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탈1레벨>
‘살아남았다.’
정말이지, 숫자 10이 넘어가는 괴물의 숫자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뭔가가 있었다. 사람도 열 명이 따라붙으면 답이 없다. 그저 압도된다. 산박은 그런 지옥에서 살아남은 것을 순수하게 기뻐했다.
‘1레벨 던전의 수준과 격차는 던전마다 너무 달라.’
진절머리 났다. 이제야 산박은 1레벨 던전을 좀 안 것 같았다.
[레벨 업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사용자 태산박을 인식합니다. 필요한 정보를 출력합니다.]
[던전 사용자 태산박의 존재를 특정합니다. 당신은 카르마의 선택을 받은 자입니다.]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충분한 카르마를 획득했습니다. 레벨 업을 위해서 남겨놓을 수 있고, 자신의 수준에 맞는 새로운 주문과 기술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익숙한 말이 반복되었다.
‘1레벨 드루이드 주문은 형편없다. 좋은 걸 얻는다는 기대도 안 가.’
행운에 맡겨야 한다면 안 하는 게 나았다. 기댈 수 없었다. 다른 곳에 기대야 했다.
“다음 레벨 업을 위해서 남겨 놓는다.”
[획득 카르마를 보존합니다. 다음 던전을 클리어할 때까지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이 끝나고, 산박의 몸에서 청철 팔라딘 훈장이 튀어나왔다.
사르르륵.
허공에 뜬 청철 팔라딘 훈장에서 사금이 흘러내렸다. 새하얀 공간의 빛과 마주하며 황금빛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밝게 빛났다.
사금은 글자를 만들어 냈다. 사용자의 언어에 따라서 글자가 만들어졌다. 산박의 경우에는 당연히 한글이었다.
[십품(十品) 임시 팔라딘, 태산박의 공적이 확인되었다. 악독하고 비열하며 사악한 데다가 저열한 자존심 하나 없는 버러지같이 더러우면서도 치사한 야만 신의 제단 3개를 파괴했다.]
청철 팔라딘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빛의 신 팔라딘이 원하는 바를 행하는 성기사가 된다는 것과 같았다. 이시은이 마녀에 이어서 네크로맨서 직업을 획득한 것처럼 산박 또한 성기사로서의 힘을 얻을 자격을 언젠가 받을지도 몰랐다.
[이는 팔라딘으로서는 하찮은 공적이라, 청철에 쓰일 공적은 아니다. 허나 임시 팔라딘에게 있어서는 공적임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청철의 공적으로 삼아 이를 기록한다.]
한쪽에 날짜와 함께 악독하고 비열하며 사악한 데다가 저열한 자존심 하나 없는 버러지같이 더러우면서도 치사한 야만 신의 제단 3개 파괴라는 글자가 새겨지고 굳어져 황금이 되었다. 다른 글자는 사금이 계속 돌고 돌고 겹쳐지고 겹쳐졌지만 공적으로 삼은 것은 온전한 황금이 되어 굳어졌다.
그곳에서 세 개의 황금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산박은 그 빛이 보여주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지식도 얻을 수 있었다.
빛의 신 팔라딘에 대한 지식. 평화의 대신(大神), 정의와 심판의 전신(戰神).
‘창칼 하나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평화를 누릴 자격은 없다.’
그는 진정으로 평화의 대신이라 불릴 만했다.
청철에 대한 지식. 품(品)을 받은 성기사 중에서도 가장 말단에 속하는 훈장이며 증표다. 빛의 신 팔라딘의 은혜를 받는 족속들을 뜻한다.
빛의 신이 좋아할 만한 일을 하고 그 대가를 받는 장치이기도 했다. 공적을 적는 보고서의 기능도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아티팩트로서의 가치가 점점 높아진다. 생명체의 그릇에 힘을 담는 데는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로 아티팩트를 통해서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추가적인 힘을 주는 게 빛의 신 팔라딘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인간에게도 잘 어울리는 신이다.’
힘이 청철 훈장에 담기기 때문이다.
황금빛 세 개는 삼 중 택일(三中擇一)을 뜻했다. 황무(黃武), 황성(黃聖), 황물(黃物). 세 가지 종류의 은총이었다. 신의 힘이 깃든 힘이다.
물론 십품 임시 팔라딘이 얻을 수 있는 힘은 한없이 낮았다. 공적을 세워도 다른 품에 견줄 수 있는 공적도 아니었다. 하지만 산박은 실망하지 않았다.
‘빛의 신 팔라딘과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제단을 부숴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뭐든 이득이었다.
황무는 팔라딘의 힘이다. 청철로부터 이어지는 신체의 강화였다. 영구적인 것은 미약하고, 단기적인 것은 효과적이지만 오래 사용할 수 없고 후유증이나 다양한 제약이 존재한다.
