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270)

87화

굉려는 방어구를 노리지 않았다. 그건 사막 은총 갑옷이 지닌 능력을 경계하는 게 아니었다. 갑옷의 능력은 이미 산박과 시은에 의해서 무력화가 된 상태였다.

‘결국, 강철이라는 게 문제지.’

무력화되었다고 해도 강철 갑옷이었다. 녹슬어도 철로 철을 자른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다만, 흉갑이었기에 겨드랑이에 롱 소드를 집어넣는 일은 수월했다. 생전에 딱 맞았던 것이라 언데드 상태에서는 헐렁해서였다. 그런 흉갑의 겨드랑이를 공략하지 못하는 건 병신이었다. 굉려는 기본 검술 기술까지 얻은 암살자였다.

콰드득!

뼈와 갈비뼈가 박살이 났다. 롱 소드에 갑옷이 함께 딸려 나오다가 앞으로 엎어졌다. 그걸로 놈은 끝이었다. 후방에서 옆으로 튀어나온 공격에 무력하게 박살이 났다.

후웅!

굉려는 휘둘러지는 할버드의 소리를 들었다. 황량자 언데드 정규군 2기가 양옆에서 단박에 반응했는데,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매우 위협적이었다. 기수와 정규군이 굉려를 노렸다.

그들은 또한 좌상우하(左上右下)의 법칙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 검술의 경우에는 좌상좌하, 우상우하를 번갈아 가며 공략하라고 하지만 그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저 기본 검술로 할 수 있는 기교가 아니었다. 허수아비 상대로는 할 수 있어도 실전에서는 까다롭고 두려웠다.

그에 반해서 좌상우하의 법칙은 자신감을 줄 수 있었다. 또한 두 명이 나누어서 이를 분담했기에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주 눈이 오른쪽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또 첫수를 좌상으로 하면 거리감을 엉키게 하기도 좋았다. 1인칭의 시야를 지닌 인간에게 거리감은 너무나도 모호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하단은 언제 어디서나 쓰기 좋았다. 다리는 다른 곳보다 툭 튀어나와 있는 경우가 많고 회피하기 어려웠다. 줄넘기하듯이 껑충 뛰어넘는 건 갑주를 입고 하기에는 힘든 것이었다.

붉은 깃발이 굉려의 시야 위로 보였다. 깃발을 달지 않은 할버드는 하단을 노렸다.

“흡!”

굉려는 큰 위협을 느꼈다. 다행이라면 아슬한 순간 투척 단검을 통해서 할버드 두 개 중 한 개를 쳐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하지만, 다행스럽게 사막 은총 무기의 효력이 멀쩡하게 유지되고 있는 놈이었다.

쾅!

산박과 시은의 원거리 공격에서 무기를 지켜낸 놈이었다. 1회 충격을 크게 주기 때문에 단검과 부딪치며 커다란 충격량을 토해냈고 그 반발력으로 궤적이 수정되었다. 또한 모래가 단번에 주변을 뒤덮었다.

자연스럽게 굉려는 그 빈틈을 이용했다. 몸을 굴렸고, 놈을 근접 박투를 통해서 쓰러뜨렸다.

쿵!

그냥 몸통 박치기를 한 것에 불과했지만 체중이 가벼운 언데드였기에 어려움이 없었고, 냉큼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진형이 붕괴했다.

“지금이다아아아!!”

충호가 단번에 달려 나갔다. 30m의 시야 거리 속에서 이루어진 굉려의 활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이었다. 어느 때보다 희망찬 목소리였다.

충호, 산박, 시은, 하급 해골이 그 구멍으로 득달같이 달려들며 깃발병을 단번에 합공해서 죽였다.

퍼버벅!

기병은 방패에 후려쳐 맞고 시은의 환도에 무릎이 박살 났으며 산박의 발차기에 투구가 날아가며 두개골이 덜렁거렸다. 산박의 발이 흉갑을 단단히 밟아서 고정하고 환도를 목에 박아 넣었다.

해골은 시은을 보호하기보다는 자체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일행이 한 놈을 노릴 때 반대편에 있는 놈을 가로막았다. 조금 제어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1인분은 하고 있었다. 네크로맨서 장비 덕분이었고, 상대도 똑같은 언데드였다.

황량자 정규군은 길쭉한 진형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 순간만큼은 산박의 팀이 수적으로 우세했다. 다수와 싸우는데도 소수가 ‘다수의 이점’을 지니는 얼마 안 되는 순간이었다.

굉려는 확실하게 자신의 공격력을 황량자들에게 보여줬다. 그 덕에 순식간에 날개가 무너지고 포위가 흐트러졌다. 포위를 위해서 공들였던 시간이 공(空)으로 돌아갔다. 허무한 순간이었다. 그제야 황량자 지휘관은 굉려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다.

