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럼 탕만 씨가 먼저 장비를 맞추세요. 왜 이렇게 미적거리시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다른 팀원이 손해를 보고 있잖아요.”
시은의 말에 두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녀는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전 그래도 강합 형님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절 팀에 소개시켜준 게 강합 형님인데, 괜히 제가 먼저 장비를 맞췄다가 형님이 정식 팀원에서 임시로 떨어지면 그땐 제 책임이지 않습니까.”
술기운 때문에 탕만이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강합이 수저를 놓으며 화를 냈다.
“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냐? 끅!”
강합은 실로 당황해했다. 딸꾹질까지 해서 서둘러 ‘이 상황을 학습한’ 시은이 물을 떠서 건네줬다. 탕만은 그사이에 더욱 떠들어 댔다.
“사촌 형님이 쫓겨나시고, 전 비겁하게 남았습니다. 이렇게 던전을 다니는 것도 집안사람 몰래 하고 있을 뿐이죠. 전 빚이 있습니다. 더는 쓰레기 같은 짓을 하지 않을 생각이고, 마음의 빚을 갚아 나가고 싶습니다.”
분위기가 요상해졌다. 탕만은 아무래도 자기만 가문에 남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듯했다. 시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뭐야, 이게? 정말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낯간지러울 뿐만 아니라 속에서 역겨움이 피어올라 왔다. 그건 거부감이었다. 이시은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 두 사람의 우정을 거부하고 있었다.
탕!
그녀가 테이블을 세게 쳤다.
“어우!”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랐고, 슬슬 마무리하고 있는 옆 테이블도 움찔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아유, 아닙니다. 대단히 아름다우십니다. 혹시 남자 친구 있으세요?”
시은이 눈웃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이자 옆 테이블의 남자가 헤실거리며 손을 뻗어 괜찮음을 표시하며 수작질을 했다. 같이 합석하고 있는 탕만과 강합이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시은이 거부하자 그는 코를 훔치며 일행과 떠나갔다.
“저 새끼, 저거…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네 복장을 봐라. 추리닝 입고 나온 놈을 남친이라고 생각하겠냐?”
“하이고. 형님은 머리 스타일이라도 좀 가꾸세요. 요즘 이발소 스타일로 커트하면 욕먹습니다.”
“뭐?”
탕!
시은이 다시 시선을 모았다.
“장난칠 마음 없고, 탕만 씨가 내일 풀 세트로 사세요. 아셨어요?”
대답을 촉구하는 표정에 탕만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못 합니다. 정식 팀원이 아닌데 연거푸 두 번을 던전을 돌다뇨? 전 안 되겠습니다. 정 해야 한다면 강합 형님이 하십시오.”
“트라우마 가진 사람을 어떻게 써먹어요? 팀장님이 그걸 감수하고 던전에 들어가실 것 같아요?”
“그럼 다섯이서 들어가는 건 어떻습니까? 몇몇 기업은 그렇게도 모집을 하지 않습니까.”
“돈 받고 레벨 업 시켜 주는 거죠. 300만 원 내실래요? VVIP는 500만 원, 천만 원도 낸다고 하던데요.”
레벨 업을 통해서 지능이나 지혜도 높일 수 있어서 돈 있는 집 자식들은 더 우월해지려고 던전에 뜻이 없어도 동행하곤 했다.
“그래도 충호 씨가 아직 풀 세트를 마련하지 못했다고…….”
“금방 마련할 거예요.”
시은은 그가 모종의 이유로 팀장에게 차용증을 쓰고 풀 장비를 얻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건 산박이 말해야 하는 종류의 것이었고, 시은은 선을 넘지 않았다. 이것도 충분히 선을 넘는 일이지만 산박은 모를 것이었다. 굳이 말할 것도 아니었다.
“그래. 탕만아, 네가 해라. 나 때문에 세 명이 던전 공략도 못 하는데 하루하루가 죄인 같다. 그것보다는 네가 가서 내 마음을 덜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탕만이 몇 번 거부했다. 시은은 단계별로 정해뒀던 멘트를 꺼냈다.
“이미 팀장님은 2팀을 개설하고 운용했고, 어제 1레벨 던전을 클리어하셨어요.”
“예?”
“저, 정말입니까.”
두 사람은 마치 자신들이 버려진 것처럼 굴었다. 그럴 만도 했다.
“2팀의 정식 팀명은 오버시어고, 원거리, 장거리 콘셉트 팀이에요.”
전후방에서 활약 가능한 산박이 있는 팀이었다. 단점을 받쳐주는 산박 덕분에 오히려 장점이 크게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럴 수가…….”
강합이 크게 실망한 모습을 보였다. 시은이 서둘러 쏘아붙였다.
“팀장님이 언제 팀 하나만 굴린다고 했어요? 뭘 그렇게 실망해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좀 당황스럽습니다.”
