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270)
  • 76화

    <한 걸음>

    박조조는 오랜만에 싱글벙글하며 아침 일찍 트럭을 몰았다. 던전에 갔었던 산박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수익을 주는 것이 바로 산박과의 거래였다.

    “오늘도 신수가 훤하십니다.”

    박조조의 말에 태산박 또한 웃으며 대답했다.

    “10년, 20년, 오랫동안 갑시다.”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돈이 있으면 관계도 탄탄해지는 법이었다.

    빛 무리 치료수 대용량과 별빛 물약을 가득 채운 물병이 트럭에 실렸다. 스테인리스로 된 밀폐 용기였는데,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요즘 미세 플라스틱이니 뭐니 난리입니다.”

    단가는 높았지만 재활용할 수 있었기에 교체한 것이었다. 어제 박조조가 가져갔던 스테인리스 빈 병을 산박이 받았다. 나중에 씻고 말려야 했다.

    “오늘부터 주급이죠?”

    “예. 하, 고놈들, 조금이라도 편해지려고 아주 발악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지 않습니까?”

    기업 입장에서는 뭐든지 늦게 주는 게 좋았고, 편했다. 그 때문에 던전 대전 상인 공회는 매번 산박에게 달마다 돈을 주고 싶어 했고, 결국 일급에서 주급으로 지급 방식을 변경하게 되었다. 월급이 안 된 것으로 산박은 만족했다. 던전 대전 상인 공회도 일급이 아닌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갑은 산박이었다.

    ‘적어도 빛 무리 효과가 남아있을 때까지는.’

    이번에 청철 훈장을 빼앗겼기에 다음 신으로 갈아탈 때 제단이 사라질 수 있었다. 이를 대비해야 했다. 별빛 물약 또한 시각적 효과를 지니고 있어서 대체할 수 있지만 약간은 다른 법이고, 그런 작은 변화에 민감한 게 기업이고 민간이었다.

    ‘인기가 사그라지면 매출이 곤두박질치겠지.’

    드루이드 빛 무리 치료수는 시각적 효과로 다른 물약들에 사용되어 하루에 100만 원씩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게 사라지면 산박의 수익에 타격이 상당할 것이었다. 하지만 별빛 물약도 주문 피해 물약이라는 효능으로 하루 매출이 70만 원에 달했다. 무엇보다 별의 수련자라는 기술로 부여되는 힘이라 산박의 힘과는 별개의 힘이었기에 특히나 쓰기 좋았다.

    박조조는 트럭을 몰고 대전으로 갔고, 산박은 씻고 물기를 말린 이후에 지건이 관리하는 밭으로 향했다. 부지런하게 콩밭에서 일하던 지건이 손을 크게 흔들었다. 부인도 선크림을 바르고 밀짚모자를 쓴 채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전에는 지건이 트럭을 몰고 다녀서 남편 없는 밤을 보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조금 있었던 우울증도 햇빛과 노동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돌아오셨습니까?”

    “예. 잘 마무리했습니다. 하루 쉬고 바로 여기 왔습니다. 로열티를 빨리 받고 싶어서요.”

    “하하하하!”

    산박의 농에 지건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 좋은 상상이었다. 그만큼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이 많기 때문이었다.

    산박과 함께 부부는 서둘러 과수원을 찾았다. 잡초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있더라도 짧고 몽땅했다. 부부는 틈틈이 허리를 숙여서 잡초를 뜯어내어 손에 쥐었다. 가는 김에 잡초를 뽑는 모습은 실로 열일하는 농부의 모습이었다.

    사과 묘목 다섯 그루가 있었지만 산박은 오로지 한 그루에만 주문을 연거푸 사용했다. 나무 생육 주문은 보통 1레벨 주문을 한 번 사용할 힘으로 두 번, 세 번 쓸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이고 나약한 주문이었다. 그걸 무려 여섯 번을 사용했다.

    “어,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물약 그런 거에 많이 쓰신다던데…….”

    “저번 던전에서 주문력을 높였습니다. 이 정도는 가뿐합니다.”

    야만의 오른팔, 문명의 왼팔. 야만신으로부터 받은 힘 덕분에 1레벨 주문을 두 번은 더 쓸 수 있었고 나무 생육 주문은 여섯 번을 쓸 수 있었다.

    ‘컨디션이 나쁘지 않네.’

    몸에 있는 힘을 모조리 소모한 산박이 몸을 일으켰다. 나무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 속도는 눈에 보일 정도였으며 쉽게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놀라워요.”

    장지건의 아내인 윤다연이 감탄했다. 수개월을 빠르게 재생한 것처럼 성장 속도가 한눈에 보이는데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장은 10분 정도 이어졌고, 총 10cm가 늘어났다.

    “묘목을 벗어나니까 빠르네요.”

    묘목이 되기 전에는 주문 한 번에 1cm도 안 자랐는데 묘목 이후에는 적어도 1.5cm 이상은 무조건 자라는 듯했다.

    “요즘 농사는 어떠세요?”

    “돈 없이도 지낼 만큼 텃밭을 많이 만들고, 특이한 작물을 키우고 있습니다.”

