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돈노금과 표확곡>
산박은 급하게 충호를 불렀다. 당진에 가서 장비를 구매해야 했다. 당연히 그 전에 차용증을 쓰게 했다.
꾸욱.
충호는 단번에 인을 찍었다.
“망설임 하나 없는데, 괜찮습니까?”
“예.”
사실 산박이 그렇게 물을 정도도 아닌 간단한 결정이나 다름없었다. 산박은 믿음과 신뢰를 보여주는 팀장이었다. 공짜로 물품을 지급해 주기도 하고 던전 내에서의 위상도 높으며 팀 전체에 영향력이 뻗어 있었다. 전공을 올리기 때문이다. 뒤에서 그저 주문만 읊는 게 아니며, 호랑이로 변해서 날뛴다. 무엇보다 위험한 일은 종종 직접 하기도 했다. 그런 산박을 믿지 못한다면 애초에 산박과 함께 던전에 갈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다. 고로 충호가 차용증에 거침없이 인을 찍는 건 전혀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산박은 아쉬워했다. 충호의 속마음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산박은 그가 어떤 자인지 알아야 했다.
‘팀의 전방을 크게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산박은 드루이드다. 동물로 변신하면 전방에서도 싸울 수 있지만 한계가 있다. 무위도 없고 전투 기술도 없다. 나중에 해결될지 몰랐지만, 그 또한 한계가 있었다.
‘그 차이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겠지.’
충호에게 팔 하나를 맡기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 말고 다른 특출난 자가 영입되기를 기다리는 건 낙관적 사고였다.
‘어쩔 수 없지.’
기회는 날아갔다. 그걸 계속 잡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충호가 생각보다 더욱 산박을 믿고 있을지도 몰랐다. 실로 곰 같은 사내니까.
“장점과 단점, 무엇을 선택하고 싶으세요?”
당진시로 향하며 산박이 물었다. 해는 저물었지만 버스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당연히 장점입니다.”
괴물을 상대로 충호가 단점을 줄여봤자 의미가 없었다. 장점을 키워야 했다.
충호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먼저 선천적으로 지닌 힘과 덩치다. 그리고 주문이 사용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주문……. 까마귀 쇄도는 나쁘지 않은 주문이니까요. 이를 배가한다면…….”
충격 피해를 주는 까마귀 쇄도는 빠르기도 빨랐고 범위도 넓었다. 괴물에게 확실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원거리 수단이 하나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었다. 이것의 위력을 배가시킨다면 던전 전투가 수월해진다. 근접전은 여전히 인간에게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문은 있어도 주문과 관련된 기술이 없다는 게 문제죠. 장점으로 보기 모호합니다.”
산박의 언급에 충호가 이를 잘라냈다. 보완에 불과했다.
“그림자 칼날, 까마귀 쇄도. 그렇게 주문 두 개를 보고 확신했습니다. 보조는 해도 주력은 되지 못한다는 걸요.”
“그렇습니까. 그럼 힘이군요.”
“예.”
힘과 관련된 풀 플레이트 아머를 구하고 싶었다. 그게 충호의 마음이었다.
‘얼마 할지…….’
산박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비축해 뒀던 여윳돈을 깡그리 털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거래하는 장 노인이나 박조조 모두 융통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풀 플레이트 아머에는 수많은 종류가 존재했다. 중세식 풀 플레이트 아머, 신소재 풀 플레이트 아머, 원시 풀 플레이트 아머 등등 그 종류만 해도 여러 가지였다.
‘당연히 가장 싼 건 원시 풀 플레이트 아머다.’
던전에서 수거하여 수리를 한 풀 플레이트 아머였다. 방어구로서의 능력 외에 한 가지씩은 능력이 부여되어 있었지만 발품을 많이 팔아야 했다. 당연히 그에 맞춰서 쌌다.
‘신소재는 구매하기가 어렵다.’
대기해서 받아야 할 정도로 만들어지는 족족 다른 곳으로 팔려 나가기 바쁘다. 내일 당장 써야 하므로 이것도 불가능했다.
남은 건 중세식 풀 플레이트 아머였다. 던전 자원이 사용되지 않고 과학으로 만든 소재로 만들어진 풀 플레이트 아머였다. 공장에서 만들기 때문에 다양성이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찾으십니까?”
“군산 던전 산업이 만든 힘의 풀 플레이트 아머요. 1레벨요.”
“예!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점원이 보여준 풀 플레이트 아머에는 산 두 개가 떡하니 교차하고 있는 마크가 그려진 것 외에는 그 어떤 문양도 없었다. 산 밑에는 군산이라는 글자가 쓰여있고 이것 또한 검은색이었다.
