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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86/270)

86화

굉려는 마치 모래를 이용해서 헤엄치는 가오리 같았다. 몇 번이고 눈에 모래가 들어가고 입으로 모래를 삼켰지만 속도를 늦추는 일이 없었다. 남들은 늦추거나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 백정 노릇을 했던 굉려는 처절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수밖에 없었다. 경쟁은 서로가 서로의 살을 얼마나 많이 깎아낼 수 있는지, 그 노력에 달린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철두철미해야 하는 암살자의 삶을 산 굉려에게는 절박함이 있었다. 대장삵은 그런 굉려의 옆에서 속도를 맞췄다.

“전차를 타격해야 한다! 해골마를 반으로 줄이거나 기수를 죽여야 한다! 그게 산박이 원하는 그림이다!”

“저 혼자서 하라는 건가요!”

굉려의 외침에 삵이 코웃음을 쳤다.

“당연히 아니지! 산박은 동물 변신도, 그 외의 다른 주문도 사용하지 않았다! 날 위해서 힘을 사용하지 않고 있지!”

힘을 회복하고 나서의 전투였다. 진작에 집중성탄을 사용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특히나 엉망으로 뒤엉켰을 때는 구미가 당겼을 터다. 그런데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적들이 지닌 갑옷의 특징 때문이었다. 한 시간~세 시간에 1회. 전투로 따지면 평균 1회에 불과하지만, 충격을 크게 반감시키는 사막 은총 갑옷 때문이었다.

결국 대장삵의 물 마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1레벨 드루이드의 가치는 겨우 그 정도에 불과했다. 집중성탄은 관통력은 좋았지만 결국 충격을 주는 주문이었다. 이를 철저하게 방해하는 적의 사막 은총 갑주는 그야말로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놈은 어쩔 수 없었겠지.’

대장삵은 산박을 이해했다. 그는 언제나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의 함정, 돌부리에 아슬하게 몸을 휘청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멀리 보는 만큼 가까이에 있는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

다양한 종류의 주문을 획득하고, 이를 받쳐주는 기술을 터득하고, 최대한 다양한 장비를 소지, 가방에 여유분 혹은 제2, 제3의 콘셉트 장비를 맞출 수 있도록 한다. 정석은 간단하다. 쏟아붓는 노력과 금액만큼 확실하게 결과가 따라온다.

지금 산박이 하는 일은 그저 위태로운 곡예에 불과했다. 대장삵은 이를 알면서도 조언을 하지 않았다. 그걸 산박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놈은 똑똑하다. 배우지 않아도, 유능하다.’

그의 신경은 여러 곳에 퍼져 있어서 실수하고 있는 게 곳곳에서 보이지만 확실하게 자신의 목표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목표’가 무엇인지 대장삵은 도통 몰랐다.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건들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야 잡탕이다.’

어엿한 소나무가 되지 못하고, 풍성한 버드나무도 되지 못한다. 말 그대로 잡목이 무성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늠름한 가구도, 단단한 기둥도, 하물며 간단한 서랍조차도 되기 힘들다. 상등품으로 쓸 목재는 정해져 있다. 대장삵은 그걸 ‘대장삵 소환 주문’을 통해서 수많은 세월 수많은 존재와 만나면서 깨닫고 있었다.

‘방향성 없는 재능의 말로는 결국 잡목이다.’

“멈춰요.”

굉려의 말에 상념에 잠겨있던 대장삵이 몸을 낮췄다. 자연에 부는 모래바람의 소리는 상념에 젖기에 좋았다. 대장삵은 엉덩이를 뒤로 빼며 넘어지듯이 납작해졌다.

“작전은?”

대장삵의 말에 굉려가 콧물을 훔쳤다. 모래 같은 이물질 때문에 몸이 난리를 치고 있었다.

‘최악의 던전이다. 난 왜 이런 곳에 다시 오겠다고 마음먹었을까.’

눈앞의 전투를 두고 굉려는 살짝 후회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은 단 1초도 이어지지 않았다. 칼처럼 잘라냈다. 그의 눈에 담긴 기세가 변했다. 살기가 짐승처럼 날뛰었고, 그것은 다시 하나로 모여서 단검이 되었다.

이 과정을 터득하는 데 열두 명의 피가 묻어야 했다. 세종시의 서쪽. 공주시에 있는 천태산을 중심으로 있는 절 경쟁 때문이다. 굉려는 그저 운이 나빴다. 하지만 그 손에는 확실하게 열두 명 스님의 피가 묻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막대했다. 절이 그러했고 사원이 그러했고 교회가 그러했으며 성당이 그러했다.