    “특이한 작물요?”

    “네. 한번 해놓으면 3년 정도 뒤에나 수확할 수 있긴 해도 평당 2만 원은 벌리는 아스파라거스부터…….”

    지건이 산박에게 구구절절 자신의 농장의 수익들을 열거했다. 농부로서의 믿음을 주기 위함이었고, 허투루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장 노인으로부터 몇 번이나 질문 공세를 받았기에 이제는 사업하는 양반처럼 돈 얘기를 주르르 할 수 있었다.

    “이게 좋은 게 평당 2, 3만 원 농사가 잘 없는데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저희 부부의 얼마 안 되는 노동력을 생각하면 연수를 따지는 건 좀 그렇죠.”

    인력이 부족한 걸 잘 덮는 방법이 3년 농사인 셈이었다. 또 평당 수입이 높은 작물을 재배해야 했다. 그게 아스파라거스였다.

    “옥수수 같은 건 재배 안 합니까? 축산용 옥수수는 제법 돈이 된다고 들었는데요.”

    “옛말입니다. 거긴 미국산이 꽉 잡고 있어요. 국내는 거의 사장되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저 늙으신 분들이 정부 보조금 받으려고 하는 게 전부입니다.”

    뒤통수 맞지 않기 위해서 하고 있을 뿐, 젊은 사람이 할 작물은 아니었다.

    “아하.”

    “요즘에는 특이한 작물이 최고죠.”

    지건의 분야에 대해서 산박은 대화를 제법 나눈 뒤에 작별 인사를 했다.

    ‘나도 하기는 해야 하는데…….’

    물의 나무 주변의 텃밭! 날이 갈수록 그곳의 기운이 강해지고 있었다. 상추나 심기에는 아쉬웠다. 텃밭을 갈아 버리고 새로운 것을 한번 심고 싶었다.

    ‘역시 삼이겠지. 아냐, 조금 시간을 내서 찾아보고 장 노인에게 부탁해 보자.’

    * * *

    너를 내 마음속에에에에~! 흔들어~ 미친 듯이 흔들어~

    최신 가요가 시은의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삶이 각박해질수록 원초적인 것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거드름을 피우기에는 ‘판타지 쇼크’ 이후의 삶은 끔찍할 뿐이었다.

    “응. 유나야.”

    ―언니~ 정기 보고!

    “하루 지났는데?”

    ―아! 그건 피곤해서…….

    검은색 매니큐어를 바르며 시은이 휴대 전화를 스피커로 바꾸었다.

    “말해봐. 팀장님보다 늦게 안부 전화 해놓고, 할 말 없어?”

    ―피곤해서 그랬다니까.

    “농담이야, 농담.”

    연습장에 몇 번 끄적인 여자와의 농담을 성공적으로 풀어낸 시은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누구도 볼 수 없었다.

    유나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래서 어땠어?”

    유나는 있었던 일들을 아낌없이 풀어놓았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까지 모든 걸 말해주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가장 먼저 자신이 모르는 산박에 대한 정보를 시은이 모두 공개했고, 둘은 서로 같은 성별이기도 했다. 던전 사용자들 중 여자의 비율은 매우 낮았다. 서로 같은 배를 큰 믿음으로 함께 탈 수 있었다.

    반면 시은이 유나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나이가 어리니까.’

    발랑 까진 년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먼저 믿음을 보여줬다. 나이가 어릴수록 작은 은혜도 크게 갚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었다. 단순한 정보 축적과 확률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시은은 이를 확인하고 나서는 더더욱 살가운 ‘척’ 유나를 대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이니 뭐니 하면서 두 사람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보내 버렸다니까요? 오빠들도 그냥 쿨하게 가버렸고 이젠 저랑도 잘 대화를 안 해요. 이거 완전히 끝난 거죠?

    “남자 셋 사이에서 정말 고생이 많네. 내가 한번 팀장님한테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볼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언니! 언니가 말씀해 주시면 뭐라도 달라질지 몰라요. 진짜 2팀의 팀 색깔은 완전 대박이었다니까요? 어땠냐면…….

    유나가 열심히 오버시어 팀의 장점을 이야기하고 자신을 드높였다. 시은은 이를 아주 잘 받아줬다. 하나부터 열까지 수없이 연습한 결과물이었다.

    통화를 끊고, 시은은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너무 잘됐어.’

    산박은 결코 2팀을 버리지 않을 것이었다. 어떻게 할지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시은은 둔표건 휼간이건 ‘사람’은 상관없다고 여겼다.

    ‘다른 놈을 넣어도 충분하다.’

    1레벨 던전 사용자 중에 가장 천대받는 자들이 원거리 직업이고 주문 사용자들이었다. 던전 사용자들의 수준이나 던전의 간악함을 생각했을 때 1레벨 던전에서는 사실 전방에 서서 확실한 전투력과 수비력을 선보이는 전사들이 최고였다.

    얼마나 심각하냐면 소비템으로 원거리를 퉁치고 치료사와 전사 셋으로 된 전문 팀이 많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시은에게 있어서 둔표와 휼간의 가치는 0. 산박이 그들을 버린 것에 그 어떤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반면 산박은 그들이 실패하고 다시 돌아옴으로써 ‘사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게 그와 그녀의 차이였다.

