말할 때나 취미이지 시은에게는 생존을 위해서 꼭 필요했다.

    괴물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거죽을 잘 쓰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장소가 필요했다. 안전하게 상대를 덮칠 장소는 꾸준함과 성실함 그리고 근면성이 있어야지만 얻을 수 있었다.

    밤에도 잘 보이는 노란색 바탕의 운동복에는 새하얀 줄이 그어져서 멋스러움이 있었다. 약간 타이트하게 허벅지를 조이기 때문에 몸매를 뽐내기에도 좋았다. 머리는 뒤로 질끈 묶고 새하얀 헤어밴드를 착용했다. 시은은 흰색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로등이 꺼진 곳이 많은 도시를 돌아다닐 땐 흰색이나 밝은 계통의 옷을 입는 게 필수였다.

    가볍게 맨 스포츠 백에는 마실 생수 통을 넣고 만약을 대비한 중형 락스 통과 소형 락스 스프레이도 챙겼다. 이것만 해도 등 뒤에 멘 스포츠 백이 상당히 부풀어 올랐고, 무게도 제법이었다. 거기에 애완견 혹은 경비견이나 충성도가 높은 개와 엮일 수도 있어서 소시지와 육포도 한 봉지 챙겼다.

    백팩의 무게만 보면 여전사 느낌으로 가볍게 러닝하고 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락스 통을 챙기는 것부터 범상찮았다. 수틀리면 지문을 전부 지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은은 스포츠 장갑을 끼고 새총을 챙겨서 밖으로 나섰다. 시간을 확인하고, 천천히 조깅했다. 빛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이 느껴지면 X 포인트. 사람이 보이면 XX, 더블체크다. CCTV 중에서 제대로 전선이 들어간 것도 확인하고, 가짜 CCTV 모형도 확실하게 다시 확인한다. 매일, 매일 이를 반복한다. 또 들키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으면 새총으로 가로등을 부순다.

    그녀에게 무법은 안락한 집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부순 가로등은 밤에 시은의 활동력을 더욱 부추겼다. 수많은 충동 속에서 밤을 적당히 달리는 시은은 자유로움과 쾌락을 느꼈다. 충동에 흐느적거리는 정신은 오랜만의 휴식에 취했다.

    집에 돌아오면 스마트폰에 적힌 포인트 체크를 엑셀에 저장하고 갱신 및 데이터를 축적한다. 이를 그래프로 다시 변환하여 한 번에 확인할 수 있게 만든다. 그게 이시은의 저녁 스케줄이었다.

    그러고 나서 시은은 메신저를 확인했다. 언제나처럼 산박은 팀원들에게 매일 개인 메시지를 남겼고, 팀원은 성실하게 그에 대답해야 했다. 얇은 인연의 줄을 이어 나가기 위함이었다.

    [오늘도 바빠요? 운동 좀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해요. 잘 아는 클럽 있어요. 정말 화끈하게 노는 곳이야~]

    오늘은 다른 사람에게서도 메시지가 와있었다. 노골적이지만 돈과 외모가 있는 서후였다. 그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시체에 들끓는 구더기처럼 많았다. 예쁜 여자에게 환장하는 남자와 다를 바 없었다.

    [방금 운동 끝내고 들어왔어요. 피곤해서 일찍 자야겠네요.]

    답변은 금방 왔지만 읽씹했다.

    ‘박서후.’

    적패 네크로맨서로 시은보다 한 단계 높은 네크로맨서 신분 패를 지닌 자였다. 네크로맨서들의 주 무대인 인천 포스코 타워에서 만난 인연이었다. 시은에게 지나칠 정도로 치근덕거렸는데, 속이 텅텅 비어 있었다. 도서관에 자주 다니는 줄 알고 간단히 연락처를 주고받았지만 실상은 클럽 죽돌이였다. 쾌락에 미쳐서 젊음을 탕진하는 놈이었다.

    네크로맨서의 역량보다는 던전 사용자로서의 던전 공략 역량이 높아서 적패에 오른 자로, 포스코 타워 내에서의 입지가 약했다. 물론 당장은 시은보다 역량이 높아서 그 덕을 보고 있었지만 솔직히 기대 미만의 인물이었다.

    그는 시은의 인스타에도 출몰하기 시작했고 1년 전 게시물에까지 댓글을 달고 있었는데 적당히 내쳐도 끝날 기미를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사타구니가 벌떡 서서는 주체를 못 한다는 게 옳았다. 시은같이 육감적이고 섹시미가 높은 한국 여자는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집까지 찾아올 용기가 없다는 게 이놈의 명줄을 늘려주는 거겠지.’

