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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270)

83화

그는 대장삵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그의 뇌리에는 물을 쏟아붓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단단히 각인되어 있었다.

즉흥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석판이 준 힌트였고 황량자 피난민에 대한 정보를 이미 습득하고 있었으며 그 모습을 실제로 보고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황량자는 모래 반, 뼈 반의 반언데드 반슬라임의 괴물이었다.

“좋은 판단이다! 집중성탄보다는 훨씬 효과적이지!”

모래를 쓸어 버리면 몸의 구성 물질이 크게 사라지는 법이었다. 공격 수단 혹은 수비 수단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모래가 물과 함께 뒤섞여서 쓸려 나가면 남은 건 그저 하급 언데드일 뿐이었다. 슬라임으로서의 특성이 사라지거나 반감되는 셈이다.

대장삵이 앞발을 크게 허공으로 뻗으며 두 발로 섰다. 서버린 상태에서 눈을 부릅뜨며 무식하게 돌진하고 있는 황량자들을 쳐다봤다.

“그어어어어!”

그들은 성대가 없음에도 소리를 질렀다. 그 외침 속에는 모든 것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칼날처럼 벼려진 분노가 아닌, 나약한 자들이 가지는 세상에 대한 덧없는 분노였다.

‘약해 보이는 괴성이다.’

전투 경험이 적은 자는 두려워하고 위축되겠지만 대장삵에게는 헛된 울음소리일 뿐이다. 집 잃은 이재민의 울부짖음에 불과했다. 약자의 고통 소리다. 대상도, 이유도,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증오의 외침이다. 그렇기에 그 외침은 소리만 컸지 속은 텅텅 비어 있었다. 싸울 생각이 없는 개가 우렁차게 짖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휘오오오오오!

산박의 명령을 이행하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했다. 적어도 저들 절반은 끌고 가야 했다. 제약된 1레벨 던전에서 그런 물의 주문은 많이 없었다. 회오리치며 물의 주문을 몇 번이고 쌓아 올린 뒤에 한 번에 둑을 무너뜨리듯이 쏟아 보내는 편법을 써야 했다.

‘편법은 언제나 힘들고 어렵지.’

정석이 가장 편한 길이었다. 그건 끝에 도달하면 알게 되는 것이었다. 모두가 지름길을 원하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일 뿐이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정석으로 향하는 길은 다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잣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회오리 기류를 통해서 가두어진 물살이 쏟아져 나와서 돌진하는 놈들을 덮쳤다. 그들은 물이 둑처럼 쌓아 올려지며 회오리치는데도 경각심을 느끼고 피하지 않았다. 이성이 없어 보였다.

“구워어어억!”

입에서 모래와 함께 뒤섞이는 파도가 거품을 토해냈다. 모래가 파도와 함께 쓸려 나갔는데, 아쉬운 건 물의 밀도였다. 밀도가 높은 액체인 물은 뼈도 함께 휩쓸어 버렸다. 해골만 남은 게 아니라, 그저 함께 쓸려 나갔다.

“이런!”

충호가 단번에 그들을 따라가고 싶어서 안절부절, 정신을 못 차렸다. 본능적으로 이 전투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단번에 깨닫고 있었다. 안달이 난 그를 산박이 말렸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은 놈부터!”

“예!”

거대한 덩치가 휩쓸리는 장면 속에서도 산박은 침착했다. 짜잘이들을 치도록 미리 팀의 방향성을 잡았다.

파도가 휩쓸려 나가고 잔여물도 사라지자 그 뒤에 있던 황량자가 덤볐다. 그들은 모래 반, 진흙 반의 토사물을 몸에서 토해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쪽에서 주변 흙을 빨아 당기고 있는 듯했다.

산박은 환도를 뽑았다. 호랑이로는 변하지 않았다. 전술대로 중앙에 힘을 보탤 생각이었다.

“굉려 씨는 뒤!”

“예!”

산박의 말에 굉려가 몸을 숙인 채 파도에 휩쓸려 나간 놈들의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탕탕탕탕탕!!

그사이 충호가 무기로 방패를 후려쳤다. 공기를 떨게 하며 소리가 퍼져 나갔고, 그들이 충호에게로 덤벼들었다. 숫자는 여덟 마리 정도로 매우 많았다. 하지만 옆으로 퍼질 생각이 없다는 게 실로 큰 행운이었다.

시은은 석궁을 발사하고 마녀의 손길을 쏠 준비를 했다. 언데드는 충호의 옆에 세웠다. 산박 또한 충호의 옆에 있었다.

석궁에 두개골을 맞은 황량자는 그대로 엎어지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다른 언데드와는 다르게 두개골이 약점인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네크로맨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무지몽매한 생각이었다. 시은은 답을 알았지만 당장 설명하지는 않았다. 이런 전투 상황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만, 간단하게 외쳤다.

“몸이 모래가 아닌 진흙이 조금이라도 섞인 놈은 뼈를 조금만 부숴도 무력화돼요! 참고하세요!”

“알았어요!”