“뭉쳐라! 사막의 아들들아! 적들에게 보여주자! 죽어서도 끝나지 않는 태양의 전사들의 마지막을! 에이아스!”

“아이아스!”

팀이 좌측으로 확 몰려갔고, 2기를 죽였기 때문에 그곳에 가까이 있던 2기는 대각선으로 주춤 물러나며 뒷걸음질을 쳤다. 지휘관이 중심축이 되었다.

반면 우측에 있던 4기는 6기로 늘어났다. 전차를 수복하던 게 망했기 때문에 그곳에 있던 기수가 2기 추가된 것이다. 6기는 2열로 변해서 두툼하게 좌측으로 이동했다.

2열이 된 곳에 사정없이 부딪쳤지만 할버드의 저지력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산박의 팀에는 주문 사용자가 무려 세 명이나 있다는 점이었다.

마녀의 손길이 황량자의 한쪽 발을 무릎 꿇리면 산박이 할버드를 당겨서 끌어오고 충호의 방패가 투구를 후려쳤다. 철저하게 협공을 통해서 하나씩 잡아 갔다. 움켜쥐고 당길 수 있는 마녀의 손길은 백병전에서 생각보다 유용했다.

충호는 까마귀 쇄도를 통해서 마치 무기를 하나 더 쥔 것처럼 적들을 압박했고, 피해를 누적시킬 수 있었다.

산박의 경우는 별빛탄을 이용해서 화염 물약 때문에 내구력이 크게 망가진 관절 부분만을 노렸다. 타격력이 약해도 관절을 끊어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경상자가 중상자로 변하며 불구가 되기 시작했다. 전력의 반절이 무너지면서 9기 중 4기의 전투력이 반토막 났다.

굉려는 끊임없이 후방을 괴롭혔고, 전력을 분산시켰다. 굉려 혼자서 적게는 1기에서 많게는 3기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결코 덤벼들지 않았다. 할버드를 롱 소드로 툭툭 치면서 신경을 긁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할 만하네요.”

황량자 정규군을 죽이고 나서 충호가 가쁜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상처 하나 없었다. 적의 할버드는 위협적이지만 돌진력이 부족했고, 체중이 무거운 충호의 방패를 어찌할 수 없었다. 괴물임에도 하급 언데드라서 전투력이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았다.

“전차가 있었잖아요. 그게 있었다면 당하는 건 우리들이었겠죠.”

시은이 그 말에 대꾸하며 버둥거리고 있는 해골마의 골통을 환도로 내려쳐 부쉈다. 그다음에 발로 짓밟았다. 움직이는 감각이 신발을 통해서 느껴졌다. 절로 흥이 났다.

“처음에 준 피해로 이미 끝난 싸움이라고 봐야 했을까요?”

“그럴지도요.”

사막 은총 갑옷과 사막 은총 무기는 모두 배낭에 들어갔다. 1레벨 장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녹여서 특수한 공정을 거치면 다른 장비로 재탄생될 수 있었다.

투사체에 부딪친 할버드는 알아서 충격량을 퍼뜨렸고 제대로 전투에 사용되지 못했다. 제어할 수 없는 힘은 산박의 팀에게 정말이지 쓸모가 없었다. 필요할 때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박은 모든 황량자 정규병을 확인하고 지휘관을 찾았다. 놈의 품에서 사막신의 증표를 찾아낼 수 있었다. 호박석 목걸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달랐다. 한 주먹만 한 구리와 철을 녹여서 만든 공예품이었고, 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햇빛이 들어올 수 있는 구멍이 여덟 개 있었고 내부에는 작은 빛의 구체가 둥둥 떠다니며 부유하고 있었다. 바로 카르마였다.

‘이거지.’

1레벨에서만 사용 가능하지만 소량의 카르마로 변경 가능한 것이 사막신의 징표였다. 모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소문이 있으나 학교마다 있는 일곱 괴담 같은 것이었다. 믿는 사람은 없었다. 개당 10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을 지니고 있었고, 종종 경매에 넘어가면 그것보다 더 많은 가격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1레벨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흠이었다.

‘소량이라고 해도 카르마. 이건 당장 사용하고 싶다.’

호박석 목걸이 또한 세 개를 얻을 수 있었다. 솔직히 운이 좋다고 할 정도로 많은 수량이었다. 특히나 정규군은 호박석 목걸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았다.

할버드 열한 개, 흉갑과 투구, 신발을 비롯한 갑옷 세트 열한 벌. 이 모든 걸 배낭에 넣고 땅에 은폐했다. 전차나 해골마에서는 특별히 획득할 것이 없었다.

하루를 휴식하고 나아간 끝에 팀은 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당하네요. 생각보다 쉽게 묘실에 도착했어요.”

시은이 어처구니없어했다. 더욱더 많은 적과 싸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산박 또한 적어도 네 번의 전투를 겪을 것이라 던전 공략이 빠듯할 거란 얘기를 했는데 너무 빨리 묘실에 도착해 버렸다.

