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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85/270)
  • 85화

    기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 3기만으로도 수천의 민병대를 짓밟는 흉포한 괴물이다. 맞설 용기를 지니지 않으면 머릿수 따위는 아무 소용 없는 병과의 으뜸이다.

    기병과 보병은 코끼리와 코뿔소만큼이나 차이가 심했다. 아무리 발악해도 이기기란 요원하고, 피해를 많이 보고 잡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겁을 먹기 쉬웠다. 현대에조차도 접촉 사고를 냈는데 덩치 큰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면 쫄기 마련이었다. 문명인임에도 야만적이게 덩치에 겁을 먹는다. 전쟁에서는 더더욱 겁먹을 수밖에 없었다.

    “정면 승부는 안 되겠죠.”

    “언데드라고 해도 좀비면 체중이 어느 정도 유지가 되고 있을 테니까요.”

    산박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량자의 던전에는 기병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였다. 아마 이런 길이 있다는 건 아는 사람만 아는 듯했다. 정보료를 비싸게 받고 팔려고 했지만 정보 기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엉망진창이네, 진짜.’

    자본주의의 폐해였다. 지금 그대로도 잘 팔리니 돈을 쓰지 않고 갱신도 하지 않는다. 남들이 정보를 개설하면 그때 그걸 베껴서 똑같이 쓰면 그만이다. 트래픽에 환장한 인터넷 지라시 언론이나 다름없었다.

    ‘막을 수 없다는 게 황당하지. 어찌 되었건, 이런 단서가 있는데도 기병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어리석다.’

    “놈들을 공격하고 도로를 통과하는 게 낫겠습니다.”

    “하지만 평지인데, 차라리 조금 방향을 바꿔서 가는 게 어떻습니까?”

    충호가 반대 의견을 냈다. 기병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보다 높은 곳에서 라이트 랜스를 투창하는 정예 기병과 부딪친 경험이 있어서 더더욱 두려웠다.

    “함정을 파서 놈들의 기동력을 크게 무너뜨리면 괜찮지 않을까요?”

    시은은 찬성했다. 산박이 찬성했기 때문에 거침없이 ‘팀의 피해가 클 수 있는 루트’를 선택했다. 충호의 말을 들으면 팀은 안전하게 던전을 클리어할 공산이 컸다. 다행인 점은 산박이 먼저 싸우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다.

    ‘변수 하나만 있으면 크게 다칠 수 있겠는걸.’

    인간은 약하다. 그녀의 눈이 굉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예외가 없지는 않지.’

    시선의 방향이 충호에게로 변경되었다. 충호는 워낙 둔감하고 강인한 영혼을 지녀서 정면으로 기병과 부딪쳐도 트라우마 하나 없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실 충호를 괴롭히거나 피해를 입혀도 재밌거나 쾌감이 오지는 않았다.

    ‘충호는 샴페인이야.’

    산박이 소중하게 여기는 샴페인이다. 중요한 날에 쓰기 위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고급술이다. 충호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냥 죽이는 것뿐이었다. 그게 가장 산박에게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짜릿해. 내가 충호의 목에 칼을 박으면 어떻게 될까?’

    그 파멸의 상황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기병과 싸운다면 굉려가 다쳤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기분 나쁘고.’

    암살자라는 게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 은신이나 간파를 배우면 죽이기도 어렵다. 시은에게 있어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직업인 셈이었다. 더욱더 정확히 말하면 껄끄럽다.

    ‘특히 산박과 호흡이 좋아 보여.’

    산박은 굉려가 무엇을 할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고, 굉려 또한 산박에게 호감을 지닌 듯했다. 깨지기 힘든 인간관계다.

    ‘여기서 죽어 줬으면 좋겠는데.’

    이시은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녀가 음모를 꾸몄다.

    “함정을 너무 크게 하면 들킬 테니까 리스크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겠죠? 깃발을 자주 갈아 주는 만큼 함정의 낌새를 잘 간파할 것 같잖아요.”

    “모래바람을 생각해도 지겹도록 본 것이니, 부정할 수는 없겠죠.”

    산박 또한 긍정했다. 언데드들을 얕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수많은 세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터였다.

    ‘그것도 본능적으로.’

    본능의 영역은 실로 두렵다.

    “하지만 함정을 은폐하는 데 신경 쓰면 그렇게 대단한 함정은 못 쓰지 않습니까.”

    충호가 타당한 지적을 했다. 결국 밸런스의 문제였다. 파괴력이냐, 은폐력이냐. 둘 모두를 가져갈 수는 없었다.

    “물 배낭을 쓰면 어떻습니까.”

    “물 배낭?”

    굉려의 말에 충호가 상상이 안 가는 듯 반문했다. 하지만 이내 주먹을 쳤다. 반면 산박은 애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물로 함정을 만들면……!”

    강을 건너는 기병처럼 돌진력이 쑥 줄어든다. 물의 밀도 때문이다. 단시간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큰 이득이었다. 만들기도 쉽다. 땅을 파면 그만이었다.

