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270)
  • 75화

    ‘레벨 업을 위해서 그냥 넘긴다고 했지만 이 순간이 오면 꼭 갈증처럼 고뇌하게 된단 말이지.’

    카르마를 아껴서 서둘러 고도화하는 게 중요했지만 혹시나 1레벨 주문이나 기술 중에 드루이드에게 큰 효과나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있을 수 있었다. 이를 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복권 당첨. 가챠 성공. 한 방 도박. 그런 원초적인 욕망이 득실거렸다. 하지만 산박은 그 어떤 정보도 없이 이를 노리는 건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간이었기에 갈등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드루이드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자연으로 가버려서 있는 게 없었다.

    ‘불가능한 일이지.’

    드루이드는 직업을 획득하자마자 홀연히 은둔한다. 2레벨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고 귀농하여 자연인이 되어 버린다. 고로, 드루이드에 대한 정보는 다분히 제한적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1레벨 기술과 주문을 획득할지 아득하다.’

    “다음 레벨 업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확인했습니다.]

    이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야만신이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선물을 받으시겠습니까?]

    “빛의 신 팔라딘이 이를 허락할까? 그분에게 불이익을 받을 수 있나?”

    [그가 준 모든 것이 회수됩니다.]

    불합리하다고 여겨질 수 있었지만 산박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신이 필멸자들에게 휘둘리는 것만큼 병신 같은 일도 없었다. 또 그래서는 안 되었다.

    “야만신의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은 할 수 있나?”

    [야만의 오른팔, 문명의 왼팔이라 불리는 권능을 선물했습니다. 그 효과는 소폭이지만 신체의 강화, 1레벨 주문을 약 두 번 더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추가입니다.]

    산박의 입에 군침이 돌았다. 야만신은 이상할 정도로 필멸자가 원하는 바를, 절실하게 생각하는 바를 건네주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대우가 좋다.’

    그렇기에 지혜가 높은 산박은 되레 경계심이 일어났다.

    “선물을 거부한다.”

    [야만신의 분노를 살 수 있습니다. 정말로 신의 선물을 거부하십니까?]

    ‘X벌, 개같네.’

    받으면 팔라딘이 빡치고 안 받으면 야만신이 빡친다. 아주 개같은 경우였다.

    “안 받……. 아니, 잠시만.”

    산박은 정신을 집중했다. 산박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야만신의 제단을 모욕한 것이 산박이었다. 그런 자에게 선물을 주고 관심을 표현한다?

    ‘보통 또라이가 아니다. 절대로 상종하지 말아야겠어.’

    야만신, 그는 분명 미친 정신병자 사이코패스 또라이가 분명했다. 남이 뺨을 때리는데 웃으면서 꽃을 주는 놈은 결코, 결코 상대해서는 안 된다. 무시가 답이었다.

    산박은 야만신의 이 한 수를 매우 높이 샀다. 생각하고 곱씹을수록 소름이 돋았다. 야만신이 산박을 상대로 흉수(兇手)를 뻗쳤기 때문이었다.

    ‘신 맞아? 너무 치사한데…….’

    다 큰 사람이 놀이터에서 사탕 빨고 있는 애의 사탕을 빼앗고 낄낄거리며 도망치는 꼴이었다.

    ‘분명 빛의 신 팔라딘과 야만신은 적대적 관계다.’

    레벨 1짜리 던전 사용자를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으니 알 만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불충분했다.

    ‘혹시 나라서 그런가?’

    산박은 십품 임시 팔라딘임에도 청철 팔라딘 훈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실로 이례적인 일인 셈이다. 이를 생각했을 때, 야만신의 관심이 또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벌써부터 뭔가가 꼬이는데…….’

    확실한 노선 정리. 그게 지금 산박에게 필요했다.

    ‘아니, 오히려 불명확한 노선이 더 좋을 수 있다.’

    박쥐처럼 산다면 양쪽에서 모두 내쳐질 수 있었지만 내쳐지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이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에 신경을 끌 것이었다.

    ‘오히려 한쪽 편만 들면 더 큰일이 날 수 있다.’

    산박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건 사고에 휘말릴 수 있었다. 고레벨 던전 능력자나 기업의 하수인이 산박에게 다른 신으로 갈아탈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많은 신뢰를 신에게 주고 그 힘을 받았는데 몸을 돌린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다. 장고 끝에 산박이 입을 열었다.

    “야만신의 선물을 받는다.”

    [야만신의 선물을 받으시겠습니까? 빛의 신 팔라딘의 분노를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자연적으로 청철 훈장이 회수되며 기도의 제단도 사라집니다.]

    “상관없다.”

