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 *
산박은 그날 밤에 1팀 메신저에 글을 올렸다. 그는 이미 굉려가 믿음직하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장비를 세팅했다. 그것만으로도 능히 전력이 될 수 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훈련하기는 해야겠지만 그것보다 먼저 판단을 했고, 결정할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십니까? 문제가 생겼다고 연락 하나 없는 걸 보니 모두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새로운 팀원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직업은 암살자고, 근접전 특화 장비로 풀 세트를 맞추고 있습니다. 훈련 기간을 마치고 1레벨 던전에 향하도록 하겠습니다. 멤버는 충호 씨, 시은 씨, 굉려 씨 그리고 저입니다.]
[탕만 씨나 강합 씨는 장비 맞추는 대로 연락해 주세요. 다른 분들은 다 맞췄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산박은 곧바로 잠을 청했다.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산박이 굉려를 쉽게 받아주자 장 노인이 야식과 함께 적당히 반주를 하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한두 잔에 불과했기에 취기가 올라오지는 않았다.
‘빨리 자자.’
대장삵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지 않는 놈이었다. 최근 TV에서 새벽녘 인간인지 뭔지 괴상한 헛소리를 하는 강의를 들어서 더더욱 이상해져 버렸다.
* * *
산박이 잠을 청할 무렵에 굉려와 장 노인은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떻더냐?”
장 노인은 굉려에게 산박에 관해서 물었다.
“전에도 봤는데 무슨 감흥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악수까지 했는데, 무슨 감각이라도 느껴야 하는 것 아니냐.”
사람을 잡아본 굉려는 사람 보는 눈을 남들보다 크게 가지고 있었다.
“…….”
굉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차갑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차갑다?”
“예. 말 속에서 차가움을 느꼈습니다. 마치 미리 정해둔 설계도를 따라서 말하는 것 같은… 그런 딱딱함도 느꼈습니다.”
장 노인이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더 매정한 놈이라고 봐야겠구나.”
“예. 아마 ‘때’에 따라서 그 행동거지가 매우 바뀔 수 있습니다.”
“바뀐다면 냉혈한처럼 보이겠어. 그가 언행을 바꿀 때는 그런 경우뿐이니까.”
산박이 본색을 드러내는 경우라고 해봤자 손익을 가늠하고 결론을 냈을 때뿐이었다.
“다른 건 더 없더냐?”
“…사람을 몇 명 죽인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수라장을 좀 겪은 듯합니다.”
“크흠!”
굉려가 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 말에 장 노인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쉽게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놈이 사람 좀 죽여본 놈 같았다고?”
“예. 보면 딱 압니다.”
“전에 봤을 때는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 말에 굉려가 손으로 코를 비볐다.
“지금 보니까, 죽인 것 같은데요. 악수했을 때 척추가 오싹했었습니다. 저랑 동급, 아니, 저의 위일지도 모릅니다.”
“네가 뭐 대단하다고. 허튼소리 하지 마라.”
“어르신.”
“그럼… 너 확신할 수 있겠어?”
“예?”
“확신할 수 있느냐고. 그 판단 말이다.”
“그냥 직감이라서…….”
“쯧쯧. 어디 가서 말하지나 마라.”
그 말에 굉려가 고개를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박조조한테서 들었다. 산박은 팀 하나로 끝낼 생각이 없다. 1팀의 경험으로 2팀도 만들었고, 단번에 성공시켰다. 고로 반드시 산박의 세력에서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예. 그럴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굉려는 산박의 팀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산박이 2팀을 만들고 계속 나아가는 모습에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다. 비전이 있는 자의 밑에서 일하고 싶어졌다. 지금처럼 그저 장 노인이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좋아 보였다.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라.”
장 노인의 방을 빠져나온 굉려는 늦가을의 싸늘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조금 답답한 마음이 있었다. 이것도 하기 싫고 저것도 하기 싫어서 많이 방황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생활을 접는다. 산박은 굉려를 보며 확신에 찬 눈을 하고 있었고, 굉려는 반드시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 믿고 있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밤공기를 마시며 진정시키던 굉려는 밤하늘을 한참 바라보다 체온이 식어 추위를 느끼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부자리는 이미 펴져 있었다. 반듯하고, 새 이불이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하라는 건가.’
작은 것부터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굉려는 답답함을 느꼈다.