산박이 냉큼 대답하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혹시 잘 못 들었을 사람이 있을 수 있어서였다. 특히 방패를 무기로 두드리고 있는 충호는 잘 못 들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놈들이 접근하자 시은도 환도를 뽑고 마녀의 손길 주문을 사용했다. 마녀의 손은 그대로 가장 선두에 있는 황량자 피난민의 머리에 들러붙었다.

푸쏴아아!

모래와 함께 엎어지며 그들의 돌진력과 진형이 흐트러졌다.

쿵!

그런 악재 속에서 농기구와 충호의 방패가 부딪쳤다.

‘가볍다.’

충호는 조금 당겨둔 방패를 앞을 쭉 내밀었다. 상대의 근력은 형편없었고, 무엇보다 힘의 방향도 엉망진창이었다. 확실한 내려치기도 아니고 옆을 후려치거나 방패병이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방패를 찌르지도 않았다.

어중간한 내려치기였다. 방패는 땅으로 푹 꺼지지도 않았다. 충호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체중을 실었다기보다는 체중은 방패에 정면으로 부딪치고 농기구는 체중의 이점을 취하지 못한 채 내려치기를 한 식이었다. 두 방향 두 힘인 셈. 한 방향 두 힘을 써도 모자란 판국에 힘의 집중조차 할 수 없는 민병 수준의 무력이었다.

퍽!

앞뒤로 오가는 충호의 방패 공격에 단번에 황량자의 손목뼈가 부러지며 농기구가 땅에 떨어졌다. 마무리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충호는 오히려 슬금슬금 뒤로 빠지며 방패를 순간적으로 당겼다 밀었다를 반복했다.

적의 숫자가 많았기에 저들에게 공간을 계속 내어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세게 그 파도에 저항하려 한다면 오히려 잡아먹힐 터였다. 어찌 되었든 상대의 머릿수가 많았고, 특히나 상대가 한곳에 똘똘 뭉쳐서 부딪쳐 왔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은 필사의 돌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의도에 놀아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호는 상대적으로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전쟁, 전투에서는 적이 노리는 것을 피를 내서라도 들어주지 않는 게 오히려 이득인 경우가 많았다. 하물며 피해 없이 적의 의도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 방법을 쓰지 않는다면 충호는 ‘훌륭한 전사’라고 할 수 없었다. 산박의 관심을 받지도 않았을 터다.

캉!

철과 철이 부딪쳤다. 산박은 농기구에 환도를 맞댄 채 단단히 묶어둔 채로 수비에 전념할 뿐이었다. 산박의 손과 어깨가 마치 춤추듯이 크게 움직였다. 상대 또한 발악을 했다. 농기구와 환도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카각!

옆에서 보면 실로 격렬한 힘 싸움으로 보였다. 그 속에서 산박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능숙한 검술처럼 보였지만, 황량자 피난민은 싸울 줄을 모르는 상대였다. 그런 적을 상대로는 산박의 검술도 절륜하게 보이고 압도적으로 비쳤다. 그저 힘을 앞으로 주기만 하는 황량자 피난민은 너무 손쉬운 상대일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뒤의 놈이 밀고 들어왔으나, 충호와 함께 전선을 뒤로 물리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되레 쓰러지는 놈의 골통을 환도로 퍽 하고 부쉈다.

퍽!

굉려는 단숨에 농기구를 대각선으로 흘렸다. 상대가 내려치는 힘을 이용했다. 환도의 안쪽 날에 피난민의 팔목 뼈는 버티지 못하고 잘려 나갔다. 충호나 산박처럼 뼈가 부서지는 모습은 일절 없었다. 깔끔하게 절단되었다. 장비의 힘으로 누구보다 공격력을 높인 굉려였다. 그의 후방 치기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굉려가 뒤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음에도 전방이 워낙 두껍고 소란스러웠다. 지휘받지 않는 언데드인 만큼 생기의 총량이 큰 쪽에 이끌리기 마련이었다. 두 마리가 들러붙으면 모래바람 속에 몸을 숨겼다가 다시 나타나면 그만이었다.

충호는 뒤로 물러나며 강하게 상대를 밀어서 넘어뜨리기도 했다. 시은은 홀로 툭 튀어나온 놈을 상대했는데, 그 속력이 매우 빨라서 위협적으로 여겨졌다. 체격도 다른 황량자 피난민보다 작았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크기였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이 황량자의 패배였다.

산박은 ‘균형자’라는 직업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5 미만의 부족한 능력치가 보정을 받아 5에 고정되기 때문에 접근전에도 평균적인 수준을 보유하고 있었다. 시은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1인분을 했고, 충호는 곰 같은 덩치로 상대를 방패로 밀어서 넘어뜨리고 뼈를 부수는 등의 일을 했다.

대부분의 황량자 피난민을 타격하여 죽인 건 굉려였다. 굉려가 킬을 쓸어 담았다고 해서 그가 강하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전술’대로의 과정과 결과였고 변수는 없었다.

“그아아아아!”