    ‘내가 그만큼 가치 있다면 팔라딘도 여지를 남길 터다.’

    […빛의 신 팔라딘이 청철 훈장을 회수했습니다. 기도의 제단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역시. 한 번의 기회를 제공하는 건 당연하겠지.’

    던전에서 다른 이들보다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게 산박이었다. 화가 나도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것이 타당했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신들에게서 관심을 받지 않으려면 계속 신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독이다. 그렇다면 자꾸 새로운 독으로 바꿔서 독이 맹독이 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새하얀 공간에 흉악한 척추뼈가 만들어지고 땅에 박혔다. 그 양옆으로 팔이 생생하게 만들어져서 걸렸다. 오른팔은 무기를 들었고 왼팔은 묵직하고 두꺼운 책을 들고 있었다. 그게 끝이었다.

    ‘아쉽다.’

    산박은 이미 결정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빛의 신 팔라딘은 믿을 만한 신이었기에 한번 크게 베팅하고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랑은 안 맞았겠지.’

    너무 고리타분한 정의의 신이라는 게 문제였다. 어찌 되었든 나중에 가면 갈등으로 많은 도움을 받지는 못할 것이고 높은 등급의 팔라딘도 되지 못했을 터였다. 혹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권리에 맞게 책임도 무거울 터였다.

    ‘괜히 팔라딘이 아니니까.’

    앞으로의 ‘계획’과 산박이 지닌 ‘신념’ 그리고 그 끝에 완성할 ‘꿈’을 생각한다면 오로지 빛의 길만 걸을 수 없었다.

    던전이 무너져 버렸다. 이번에도 산박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당연했다. 그는 다른 기술이나 주문을 얻지 않고 레벨 업을 위해 카르마를 보존하는 걸 택했다.

    ‘특히 세 사람 모두 1레벨 던전 공략은 이번이 처음이니까.’

    기술이냐 주문이냐, 혹은 직업에 맞는 특출한 능력이냐. 모두 고민에 빠져있을 터였다.

    산박은 약탈자로부터 얻은 부산물을 먼저 옮기고 박조조에게 콜을 넣었다. 그사이에 다른 이들도 속속 도착했다.

    “바로 팔지 않고 뭘 기다리고 있습니까?”

    현실로 돌아온 루둔표가 툭 쏘아붙였다. 말 속에 말벌의 침이라도 꽂힌 것처럼 적대적이었다. 상황 끝났고, 볼일 다 끝난 사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 태도의 변화는 실로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산박은 무덤덤했다. 이미 그는 모든 걸 예측하고 있었다. 이리될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제 팀은 항상 똑같은 트럭 상인에게 물품을 거래합니다. 최고가로 낙찰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허, 최고가로 말씀입니까? 하하, 마진에 미친 놈이 트럭 상인인데…….”

    그런 말에도 산박은 태평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루둔표가 다리를 떨어댔다. 그는 산박의 여유로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짜증 나는 놈이다.’

    곧 휼간과 유나가 모습을 드러내서 지하철 위로 올라왔다. 몇몇 트럭 상인들이 빵빵하게 채워진 배낭을 보고 말을 걸어왔지만 산박은 칼같이 잘라냈다.

    “일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높은 값에…….”

    “일없습니다.”

    단호한 말에 상대는 포기하고 떠나갔다.

    “유나야, 잠깐…….”

    유나는 번갈아 가며 그들의 호출을 받았지만 금방 되돌아왔다. 표정을 보아 하니 유나가 매우 단호하게 그들의 제안을 거부한 듯싶었다.

    ‘계획대로 잘되고 있다.’

    산박은 속으로 웃었다. 적어도 휼간은 살아서 자신에게 돌아와 고개를 숙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박조조가 도착했다.

    “이 악랄한 놈들을 잘도 잡으셨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난 다음 박조조는 부산물을 확인하며 감탄했다. 물량형 던전은 특히나 전투력이 낮은 1레벨 던전의 인간을 잡는 독 중 가장 독한 독이었다. 그곳을 네 명으로 클리어했으니 감탄할 수밖에.

    ‘한 명도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약탈자의 보석 신체는 세 가지입니다. 눈, 귀, 코입니다.”

    많은 약탈자를 잡았지만 그 부산물을 배낭에 모두 넣지 못했다. 백 마리를 넘게 잡았지만 일흔 마리의 부산물만 챙길 수 있었다.

    “효과는 모두 동일합니다. 녹여서 장비의 안감에 코팅되어 장비에 부여된 힘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제법 돈이 되겠는데요?”

    산박의 말에 박조조가 헛웃음을 지었다.

