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고문서의 선별에서 사실 수학 부분은 버려도 상관이 없었다. 대부분의 정보 단체에서도 이를 권장하는 바였다. 하지만 시은은 굳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황량자 던전의 특징 때문이에요. 어차피 한 방향 진행으로 묘실에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런 공략을 하겠다고 방향을 잡았으니까, 전리품 배낭도 넉넉한데 굳이 고문서를 선별할 필요는 없죠.”
“그렇죠.”
산박이 시은의 판단을 수용했다.
‘오히려 가방이 남는 걸 걱정해야 할 정도다.’
시야 거리가 나쁘기에 적과 만나는 건 복불복이다. 결국 수익률이 나오지 않으면 던전 실패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팀장의 영향력에 금이 가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레벨 풀 장비를 갖추도록 했다. 그래 놓고 수익률이 나쁘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특히나 산박이 손에 쥔 팀원들은 모두 기반이 약하다. 가문에서 쫓겨나거나, 씨족이라 해도 흩어져서 사는 것에 불과했다. 검버섯처럼 퍼지는 나약한 가문인 셈이다. 간단하게 뜯기는 버섯과 같다. 그걸 본가라고 하는 것도 우스웠다.
그건 산박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본적을 알고 있어도 그 어떤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자식을 고아원에 버릴 정도로 몰락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산박의 팀은 돈에 민감했다.
모든 고문서를 조심스럽게 차곡차곡 배낭에 쌓았다. 다행스러운 일은 고문서는 양피지로 되어 있었기에 종이보다 내구력이 튼튼하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종이었다면 이미 바스러졌을 터였다.
수레에서는 예의 석판도 볼 수 있었다.
‘황량자들의 문화라고 해야 할까.’
석판을 집에 걸고 부흥과 안녕을 기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석판에는 찬양을 받으며 손에서 물을 쏟아내는 방랑자가 보였다. 땅은 물기를 머금었고 씨앗이 돋아났으며 사람들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밤하늘 아래에서 캠프파이어를 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구석에서 지켜보던 방랑자는 다시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 발목을 손으로 잡힌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야반도주하다가 들켰나 보네.’
걱정은 되지 않았다. 정석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재밌었고, 의외성을 부여해 흥미를 느끼게 하였다.
“고문서랑 호박 목걸이인가. 나쁘지 않네요.”
“적의 수준에 비해서는 로또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죠.”
대장삵이 없었다면 제법 접전이 벌어지고 전투 시간이 길어졌을 터였다. 아마 몇 개의 소비 아이템을 썼을지도 몰랐다. 숫자는 그만큼 사람을 두렵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것은 팀에게 큰 자신감을 줬다. 산박은 자신의 힘을 가늠했다. 집중성탄을 한 번 쓴 것이나 다름없는 소모를 겪었다. 불완전한 집중성탄을 사용할 정도밖에 힘이 남지 않았다. 1레벨 주문 네 번을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다.
“삵아, 넌 힘이 남았어, 아니면 다 썼어?”
“안 썼다. 전에 말했을 터다.”
“들은 기억이 없는데…….”
대장삵이 산박의 어깨에 올라탔다. 귓속말하기 위함이었다. 물의 나무는 숨겨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난 물의 나무로부터 힘을 받고 있다. 고로 힘의 그릇을 얻을 수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을수록 물의 나무도 편하고 좋다는 말을 내가 안 했을 리가 없는데?”
“그렇게 중요한 걸 내가 잊을 리도 없는데?”
잠깐의 침묵 사이에 서로 기 싸움이 오갔다. 여기서는 대장삵이 먼저 물러났다. 산박의 높은 지혜를 알고 있어서였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인 것이지.”
‘저놈이…….’
무승부로 가고 싶어 하는 대장삵의 옹졸한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산박은 이를 윤허해 줬다.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이 명예를 생각하는 전사는 어느 정도 자존심을 추켜세워 주는 쪽이 제어하기에 편했다. 그게 아니라면 칼을 뽑아 들고 확실하게 흑백을 가려야 했다. 그렇게 해야지만 대장삵을 짓누를 수 있었다.
산박이 대장삵에게 승리한 건 대장삵이 무리하게 공적을 탐하다가 역소환되었을 때였다. 그 단 한 번의 경험으로 산박은 대장삵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 삵의 조련사나 다름없었다.
남은 힘을 가늠한 산박은 욕심이 생겼지만 꾹 참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던전은 항상 위험했고 조심해야 했다.
모래바람이 부는 곳에서의 휴식은 힘든 일이어서 황량자 피난민이 지니고 있던 수레를 이용하기로 했다. 한쪽에 벽을 쌓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나머지는 고문서를 구겨서 틈을 메꾸었다. 훌륭한 바람막이가 완성되었다.
