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270)
  • 54화

    * * *

    새벽이 오자 대장삵은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태양이 떠오르며 서서히 벌레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해가 지고 땅에 스며든 온도가 사라지기 전까지 벌레들은 한 번 더 맥동한다. 그사이의 캄캄한 시간에만 휴식할 수 있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나무를 지키는 데 할애해야 했다.

    ‘생명의 나무’.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드루이드는 생명의 마법사라 불린다. 산박은 그 수준이 한참 낮지만 그런데도 ‘나무’를 키울 정도는 되었다. 필요한 주문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삵은 잠도 자지 않고 나무를 지키고 있었다. 생명에 이끌리는 건 본능이고, 본능이 강한 건 곤충도 매한가지였다.

    콱!

    폭신폭신한 발이라도 찍어 누르면 밟혀 죽는다.

    핥핥!

    날아다니는 날벌레는 혓바닥을 놀려서 축축한 혀를 이용해 잡아먹었다.

    킁킁!

    냄새를 맡으며 혹여나 찾아온 동물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대장삵은 산박을 깨운다.

    “아, 좀.”

    “일어나라, 드루이드!”

    꾹! 꾹! 누르기도 하고.

    벅벅!

    이불을 손톱으로 긁었다. 이불이 상하기 때문에 산박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그걸 대장삵은 말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훌륭한 고양잇과의 후손다웠다.

    “이번에는 제법 버티는군.”

    대장삵이 손톱을 핥았다. 실오라기가 거친 혓바닥에 딸려서 쏘옥 입 속으로 들어갔다. 산박은 이불을 뒤집어엎어 쓰고 올랑 말랑 하는 기분 좋은 잠기운을 느꼈다.

    ‘포기했나? 이렇게 오래 버티기는 처음인데.’

    산박의 머리에 다가간 대장삵이 늠름하게 앞발로 산박의 머리를 콕 누른 채 말했다.

    “깨지기 쉬운 유리컵이 떨어져도 네가 참을 수 있을까?”

    산박이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유리컵의 생존은 중요 사안이었다.

    산박은 씻고 나와서 나무에 주문을 부여했다. 이제 제법 굵어진 묘목이었다. 주문과 물만 주고 떠나려는 산박을 대장삵이 막아섰다.

    “왜 또.”

    “주변 배경을 조성해야 한다. 곧 ‘때’가 온다. 그때를 맞춰야지만 내가 이 나무의 힘을 받아들여서 자체적으로 주문력을 보유할 수 있다.”

    “그냥 자라면 되는 거 아니었어?”

    “거기에 대한 드루이드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나 보군.”

    “직업을 얻었을 때, 시스템에 의해서 지워졌다.”

    산박은 거기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았다. 대장삵을 소환하는 주문으로 그 대가를 받았으며, 화낸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납득하고 앞을 마주해야 했다. 자신이 흘린 피를 되돌아볼 시간도 아까웠다. 그런 것에 정신력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쉬운 일이다.”

    대장삵은 산박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다. 이런 하찮은 드루이드가 자신을 소환했다. 몽모탄 구릉의 지배자이며 싸늘한 송곳니라 불리는 늑대 무리를 몰아낸 위대한 삵의 지배자를 소환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던전이란 곳이 그런 곳이겠지.’

    호각 혹은 조금 열세인 상태를 유지한 상태로 공략하게 하는 것. 그게 던전이라는 곳의 핵심 전략이었다. 마치 우수한 병졸을 생산해 내기 위한 실전적 훈련소같이 보이기도 했다.

    ‘바보 같은.’

    그 생각에 산박은 피식 웃었다.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말해봐. 네가 그리는 그림이 정확히 뭐야?”

    그 말에 대장삵이 웃는 상을 했다. 산박을 부려 먹는 순간이다. 이제 산박은 자신의 부하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먼저 근처에 연못이 있어야 한다.”

    “조금만 나가면 강이 있는데?”

    “어리석은 노오오오옴!”

    대장삵이 요놈 잘 걸렸다는 식으로 역정을 내며 냉큼 산박의 다리를 기어 올라가서 어깨에 딱 올라섰다.

    “아악! 따가워! 뭐 하는 거야!”

    “어리석은 놈! 강이랑 연못이 너한테는 똑같으냐! 흐르는 물과 고정된 물은 아주 다르다! 알겠느냐!”

    산박이 대장삵의 배를 잡아서 내려놓았다. 무리하게 균형을 잡으려던 대장삵이 활어처럼 펄떡거렸다.

    “다른 건?”

    “그 외의 것은 꽃, 수풀, 또 다른 나무지만 필수적인 건 아니다.”

    “필수적인 건 연못이란 말이네. 물과 깊게 관련이 있다면 강으로 충분했을 터다.”

    물은 대장삵의 주요 마법 계통이었다. 창고의 길로 나가면 바로 강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니?