“2레벨 던전의 던전 인원은 여덟 명~열 명. 그걸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죠.”
“아…….”
그 말에 강합이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어찌 되었든 먼저 2레벨을 찍어야 해요. 늦게 생긴 팀보다 늦게 레벨 업 한다면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눈 감아도 딱 보이잖아요.”
“…….”
답은 정해져 있었다. 왠지 모를 답답함에 강합이 시은이 바닥에 내려뒀던 소주를 들어 올렸다. 한잔하려는 모습에 시은이 병을 낚아채서 따라 주었다. 자연스럽게 탕만도 빈 잔을 들어 올렸다. 예쁜 여성에게 술을 받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짠 하고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계산은 더치페이로 하려고 했지만 시은이 술값을 미리 계산해둔 지 오래였다. 두 명은 크게 화를 냈지만 시은은 태연했다.
“제가 불렀잖아요. 술값 정도는 제가 내게 해주세요. 안줏값은 더치로 하고요.”
이 모든 것 또한 시은의 계략이었다.
밖으로 나와서 강합이 담배를 피울 때, 택시를 부르기 위해서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시은에게 탕만이 다가왔다.
“저… 시은 씨.”
“네.”
“제 장비 사러 갈 때, 같이 좀 봐주실래요?”
그 말에 시은이 조금 고민했다. 탕만은 긴장한 표정으로 시은을 보고 있었다. 사적인 감정이 다분히 들어 있었다. 이를 시은은 쉽게 파악했지만 금방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메시지 보내 드릴게요.”
“예. 기, 기다리겠습니다.”
시은은 그렇게 택시를 탔다. 서로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었다.
택시 창문을 올리자마자 시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 무엇도 남지 않고 그 무엇도 담기지 않은 삭막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미모 때문에 퇴폐적으로 비쳤고, 음울한 밤거리의 빛 때문에 더욱 색기가 피어올라 왔다.
‘길탕만…….’
그와 사적인 만남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는가? 사용함으로써, 관계를 이어 나가면서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는가?
‘없다.’
충호라면 또 몰랐다. 적어도 그를 방심시키고, 그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쌓이면서 중요한 순간에 산박을 괴롭히기 위해서 ‘손쉽게 죽일 방법’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탕만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그저 굴러다니는 전사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체급부터 용맹까지 모두 충호의 하위 호환이었다. 비교하는 것조차도 부끄러웠다.
‘충호가 나한테 관심을 표했다면 여우 짓을 했겠지만…….’
탕만이 가진 건 남들도 가지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그때에는 볼일이 생길 것 같아서요.]
[아, 옙…….]
답장은 순식간에 도착했다. 일정을 정하지 않았는데도 볼일이 생기는 매직!
“흐흥…….”
시은은 숨죽여서 짧게 웃었다. 탕만의 얼빠진 표정이 떠올랐다. 만약 그가 지금 앞에 있었다면 발로 그 얼굴을 밟아주고 싶었다.
‘걷어차는 것도 나쁘지 않지.’
* * *
‘삼’. 산삼, 인삼 등등. 그 영양 성분은 사실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증명 또한 이루어졌다. 하지만 산박은 그런데도 산삼에 집중했다.
왜냐하면, 물의 나무로부터 뻗어지는 ‘힘’이 독특한 효력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추조차도 일반적이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산삼은 더더욱 큰 변화를 일으켜줄 것이 분명했다.
‘인터넷에서는 잘 나오지도 않아.’
약초꾼 보조를 구하는 구인 글은 많았지만 지식 전수에는 팍팍했다. 블로그는 버려진 지 오래고, 이상한 광고 글로 뒤덮인 곳도 있었다.
최소한의 정보를 검색하고 산박은 장 노인을 찾았다.
“산삼 씨앗을 얻고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산에서 통째로 옮기고 싶은데, 도움을 주십시오.”
“갑자기 찾아와서는 하는 말이 그것뿐이냐? 쯧쯧…….”
말은 그렇게 해도 장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축객령을 내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 또한 드루이드인 산박이 산삼을 키운다면 제법 그럴듯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어디서 키울 거냐? 지건이한테 맡길 셈이냐?”
“아뇨. 제가 따로 관리할 생각입니다.”
“좋은 거라 너 혼자 배부르겠다는 고오약한 심보로구나.”
“다른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은 무슨!”
그렇게 큰소리쳤지만 산박의 기색에 변화가 없자 장 노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본인조차도 바꿀 수 없는 요인이 있는 듯했다.
‘이놈은 선을 확실하게 지키는 편이다.’
그 선이 조금 뒤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손해를 조금 보더라도 남들에게 먼저 세 보 양보하고 그 반응이 배은망덕하거든 그제야 손절하는 스타일이었다.
‘가장 까다로운 부류지.’
마음에 여유가 없거나 타인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못 하는 방법이었다. 선에 들어와도 자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과 거리감이 생기고 나서야 도망치듯이 인연을 정리하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놈은 달라.’