“팀장님.”
“굉려 씨.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굉려가 산박의 옆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사적으로 크게 잘 만나지 않기 때문에 조금 딱딱한 대답이 나왔다.
“오늘 휴식하실 거면 배낭에다가 물을 채워 넣는 게 어떻습니까. 적에게 제법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수레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끌어야 하지만 수레 자체에 무게가 있지 않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산박은 손을 턱에 가져갔다.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굉려 또한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일단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건 좋은 리더의 특징이었다. 굉려를 무식하게 비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평균은 갔다.
“나쁘지 않네요. 하지만 효율이 없습니다. 배낭에 많은 물을 담아도 그걸 던질 수는 없으니까요. 사용 방법이 조금 까다롭다고 해야겠네요.”
부피에 비해서 물은 무식하게 무겁다. 굉려의 생각은 좋았지만 디테일하지 못했다. 대충 스케치를 하고 그럴듯해 보이니까 산박에게 달려와서 말한 것이고, 그림이 완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산박이 깊게 고민하고 계산을 대신 해줬다.
“아, 그렇겠네요.”
“물이 든 배낭을 쓰면 한 사람이 강제적으로 차출되어야 하니까요.”
그건 굉려가 될 공산이 컸는데, 암살자로서의 공격력을 날카롭게 간 굉려가 물을 쏟아붓는 건 모양새도 좋지 않았고 손해가 컸다. 전투에서 모든 행위는 상대적으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절대적인 건 없었다. 좋은 것도 다른 것과 비교하면 나쁜 것이 되기 일쑤였다.
“시은 씨가 물을 쏟아부으면 석궁이나 주문을 쓸 시간이 없고, 노출도 되니까 적의 진형이 더 퍼질 수 있습니다.”
충호와 산박에게 집중된 적들이 툭 튀어나온 시은, 그것도 뭔가 출렁이는 배낭을 짊어진 시은을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고, 적들의 진형은 자연스럽게 넓어진다. 그럼 포위당하는 시간도 짧아진다.
“특히 황량자 피난민은 엉망진창이니까요. 아까는 한곳으로 돌진했지만, 언제 이상한 행동을 할지 모르죠.”
프로그래밍이 되지 않았기에 퉁퉁 튈 수 있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일행은 모닥불을 피우고 달군 돌을 땅에 집어넣고 흙으로 덮었다. 뜨끈한 온기가 올라왔다. 야지에서 잠을 청할 때 귀찮더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달구어진 돌은 흙 덕분에 아주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행이라면 이 황량한 땅에는 돌이 아주 많았다.
“아니! 돌을 그렇게 쌓아 뒀는데 왜 이것밖에 안 남았어요?”
“늦게 온 사람이 죄지.”
최후의 양심으로 다섯 개를 남긴 것만 해도 시은의 미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은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가 절로 느껴졌다.
“이렇게 된 이상 팀장님 옆에서 온기 좀 받아야겠어요.”
“미친 소리 하지 마세요.”
“등만 붙이고 잘게요. 쌀쌀해서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해요?”
“어떤 과학자가 그러는데 여자는 추위에 강하대요. 다 내숭이라더라고요.”
“그건 과학자가 멍청한 사람이에요. 추울 땐 똑같이 춥다고요.”
티격태격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충호와 굉려는 참전할 생각도 안 했다. 대신 근질거리는 입으로 한마디를 툭 하고 던졌다.
“아! 던전에서는 썸 좀 타지 맙시다. 이거 옆구리 서늘한 사람은 던전 공략도 못 합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산박의 외침에 시은이 짓궂게 웃었다. 그걸로 시은은 스트레스가 조금 날아가는 걸 느꼈다. 물론 산박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막아볼 테면 막아 보라지.’
의외로 체면을 많이 생각하는 게 산박이었다. 이런 일로 끝까지 달릴 사람이 아니었다. 치킨 레이스에 쥐약인 게 태산박이라는 남자였다. 못 먹을 것 같으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른 이득을 찾는다.
또 충호가 썸을 탄다고 말했기에 더더욱 시은과 말을 섞지 않을 터였다. 더 큰 오해로 번질 수 있어서였다. 차라리 ‘달군 돌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서 이 상황을 조용히 넘기는 게 그나마 편했다. 시은 또한 산박의 이모저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재밌어. 즐거워. 새로운 재미야.’
그는 그녀가 깊고 신중하게 대하기 충분한 남자였고, 그 가치 덕분에 거기서 오는 모든 과정이 짜릿하고 새로웠다. ‘전’과는 달랐다. 전에 하던 것은 그저 한순간의 쾌락에 불과했다. 사막에서 물 한 모금 마시는 수준이었지만, 이건 오아시스에 몸을 풍덩 던지는 것과 같았다.
