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270)

56화

“뿌리가 왜 이렇게 튀어나와 있어.”

과수원에 심은 다섯 그루의 토종 사과나무는 아직 묘목인 상태였다. 하루에 한 번만 주문을 읊어주고 갔기 때문에 창고의 나무보다 작았다. 그런데도 뿌리가 땅에서 툭 튀어나와 있었다. 흙이 묻어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건도 황당해했다. 장 노인이 역정을 냈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그냥 키우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과일보다 월등히 좋은 게 나온다고. 애지중지해서 키워야지. 대충 관리했지?”

“아아아닙니다! 체온계도 놓고 있고, 비료 또한…….”

그가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했지만 책잡을 것이 나왔으니 입 다물고 고개를 숙이는 게 상황을 더 좋게 만들었을 터였다.

“쯧쯧쯧.”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장 노인이 혀를 찼다. 입 닥치고 고개나 숙일 것이지 따박따박 변명을 늘어놓는다. 자신이 놓친 것에 대한 사과가 아닌 자신이 한 것들에 대해서 말하는 건 썩 좋은 자세가 아니었다.

“에휴.”

장 노인은 진절머리가 났다. 저 그릇이 좁다는 걸 알아서였다. 고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또,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고개만 숙일지도 몰랐다.

‘저렇게 멍청해서야…….’

“손으로 흙을 파봐라. 뿌리가 상하면 안 된다.”

“예!”

지건이 냉큼 움직였다. 더는 그를 책잡지 않았기에 좋아하는 기색마저 있었다. 아직도 애였다, 애.

튀어나온 뿌리를 따라 얕게 땅을 파다 보니 꽤 넓은 범위의 흙을 파헤치게 되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이지?”

뿌리가 굵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뿌리 반, 흙 반이었다. 로이드를 먹은 헬스인처럼 기형적인 성장을 보였다.

“뿌리부터 생육시킨 게 아닐까요?”

“모르지. 아무튼 기반부터 딱 잡혀있는 게 좋다. 거기에…….”

장 노인이 말을 줄이며 걸음을 옮겨 사과 묘목 두 그루 사이를 지팡이로 딱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도 적당히 파봐. 살살.”

“예!”

그곳을 파자 뿌리가 사랑하듯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게 보였다. 한 그루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 모습에 장 노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놀랄 노 자로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드루이드 주문 때문에 일어난 일인 건 틀림없어 보였다. 산박이 부여한 나무 생육 주문을 서로 공유하기 위해서 뿌리부터 성장시켜 서로 연결한 것이었지만 장 노인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는 못했다. 지식이 없어서였다.

“잘 관리하면 시들지는 않겠어. 잡초나 잘 제거해 줘라. 해충이 들러붙어 있는지 아침저녁으로 단단히 봐야 할 것이다.”

“예.”

장 노인은 과수원에서 벗어났다. 조용히 지내던 장 노인이 다시 한번 크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건은 그걸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적어도 같은 장가(家)의 사람들을 통해서 운송업을 할 때보다 삶이 안정적이 되어서였다. 그에게 장 노인은 은인이었다. 촌수로 계산하면 32촌에 불과했지만 꼼꼼히 챙겨 주시는 분이셨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아내인 윤다연에게 말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못 미더워 하시는 것 같아요. 언제 날 잡아서 나무의 상황이나, 앞으로 나무가 어찌 되는지 산박 씨에게 미리 알려 달라고 하는 건 어떠세요? 장 어르신보다 많은 걸 알면 그분도 과수원에 발을 끊으실 거예요.”

“아, 그것 참 좋은 것 같네요.”

“그것보다 이렇게 오랫동안 집에서 함께 지낸 것도 정말 오랜만이지 않아요?”

지건이 손가락을 식탁에 톡톡 치면서 걸어가듯이 다연에게 다가가자 다연이 그 손을 잡아줬다.

* * *

화요일, 산박에게 안 좋은 소식이 들어왔다. 정보꾼 송유나로부터 메시지가 온 것이었다.

‘그렇게 매정하게 자리를 떴는데, 이게 무슨 경우지?’

황당했다. 하지만 곧 송유나가 자신을 조사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척거릴 이유가 충분했다.

여자의 몸으로 던전을 공략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 예쁘면 예쁠수록 곤란한 일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산박의 경우에는 강합, 충호, 탕만이 들어오기 전부터 시은이 팀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참았던 것뿐이었다. 찍소리도 못 했다.

‘그런 경우는 드물지.’

오로지 여자만으로 이루어진 팀이나 팀장이나 팀원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채 들어오는 게 아니라면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람만 꼬드기면 끝이니까. 말 그대로 무법 지대지.’