법이 무너지고 나서는 승려들끼리 서로 왕좌를 차지하려고 했고, 그 암중에는 음험한 짓거리도 존재했다. 절 옆에 절을 세우는 건 기본이었다. 인기가 좋은 스님을 데려오는 것도 실력으로 통했다. 새로운 절에 가장 으뜸으로 들어갈 때에는 스님들 또한 혹할 수밖에 없었다.

‘집중하자.’

“한두 놈은 제가 단번에 쓰러뜨립니다. 그사이에 전차를 파괴할 수 있겠습니까?”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게 대장삵이다. 굉려 또한 충호에게 이를 익히 들었다. ‘애새끼’처럼 누가 위인지 아래인지 싸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렵지 않지. 하지만 파도로 쓸어 버리고 네 공격으로 해골마를 처리하는 게 더 낫다고 본다.”

“전의 그 파도만큼입니까?”

“반절. 그것만으로도 놈들은 단시간 못 움직여. 해골마 2기를 부수기에 충분한 시간일 거다.”

그 말에 굉려가 웃었다.

신호를 보내고 굉려가 단번에 일어났다. 적들은 전차를 고쳐 잡고 해골마를 묶는 와중에도 단번에 굉려를 파악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뭐라고 지껄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들을 수 있는 언어도 아니었다.

적이 대처하려고 할 때, 굉려는 옆으로 몸을 던졌다. 그건 실로 기괴한 일이었다. 기습의 묘리를 버린 것과 같았고, 상대가 진형을 더 굳건하게 만들 뿐이었다.

해골마를 측면으로 천천히 이동시키고 있던 황량자 정규군이 정면으로 나섰다. 그들은 모두 할버드를 지니고 있었다. 굉려가 옆으로 몸을 던지며 단번에 바닥을 굴러 측면을 천천히 돌고 있는 해골마 4기를 향해서 달려들더라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할버드라는 장병기를 든 데다, 해골마와 가까이 있는 건 황량자들이었다. 그 거리와 리치의 차이는 현실적인 벽이었다. 하지만 이를 끊어낼 수 있었다.

쏴아아아아!

황량한 땅에서 파도가 휘몰아쳤다. 맑은 파도에 모래가 뒤섞여서 흙탕물이 되었다. 단번에 그들을 휩쓸었다. 그사이에 내달렸던 굉려는 묶여있는 해골마를 향해서 이빨을 드러냈다.

살법 쾌살일보(快殺一步). 근육이, 나아가 다리가 멋대로 한계를 초월하여 한 걸음 뻗어 나간다. 무릎에서 통증이 스며들어 신경계를 관통해 뇌에 닿았지만 굉려는 거침없이 한 걸음을 ‘좁혔다’. 동시에 눈 주변에 힘줄이 돋아났다. 굉려 특유의 고통 감내 능력은 실로 탁월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살법을 잘 이해하고 이용할 줄 알았다.

화르르!

불꽃 롱 소드로 단번에 해골마를 베었다. 화염은 분출하지 않았다. 전차를 몰기 위해서 묶여있는 해골마를 상대로는 불꽃을 토해낼 이유가 없었다.

해골마의 척추뼈가 내려치기 한 방에 단번에 내려앉았다. 그다음에는 쓰러지는 놈을 밟아 착지하며 롱 소드를 옆으로 휘둘러 뒤에 있는 해골마의 버둥거리는 머리를 후려쳤다.

확실한 타격감을 느끼며 앞발 차기로 정직하게 모든 힘을 다하여 앞의 놈의 척추를 갈비뼈와 함께 타격하고, 휘둘렀던 롱 소드의 힘을 축으로 270도를 돌며 마지막 한 놈의 두개골을 노렸다. 아쉽게도 머리가 아닌 목과 뒤에 이어지는 흉부를 타격했다.

와르르 무너지는 뼈 속에서 굉려는 그대로 도망쳤다. 대장삵은 애초에 파도 속에 있지도 않았다. 굉려보다 먼저 튄 지 오래였다.

전차를 무력화시키자 그들의 계획은 무효로 돌아갔다. 전력을 수습 및 보강하려던 것이 굉려와 대장삵에 의해서 무너지자마자 황량자들은 할버드를 앞세우고 흉갑을 들이밀며 전진을 시작했다.

“놈들이 옵니다!”

충호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산박 또한 눈이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가위바위보 싸움에서 산박은 큰 승리를 거뒀다.

적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그 시간 내내 원거리 수단에 공격받았다. 그 덕에 대부분이 경상을 입거나 중상을 입고 있었으며 충격을 한 번 크게 감쇄시켜 주는 방어구 또한 효력을 다했다.

‘황량자 정규군이 무서운 이유는 원거리 수단이 확실히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지.’