황성은 팔라딘의 주문이다. 청철로부터 발생되는 주문이었다. ‘정신의 망치’ 또한 황성에 속했다. 다만 그 수준이 가장 하급이고 사용자의 정신에 따라서 색이 달라져서 문제였다.
아무튼, 추가적인 공짜 주문은 언제나 어디서나 이득이고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거지 같은 드루이드의 다양하고 다채로워서 쓸모없는 주문을 생각하면 산박에게 가장 좋은 주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주문 강화 장비를 착용하고 호랑이로 변신해 검은 안개 속에서 날뛰었던 산박이었다. 드루이드에게 중요한 건 추가적인 주문이 아닌 추가적인 힘이었다. 다양성이 아닌 깊이를 추구해야 했다. 역설적이었다. 쉽게 다채로운 주문을 획득할 수 있기에 도리어 깊이를 추구해야 했다.
황물은 팔라딘의 장비이며, 소지하고 있는 장비의 강화였다.
‘돈 바른 장비를 한층 더 강화시켜 준다.’
평범한 장비도 아이템으로 승격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모든 게 대단해 보였지만 산박이 받을 황무, 황성, 황물의 수준은 낮은 것들뿐이었다.
‘황무, 추가 근력.’
단 한 번의 공격에 근육을 더해준다. 나쁜 건 아니었다.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응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에게서 받는 것치고는 좀…….’
‘황성, 미약한 축복.’
지속 시간은 10분 남짓, 몸의 활력 소모를 줄여준다. 더 오래 싸울 수 있고 더 오래 달릴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았지만, 거기서 거기였다.
‘황물, 황금 표면.’
무기의 내구력을 강화시킨다. 단점이라면 황금색이 반짝이기 때문에 적의 이목을 크게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키지 않아.’
고만고만한 것들이었다. 그중에서 산박은 고민 끝에 추가 근력을 선택했다. 호랑이 상태에서 쓰면 더욱 강한 펀치를 날릴 수 있을 터였다.
‘호랑이는 생각 이상으로 강한 야수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황무. 팔라딘의 강함은 육체로부터 온다. 기술과 마음을 다스리기보다 실질적인 능력치를 향상시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평화를 만들어 내는 강인한 주먹.]
사금이 움직이며 메시지를 남겼다. 조언이기도 했다.
청철 팔라딘 훈장에 정신의 망치 주문과 추가 근력이 들어갔다. 청철을 소지하고 있을 때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이를 끝으로 하얀 공간이 무너지고 산박은 지하철의 지하에 내려앉았다. 산박이 1등이었다. 다른 이들은 레벨 업을 위해서 카르마를 보존하지 않고 바로바로 소모하고 있는 듯했다.
산박은 짐을 옮겼다. 부산물이었다.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절로 고민이 쌓여갔다. 수익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팀 옥시모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수익이다.’
적어도 오래 쉬거나 사라질 팀의 마지막 길이다. 최대한 많이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트럭 상인 박조조가 연락을 받고 서둘러 찾아왔다. 산박은 그에게 가장 큰 손님이었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가져야 할 상대였다. 그의 곁에 있으면 콩고물이 제법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남들처럼 쩨쩨하게 굴지 않는 게 매우 컸다.
때문에 박조조는 제법 귀찮은 일도 마다치 않게 되었다. 유통에 관해서는 박조조에게 말 한마디 하면 그만이었다. 그 덕에 산박은 자신이 발품 팔고 노력해야 할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더 중요하다. 산박은 던전에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했다. 또한 돈을 버는 것에도 집중해야 했다. 그 두 개를 모두 잡기 위해서는 한쪽을 다른 이에게 어느 정도 맡길 필요가 있었다.
박조조가 왔고, 산박은 그에게 맡겨 두었던 치료수를 받았다. 팀원들이 하나둘씩 올라왔다. 산박은 자잘한 치료까지 그냥 모두 치료수로 치료해 주었다. 자신의 드루이드 빛 무리 치료수였기에 마음껏 쓰는 데 무리가 없었다. 하루 매출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돈을 잃는 건 아니었다. 그저 들어올 돈이 안 들어올 뿐이었다.
“보자, 보자, 보자!”
박조조가 손을 비볐다. 그는 가장 먼저 온화한 자수정을 확인했다. 절로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 표정을 보고 산박이 혀를 찼다.
“발열을 하는 건 좋지만 그렇게 수준 좋은 건 아닙니다. 무엇보다 빛을 낸다는 게 안 좋죠. 백색 빛이라면 나쁘지 않은데, 자줏빛인 게 문제입니다.”