    ‘안전성을 생각하면 1팀보다 2팀에 크게 관심을 기울일 거다.’

    시은의 입술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려 왔다. 시은은 그 피를 손으로 받아서 다시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자신의 피 맛은 달았다. 아주 달게 느껴졌다. 시은은 다른 이들과 비교해 뭔가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매우 비틀려져 있었다.

    오버시어 팀에 대한 위험성을 파악한 시은은 연고를 입술에 바르고 압착 반창고를 잘라서 붙인 뒤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강합 씨, 아직도 못 정하셨어요? 누가 먼저 풀 장비를 갖출지?]

    문자는 금방 왔다. 예쁜 여성의 특권이었다. 또는 술자리를 빛내주는 듬직한 큰행님의 특권이기도 했다.

    [예. 탕만 이놈이 고집이 아주 세네요.]

    [두 사람, 지금 시간 되세요? 곱창이나 먹어요.]

    [예?]

    시은이 몸을 일으켰다. 검은색 속옷에 검은색의 미니 랩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조금 사이즈가 큰 밝은 베이지색의 스웨터 니트 재킷을 걸쳤다. 얼핏 보면 가을 카디건 같았다.

    시은은 짙은 겨울용 스타킹을 신고 거울 앞에 섰다. 안에 입은 원피스도 파괴력이 강력했지만 카디건을 입은 채로도 그 아래 드러난 허벅지가 특히 자극적이고 벗겨보고 싶을 정도로 색기를 줬다. 시은은 색기 있는 얼굴 때문에라도 힘을 숨긴 여자 같았다.

    ‘하이힐은 과하지.’

    강합과 탕만이 오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무장하고 싶지는 않았고, 발이 불편했다. 시은은 새하얀 운동화를 신었다. 미스매치를 해도 잘 어울렸다. 얼굴과 몸매가 받쳐줬다. 상체를 사이즈가 큰 옷으로 숨겨도 다리가 대단히 노출되어 있었다.

    작은 백을 어깨에 메고, 시은이 밖으로 나섰다. 공기가 제법 차가워 시은은 신발장 서랍에 있는 핫 팩을 하나 꺼냈다.

    1팀 옥시모론이 창설되고 나서 모두 세종시에 살게 되었기에 만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헤헤.”

    간단한 화장만 했지만 시은에게는 거리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매력이 있었다. 쌀쌀한 공기만큼 밤과 잘 어울리는 게 이시은이었다. 멀리서 그녀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만 봐도 분위기가 있었다. 웬만한 남자들은 접근도 못 했다.

    시은이 눈을 들어 올리고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긴 눈썹이 강합과 탕만의 눈에 들어왔다. 두 명 모두 입을 헤 하고 벌렸다. 그 모습에 시은이 눈웃음을 지었다.

    저 방심하는 태도. 그녀가 얻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메신저로 꾸준히 만났잖아요.”

    “에이! 거기에는 시은 씨의 외모! 미모가 없잖습니까.”

    세 사람은 잡담을 떠들며 조금 걸어서 곱창집에 들어갔다. 탕만이 호들갑을 떨며 잰걸음으로 빨리 가서 의자를 쓱 빼줬다. 하지만 시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안쪽 소파에 앉았다.

    “아.”

    “야, 이놈아, 여자가 안쪽에 앉아야지.”

    시은이 웃는 ‘척’을 했다. 분위기가 그것만으로도 화목해지고 훈훈해졌다.

    “두 명이 동시에 풀 장비를 구매한다면 며칠 더 있어야 해요?”

    시은이 본론을 꺼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술! 술! 술 들어간다! 술술술!”

    세 사람은 세 병을 내리 비웠다. 하지만 시은은 무덤덤했다. 그녀가 끼고 있는 목걸이는 3레벨 해독의 은목걸이였고, 술 같은 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조금 달아오르기는 했고 살짝 취한 척했지만 그건 연기에 불과했다.

    “후우우…….”

    탕만이 강합이 주는 술을 밀어냈다. 더는 불가능했다. 그 모습에 시은은 입을 가렸다. 고소한 쾌락이 살짝 스며들어 왔다. 저들의 쾌락을 짓밟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술은 이제 됐어요.”

    시은은 확실하게 자르며 술병을 내려놓았다. 반쯤 남은 소주병도 내려가지자 강합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표정을 바로 했다.

    “두 사람 얼마나 모아야 하는데요?”

    “두 달에서 석 달 정도…….”

    그 말에 시은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말도 안 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왜요?”

    “강합 형님이 아직도 좀 치료 중에 있습니다.”

    “아… 아직도……. 정말 힘드시겠어요.”

    시은의 눈동자가 강합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직도 랜스 투창에 당했던 것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병의 돌진, 단 한 수에 뼈가 박살이 나며 혼절한 그 기억은 악몽의 단도가 되어서 강합의 정수리에 박혀 있었다.

    ‘잘됐네.’

    겉으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시은의 차가운 심장은 안도했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끝날 수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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