    “잊었나요. 도로는 돌로 만든 대못 같은 걸로 박혀 있잖아요. 그걸 하나하나 어떻게 뽑아요? 그 전에 올걸요~”

    빌어먹을 돌 도로가 문제였다. 빽빽하게 박아 넣은 돌의 길이는 작게는 15cm부터 길게는 60cm로 길쭉한 못처럼 된 것들이었다. 뽑으려고 해도 돌마다의 틈새가 제법 빡빡하다. 물웅덩이를 만들기에는 어려웠다.

    “그럼 도로 밖에 설치해서 유인하는 건요?”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도로라면 몰라도 유인하면 들킬 것 같거든요. 저들은 정규군이니까요. 무리에 부보스 같은 놈이 한 마리 섞여 있습니다.”

    “아…….”

    결국 최대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게 축적된 모래를 걷어내고 그 밑에 물을 살짝 넣어 흙으로 만든 뒤에 수레를 뜯어내 말뚝을 박았다. 양쪽에 밧줄을 걸고 매듭을 지어 말뚝 외의 밧줄 길을 하나 더 만들어서 사람이 쥐었다.

    쿵쿵쿵.

    열심히 말뚝이 있는 땅을 다지고 은폐한 다음에 일행은 땅을 파서 은신했다. 고개를 내밀지는 않았다. 대신 귀를 집중해야 했다.

    ‘두 곳 중 어느 한쪽이라도 소리를 들으면 된다.’

    연결된 밧줄로 상대에게 신호를 줄 수 있었다. 그 상태에서 서로 교대하며 휴식에 들어갔다. 적이 언제 나타날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가기에는 2일 차에 돌입했음에도 얻은 부산물이 적었다.

    두두두두두두!

    돌을 때리는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자갈과 자갈이 부딪치는 소리와 닮기도 했다.

    “흐읍!”

    쉬고 있던 충호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상체를 들어 올렸다가 굉려에게 제지당했다.

    ‘크, 큰일 날 뻔했다.’

    덩치가 컸기에 인기척이 크게 날 뻔했다.

    밧줄에 조금 당기는 힘이 생겼다. 반대편에서 보내는 신호였다. 흔들거나 들어 올리지는 않았다. 혹시 몰라서였다. 그저 살짝 당기는 힘을 꾸준히 발생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대기하고 있는 이들 모두 지금이라도 당장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머리가 툭 튀어나오면 잘 보일 터였다. 모래와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모래바람에 있는 모래를 막으면서 확연하게 들킬 것이었다. 고로 저들이 속도를 늦춰도 당할 수밖에 없을 때 고개를 들어 올려야 했다.

    ‘짐수레로 몇 번 연습해서 들었지만 차원이 다르다.’

    진동음부터 큰 소음까지 짐수레로 연습하며 함정 속에서 거리를 맞췄는데 그게 불가능했다.

    갑자기 밧줄이 확 당겨졌다. 산박이 당긴 게 분명했다. 뒤를 잴 것도 없이 충호가 밧줄을 들어 올렸고, 굉려도 아주 뒤에서 힘을 보냈다. 그가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밧줄의 끝부분에서 잡아당길 뿐이었다.

    너무나도 완벽할 정도로 상대는 밧줄 함정에 걸려들었다. 산박이 지닌 무서움이었다. 판단력이 실로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으차아아아아앗!”

    충호가 호쾌하게 소리를 질렀다. 모래바람 속에서 상대 기병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지는 게 보였다. 그건 기병이 아니라 전차였다. 1기에 말 네 필이 묶여 있었고 총 2기가 나란히 달려오고 있었는데 단번에 해골마가 앞으로 머리부터 처박았다. 전차가 휘청거리며 옆에 있는 다른 전차와 부딪혀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

    “왓후!”

    그 짜릿한 타격감에 충호가 소리를 짧게 내질렀다. 그리고 무기를 들고 달려 나갔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 한 명 산박만은 눈을 찌푸렸다. 상대 언데드 말이 ‘해골마’였기 때문이었다.

    ‘1레벨 던전에서 가장 무서운 병과라고 하면 기병과 덩치 큰 괴물이다.’

    언데드 기병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택한다면 당연히 체중이 무거운 좀비마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해골마라는 게 아쉬웠다. 무게가 가벼운 만큼 요란하게 전차가 엎어진 것에 비해서 실제로 큰 충격은 아니었다. 전차에 타고 있던 11기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정규군은 실제로 서둘러 일어나고 있었다.

    “불 나갑니다! 불!”

    산박은 슬링을 통해서 힘껏 멀리 화염 물약을 던졌다. 이시은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며 발사 준비를 한 석궁을 올렸다. 반 호흡 후에 단번에 석궁을 발사했다. 날아간 볼트가 정확하게 화염 물약과 만났고, 물약이 깨지면서 화염이 크게 떨어져 내렸다.