    “흐르는 물을 옮기는 건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담겨있는 물을 옮기는 건 손쉬운 일이다.”

    맞는 말이었다. 또 옮기려면 어쨌든 담아야 했다.

    “그래서 연못인가.”

    “그렇다.”

    산박은 수도꼭지를 세 개짜리로 바꿨다. 정원을 가꾸거나 물을 여러 용도에 쓰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다용도 수도꼭지였다. 그것을 통해서 연못에 쓸 물길을 만들고, 땅을 깊게 팠다. 이건 업자를 불렀다. 며칠 걸리는 삽질도 포클레인이면 한 방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입니더. 일당 최대한 쳐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더. 혹시 장비 필요하거나 사람 필요하면 일로 전화 주십쇼.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명함을 받자 인부가 포클레인을 끌고 사라졌다. 돈 벌기 힘든 시대였다. 조금이라도 벌기 위해서는 몇 번 흙을 푸는 일도 마다치 않고 명함을 뿌려야 했다.

    쏴아아아!

    방수포를 꼼꼼하게 깔고 벽에 시멘트를 바르는 일은 고아원 애들이 와서 도와줬다. 일당은 줘야 했지만 매우 싼 가격이었다. 그들 또한 산박에게 빚이 있어서였다. 산박은 그저 장 노인의 말 때문에 최소한의 돈을 줬다.

    “어때?”

    “제법 그럴듯하다.”

    산박의 말에 대장삵이 연못의 위에 박아둔 돌들에 올라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캬악!”

    풍덩!

    제대로 끼워지지 않은 돌이 덜컹거리자 대장삵이 그대로 허공으로 튀어 오르며 털을 곤두세웠다. 놀라운 민첩성 때문에 빠지지는 않았다.

    “삵인데 물을 싫어해?”

    “방금은 그저 놀랐던 것뿐이다.”

    대장삵은 춉춉거리며 물의 온도를 확인하고 연못을 돌아다녔다. 그러고는 산박에게 명령했다.

    “물고기가 왜 없는 거냐!”

    “연못만 있으면 된다며.”

    “아니. 물고기도 필요하다.”

    대장삵이 그렇게 말했지만 산박은 속지 않았다. 나무가 ‘때’를 맞이하는 데 필요한 것은 연못. 물고기는 그저 대장삵의 기호였다.

    “그때가 오면 나무는 어떻게 되는 거야?”

    “꽃을 피우지. 연못의 꽃이며, 물의 나무가 탄생하는 날이다.”

    “연못의 꽃.”

    산박이 그 단어를 중얼거리자 대장삵이 그것에 대해서 설명해 나갔다.

    “드루이드가 주문을 통해서 키우는 나무는 나 같은 영물이 근처에 있을 때 때를 맞이한다. 개화의 때다.”

    드루이드와 영물. 두 가지가 필요했다.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영물과 교감하지 못하는 드루이드 중에는 잘못된 사상을 지닌 드루이드가 있을 수 있어서였다.

    “주변의 자연물을 통해서 피우는 꽃은 매우 세세하게 나누어진다. 허나 나무는 원소의 계통만큼 굵직한 가짓수만 가지고 있다.”

    “물의 나무가 피우는 연못의 꽃이라는 소리네.”

    “그래. 연못의 꽃은 나에게 현실적인 힘을 주게 될 것이다. 더는 너에게 힘을 빌리지 않아도 주문 두세 개쯤은 펼칠 수 있을 거다.”

    “너무 가, 강력한데.”

    산박이 놀라워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장삵의 말에 그런 마음이 쏙 들어갔다.

    “평생 단 한 번 맺는 꽃이다. 당연히 강해야지. 그리고 그 연못의 꽃을 먹은 영물은 그 나무가 수명을 다할 때까지는 다른 꽃을 피울 수 없다.”

    “드루이드, 영물, 나무 그리고 자연. 모든 것이 맞물려서 만들어지는 꽃.”

    “정확하다.”

    “하지만 태워 버리고 또 나무를 키우면 되는 일 아닌가?”

    “그런다면 난 업(業)에 집어삼켜지겠지.”

    업보는 돌고 돌아서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다가오는 법이었다.

    “그 나무 하나밖에 연못의 꽃을 못 피운다는 게 아쉬운걸.”

    “욕심이 많다. 드루이드답지 않아.”

    그 말에 산박이 대범하게 웃었다. 최고의 칭찬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해졌다. 드루이드의 직업이 강해진다면 분명 그 특성도 강하게 자신을 덮어씌울 것이었다.

    * * *

    보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산박은 그사이에 돈을 벌고 지건의 과수원 나무에 주문을 읊어주는 등 일상을 살아갔다. 틈틈이 시간을 들여서 대장삵과 함께 0레벨 던전도 공략하며 돈을 움켜쥐었다.

    “신기하다.”

    “그렇지?”