조명으로서 쓰는 곳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특별한 곳에 쓴다는 뜻이고 곧 수요가 적다는 말이었다.
“잘 안 팔리면 얼마 정도 한다는 겁니까?”
“잘 안 팔리는 건 아닙니다. 단지 값이 낮을 뿐입니다. 보통 복지 단체에서 많이 사 가기 때문에…….”
복지 단체는 돈이 없었다. 산박은 그저 입맛을 다셨다.
“빛이 나더라도 열이 나기 때문에 이불에 넣거나 하는 등의 용도로 씁니다. 그래서 킬로당 천 원… 정도 합니다.”
“제기랄.”
듣던 탕만이 머리를 감쌌다. 목숨값이 천 원이나 다름없다는 소리니까 열불이 터질 수밖에. 더군다나 그에게는 이번이 첫 1레벨 던전 공략이었다. 너무 절망적인 첫 공략이었다.
자수정의 무게를 달아보니 그래도 제법 되었다.
“80kg이네요. 8만 원입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담았는데 킬로당 천 원이라니…….”
“제가 발품 팔면 되니 8만 8천 원에 해드리겠습니다.”
박조조가 인심을 썼다.
다음은 생체 부산물 차례였다. 박조조는 몇 번이나 어플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곧개미의 위장. 보기 드문 상품입니다.”
연금 재료, 방어구의 반발력이 강해지는 특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근접전에 강한 장비로 만들 수 있었다.
“개당 만 원입니다. 이걸 취급하는 회사가 몇 곳 없는데, 모두 똑같은 가격에 매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는 회사가 그렇게 사니 쉽게 구하든 피를 흘려서 구하든 상관없었다. 그저 만 원에 불과했다.
“다행이다.”
산박은 그럼에도 안도했다. 스물아홉 개의 곧개미 위장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위장을 챙겼는데, 그게 여기서 빛을 발했다.
‘곧개미의 더듬이도 만 원, 아니, 오천 원만 해도…….’
한 마리에 여섯 개씩이나 달린 게 곧개미의 더듬이였다.
“곧개미의 더듬이는 큰돈은 안 됩니다. 워낙 많이 풀리기도 하고, 던전 신소재의 재료이긴 하지만 마법과 과학의 융합으로 복잡한 공정을 거치기 때문이죠. 다행히 그렇게 공정을 마치면 2레벨 장비에 쓰이기에 최소한의 수익은 보장됩니다.”
박조조가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스물아홉 마리 곱하기 여섯 개. 백일흔네 개…라고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여섯 개를 한 세트로 치기 때문에…….”
그 말에 탕만이 분통을 터트렸다.
“미친 기업 놈들. 제대로 뽕 빨아먹네. 안 그래요?”
“사주는 건 고맙지만 욕이 나오긴 나오네요.”
산박도 동의했다. 특히 던전 신소재는 정이 팍팍했다. 자기들도 만들어서 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기분이 더러운 건 더러웠다.
“그래도 다행인데 요즘에는 곧개미 굴에서 나오는 부산물의 공급량이 상당히 감소했습니다.”
박조조가 스마트폰을 주륵주륵 내렸다. 트럭 상인들만의 끈끈한 관계 속에서 공유되는 은밀한 정보를 눈으로 읽어 나갔다. 전과 다르게 박조조는 트럭 상인 중에서도 제법 길을 닦을 수 있었다. 모두 던전 대전 상인 공회에 연줄을 댔기 때문이었다. 산박의 덕이었다.
“한 세트에 8천 원. 스물아홉 세트 23만 2천 원.”
총 61만 원, 두당 15만 2500원. 평균보다 높은 수익이었다.
박조조의 배려였다. 그 또한 산박에게 콩고물을 얻어먹고 있어서였다. 모든 게 산박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박조조는 상인 주제에 천천히 산박을 위하는 일을 시작했다. 박조조는 어느새 산박의 상인이 되고 있었다.
* * *
돈을 분배받고, 팀원들은 술자리를 가졌다. 으레 있는 뒤풀이였다. 특히나 큰 부상이라곤 탕만이 눈을 조금 얕게 베인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치료수로 치료했다. 사망자 하나 없었다.
“건배애애애!”
탕만이 가장 신났다. 그가 겪은 고난은 남들보다 더했다. 전쟁에서 죽어 나자빠지는 신병처럼 죽었어야 했는데 살아남았다.
깡!
맥주잔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너무 세게 부딪쳐서 위쪽에 금이 갔다.
“헉.”
탕만이 깜짝 놀랐다. 큰 소리에 종업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잔값으로 천 원을 줘야 했다. 너무 뼈아팠다.
“그렇게 들떠서 나중에는 어쩌려고…….”
산박이 피식 웃었다.