성비가 9:1인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만약 산박이 여자라면 트럭 상인을 했지 던전에 들어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을 것이었다. 외국에서 돌핀 팬츠를 입고 저녁 열한 시에 뒷골목을 돌아다니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시은이 팀 초기부터 함께하고 있는 산박의 팀은 송유나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팀이었다.

‘골치 아프게 되었어.’

고레벨 던전 정보를 지닌 송유나는 언제 암살당할지 모르는 위험한 여자였다. 정작 본인은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그렇게 큰 보물을 약탈했다. 그런 정보꾼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산박의 힘이 약했다.

‘송유나는 포기하지 않겠지.’

산박을 조사하고, 산박에게 이런 메시지까지 보냈다. 불똥이 튄다면 반드시 산박을 향할 것이었다. 오해? 고레벨 던전 정보를 호로록 빨아먹은 정보꾼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오해는 무슨 오해. 뚝배기를 깨러 올 뿐이었다.

‘미치겠군.’

일단 산박은 메시지를 꼼꼼하게 모두 저장했다. 그녀에게 놀아나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세종일산의 실업 팀은 악질적이에요. 그들에 대한 정보가 퍼지지 않은 이유는 조금만 떠들어도 무분별한 고소를 맞기 때문이죠. 형사는 대부분 무혐의로 끝나지만 민사로 질질 끌며 인생을 끝장내기 좋아하는 놈들이니 같이 공략하는 걸 그만두세요.]

[거기에 돈노금과 표확곡은 외부 직원을 가혹하게 다루기로 유명해요. 수익금은 제대로 주지만 큰 부상을 당해서 현실에 도착하고도 죽는 사람이 많거나 다시는 던전 공략을 못 할 정도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은퇴하는 던전 사용자도 있어요.]

한마디로 거지 같은 놈들이 걸렸으니 도망가라는 소리였다.

‘못 다루는 정보가 없나 본데. 하지만 뭘 모르네.’

이미 실력 검증까지 받고, 내일에 던전에 들어간다. 유나가 조금이라도 빨리 정보를 줬다면 그만둘 수 있었겠지만 이미 늦었다. 산박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한테 메시지 보내지 마세요. 일없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산박이 정보꾼을 찾은 이유는 저레벨 던전에 대한 정보 때문이었다. 고레벨 던전에 대한 정보는 고레벨이 되었을 때 여유로운 돈줄을 이용해서 호구처럼 기업에 돈을 바쳐 얻어야 했다.

‘기업 정보를 획득하지 않고 고레벨 던전에 간다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지.’

고레벨 던전 공략 팀은 소수다. 파악하고 관리하기 적당한 숫자였다. 그렇기에 산박이 유나로부터 고레벨 정보를 받는다면 그건 오히려 맹독이 될 뿐이었다. 사회는 그렇게 간단한 곳이 아니다.

결국 지금 유나를 받아들이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또한 유나가 제시하는 보물은 산박에게 똥 오물이나 다름없었다.

미색? 미색에 빠졌다면 이미 시은에게 팬티까지 벗어서 덜렁거리고 있었을 터였다. 송유나가 산박과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녀는 자신의 하자를 지우고 오거나 산박이 그런 리스크를 감당할 정도로 대단한 이득을 줘야 했다.

‘어느 쪽이든 불가능한 일이지.’

산박은 돈으로 살 수 없고, 육체로도 살 수 없다. 그를 살 수 있는 건 오직 그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것뿐이었지만 그 꿈이 뭔지는 오직 산박만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산박은 유나로부터 얻은 정보를 시은과 공유했다. 해가 질 무렵에 겨우 시은과 만날 수 있었다.

“분위기 좋죠?”

조금 조명이 약해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는 카페 2층에는 젊은 커플이 많았다. 공부하기는 좋은 조명이 아니었다.

“약간 야하다고 해야 할까? 테이블마다 칸막이도 많고요.”

시은이 속삭였다. 평범한 사람은 그 야릇한 속삭임을 듣는 것만으로도 하복부가 달아오를 정도였지만 산박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고자…는 아니죠?”

산박이 시은에게 꿀밤을 강하게 먹였다.

“자꾸 선 넘으려고 하지 마세요. 전 시은 씨한테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고 있어요. 아셨어요, 시은 팀원님?”

“예, 팀장님.”

그녀가 머리를 손으로 비비며 말했다.

산박이 얻은 정보를 풀어놓자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밟아도 똥을 밟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잘 감춰놓은 똥 오물이었다.

“그래서 후방 포지션만 구한 거네요.”

산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방 직업이 마음만 먹으면 후방 포지션은 크게 다칠 수밖에 없었다. 또 2:2라면 전방 직업이 압도적으로 썰어버릴 수 있었다. 무위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며, 장비도 산업 팀이기에 잘 갖추고 있어서였다.

“그들도 죽이지는 않겠죠. 다만 큰 정신적 트라우마와 부상을 입힌 채로 현실에 복귀하는 거고요.”