파도에 휩쓸린 황량자 피난민은 하급 언데드 해골과 비슷한 수준이라 쉽게 처리했고, 무엇보다 모래가 진창이 되어 서로 뒤섞여 뭉쳐 있어서 ‘죽였다’라기보다는 ‘철거’했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휴식하고 부산물을 얻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 땀을 식혔다. 충호는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가장 선두에서 전투의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해서 스트레스도 극심했고 정신력도 많이 소모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전사’ 직업을 지닌 게 충호 혼자뿐이었다.

“괜찮으세요?”

“너무 긴장해서…….”

산박이 약간의 탈진 증세를 보이는 충호에게 물을 건네주며 물었다. 충호는 웃으며 물을 받아 들었다. 물은 레몬이 담겨 있어서 새콤했다.

휴식하며 이번 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굉려 씨의 공격력이 엄청나더군요. 암살자답지 않았습니다.”

“기습에만 쓸 만하면 던전에서 1인분을 하기가 힘드니까요.”

굉려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충호가 그의 공격력을 인정해 줬기 때문이었다. 굉려 또한 충호의 듬직함을 칭찬했다. 그다음에는 산박의 무력을 언급했다.

“생각보다 근접 능력치가 좋으신 것 같습니다. 보통 후방 직업들은 심각하면 근접 능력치가 1인 사람도 있는데…….”

“평균이 5 아닙니까?”

“그 평균은 죄다 전사들이 올리는 거죠.”

충호가 산박의 물음에 답하며 끼어들었다. 그도 산박의 근접전 능력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그냥 남들만큼 힘이 있을 뿐입니다.”

특별해~ 특별해~ 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산박은 겸손을 떨었다. 동시에 주제를 돌리기도 했다.

“전술은 어떻습니까? 감상을 듣고 싶은데…….”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수월하게 대처를 할 수 있는 건 정말 큰 행운인 것 같습니다.”

적에 대해서 알고 있기에 가장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물로 절반을 쓸어 냈으니 사실 전술이고 뭐고 할 필요도 없지 않아요?”

시은은 시큰둥했다. 전술을 제대로 맛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나머지와 싸워 봤으니 뭐라도 느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네요. 굳이 말하자면 충호 씨가 너무 든든하다는 것 정도?”

산박이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전술이 좋은 게 아니라 충호를 앞세우니 무슨 전술이든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전술에 대한 피드백을 받지 못한 채로 산박은 부산물부터 확인했다. 다른 이들도 이를 도왔다. 누더기를 입은 황량자 피난민이지만 꼼꼼히 그 주머니나 덜렁거리는 혁대에 걸린 가죽 주머니를 모두 확인해 봐야 했다.

주머니에는 바짝 마른 종자들이 담겨 있기도 했고 화폐가 들어가 있기도 했다. 화폐는 다양한 금속이나 귀중품이었다.

바람이 이끄는 방향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한 번 한 번의 싸움에서 최대한 많은 전리품을 배낭에 넣어야 했다. 잘못하면 수익률이 낮아지고 팀원의 만족도가 내려가며 동시에 다른 팀에 속하게 되는 팀원이 생길 수 있었다.

‘지금은 좀 위태롭지.’

산박이 팀을 두 개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팀원 또한 거리낌 없이 다른 팀으로 가버릴 수 있었다. 훌륭한 변명거리를 팀장인 산박이 먼저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너도 딴 팀 꾸렸으니 나 또한 다른 팀으로 갈 자격이 있다는 소리였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한국인이었기에 팀을 나갈 때도 이유, 변명거리가 매우 중요했다.

산박은 가죽 주머니에서 가방에 넣을 만한 걸 여럿 얻었다.

‘호박석 목걸이.’

전투력 낮은 황량자 피난민이 가지고 있기에는 귀중한 물품이다. 내부에서는 은은히 주홍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인다. 실제로도 비쌌다.

‘이런 게 피난민 황량자에게 많은 게 아이러니하지.’

단순 숫자가 많아서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스무 마리의 피난민에게서 여덟 개의 호박석 목걸이가 딸려 나왔다.

그들이 끌던 수레에는 바짝 마른 아기 유골이 곱게 싸여 있거나 생필품이 들어가 있었다. 그중에는 제법 귀중하게 양피지나 가죽에 싸여있는 고문서도 존재했다.

“흐음…….”

충호와 굉려는 그걸 들춰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척 봐도 난해한 기하학적 문자부터 수학과 관련된 것들이 가득했다. 고문서들은 자연스럽게 산박과 시은에게로 옮겨졌다. 직업마다 획득하는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수학 관련은 버려도 될까 싶지만, 일단은 다 들고 가죠.”

고문서는 중요 수출 품목 중 하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던전학이 거지 취급을 받았다. ‘판타지 쇼크’로 서울이 박살 났기 때문이었다. 수도 중심적 발달의 폐해였다. 하지만 해외에는 권위자가 존재했다. 쓸데없는(당장 돈이 안 되는) 일에도 돈을 투입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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