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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88/270)
  • 88화

    산박이 롱 소드만 들라고 했지만 굉려는 맨몸에 혁대를 매고 화염 물약과 단검을 챙겼다.

    “피부가 긁힐 텐데 괜찮겠어요?”

    “닳아서 부드럽습니다.”

    산박이 의심하여 혁대를 만졌다. 실제로 오래 사용해서 가죽이 부드럽게 되어 있었다. 산박은 혁대를 맬 수 없어서 환도만 챙겼다.

    별빛탄을 앞세워 물속에 집어넣었다. 적의 그림자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그다음에 시간을 두고 두 명이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미리 이야기를 나눴던 대로 산박이 나중이었다.

    풍덩! …풍덩!

    내부에는 역시 벽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물고기는 살고 있지 않았고, 이끼조차도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맑다.’

    불빛만 있다면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맑은 물이었다. 그리고 그건 너무 이상했다.

    힐긋 본 벽화는 그저 위와 아래에 파도가 있었고 물고기가 세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산박은 한순간 만에 그 벽화의 모순을 깨달았다. 하늘 위에 파도가 있는 건 다른 이들도 쉽게 알 수 있지만, 세찬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들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깨닫기 힘든 것이었다.

    벽화에서 시선을 떼고 산박은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도 우물 출입구가 존재했다. 굉려가 단번에 그곳으로 향했다. 동시에 별빛탄도 위로 솟구쳐 올랐다.

    굉려는 롱 소드를 뽑은 채로 물에서 튀어나왔다.

    “푸하아!”

    물이 눈에 들어갔지만 굉려는 서둘러 주변을 살피며 롱 소드를 찌르기 상태로 휘적거렸다. 울렁거리는 시야 속에서도 움직이는 적이 있으면 대충은 볼 수 있었다.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 롱 소드로 일단 저지하면 되는 일이었다.

    적이 없자 굉려는 그제야 얼굴을 닦으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굉려가 올라가자 산박도 뒤를 이었다.

    조금 좁은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서관 같았다.

    “고문서가 많습니다.”

    별빛탄이 부유했다. 알아서 움직이는 느긋한 도깨비불 같았다. 산박의 정신이 별빛탄을 제대로 확 휘어잡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산박은 그만큼 동요했는데, 고문서가 지나칠 정도로 많아서가 아니었다. 바로 아래의 벽화와 연결되는 퍼즐 때문이었다.

    ‘여기에 반드시 힌트가 있다.’

    그 힌트는 바로 물의 창조, 창수의 비밀일 것이 분명했다.

    고문서는 어지러운 문자로 되어 있었지만 그림도 반드시 존재했다. 언어가 조잡해서 그림도 있어야 하는 듯했다. 그건 산박에게 큰 다행이었다. 오래되어도 걱정 없었다. 모두 내구력이 높은 양피지로 되어 있었다.

    그 외의 흔적이라고는 작은 제단뿐이었다. 아마 사막신을 기리는 제단인 듯했다. 그릇에는 모래가 가득 담겨 있었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매우 세심하게 모래를 그릇에 채워 넣은 듯했다.

    뭔가 의미가 있는 듯했지만 산박은 간파할 수 없었다. 황량자들의 문화에 대해서 무지한 게 컸고, 현대인들은 종교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산박에게 이점이 있다면 ‘학자’라는 직업 특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학문을 배우기 쉬워지며 지능이 상승하는 특성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문서 문자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림으로 이해하면 닿을 수 있을지도…….’

    문제는 시간이 제법 걸린다는 점이었다.

    ‘그럴 가치가 있는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림 속의 인물이 드루이드로 보이는 건 농사일을 돕는 모습과 물을 부리는 모습 때문이었다. 하지만 농사일을 잘 아는 마법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모호했다. 더군다나 산박은 카르마의 시스템에 진리를 회수당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얻을 힘이 자신이 가져도 되는 힘인지 모를 일이었다.

    “되돌아가서 배낭을 챙겨 와 주시겠습니까? 전 조금 더 조사를 하고 싶네요.”

    “예.”

    굉려가 반대편으로 다시 헤엄쳐서 갔다. 압축한 배낭을 가져올 것이었다. 고문서는 수출하면 일단은 돈이 약속되어 있는 편이었다. 물론 철 스크랩같이 kg 단위로 팔릴 뿐이었다. 그래도 자본의 힘 덕분에 ‘잉여 연구’를 할 수 있는 외국이 부러운 지식인도 많다는 듯했다.

    산박은 그림들을 훑었다. 굳이 오래 들여다볼 필요가 없었다. 오로지 순간적 직관이 모든 걸 결정했다.

    휙, 휙, 휙.