“던전의 생태계를 생각해서 칠흑처럼 어두운 검은색 갑주입니다. 스프레이 또한 평범한 게 아닙니다.”
동글동글한 인상의 풀 플레이트 아머였다. 괴물의 맹공을 어떻게든 흘려내고 빗나가게 하기 위한 갑옷 설계가 드높은 물리학과 수학을 통해서 현실에 실현되어 있었다.
“가격은요?”
“280만 원입니다. 정가보다 20만 원이나 낮은 가격입니다. 가성비도 높습니다.”
살 떨리는 가격이었다. ‘판타지 쇼크’ 이전의 시세로 치면 소형차 한 대 값과 비슷했다. 소형차는 오래 굴릴 수라도 있지, 풀 플레이트 아머는 괴물과 싸우기 때문에 새로 구해야 하기도 하는 소비품이었다. 감히 자동차와 비교할 수 없는 사치의 끝이었다.
‘1레벨 던전의 무서움을 알기에 중보병이 되어야 한다.’
그대로 산박은 280만 원을 질렀다. 충호가 그간 모은 쌈짓돈 110만 원을 산박에게 줬기에 170만 원을 산박이 감당했다.
힘의 풀 플레이트 아머는 오로지 힘의 증가에 극대화된 갑옷이었다. 전사의 공격력을 올려주고, 상대 괴물과의 격돌에서 쉬이 밀리지 않는 뚝심을 줄 수 있었다.
“공격적인 장갑을 입었으니 수비적인 방패를 구매해야겠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방패 또한 사야 했다.
‘검은 그림자 칼날로 대처가 가능하다.’
상대도 인정할 수 있었다. 굳이 능력이 부여된 검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중형 추가 방패입니다. 1레벨 방패 중에서 가장 가성비가 높습니다.”
당연히 이 방패 또한 군산 던전 산업이 만든 방패였다. 방어구 전문 기업인 군산 던전 산업이었기에 없는 게 없었다. 또 가격대별로 경쟁하고 있는 주력 상품이 존재했다.
“얇은 방어 막이 매우 넓은 반경으로 펼쳐집니다. 상대의 위력적인 공격을 반감시킬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막히면 물리적 공격은 공격력이 생각보다 많이 감쇄된다. 이를 이용한 것이 중형 추가 방패였다. 덩치가 큰 충호에게 좋은 방패였다. 가격은… 9만 천 원! 나쁘지 않았다.
산박과 충호는 그걸로 쇼핑을 끝냈다. 섬광 단검도, 시은에게서 받은 화염 물약도 있었다. 또한 산박이 지급할 치료수도 존재했다. 그 정도 아이템이면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내일 봅시다. 급하게 불러내서 놀라셨죠?”
“아닙니다. 오히려 전 1레벨 던전에 갈 수 있어서 더 좋습니다.”
고레벨 던전 사용자가 되는 것. 그게 충호의 목표였다.
“빚이라고 해도 빨리 장비를 맞췄으니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그건 뒤풀이 때…….”
“말도 안 됩니다!”
산박이 웃음소리를 제법 크게 냈다. 결국 저녁 열 시가 넘어서 당진시에 있는 호프집에 들어갔다. 치킨을 반반 시키고, 술도 시켰다.
“어? 이건 서비스인가요?”
달구어진 작은 프라이팬에 콘치즈가 나오자 산박이 대번에 좋아했다. 요리도 하고 서빙도 하는 사장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서비스입니다. 자주 좀 들러 주십시오.”
두 사람은 신이 났다. 처음 온 집이지만 서비스가 상당해서였다.
“대단한데요? 이름을 기억해 놔야겠습니다.”
콘치즈의 원재료값이 낮다고 해도 테이블마다 하나씩 주려면 적잖은 돈을 내줘야 했다. 분명 사장이 승부수를 띄운 것이리라.
짠.
산박은 소맥을 말았고, 충호는 얼음을 띄운 잔에 소주만 넣고 마셨다.
“흐!”
혀가 얼얼할 정도의 시원함이 들어왔다. 충호는 각진 무를 냉큼 하나 입에 집어넣어 씹었다. 산뜻한 즙과 함께 식초의 강렬한 풍미가 소주의 뒷맛을 싹 지웠다.
‘이거지.’
열이 확 올라왔다. 충호는 맥주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선호하지 않았다. 마시면 추위를 느끼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마시는 겁니다.”
충호가 술을 너무 맛깔나게 마시자 산박이 미리 제한을 뒀다.
“예.”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온갖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에 대해서, 함께했던 일들에 대해서 짚어 나갔다.
“탕만 씨를 제법 받쳐 주시던데, 이유가 있었나요?”