모든 것이 탁탁 정해져 있었다. 그 정해진 선을 넘으면 끝이다. 적어도 장 노인의 시선에서 본 산박은 냉철한 인간이었다.
“좋다. 하지만 그러려면 차라리 인삼이 어떠냐?”
“인삼은 좀…….”
“어차피 같은 삼이다. 모르는 사람이나 산삼, 인삼을 차이 난다고 그러지. 똑같은 삼인 게다.”
“백년 묵은 산삼이랑 인삼을 비교한다면요?”
“직접 가져오고 말을 해라.”
산박이 웃었다. 장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인삼이 싫으면 산양삼이 최선이지.”
“산양삼은 또 뭡니까?”
“산에 씨앗을 뿌려서 키우는 삼이다. 산삼보다 잘 자라고 인삼보다는 덜 자라지.”
‘무슨 놈의 삼이 이렇게 종류가 많아?’
산박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할 테냐? 내가 줄 수 있는 것도 산양삼 씨앗뿐이다.”
“그럼 그걸로 주십시오.”
“좋다. 얼마를 줄 수 있느냐?”
“저희 인연을 생각해서 3만 원 어떻습니까.”
“이놈이……. 정가가 5만 원이거늘, 돈도 잘 벌면서 그걸 깎느냐?”
“최고급 산양삼 씨앗을 주신다면 5만 원 그대로 쳐드리겠습니다.”
“내 용돈도 좀 쳐줘.”
“제 할아버지도 아닌데 무슨 용돈입니까.”
“그간 지건이 과수원에 소홀하였지 않느냐. 여기서 그걸 푸는 거지.”
“궤변입니다. 돈 쓸 데가 많아서 안 됩니다.”
“흠! 좋다. 5만 원.”
산박은 바로 현찰로 5만 원을 줬다. 장 노인이 이를 냉큼 챙겼다.
“며칠 내로 지건이가 줄 것이다. 창고 마당에 두면 되겠느냐?”
“예.”
산박은 바로 일어섰다. 하지만 장 노인이 그를 말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그래. 밖에 굉려 있느냐?”
“예, 어르신.”
“들어와라.”
문을 열며 장굉려가 들어왔다. 산박은 단번에 그를 훑었다.
‘검술 하기 딱 좋은 몸체네.’
궁술이 힘(力)이라면 검술은 민첩(敏捷)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 목도 덜렁거리게 하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롱 소드의 무게는 고작 1.5kg에 불과하다. 반면 활의 장력은 으마무시하게 커질 수 있었다.
어깨가 넓었지만 호리호리했다. 키도 크고 팔과 다리도 길쭉하다. 모델을 보는 것 같았다.
“인사해라. 태산박이고, 요즘 가장 잘나가는 양반이다.”
“장.굉.려라고 합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앉아라.”
“예.”
굉려는 산박과 장 노인 사이에 앉았다.
“나이는 스물아홉이지만 아직도 애 같은 놈이다. 이번에 다시 정신 차려 본다고, 나한테 일 좀 달라고 하더라. 레벨 1 던전 사용자고, 직업은 암살자다.”
‘암살자…….’
산박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유나와 겹치기 때문이었다.
“안다, 알아. 그래도 부탁할 게 너뿐이다. 얘를 좀 받아 줬으면 한다.”
“장비는…….”
그 말에 장굉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했다.
“풀 세트로 갖춰 입고 있습니다.”
“어떤 장비입니까?”
“발소리를 줄여주는 신발에…….”
무난한 선택이었다. 기습을 하기 딱 좋았고, 혼자서 작전을 수행할 때 안전성을 높일 수 있었다.
“신체 강화 상의, 하의, 조끼를 끼고 있고…….”
산박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매우 공격적인 장비였기 때문이었다. 검술에 힘을 더하는 장비였다. 또한 신체 강화 장비를 세 개 최대한도까지 착용하는 모습으로 봐서 근접전 능력에 크게 투자한 모습이었다.
‘직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가 보네.’
“체력 증진의 목걸이, 반지 두 개를 끼고 있습니다.”
오로지 신체에 몰빵한 장비 세트였다. 무엇보다 전사와 경쟁해야 했기에 다른 이들보다 돈을 배는 더 썼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무기로는 불꽃 롱 소드와 마비 독 대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끝입니다.”
“원거리 수단은 없습니까?”
“투척 단검 몇 자루를 다루긴 합니다. 하지만 거추장스러워서 사용을 잘 안 합니다.”
“어때?”
“나쁘지 않습니다.”
산박은 순수하게 가감 없이 대답했다.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굉려에게서는 피 냄새가 풍겼다.
‘인간 백정 노릇을 한 놈이다.’
실전에서의 활약은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산박이 단번에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굉려 씨.”
시원한 웃음에 굉려 또한 작게 미소 지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