    “많이 녹여봤자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기업도 팔아야 하니 가격표가 담합이 되어 있습니다. 지랄 같은 일이죠. 하지만 다른 것보다는 그나마 합리적입니다. 100g당 만 원 선입니다.”

    “100g당이라니…….”

    다른 이들은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에 박조조가 산박을 쳐다봤지만 산박은 오히려 그런 박조조의 눈을 피했다.

    ‘어라?’

    팀 하나는 제대로 확 잡아서 이끄는 게 산박이었다. 냉철한 이성으로 휘어잡기 때문에 산박의 한마디면 대부분의 팀원이 그냥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았다. 항상 옳은 말을 하고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시선을 피해?’

    자신보고 해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곧 팀원이 제대로 된 놈들이 아닐뿐더러 산박과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의미했다.

    ‘멍청한 것들이었구만.’

    박조조가 단번에 눈빛을 달리했다.

    “그럼 아시는 트럭 상인에게 물어보십시오. 100g당 만 원 선에 파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나쁠 거 없죠.”

    루둔표가 먼저 나섰다. 종휼간도 맡겨둔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모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 아무도 말이 없습니까? 통화는 통화대로 끊어 놓고서는.”

    “음…….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생각이 짧았습니다.”

    박조조는 뒷말을 기다렸지만 아무 말이 없자 빡친 표정을 지었다.

    “나이 처먹은 꼰대가 사과 한마디도 입에 안 담네.”

    “무, 뭐라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잘못해 놓고 사과 한마디 안 하는 꼰대 새끼들이라고 했습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시는 트럭 상인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말해 보세요.”

    둔표와 휼간에게 박조조가 삿대질을 해대었다. 하지만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박조조가 자신의 입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보나 마나 보살을 만났다고 빨리 팔라고 했겠죠. 아닙니까? 마진이라고 해봤자 100원도 안 챙겨 가니까.”

    100g당 올리는 박조조의 수익은 99원에 불과했다. 배낭에 있는 일흔 마리의 부산물의 무게는 많아 봤자 5kg이다. 모조리 팔아도 4,950원밖에 박조조의 손에 안 떨어졌다. 장사를 하려고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딴 허접한 놈들이 지금 나를 못 믿고, 내가 얼마나 태 사장님의 팀 운영에 큰 도움을 주는지 모르고! 날 음해하고! 돈독에 든 상인으로 몰아붙이고! 어엉!”

    두 명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트럭을 몰고 와서 4,950원을 챙겨서 가는 상인을 나무란 격이었다. 던전 사용자로서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정도만 하세요, 박 사장.”

    “음……. 내 태 사장님 체면을 봐서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보니까 나이도 제법 있어서 태 사장님을 가볍게 보시는 것 같은데, 사람 볼 줄 모르면 가만히 있으세요. 절반은 가니까.”

    박조조가 말을 이었다.

    “내 기분 나빠서 달빛애벌레는 제가 10만 원을 받아야겠습니다. 저 사람들 몫으로 주든지 말든지 하십시오. 아니면 이번 거래는 없던 거로 하겠습니다.”

    50만 원을 빌미로 10만 원을 빼먹을 소리를 했다. 당연히 둔표와 휼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박조조가 금액을 빼 간다면 그 돈은 자신들의 수익금일 게 분명했다.

    그 말에 산박이 서둘러 박조조를 껴안았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화를 좀 푸십시오. 제가 정말 난처합니다.”

    “저, 저저저! 사람들 표정 보십시오. 아직도 사과를 안 하고!”

    박조조가 말까지 더듬으며 소리를 내지르며 버둥거렸다. 돈 얘기가 들어가니 둔표와 휼간이 냉큼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고개를 제법 깊이 숙이기까지 했다.

    약탈자의 보석 신체 5kg을 팔아서 나오는 수익은 50만 원. 두당 12만 5천 원. 거기서 5만 원씩 빼앗기면 남는 건 7만 5천 원이다. 순식간에 반토막이 나는 꼴이었다. 며칠 동안 1레벨 던전을 돈 보람이 없었다.

    “인생 똑바로들 사세요.”

    “박 사장님!”

    “예. 정말 태 사장님 때문에 제가 참습니다.”

    달빛애벌레는 묵직하게 잘 모아 두었다. 1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15만 원씩 공평하게 나누었다.

    “뒤풀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산박의 말에 둔표와 휼간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그 모습에 산박은 그들을 전혀 잡지 않았다.

    “예.”

    남은 유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래된 인연은 그녀가 산박과 함께 남으면서 유리잔처럼 간단하게 깨져 버렸다.

    “시원섭섭한 표정입니다?”

    그 말에 유나가 힘없이 웃었다.

    “원래 이런 거겠죠.”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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