    산박은 고문서를 펼치고 한쪽에 차곡차곡 쌓았다. 배낭에 담아야 했기에 어지럽힐 수는 없었다.

    ‘드루이드는 확실해. 쓸데없는 주문이 많아.’

    대부분 자연의 부흥을 위해서 사용했다. 솔직히 사막 같은 험지가 아니면 쓸 필요도 없고, 또 숲을 만들어 놓으면 할 일은 끝나기에 드루이드의 가치는 들쑥날쑥인 셈이다.

    이상한 건 나무 몇몇이 시들어 있는 그림이 구석구석에 있다는 점이었다. 뭔가 이걸 보는 이들에게 힌트를 주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자신과 같은 드루이드가 올 것을 기다린 것일지도 몰랐다.

    “…….”

    그림에서 드루이드 왕자와 일반인의 크기 차이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왕자는 최대한 크게 그리고, 다른 이들은 개미만큼 작게 그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노골적인 것은 제법 옷을 갖춰 입은 자들조차도 대등하게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고집’이 그림에 있었고, 그것만큼 무도한 것도 없었다. 어찌나 이치에 맞지 않고 고집스러운지 보는 것만으로도 산박은 기분이 나빠졌다. 멍청한 처사였기 때문이었다. 배우지 못했다고 하기에는 우습다. 눈치는 사촌 밥을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너무 성대하게 활동했다. 웃긴 건 그대로 왕자가 되었다는 점이지. 토사구팽 안 당한 게 신기할 지경이네.’

    황량자의 문화에 대해서 주의 깊게 여겨 봐야 할 순간이었다.

    산박은 그 뒤로 특이한 그림을 몇 장 찾아냈고, 그사이에 굉려가 돌아왔다.

    “그쪽은 아무 이상 없었습니까?”

    “예. 뭐라도 찾으셨군요.”

    의문형이 아니었다. 산박은 미약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굉려는 생각보다 써먹기 좋은 팀원이었다. 쓸데없이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예.”

    산박은 짧게 대답했다. 굉려도 그걸 원한 듯 나쁘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다 확인한 고문서입니까?”

    “네. 그중에 여기 있는 거 빼고 저기 많이 쌓인 것만 배낭에 넣어 주세요.”

    굉려는 헐렁하게 말린 양피지를 꼼꼼하게 다시 말았다. 그 뒤에 배낭에 집어넣었다. 양쪽의 출입구가 모두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다른 누구도 이곳에 오지는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양쪽의 통로 모두 확보하고 있는 게 중요했다.

    ‘병목 현상 때문이지.’

    나가기 힘들고, 들어오기 힘들다. 지키는 쪽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다.

    거기에 물의 밀도는 대장삵 때문에 싫어도 알게 되었다. ‘물의 마법사’는 너무나도 강하고 무서운 존재다. 그들은 가장 완벽한 ‘근접 직업 카운터’였다.

    무위 중에 수공(水功)이 없으면 속수무책이었다. 거기에 수공은 오로지 물에서만 사용 가능했기에 1레벨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위력은 1레벨인데 2레벨에서 나오는 형편없는 것이라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욕받이 무위 중 하나가 수공이었다. 또한 전방 직업을 놀리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무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장삵이라는 대단한 물의 마법사를 본 산박은 수공이야말로 물의 마법사에 대한 전사들의 우직함이 깃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집중하자.’

    산박은 이제 드루이드 왕자에 대한 것도 휙휙 넘겼다. 특이한 그림만 집중적으로 확보했고, 곧 진리에 닿을 수 있었다. 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카르마에 의해서, 레벨 업 시스템에 의해서 강제로 진리를 빼앗긴 전적이 있었다.

    위로 튀어 오르는 물. 그것은 아주 작은 물방울이었지만, 다시 내려올 때는 파도가 되었다. 아래로 내려오는 물은 드루이드의 역량과는 별개로 커진다는 뜻이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거대한 진리에 근접했다. 그냥 튀어 오르는 물줄기와 내려오는 파도 그림, 자연을 형상화한 기하학적 기호. 그 중심에 있는 마력의 움직임을 그저 그려낸 조각들의 퍼즐. 이 모든 걸 단번에 꿰뚫고 산박은 그 진리를 손에 넣었다.

    [사용자 태산박. ‘소수대파도(小水大波濤)의 진리’에 접근했습니다. 지정된 레벨을 초과한 힘입니다. 회수 조치합니다. 던전을 클리어하면 소정의 보상을 받습니다.]