‘한 축을 담당하면 따로 독립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그가 눈을 감았다. 잠은 잘 오지 않았다. 그는 오랜 시간 느껴보지 못했던 책임감을 느꼈다. 그건 짊어지지 않았던 세월만큼 무겁게 다가왔다.
* * *
“이, 이게 뭐야?”
탕만은 샤워를 하고 나와서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어제 과음을 해서 그런지 늦게 일어났고, 많은 이들로부터 문자가 와있었다.
[탕만 씨, 안타깝게 되었네요. 지금이라도 연락해 보세요.]
[탕만아! 큰일 났다! 선수를 친 놈이 있어!]
산박의 결정을 훑어보고, 그다음으로는 시은과 강합의 메시지를 읽었다.
[동생, 내가 한번 말해 봤는데, 씨알도 안 먹혀.]
충호는 조금 늦게 보냈는데, 직접 산박에게 이야기를 한 것 같아 보였다. 형님으로 모시기로 해서 형님 노릇을 한 듯했다. 가만히 대접만 받는 형님은 역으로 찔릴 뿐이다. 충호는 확실하게 탕만의 형님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 덕에 탕만은 섣불리 산박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충호가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충호 형님은 내가 풀 장비를 얻었다는 걸 모른다.’
이를 말하면 바꿔줄까?
‘그럴 리 없지. 상대도 풀 세트니까.’
탕만은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은 맥주 캔을 꺼냈다. 마른오징어를 씹으며 식탁에 앉았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술 똥을 싸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충호 형님이나 강합 형님한테 물어볼까.’
전사 머리 세 개가 굴러갔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그나마 강합이 청탁을 하자고 말했다. 던전 공략에 필요한 물약을 사서 선물로 주며 순번을 바꿔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충호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명분, 선비, 문(文)의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판타지 쇼크로 무너져도 그 민족성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청렴이 가장 으뜸이었고 청렴하면 능력도 따라온다고 믿었으며 인성이 좋지 않으면 인생 또한 실패한다고 여기는 민족이 사는 곳이었다.
결국 탕만은 아무것도 못 한 채로 전화를 다시 들었다. 거부당할 게 분명했지만 한 번은 부딪쳐야 했다.
―예. 탕만 씨.
“아! 예! 팀장님! 다름이 아니라 저도 1레벨 풀 장비를 맞춰서 던전 공략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거 어쩌죠? 이미 팀원을 정해 둬서요. 다음을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예. 혹시 바꿔주실 수는 없습니까? 시키실 일이 있다면 할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음…….
산박이 조금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탕만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단칼에 안 된다고 말한다면 상대는 기분 나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바꾸면 굉려 씨가 기분 나빠 하실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말씀을 주셨다면 모르겠는데, 고맙다고 귤도 한 상자 가져다줘서…….
산박은 굉려를 팔았다. 실제로 귤 한 박스를 받았기도 했다. 장씨 가문의 일족 중 몇몇 이들이 귤 장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들은 탕만은 절로 숨이 거칠어졌다. 상대가 선물을 줬기 때문이었다.
‘이런 씨. 나만 병신이 된 거네?’
젊은 사람이 남에게 대가성 선물을 주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장 노인이 억지로라도 가져다주라고 한 것이었다. 작은 차이였지만, 이렇게 들으니 커 보였다. 탕만을 원천 차단 할 훌륭한 변명거리가 완성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공정하지 못하다고 할까, 먼저 장비를 맞춘 건 굉려 씨인데 그걸 뒤로 다시 물리고 탕만 씨를 세워 주기에는 좀 모양새가 그렇지 않습니까?
“예. 그렇지요…….”
―저만 나쁜 놈으로 비칠 수 있고요.
“예.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좀 절박해서 말씀을 드린 겁니다.”
―탕만 씨를 나무라는 게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오늘 일은 저도 가볍게 넘기고 싶습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죠?
“예. 괜히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현재 팀을 조금 더 받고 실력자가 생기면 빠지는 사람 없이 던전을 주기적으로 돌 수 있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예. 탕만 씨도 마음 편히 가지세요.
통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탕만은 스마트폰을 소파에 던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미적거렸다.’
쓸데없는 일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남한테 기회를 뺏긴 기분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스스로가 병신처럼 느껴졌다.