    대장삵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만만해했다. 물의 나무는 서서히 보통 나무가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단 마치 새벽이슬처럼 곳곳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자체적으로 물을 생산하는 듯했다.

    ‘사막에 놓으면 대박이겠는데.’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생긴 이슬이 경사를 따라 내려갔다. 나무의 굵은 몸에서 흘러내려 땅으로 흡수되었다.

    “이게 물의 나무…….”

    “묘목이지만. 꽃을 피워도 성목이라고 하기에는 작지.”

    변화는 하루가 다르게 격해졌다. 가끔 나뭇가지의 한 부분이 투명한 물로 변하기도 했다.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일에 산박은 크게 흥미를 느꼈다. 내친김에 스마트폰을 거치대에 놓고 녹화도 했다.

    “이거 봐.”

    밤에 찍은 영상을 대장삵에게 보여줬다. 조명 때문에 미립자가 된 물방울들이 잘 보였다.

    “춤을 추는 것 같다.”

    “이렇게 보니 멋진데.”

    꽃은 그다음 해가 뜨자마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로만 이루어진 꽃이었다. 특이한 건 가장 큰 봉오리가 아닌 가장 작은 봉오리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서 꽃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눈속임이었다.

    꿀꺽.

    대장삵이 한입에 연못의 꽃을 마셨다. 힘이 차오르고, 나무와 대장삵이 빛으로 연결되었다. 산박은 그 현상을 통해서 두 존재의 혼이 연결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걸로 네 도움 없이도 마법을 쓸 수 있다.”

    “좋은데.”

    산박이 웃었다. 아직 실감이 안 나서 크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물의 나무는 계속해서 성장 가능성이 존재했다. 나무가 성장할수록 대장삵 또한 더 많은 힘을 자체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담벼락을 높여야 하나. 아니면 은폐를 해둬야 하나.’

    물의 나무는 종종 물로 변했다. 거기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미립자의 물을 토해내며 춤을 추기도 했다.

    ‘들키는 순간 빼앗긴다.’

    남의 산에 야밤에 들어가서 비싼 약재와 버섯을 호로록 맛깔나게 빨아먹는 인간 말종도 있는 게 이 바닥이었다.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고민하던 산박은 텃밭을 꾸려 물의 나무를 숨기기로 했다. 비닐하우스 내부에 넣으면 그럴듯했다. 실제로 상추 같은 것도 심어놓고 먹거나 선물로 조금씩 나눠 준다면 의심은 사라질 터였다.

    * * *

    단 두 달! 산박이 새로운 힘을 갖추고 장비를 모두 갖추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워낙 곳곳에 일을 벌려놔서 실제 벌어들이는 것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렸다.

    ‘곧 선순환의 고리가 시작되면 수입이 몇 배로 껑충 뛰겠지. 그때부터 시작이다.’

    산박은 증강의 힘과 주문 강화의 힘, 두 개의 힘을 부여한 장비들을 모두 착용했다. 자신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야 했다.

    별빛탄은 여전히 전력 미만이었다. 호랑이 주문은 여전히 정상으로 작동했다. 124.8kg이었다. 증강 장비를 입고 획득한 건 힘의 양이었다.

    ‘컨디션에 따라서 최소 아홉 번은 주문을 사용할 수 있다.’

    산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쉬운 건 완벽한 집중성탄을 두 번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한 번 조이는 데 다섯 번의 별빛탄 주문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불완전한 집중성탄을 한 발 더 쏠 수 있었다.

    ‘정신력으로 커버하면 불완전한 집중성탄도 강하다.’

    1레벨 주문을 탈선한 공격 주문을 두 번 사용할 수 있다는 건 큰 재산이었다. 또한 굳이 그렇게 안 써도 괜찮았다. 한 번은 집중성탄을 쓰고 나머지 힘은 대장삵이 쓰도록 하면 간단하기 때문이었다.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다시 한번 확인한 산박은 스마트폰을 켰다. 시은이 무리해서 강합과 탕만에게 간섭한 이유는 산박이 가장 먼저 1레벨 장비를 완성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들과 산박의 격차가 시작된다.

    ‘다른 팀에 들어가서 1레벨 던전을 공략한다.’

    물론 혼자 갈 수는 없었다. 팀에 소속되어야 엉뚱한 곳에서 객사할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할 수 있었다.

    “여보세요.”

    ―팀장님, 이번 주가 끝나기 전에는 저도 장비를 다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일정을 짤 수 있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넷!

    시은이 귀엽게 소리 내며 전화를 끊었다.

    ‘나처럼 사업을 벌이지 않았다고는 해도 제법 돈을 모으고 있네.’

    산박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 위화감을 짚어 내지는 못했다. 시은은 매우 치밀한 여자였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확실하게 짚어낼 수 있지만, 이미 얽혀버린 산박은 그 탁류 속에서 거짓말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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