    ‘개새끼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이건 창수의 진리가 아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본래는 하천의 물이라고 할 수 있는 실체를 지닌 물을 통해서 상천의 물이라 불리는 초월적 형태를 지닌 흐름을 만들어 ‘물을 창조’하는 방법인 줄 알았다. 허나 그 본질은 조악했다. 그저 흐름을 만들면 대기의 마나가 알아서 보정해 주는 것이었다. 1의 힘으로 10의 힘을 만들어 내는 힘이다.

    다만, 주변 대기의 마나가 빠르게 소모된다. 마나는 생명력이다. 섬에서 지하수를 미친 듯이 퍼 올려서 싼값에 생수로 팔면 그 빈 곳에 바닷물이 차오른다. 그러면 그 섬은 그저 죽은 섬이 될 뿐이다. 마나를 사용한 대가는 황량한 세계였다.

    이 황량한 세계를 만든 주범이 공교롭게도 물의 축복을 내리며 왕자라는 사회적 지휘를 획득하고 자식까지 낳아 떵떵거리며 산 드루이드 왕자인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 속에서도 드루이드 왕자는 자신이 만든 죄를 속죄하려 노력했다. 그것이 산박이 획득한 독특하고 특이한 그림이었다.

    “배낭은 여기에 두고 갑시다.”

    “예.”

    고문서가 든 배낭은 던전이 무너질 때 함께 이동될 것이었다.

    또한 산박은 특이한 양피지를 불로 태웠다. 그 모습을 굉려가 살짝 봤지만 관심도 가지지 않고 바로 물속으로 들어갔다.

    저래서 산박은 굉려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함께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이 있다면 산박은 굉려와 시은을 택할 것이었다. 굉려는 입이 무겁고, 그게 행동으로도 나왔다. 시은은 이미 함께 사람을 죽인 전적이 있었다.

    충호는 듬직하지만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이었다. 현대 사회였기에 사교성이 높을 뿐, 자신에 대한 절제성이 의외로 높다. 아마 폭력으로 결코 굴복하지 않는 사내일 터였다.

    산박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굉려는 이미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 있었다.

    ‘연어의 창수(創水)’. 물을 창조하는 힘. 동시에 이를 다른 존재를 통해서 이룩한다. 자연스럽게 그 수준이 바닥을 친다. 세계를 구한다기보다는 가족 하나 책임지는 수준에 불과하다.

    ‘정령에 가깝지만, 틀리다.’

    다른 것이 아니다. 정답이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조 정령이다. 인조 정령을 대량으로 탄생시킨다면 물 부족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전에 멸망해 버렸지.’

    그 탄생은 바로 이 물의 통로 속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산박은 마력을 운용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적임자가 있었다.

    밖으로 나온 산박은 팀원들이 있는 곳에서 사정을 말하고 대장삵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스스로 자멸을 초래한 꼴이라니.”

    대자연의 힘을 이용한 대가를 본 대장삵은 황량자들을 병신 머저리로 취급했다. 당연했다. 드루이드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건 실로 자신의 분수를 뛰어넘는 일이었다.

    “아마 공명심이 강한 인간이었겠지.”

    산박 또한 드루이드의 이레귤러였다.

    어찌 되었든 산박과 대장삵은 다시 수로로 진입했다. 다른 이들도 기다려 줬다. 산박이 강해지는 일인데 반대할 수 없었으며, 일정은 여유로웠다.

    대장삵이 먼저 물꼬를 텄다. 물이 마치 2등분된 것처럼 아랫부분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윗부분 또한 영향은 받고 있었지만 더뎠다.

    ‘놀랍다.’

    산박은 반대로 위쪽의 물을 반대로 틀었다. 그 모순이 시작되자 벽화가 빛이 났다. 연어가 거침없이 물을 ‘역행’했다. 튀어 오르는 모습이 전 벽화에 새겨져 있었다.

    그곳에서 충분한 마력이 물로 스며들어 갔고, 산박과 대장삵은 더는 자신의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알아서 벽화에서 마력이 주입되고 있었다. 또한 알아서 중심부로 이동했다. 흡착력을 지닌 것처럼 이동되었고, 중심부의 물은 조용했다.

    그곳으로 푸른 기운이 모여들고 이내 덩어리가 되어 산박의 곁을 빙글빙글 세차게 돌았다. 영물이면서 물의 나무로부터 힘을 받는 대장삵은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정령 위에 정령을 쌓는 일이 되어버릴 터다.

    곧 연어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길쭉했지만 동시에 통통했다. 푸른색의 피부를 지닌 연어는 크기가 빠르게 줄어들더니 매우 조그만 송사리나 다름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산박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생선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저 청량한 밤바람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보글보글!

    간지러움에 산박이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산박이 모습을 드러내자 당황한 팀원들이 서둘러 그를 끄집어냈다. 우물에서 봤을 때는 탈수하듯이 돌아가는 물살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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