이 점은 사실 대부분의 던전 사용자가 극복할 수 있었다. 0레벨 던전을 공략하다 보면 레인저같이 활동하기 마련이었다.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려면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고 타격 범위를 원거리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 필수성이 있었다. 고로 사실 황량자 정규군은 던전 사용자의 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산박이 화염 물약을 사용한 것은 오로지 전차, 전차 때문이었다. 기병에 대한 공포라고 말해도 상관없었다.

“갑시다!”

대답은 없었다. 소리를 크게 지르기에는 적의 숫자가 많았다.

충호는 무기로 방패를 두드리며 미리 몸에 충격을 주며 몸을 긴장시켰다. 그가 팀의 기둥이었고, 대들보였다. 가장 덩치가 크면 그만큼 해내야 했다.

산박과 시은 또한 충호의 양옆에 섰다. 굉려와 대장삵은 물러났다가 후방이나 우측을 괴롭히며 적을 엿 먹일 것이다. 중앙이 할 일은 버티는 것뿐이었다.

“그오오오오오오!!”

바짝 마른 성대를 떨며 황량자 언데드 기수가 깃발을 들어 올렸다. 태양을 형상화한 짙은 갈색 테두리에 붉은색의 태양 무늬가 크게 펄럭거렸다.

기수는 가장 좌측에 섰다. 다른 언데드 황량자들은 할버드를 양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기보다는 어깨에 걸쳤다. 모두 비슷비슷한 체격으로 이루어져 있는 정규군이었기에 뒤에 있는 사람과 결코 차이가 없었다.

두 진영이 서로의 머릿수를 파악하자마자 황량자 정규군의 열이 바뀌었다. 2열에서 1열로 변하며 길쭉해졌다. 자연스럽게 양익을 포위하고 적을 멈추게 한 다음에 서로 간의 간격을 벌려서 포위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산박은 거기까지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군사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상대의 머릿수가 더욱 많아져 보였고, 이로 인해서 중앙의 버티기가 힘들 것이라 여길 뿐이었다. 동시에 굉려가 손쉽게 적을 끝장낼 수 있을 듯했다.

“검은 안개를 쓸까요?”

시은의 말에 산박은 짧게 답했다.

“마녀의 손길로 최대한 적의 발목을 잡으세요. 굉려 씨의 운신을 편하게 해주면 우리의 승리입니다. 다만, 지금은 하지 마세요. 적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목을 움켜쥐거나 무기를 쥔 손목을 으스러뜨리는 게 더 이득인데 다리를 노린다? 너무 노골적이었다.

“충호 씨는 버티는 데에만 집중해 주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는 칠난균, 상근투(上筋鬪), 쐐기 같은 다양한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적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칠난균은 1레벨 무위 중에서 1,000순위 내에 근접하는 강력한 무위였다.

다만, 할버드 앞에서는 무력했다. 접근할 수가 없어서였다. 신체 훼손이 심한 황량자들이었지만 그들이 쥐고 운용하는 할버드가 너무 길었다. 환도의 세 배에 달했다. 창을 쓰는 강합이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막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황량자들이 단번에 어깨를 퉁 치며 할버드를 높이 들어 올렸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리치가 긴 무기를 지닌 황량자 정규군이었다. 언데드는 체중이 적기 때문에 돌격해서 부딪쳐 오지는 않았다.

캉캉! 차앙!

‘하지만 언제나 기회는 오는 법!’

충호는 방패로 할버드의 내려치기를 두 번이나 연달아 막고 찔러 오는 할버드를 환도로 올려 쳐냈다. 상단 자세에서의 공격에 대한 근육 운용술인 상근투를 운용했기 때문에 할버드는 굉장히 크게 흔들렸다. 상대가 앞으로 엎어질 정도였다.

뼈와 몇몇 신체만 좀비 형태인 것이 황량자 정규군이었다. 황량자 피난민과는 다르게 슬라임의 특성도 없었다. 그 단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황량자 정규군은 할버드의 무게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충호의 상근투가 만들어 내는 강력한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고, 그 여유를 이용해서 충호는 옆의 팀원들을 도와줬다.

특히 시은이 매우 힘들어하는 게 보였다. 여자의 몸으로 근접전을 한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장병기에게 두들겨 맞기만 하는 상황은 정신이 버텨내질 못한다.

반면 산박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볼이 살짝 베였음에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상하게 여유로워 보였다. 이건 황량자 언데드의 전술 때문이기도 했다. 포위하기 때문에 공격력보다는 저지력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 덕에 서로 간 피해가 적었다.

접전이 시작되고 나서야 굉려가 단번에 허리를 끊기 위해서 돌진하여 뒤를 급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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