    “좋았어!”

    산박의 외침에도 시은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가 돌아봤으면 웃었겠지만 그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시은은 ‘남을 돕는 것’으로 자연적인 미소가 일어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또 언데드는 통증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타격하면서 쾌감이 오는 것도 아니었다.

    화르르르!

    충격을 감쇄시켜 주는 사막 은총 갑옷을 입고 있어도 화염 공격에는 무력했다. 거기에 뒤엉켜 있어서 11기 중 8기가 화염에 당했다. 물론 그만큼 퍼졌기에 큰 피해를 입은 언데드는 적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피해를 입혔다.’

    그걸로 산박은 만족하고 있었다. 언데드의 뼈가 새까맣게 타고 관절 부분의 연골이 녹아서 굳었다. 그것만으로도 팔 하나, 다리 하나 불구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투구를 벗으며 황량자 지휘관이 몸을 일으켰다.

    “에이아스(평화는)! 기수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두 명을 데려가서 전차를 하나만이라도 일으켜 세워라! 나머지는 전방으로 향하라!”

    “아이아스(피와 땀으로)!”

    쿵!

    병사들이 할버드를 찍었다. 기수를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할버드로 무장한 것이 황량자 정규군이었다. 팔뚝이 굳거나 허벅다리가 타서 자세가 안 좋을 수는 있었지만 그 기백에는 한 점의 오점도 없었다.

    그들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었기에 산박과 일행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언데드들을 지휘하는 존재가 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놈이지?’

    산박은 놈들을 훑었다. 모두 비슷한 장비를 입고 있었다. 특출나게 눈에 띄는 모습은 없었다.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모습도 없었으며 그저 외침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정도는 이런 모래바람 속에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사막에서의 싸움에 정통한 놈들 같았다. 유일하게 파고들 만한 점이 있다면 화염 물약으로 대부분이 경상을 입은 상태라는 것뿐이었다.

    ‘아직은 전면전은 안 돼.’

    충호는 산박에게 다가왔고 굉려는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포복해서 우회 기동을 하고 있었다. 아마 목표는 황량자들이 일으켜 세우는 전차의 완전무결한 무력화일 것이었다.

    황량자들은 전차 둘 중 상태가 좋은 하나를 서둘러 세우고 해골마 중 달릴 수 있는 놈 네 마리를 다시 엮어야 했기에 시간이 지체되는 듯했다.

    ‘그 탓에 저쪽은 발이 묶였다.’

    “충호 씨! 돌진하지 마세요! 삵아! 내 말을 굉려 씨한테 전해줘!”

    산박이 빠르게 입을 속닥거렸고, 대장삵이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체격이 작았기에 이런 모래바람 속에서는 알아서 몸이 가려졌다.

    산박이 슬링을 붕붕 휘둘러 대었다. 이쪽은 원거리 수단이 많았다. 거기에 바람이 그들의 등을 때리며 적을 향해 불어대고 있었다. 투사체에 바람의 힘이 깃든다고 해도 무방했다.

    쐐애애애액! 텅!

    볼트에서 실로 무서운 소리가 났다. 바람을 타고 쏘아지는 석궁은 더더욱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목 아래의 갑옷에 맞은 볼트는 소리와는 다르게 맥없이 떨어졌다. 잊힌 사막신의 힘이 깃든 갑주는 간헐적으로 충격량을 크게 줄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산박이 던지는 슬링이었다. 바람과 닿는 면적부터 슬링탄이 더 컸다.

    텅!

    투구가 크게 흔들렸다. 살아생전에 착용할 때는 철저하게 치수까지 확인해서 맞춰진 것이었다. 모든 것이 수제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당연했다. 하지만 그건 살아있을 때나 딱 맞을 뿐, 뼈만 남은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방어구가 아니었다. 갑주의 힘이 산박의 슬링탄이 지닌 충격량을 반감시켰지만 크게 흔들리는 투구가 그 뼈를 때렸다. 살과 피부도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량자 정규군 언데드는 주춤거렸지만 뒷걸음질 쳤다가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2차, 3차. 원거리 공격이 계속되었다. 황량자들은 꽁꽁 몸을 숨겼다. 반대편에서 직접 공격할 기미가 없자 아예 진형을 뭉개고 투사체에 대한 피해를 최대한 받지 않는 진형을 꾸렸다. 무너진 전차 뒤에 숨고, 바닥에 땅을 파서 엄폐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막아줬다. 모래였기에 손쉽게 엄폐물을 만들 수 있었다.

    운수가 좋으면 모래 더미에 슬링탄이나 볼트가 박혔다. 볼트는 모래 더미에 제법 깊이 들어갔지만 면적이 화살보다 넓은 슬링탄은 반도 파묻히지 못했다. 오히려 데굴데굴 굴러가기도 했다.

    산박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 어떤 대처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시은과 함께 볼트와 슬링탄을 소모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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