    범죄의 선을 잘 아는 놈이었다. 아마 여자에게 직접거린 경험이 많이 쌓인 놈으로 보였다. 멍청이는 아닌 셈이었다. 시은은 놈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의 관심이 그녀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죽이고 싶었다. 행방불명이 되면 제법 재밌을 것이다. 경찰의 의심을 받으면 제법 재밌겠지.

    * * *

    산박은 장 노인에게 총 2,150만 원의 빚을 졌다. 개인 낚시터를 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땅값만 150만 원이었는데 어지간히도 컸다. 500평짜리 개인 낚시터는 사치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저 멀리 보고 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사치 부리는 돼지 새끼라고 욕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수익에 비해서 큰 지출이었다.

    “반갑습니다. 태산박이라고 합니다.”

    산박이 손을 내밀었다. 장 노인이 부른 장마겸은 고개를 숙이며 양손으로 산박의 한 손을 맞잡았다. 갑과 을이 확실했다. 더울 땐 더운 곳에서, 추울 땐 추운 곳에서 일하는 장마겸이었다. 그는 매사에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게 일이었다.

    “일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서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예. 부지로 향하죠.”

    그곳에는 밭이 있었다. 옥수수밭으로 쓰이던 것을 밀어 버리고 산박에게 팔았다. 식용 옥수수였기에 손해가 조금 있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2,150만 원이 현찰로 들어온다. 바로 들어오는 건 아니지만 차라리 그게 더 나았다. 부동 지구 말고 다른 곳에 땅 투자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자를 지을 거라고 하셨는데, 크기는 못 들어서요.”

    산박이 팩스로 보낸 구상도를 든 마겸이 곳곳을 살피며 말했다.

    “작은 거면 됩니다. 많이 앉아 봤자 세 명요. 그것도 낚시터 중앙 쪽에요.”

    “예. 구상도에 그렇게 적혀 있더군요. 다만 길이 있는데 흙을 그대로 놔두실 건가요, 아니면 아예 흙을 다 파버리고 인공물로 다리나 그런 걸 댈까요?”

    “나무다리를 놓아 주세요. 분위기 있게요. 원목일 필요는 없고 싸게요.”

    “톱밥 나무로는 어림도 없죠. 원목 써야 합니다. 혼자 쓰실 건데 사고 나면 큰일 나지 않습니까? 물이라서 휴대폰도 먹통 되면 끔찍하죠.”

    “그러면 그냥 원목으로 해주세요.”

    물을 놓고, 그 중앙에 섬처럼 땅을 놔두고 정자를 지어 물의 나무를 심는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나무가 있을 이유도 충분했다.

    “여기에는 컨테이너 창고를 하나 놓는다고 하셨는데……. 그럼 겨울에 춥고 여름엔 더울 텐데요? 겨울에 지내기에는 컨테이너는 단열이 안 됩니다. 요즘 유명한 조립식 집은 어떻습니까? 15평, 30평, 50평짜리가 있습니다. 목재지만 없는 게 없죠.”

    “1층 집이죠?”

    “예. 있을 건 다 있고, 싸기도 쌉니다. 겨울에 낚시하는 데 어려움은 없죠. 좁아도 옆이나 뒤쪽에 컨테이너 창고 하나 마련해 두면 그만이고요.”

    조립식 집, 컨테이너 창고 한 칸, 정자와 낚시터 주변 쇠창살에 지형 변화까지. 모두 하는 데 2천만 원이면 싼 축에 속했다. 이래서 인맥이고, 이래서 지연이다. 장 노인이 분명 입김을 불어넣었을 터였다.

    그 이후에는 당산 지구에 있는 식당에 가서 국밥을 먹었다. 마겸은 장 노인과 산박의 관계를 묻기 바빴다. 장 노인 앞에서는 입도 뻥긋 못 한 듯했다.

    “같이 사업하는 사이죠. 전 젊어서 없는 게 있고, 장 어르신도 늙어서 없는 게 있고. 반대로 있는 것도 서로 다르니까요.”

    산박은 이에 대충 말했다.

    “사람은 몇 명 쓰실 겁니까?”

    뭐든지 인건비였다.

    “광동 자치국에서 넘어온 좡족 두 명이 저랑 같이 일하고 있고, 기술공은 하나면 끝입니다. 다재다능한 친구고, 저도 전기 쪽을 잘 다뤄서요. 네 명이면 못 하는 게 없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마겸이 자신에 대해서 떠들어 대었다. 땀을 흘리는 직업을 하게 되면서 생긴 습관이었다.

    “이게 한국에서 건설업 한다는 게 말이 쉽지 요즘은 거의 망했습니다. 아파트 짓던 건축 대기업은 쫄딱 망해서 버려진 아파트만 수두룩하죠. 거기에 누가 삽니까? 말 못하는 외국인 데려다가 써서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닌데요.”