팀원에 대한 평가를 묻기도 했다.
“강합 씨에 이어서 탕만 씨까지 전부 임시로 가면 좀 그렇겠다 싶어서요. 또 저는 언더독을 좋아해서요.”
약자가 노력하는 걸 좋아했다. 이왕이면 컵을 들어 올린다면 금상첨화다.
“시은 씨랑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충호는 시은에 대해서 제법 많은 걸 물어봤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라면 그런 여자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산박은 거기에 대해서는 칼같이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요. 시은 씨는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칼같이 자르셔야죠.”
“이미 몇 번이나 선을 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충호도 더는 말하지 못했다.
“시은 씨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야 그렇죠. 마음에 안 드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잖아요.”
거기에 위험한 던전 사용자다. 남자의 모험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팀장님은… 고자는 아닌 거죠?”
“그저 먼저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뭔데요?”
“비밀입니다.”
“에이.”
충호가 몇 번 알려 달라고 했지만 산박은 말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새벽차를 타고 곧바로 약속된 역으로 향했다. 그들이 갈 곳은 ‘금천구청 던전’이었다. 개릉 던전과 같이 1레벨 던전이었다. 통계를 보면 위험하고 콘셉트에 치중된 던전이 잘 걸려서 평범한 팀은 꺼리는 곳이기도 했다. 산업 팀이나 되니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수익이 높겠지.’
그들보다 표확곡 사원이 먼저 와있었다.
“굉장히 일찍 오셨네요.”
산박이 그렇게 인사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확곡은 충호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어, 근데 시은 씨는요?”
“그게, 전에 던전에 갔는데 아직도 그 여파에서 못 벗어나서 생리가 불완전해서요.”
“아……. 아아. 예…….”
확곡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곧 충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
“예.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일단은 대리님이 오셔야지 판단할 수 있어요.”
“후우! 죄송합니다.”
산박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모습에 확곡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 표정과는 반대로 그는 산박을 말리기 바빴다.
“아이고, 이거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마세요! 어서 고개 들어 올리세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몰라요. 모든 건 대리님이 정하시니까요.”
“그렇긴 하겠지만 확곡 씨도 사원 아닙니까. 충분히 피해를 봤으니 사과를 드리는 겁니다.”
산박은 단단하게 못을 박아놨다. 말로 한 명을 기분 좋게 한다면 상황이 조금이라도 부드러워질 것을 잘 알았다.
곧 돈노금 대리가 왔다. 확곡은 산박의 저자세에 제법 열정을 갖고 노금 대리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뭐, 어쩔 수 없지. 한 덩치 하니까 전력은 확실하게 될 것 같고. 1레벨 던전도 공략했다고 하니까. 군산 풀 플레이트면 1인분은 하겠네요. 반갑습니다. 돈노금 대립니다.”
“서충호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감사까지. 그리고 산박 씨는 언제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을 거야. 누가 보면 내가 폭군인 줄 알겠네.”
“흐흐.”
확곡이 웃었다. 그러자 노금이 팔꿈치로 확곡의 옆구리를 찔렀다.
“켁.”
“뭘 웃어, 너는. 산박 씨 진지한 거 안 보여?”
“죄, 죄송합니다.”
노금은 그렇게 말해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산박을 어깨를 잡고 올렸다. 산박은 제법 힘을 줘서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진짜 산박 씨 같은 사람 처음 보네. 인재야, 인재. 이번에 실력 보고 괜찮으면 실업 팀으로 들어와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말만 그렇게 했지 산박은 이 만남 이후로 노금과 연락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노금도 산박을 찾으려고 고생과 돈을 쓰지 않을 터였다. 거기에 산업 팀은 직장인이다. 직장인이 사람 찾는 데 시간을 쏟아부을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림자 기사? 풍채가 좋은데 직업이 좀 그렇네. 하이브리드라니. 아쉽네요.”
돈노금 대리가 충호가 건넨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만큼 충호같이 덩치가 있는 사람은 간단한 직업이 최고였다. 충호보다는 못했지만 제법 덩치가 있는 게 돈노금 대리였다. 거기에 그는 창병이라는 아주 단순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일단 던전 가기 전에 간단하게 브리핑하고 갈게요.”
“예!”
모두 제법 소리를 크게 냈다. 돈노금은 그 속에서 권력의 참맛을 느낄 터였다.
“그럼…….”
돈노금이 말을 줄여 나갔다. 산박은 그 모습에서 음모의 냄새를 맡았다.
“둔전사인 확곡이 가장 앞에 서는 건 당연하겠지만, 이번에 충호 씨가 앞장서세요. 중형 방패까지 가지고 있으니 안성맞춤이네.”
“예!”
충호가 냉큼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