‘도로 때문인가?’

시설이 추가되었고, 전차 2기를 운용하는 정규군은 단 하나. 바로 묘실이 나온다. 황량자 던전의 독특한 기믹 혹은 방식으로 볼 수 있어 보였다. 그건 곧 정보료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즉, ‘황량자 던전의 도로 시설’을 만나면 단 한 번의 전투만 하고 바로 묘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정보를 획득한 것이다.

‘이를 싼값에 넘긴다면 다양한 기업으로부터 돈을 얻을 수 있겠지.’

나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정보꾼들에게 팔아도 된다. 5천 원, 3천 원에 그냥 최대한 다수에게 팔면 그 또한 큰돈이 될 것이었다. 전직 정보꾼이었던 유나에게 일을 맡긴다면 수백만 원을 벌 수 있을 터였다. 목돈 없이 끝없이 소비하고 있는 산박에게는 그런 자금도 매우 귀중했다.

하루를 휴식하고, 묘실에 들어갔다. 만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지상 1층은 협소한 통로에 불과했다. 그곳에 그려진 벽화와 끝없이 타오르는 마법 등불은 황량자들의 세계가 위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이곳에 들어오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자격이 없으면 돌아갈지어다.

수많은 병사가 작게 그려지고, 그 위에 큰 사람이 양팔을 벌리며 연설하듯이 단상 위에 있었다. 벽화에서 크게 그려진다는 것은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었다. 이곳에 있는 황자 내지는 왕자가 대단한 신분을 지닌 자라는 뜻이었다.

수많은 위대함을 그린 벽화를 꼼꼼히 보고 있는 산박 때문에 팀의 진행 속도는 매우 더뎠다.

“좀 빨리 가면 안 돼요?”

함정은 없었다.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정보였다. 황량자들이 관리하는 왕가의 묘실에 그런 건 필요가 없었다. 인력을 투자해서 확실하게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실제로 이 묘실은 드나들기에 편했고 1층의 끝에 간단한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어서 왕가의 자손들이 제사를 하러 오는 곳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1층은 원형 석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곳의 벽에는 황자의 삶이 기록되어 있었다.

산박은 조금 탄성을 질렀다. 그 방랑자의 석판이 이곳에 기록되어 있어서였다. 방랑자가 왕자가 된 듯했다. 외부인이 왕자가 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인데 신기했다.

방랑자는 물을 토해내며 다양한 업적을 세우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아서 왕의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공주와 결혼하며 동시에 부마(駙馬)가 되었다. 그는 땅을 하사받고 통치하며 왕을 떠받들었다.

‘제후가 되었나 보네.’

수많은 자식을 낳고 이곳에 묻히는 것으로 방랑자의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흐음……. 물에 대한 건 없네.’

아쉬운 일이었다. 몇 번이고 벽화를 찾아봤지만 특별히 ‘물’에 대한 지식은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었다.

“여길 보세요. 물이 있어요.”

원형 석실의 중앙에 물이 고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산박은 이것이 실마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손으로 물을 떠서 수질을 확인했다. 매우 맑았다.

‘들어갈 수 있겠는데.’

우물 수준으로 사람 하나 오고 갈 수 있어 보였다. 어두컴컴해서 무서웠지만 이것은 작은 별의 힘이나 별빛탄으로 밝힐 수 있었기에 산박에게는 아무 걸림돌도 되지 못했다.

“잠깐 저기에 들어갔다 오겠습니다. 뭔가 걸리네요.”

“예. 그럼 저희들은 대기하겠습니다.”

충호가 생각 없이 대답했다. 시은이 냉큼 다가와서 말했다.

“제 해골을 먼저 투입시켜서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 볼게요.”

“가라앉으면 누가 회수할 겁니까?”

산박의 말에 시은이 머리를 긁었다. 점수를 따려고 했지만 잘 안됐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황량자 언데드 정규병과의 싸움에서 해골은 1인분을 했다. 그게 아무래도 산박에게 큰 인상을 남긴 듯했다.

“아니! 여기서는 용맹하고 늠름하며 명예로운 내가 나서야겠지! 후위인 드루이드가 먼저 간다는 건 어불성설!”

대장삵이 나서자 그제야 충호와 굉려가 서로 가겠다며 떠들어 대었다. 산박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오히려 만족했다.

“대장삵은 오래 숨을 참을 수 없으니까 무리고……. 여기에 적의 순찰이 나타날 수 있으니 충호 씨는 대기를 하셔야 하고…….”

전후방 포지션을 생각하면 시은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산박의 시선이 굉려에게 머물렀다.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왠지 총대를 메는 기분이었다.

“굉려 씨, 복장을 가볍게 하고 무기는 롱 소드만 들고 저랑 같이 갑시다.”

“예.”

거부할 수는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