* * *
탕만이 그러든 말든 산박은 훈련 일정을 잡았다. 최소한의 협동력을 키워야 했다.
굉려는 사람들 속에 잘 녹아들어 갔다. 특히나 나이가 스물아홉 살임에도 가장 늦게 들어온 후배 노릇을 톡톡히 해주었다. 그 덕에 다른 팀원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오지 않고 오히려 탕만보다도 더 잘해주니 쉽게 인정을 받았다.
게다가 텃세 같은 거 부리다가는 산박에게 걷어차일 게 분명했다. 산박은 냉철한 리더였다.
특히나 시은은 굉려에게 큰 도움을 주며 산박의 눈길을 샀다.
‘역시 여성 팀원이 한 명은 있어야 해.’
남자라는 동물은 여자한테 약하고 쉽게 마음을 열기 마련이었다. 그 덕에 굉려는 더 빨리 팀에 적응할 수 있었다.
산박으로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리해서 하는 시은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 팀이 커지면 직책을 맡겨볼 생각을 지녔다. 그녀가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훈련을 진행하며 산박은 지건의 과수원에도 특히나 힘과 관심을 쏟아부었다. 신을 계속 갈아 치운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사과 과수원을 통해서 로열티를 지급받아야만 했다. 드루이드 사과나무의 효능에 따라서 장 노인과 함께 새로 계약서를 짜기 때문에 일단 나무 한 그루의 효능을 보려고 집중하고 있었다.
‘하루 10cm. 한 달이면 얼추 열매를 맺을 수준이 된다.’
훈련과 병행했고, 오늘 드루이드 사과나무는 산박에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산박은 태도를 싹 바꿔서 삼에 집중할 생각을 가졌다. 생육 속도를 높일 수 있었기에 삼 장사를 하는 것이 수익이 높았다. 조금만 달라도 천금을 내놓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었다.
“오셨습니까!”
몸에 흙을 묻힌 지건이 냉큼 달려왔다. 요즘 그는 기분이 아주 좋았는데, 산박이 자신의 과수원에 큰 투자를 하고 근면 성실하게 나와주고 있어서였다. 그전에는 주문 한두 번이 고작이고, 그것도 매일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면 지건이 지금 산박을 크게 반기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나쁜 놈이 착한 놈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차이만큼 큰 호감도를 지니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와서 다른 나무는 나뭇잎이 사그라지고 횅한 나뭇가지만 남았지만 산박이 주문을 통해서 힘을 부여한 나무는 아직도 나뭇잎이 싱싱했고 거대한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길 보세요.”
그 기이함에 더욱 관심을 가진 지건은 특이한 것을 발견했고, 이를 산박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지건은 긴 장대로 나뭇가지 위쪽 중에서도 조금 안쪽에 있는 걸 가리켰다. 거슬리는 나뭇가지를 조금 밀어냈다.
“오!”
산박이 감탄을 했다. 초겨울이 왔음에도 작은 사과 열매가 맺어져 있었다.
‘요거, 요거, 된다. 돈이 된다!’
출하량이 압도적인 사과나무가 될 것 같았다. 그것도 계절에 관계없이 열매를 맺을 수 있어 보였다.
산박은 그 기대심 때문에 던전 공략을 보름 미뤘다. 명분은 던전 지급 물품의 추가 선별을 위해서였다.
‘현재 팀 지급 물품은 다섯 종류.’
화염 물약 1인당 한 병, 드루이드 빛 무리 치료수 한 병, 별빛 물약 한 병, 섬광 단검 세 자루, 화염 진득액 한 개.
개인이 1레벨 던전에 들고 갈 수 있는 아이템은 최대 개수가 제한되어 있었다. 몇 번 던전마다 경우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최소한도는 이와 같았다. 치료수의 경우 두 병이 될 때도 있었지만 한 병이 될 때도 있었다.
‘더 추가하기는 해야지.’
던전 공략 단가가 올라가지만 안전한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자신의 팀에 들어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팀장이 올리는 수익이 줄줄 흐르겠지만 산박에게는 큰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돈을 써서 팀을 키우고 좋은 인재를 영입할 수 있다면 이득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다음 날에 산박은 과수원에 가기도 전에 장 노인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장지건도 함께였다.
“과수원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래, 계약서를 새로 짜야겠다. 수익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들어오시죠.”
산박이 두 사람을 창고 방으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