‘오래도록 맛보고 싶을 지경이야.’
시은은 괜히 등으로 산박을 밀었다. 산박은 꿈쩍도 안 했다.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게 보였다. 조금 더 놀려줄까 했지만 시은은 선을 지켰다.
수면을 취하고 일행은 일어나서 몸을 풀었다. 발목에 조금 열이 차오를 때까지 움직여 줘야 했다. 인간의 육신은 형편없었다. 달구어지지 않으면 그저 크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어긋나고, 상처와 염증이 생기기 쉽고, 통증을 일으킨다.
모래폭풍의 사거리 때문에 척후는 운용하지 않았다. 아군과 적의 시야가 모두 짧은 상황이라서 뭘 해도 훅 갈 수 있었다.
“정지!”
충호가 고함을 지르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앞에 그림자가 두 개 보여서였다. 일행은 몸을 낮추고 짐수레를 멈췄다. 적의 움직임은 없었기에 모두 산박의 명령을 기다렸다.
‘선두라면 잡아먹는 게 이득이겠지. 하지만 그걸 간파하고 있다면?’
“삵아, 굉려 씨를 따라가서 우회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정면으로 가보죠.”
어차피 지형이 없었다. 믿을 건 모래바람뿐이었다. 굉려는 작정하고 포복했다. 황량자 정규군일 가능성이 높아서였다.
“이건…….”
“깃발이네요.”
“깔끔한 걸 보니 자주 고치는 듯합니다.”
충호가 거칠게 펄럭이는 깃발을 잡아서 가장 끝부분을 확인했다. 내구력이 가장 빨리 닳는 부분이었지만 깔끔했다.
“그건 좀 이상한데요. 이 던전은 기본적으로 언데드라서…….”
산박이 의문을 표했다. 1레벨 던전이었기에 대화를 할 수 있는 언데드는 전무했고, 그저 시체의 수준에 따라서 강함과 성능, 특징이 달라질 뿐이었다. 생전의 무위를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수준은 1레벨에 한정되어 있다.
“그거라면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시은 씨.”
네크로맨서가 된 그녀였다. 이야기를 들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깃발을 계속 수리하는 굴레에 빠진 것으로 본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깃발도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보관된다면 새것처럼 유지될 수 있죠. 거기에 색은 전체적으로 변질이 되어 있어요.”
“완전히 새로 만든 건 아니라는 말씀이네요.”
그럴듯했다. 새것처럼 보이는 깃발은 태양을 형상화한 깃발이었다. 산박은 몸을 굽혀서 바닥을 훑었다. 오랜 시간 모래에 쓸렸지만, 일정한 방향을 지녔기에 옛것이 쉽게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네요.”
직사각형의 돌들이 매우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충호는 그걸 보며 웃었다.
“돌을 박아서 도로를 만들 정도면 정말 힘들었겠네요.”
그 목소리에는 현대인으로서의 우월감이 있었다. 하지만 시은이 바닥을 손으로 쓸며 의문을 표했다.
“높이가 다른데 왜 돌은 계속 있을까요.”
타이어가 닳았을 때 교체를 해준다. 그런다면 다시 도로의 높이가 비슷해진다. 하지만 돌 도로의 높이는 들쑥날쑥했다.
‘이러면 더 공사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평탄화 작업도 안 한 곳 같았다. 그런 문화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흘리려고 했지만 굉려가 주워 온 길쭉한 돌을 보고 나서야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빨리 가시는가 싶었는데, 깃발이었군요.”
“예. 그건 뭡니까?”
“뭉툭하게 혼자 튀어나와 있길래 가져와 봤습니다. 정(釘)처럼 생긴 돌은 특이하지 않습니까?”
“예. 이렇게 자르고 길쭉하게 만든 걸 땅에 때려 박아서 도로를 만든 것 같네요.”
엄청난 개노가다였다. 절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한번 하고 나면 닳고 닳아도 돌은 유지되기 때문에 유지 보수에 쉬워 보였다. 중세에서나 쓸 법한 도로 건설법이었다.
‘쓸데없는 지식을 얻었다.’
하지만 완전히 쓸데없는 건 아니었다. 모래를 한 곳에서 ‘편자’를 찾아낼 수 있어서였다.
“기병!”
산박이 탄식하듯이 외쳤다.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았고 실제로 가장 강렬한 인식을 심어준 것이 기병이었다. 충호와 시은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단 한 기의 기병에 의해서 강합은 아직도 던전 공략을 못 하고 정신과를 들락날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