    간단한 누수조차도 못 잡아서 개인에게 먹었던 돈을 다 토해내고 도산해 버린 곳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소규모로 건설업 하는 사람이 많아졌죠. 저처럼요. 서울 쪽 폐허도 앞으로 5년은 더 치워야지 그나마 건설 기업이 좀 생기겠죠. 저도 기회를 보고 있고요.”

    자신의 비전에 대해서도 한마디 얹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비전이지만, 자본이 받쳐주지 못하는 놈은 나가리 되기 십상이었다.

    ‘말이야 쉽지.’

    “대단하십니다. 나중에 회장님 소리 들으시겠는데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상만 해도 재미났다. 부동 지구에 터를 두고 있는 장씨 가문의 부흥! 그리된다면 장 어르신도 장마겸을 크게 여기게 될 터였다.

    함현(喊賢) 사원을 관리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은 당산 장씨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받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돈으로는 얻을 수 없었다. 그가 벌어들인 돈은 그만의 것이라 역정 내며 받지 않는 게 장 노인이었다. 애초에 세월이 쌓아준 재물이 있는데 마겸의 돈을 탐할 리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재산은 쌓이기 마련이었다. 또, 마겸이 죽으면 그 자식들이 알아서 하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사원 하나 떡 가지고 있으면 가문의 품격이 산다.

    안 받아도 돈을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받기 마련이고, 마겸 또한 크고 작게 돈을 낸 적도 있었다. 그저 한 번에 크게 내는 길이 막혀있을 뿐이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었다.

    산박은 공사를 마겸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또 방문할 때는 반드시 연락하겠다고 언질을 해놨다. 갈 생각은 별로 없었다. 처음에 한 번 가고 그때 상황을 볼 생각이었다. 공사장이라고 명함에 딱 박아놓고 있는 것만 봐도 실력이 출중했고, 믿고 맡길 수 있는 자였다. 배운 만큼 하는 법이었다.

    어렸을 때 많이 맞았을 정도로 사람다움을 배운 게 장마겸이었다. 공부를 못하니 다른 걸로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장 노인의 관심도 많이 받았다.

    그날, 오후에 유나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 말하세요.”

    ―기업 쪽에 알아봤어요. 팔 수 있는 것 같아요. 그쪽도 모르더라고요.

    “어디가 수익이 좋을 것 같아요?”

    ―기업이랑 정보꾼, 둘 다 팔아야죠. 늦게 안 놈이 멍청한 거니까요.

    “얼마 생각하십니까?”

    ―기업 쪽은 팔면 100만 원은 건지겠네요. 너무 비싸게 부르면 나중에 후폭풍이 두렵고요. 정보꾼은 하기 나름이죠.

    “7:3 어떻습니까.”

    ―오, 제법 양심적인데요? 제가 7이라니.

    “반대입니다. 소스 제공자가 더 많이 받아야죠.”

    ―그런 게 어딨어요. 직접 발품 뛰고 거래 성사하는 건 저인데요. 만화도 그리는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잖아요. 스토리 작가는 3도 히트 작가나 가능하다던데요?

    “여기서 만화가가 왜 나옵니까? 예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그럼 공평하게 5:5로 해요. 가만히 놀고먹으면서…….

    “다시 한번 말씀해 주세요.”

    ―팀장님 돈독이 대단하다고요.

    유나는 나이가 어려서 반발심이 강했다. 여기서는 물러서는 게 좋을 듯했다.

    “좋아요. 5:5.”

    솔직히 뭘 해도 이득이었다.

    ―아, 7:3?

    그 말에 산박이 코웃음을 쳤다. 유나도 어색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어리숙한 면모가 있었다.

    * * *

    종휼간은 밤잠을 자지 못했다. 병원 복도에 있는 작은 휴게실에서 멍하게 TV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간호사가 다가왔다.

    “환자분? 지금 새벽 세 시예요.”

    “우읍…….”

    사람을 보자마자 휼간이 입을 틀어막았다. 안에 것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 사람이 없는 곳이 필요했다.

    그가 위로 향하는 계단으로 달려 나갔고, 간호사가 긴급 호출을 눌렀다. 남간호사의 숫자가 적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굳건하게 닫힌 옥상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휼간을 발견해 데려올 수 있었다.

    그는 내려오는 내내 헛구역질을 해대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렇게 감정을 배출하는 만큼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스트레스를 없애고 있었다. 안에 것을 게워내면 게워 낼수록 눈물이 흘러내렸고, 휼간은 5일 만에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저장한 전화번호부에 손가락을 대고 위아래로 문지르기를 수십 분, 그는 결국 산박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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