수익도 그대로다. 다만, 그 수익도 문제가 많았다.

“세종일산에서 주는 수익금은 터무니없는 수준입니다. 보통 1레벨 던전을 돌면 두당 돌아가는 수입은 최소 10만 원에서 시작하지만 세종일산이 외부 직원에게 주는 수익금은 최대가 5만 원이라고 하더군요.”

모두 유나에게서 받은 정보였다. 고레벨 던전 정보를 훔칠 수 있는 정보꾼이었다. 이 정도는 껌이었다. 실력은 확실히 있었다.

“짜증 나네요.”

질 나쁜 회사. 질 나쁜 사원.

제대로 밟았다. 산박은 충분한 정보 조사를 했지만 세종일산이 깔끔하게 똥 오물을 닦았기에 찾을 수 없었다. 개인이 기업의 안 좋은 소리를 하면 피 묻은 몽둥이를 들고 형사와 민사로 두들겨 패기 때문에 피 보기 싫은 개인은 찍소리도 못 했다.

“그래서 팀장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어떻게 하고 자시고 그냥 쉽게 넘어가는 게 최고고, 똥 밟았다고 쳐야죠.”

당연한 일이었다. 핑크색 소형차를 보고 쉽게 빵빵대다가도 산적 같은 남자가 내리면 서둘러 줄행랑을 치는 게 인간이었다. 그게 꼴사나워 보여도 최고의 방법이었다. 강자와 싸우지 않는 건 무조건 이득이다. 이번에도 그와 같았다. 싸운다면 쓸데없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두 사람에게서 절 지킬 수 있겠어요? 던전에 들어가면 벌떡 세울 것 같은데.”

“음.”

시은의 말에 산박은 고민했다.

‘그럴듯하다.’

살인 멸구를 할지도 몰랐다.

“전신을 꽁꽁 숨기고 가는 건 어때요?”

산박의 말에 시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적어도 표확곡 사원은 제 몸을 다 봤을걸요.”

‘이거 외통수구나.’

선택이 산박에게 있는 게 아니었다. 돈노금과 표확곡이 참아야 했다. 산박은 두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뒤에는 기업이 있고, 특히 돈노금 대리는 제법 발이 넓을 것 같았다.

산박이 깊게 고민하는 모습에 시은이 손가락을 올렸다.

“충호 씨가 있잖아요. 돈을 빌려주고 풀 세트를 맞추게 해서 저 대신 데려가세요.”

“그러면 포지션이…….”

“어차피 1레벨인데요, 뭘.”

산박은 이게 최선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시은과 함께 던전을 도는 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리스크를 감내해야 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다음에는 혼자 가야겠어.’

“당장 내일이니까, 지금이라도 빨리 당진시에 가야 하지 않겠어요?”

“후. 어쩔 수 없네요.”

산박은 머리를 긁었다. 그저 대리와 사원이라기에는 그들이 지은 죄가 많았다. 그리고 그 죄를 알고 있는 기업과 그곳에 소속된 이들은 100%, 그 두 사람이 죽으면 산박에게 보복을 할 것이었다. 의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검은 물을 뒤집어쓴 놈들이 무서운 이유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동료가 죽으면 죽인 놈을 일단 죽이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움직일까 싶기도 하지만…….’

그 적극성은 노금과 확곡이 기업 내부에서 얼마나 열심히 입지를 닦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렇기에 산박은 도박을 할 수 없었다. 조직폭력배에게 큰소리치는 놈은 범죄자의 심리를 잘 모르는 병신이다. 그게 아니면 그냥 권력이나 사회 영향력이 큰 분들이다. 산박은 둘 다 아니었다.

‘조심하고 봐야겠지.’

산박은 스마트폰으로 충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시간이 있었다. 그 모습을 시은은 빨대로 커피를 휘적거리며 가만히 바라보았다.

‘위기는 곧 기회다. 강합과 탕만이 빨리 돈을 모았으면 좋겠는데.’

한 명이라도 먼저 맞추면 바로 공략에 들어설 수 있었고, 산박과의 차이가 벌려지지 않을 수 있었다. 4인이 맞춰지기 때문이었다.

시은은 생각보다 빨리 이 기회가 찾아와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2레벨이 되면 산박은 2레벨 공략을 하지 1레벨 공략은 하지 않을 게 분명했고, 또 하더라도 팀 내에 또 다른 팀을 만들 뿐일 것이었다. 시은은 계속해서 산박에게 깊게 관여하고 싶었기에 이렇게 충호를 밀어 주었다. 또 산박에게 결코 나쁜 것도 아니었다.

‘충호니까, 돈을 빌려줄 판단을 단숨에 할 수 있었다.’

시은의 생각과는 다르게 산박은 이 기회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충호가 그 돈을 스스로 마련할 정도로 이 팀과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돌아 버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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